고은지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은영이가 그러는데 희주를 화장터로 보냈던 차랑 화장터에서 나온 차가 다르게 생겼대요.”“뭐라고?”량천옥의 숨이 턱 막히며 동공이 흔들렸다. 고은지는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나태현이 들고 간 유골도 희주 게 아니래요.”순간, 량천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은지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고은지는 다시 한번 숨을 깊게 쉬었다.“차가 바뀐 거예요. 같은 차가 아니었어요.”“그럼... 가는 도중에 차가 바뀐 거 아냐?”량천옥이 다급하게 물었다.“차는 멈춘 적 없어요.”“그럼 희주는? 희주는 어디 있는 거야?”량천옥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차가 멈추지도 않았고 유골이 희주의 것이 아니라면... 그럼 희주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량천옥의 머릿속엔 외국에서 나태현과 벌였던 그 치열한 싸움이 스쳐 갔다. 그때 나태현이 사람들을 처리할 때의 분노는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량천옥은 그때의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나태현이 한 짓은 아닐 거야.”방금 고은지가 한 말의 의미를 그녀는 확실히 이해했다.고은지는 나태현을 의심하고 있었다.“정말 아니에요?”“절대 아니야.”량천옥의 목소리엔 떨림이 묻어 있었다.‘절대 아니라고? 그럼 누굴까?’고은지는 량천옥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누가 했을 것 같아요?”고은지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녀에게 원한이 있을 만한 사람이라 해도 그렇게 능력 있는 인물은 드물었다.결국 희주를 데려간 사람은 나태현 혹은 량천옥과 관련된 사람이란 뜻이었다.량천옥은 그 말에 다시 얼어붙었다.‘도대체 누굴까?’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데다가 그녀도 지금 머릿속이 엉망이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그건 내가 알아보고 알려줄게.”“...”“나한테 원한 있는 사람도 아닐 거야. 만약 나랑 연관이 있는 사람이면 분명 나한테 연락했겠지.”‘그렇게까지 힘들게 사람을 데려가 놓고 아무런 말도 없다면 목적이
고은지는 식탁 의자에 앉아 국물을 한 숟갈 뜨더니 조용히 말했다.“이 의자는 앉을 때 너무 차가워요. 이따가 방석 좀 사서 깔아둘게요.”고은지는 식사뿐만 아니라 집 안 인테리어까지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걸까. 예전에 고희주가 살던 곳이라서 그런가?’량천옥의 마음이 다시 조여들었다.“은지야...”“국물 정말 좋네요. 향이 좋아요.”고은지가 담담하게 량천옥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의 고은지는 마치 삶에 대한 애정이 다시 피어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량천옥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이건 약재예요?”“맞아, 조금 넣었어. 네 몸보신하라고.”“약재는 이렇게 이것저것 섞으면 안 돼요. 맛이 섞이거든요.”“그래, 알겠어. 다음부턴 뭐 넣을지 네가 알려줘.”“그럴게요.”국 끓이는 것만큼은 고은지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조보은네 집에서 살 때, 아이가 잘 크도록 영양을 챙기느라 늘 정성을 들였었으니 말이다.량천옥은 슬쩍 물었다.“천락 그룹은 요즘 무슨 일 없어? 내가 뭘 준비해야 하니?”그녀는 고은지가 요즘 육명호와 만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몰랐다. 원래는 회사 일엔 관심 두지 않으려 했지만 오늘은 좀 물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지금 고은지가 정말 모든 걸 끝내버린 건 아닌지 너무 걱정됐다.고은지는 조용히 대답했다.“준비할 건 딱히 없어요.”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량천옥은 그녀가 말을 아끼는 걸 보며 괜히 더 불안해졌다.“그때 장원에서 말인데요. 혹시 마지막까지 희주를 지켜봤었나요?”갑자기 희주 이야기를 꺼낸 고은지를 보며 량천옥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응.”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죽은 거 확실해요?”이렇게 말하는 고은지의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량천옥은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은지야, 너...”“그때 나태현은 어떤 반응이었어요?”량천옥은 말이 막혔다.‘그때 상황이 어땠더라... 희주가 떠난 걸 보고선 이
그녀는 전화기를 고은지에게 건넸다. 고은지는 담담하게 받았다.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가며 아무 말 없이 집으로 걸어갔다.집에 도착해서야 량천옥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내가 매정하다고 생각해?”고은지는 외투를 벗는 손을 멈추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정은 정 있는 사람에게만 주는 거예요.”조보은은 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받을 자격도 없었다.량천옥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국 덜어줄게. 날씨가 안 좋고 기온도 내려가서 오늘은 닭곰탕을 끓였어.”량천옥은 지금까지 이런 것들에 관심도 없었지만 고은지와 함께 지내면서 영양 성분이 많은 음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뜨거우니까 조심해.”“고마워요.”고은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그렇지만 량천옥은 자신이 끓인 탕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전에 없던 만족감을 느꼈다.고은지는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맛있어요.”“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전 닭보다 소고깃국이 좋아요.”고은지가 이렇게 말하자 량천옥은 잠시 멈칫했다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 내일 사 올게.”지금까지 고은지는 그녀가 뭘 해도 다 먹었기에 량천옥은 그녀가 좋아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고은지가 자신의 취향을 말해주니 량천옥은 기분이 복잡하면서도 기뻤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지는 한 그릇을 다 비우고는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왜 그래?”“한 그릇 더 먹으려고요.”‘어떻게 된 거지?’오늘 고은지가 뭔가 달라 보이고 기분도 좋은 듯해서 량천옥은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오늘 천락 그룹을 떠난 태도까지 생각나면서 처음의 안도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설마 복수를 다 끝낸 건 아니겠지?’이런저런 생각에 량천옥은 마음이 무거워져서 고은지와 함께 부엌으로 갔다. 량천옥은 문가에 서서 고은지의 외로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은지야...”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그러자 고은지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왜요?”량천옥
고은지는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 보였지만 육명호는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뭐든 도와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 고은지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버렸다.“앞으로 연락하지 마요.”고은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육명호는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참 이상한 여자야...”그가 보기엔 고은지의 인생 자체가 비극이었다. 량천옥도, 나태현과 얽힌 과거도, 무엇보다 그 마음속에 쌓여 있는 원한까지도 말이다.‘마음속에 증오만 가득해서 좋을 거 없는데...’...육명호와 헤어진 후, 고은지는 따로 차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하지만 아파트는 공사 중이이었기에 택시는 입구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짐을 들고 300미터쯤 걸어야 했다.하지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횡단보도 쪽에 우산을 든 량천옥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은지는 그제야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 오는 날, 누군가가 우산 들고 마중 나온 건 생전 처음이었다.량천옥은 황급히 다가와 우산을 고은지 머리 위에 씌웠다.“어서 들어가자. 국 끓여놨어.”고은지가 눈썹을 찌푸렸다.“제가 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그녀가 천락 그룹에 다닐 때는 퇴근 시간도 일정했고 오늘은 아직 점심도 안 지난 시간이었기에 이상했던 것이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곧 깨달았다. 자신이 천락그룹에 있는 동안 누군가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가 조금만 움직여도 량천옥은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었다.량천옥은 담담하게 말했다.“지신혜는 내가 정리했어.”그 말에 고은지의 얼굴이 굳었다.“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고은지는 지신혜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고은지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하지만 량천옥의 생각은 달랐다.“나태현이랑 무슨 사이든 넌 관심도 없잖아. 근데도 자꾸 네 앞에서 귀찮게 굴잖아. 그걸 왜 참고
고은영은 란완리조트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 다른 엄마들은 매일 아이랑 붙어 지내는데 그녀는 겨우 밤에 아이들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전화기 너머로 배준우의 낮고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말 안 듣고 도망가면 내가 직접 데리러 갈 거야.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그녀는 달래는 말투였지만 어쩐지 명령 같기도 했다.고은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지금 바로 갈게요.”툭 하고 전화를 끊은 그녀는 속이 상해 괜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배준우는 한 번 말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집으로 가버렸다가는 회의 중이라도 집어치우고 당장 달려올 사람이었다.그래서 요즘은 배준우의 아버지인 배항준도 그녀에게 불만이 많았다.하지만 배준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더러 신경 쓰지 말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둔 상태였다....고은지는 커피숍에서 나오자마자 검은색 벤틀리에 올라탔다.고희주의 일로 갑작스레 상황이 뒤바뀌었고 그녀의 세상도 다시 한번 뒤흔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웅에 대한 증오만큼은 뿌리처럼 깊게 가슴속에 얽혀 있었다....한편, 천락 그룹 본사에서.나태현은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연달아 피우기 시작했다. 고은지가 떠나자 양지호가 들어와 그에게 서류를 건넸다.“대표님 사인이 필요한 서류들입니다.”나태현은 서류를 받지도 않고 물었다.“그 여잔 어떻게 나갔어?”양지호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답했다.“일단은 고은영 씨를 만났고요. 그리고는 육명호 씨 차를 타고 떠났습니다.”나태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육명호...’고은지가 육명호랑 접촉하는 이유는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내가 정말 끝까지 참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고은지가 곁에 있을 땐 견딜 수 없을 만큼 거슬렸는데 정작 떠나고 나니 또 신경이 쓰였다.“그 일 말이야. 서둘러.”나태현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 일이란 아버지 나태범과 량천
만약 정말로 나태현의 계략이라면 고은지는 다시는 아이를 볼 수 없을 것이었다.하지만 그와 연관이 없다면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가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하는 게 나았으니 말이다.어차피 그와 고은지 사이는 넘을 수 없는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니까.고은영의 말을 들은 고은지가 물었다.“희주가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거야?”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이 소식은 예상치 못한 경로로 들은 거고 희주가 정말 살아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고은영은 고은지에게 헛된 기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이 일은 너무도 복잡했다. 해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량천옥한테 한 번 물어봐 보는 게 좋을지도 몰라.”나태현에게는 절대 티를 내선 안 된다. 하지만 량천옥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철저히 숨길 것이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알겠어.”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고은영에게 조용히 말했다.“준우 씨한테 잘 부탁한다고 전해줘.”“응. 걱정하지 마.”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바쁘면 먼저 가도 돼.”고은영은 고은지와 나태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나태현이 어떤 꼴을 당하든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량천옥이 없었더라면 고은지가 다칠까 봐 걱정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응, 나 좀 처리할 게 있어서 먼저 갈게.”“그래.”고은지는 박스를 들고 일어나더니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겨진 고은영은 자리에 앉아 곧장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지 씨 만났어?”“금방 만났어요. 조사할 때 절대 나태현 씨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알겠죠?”지금은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만약 희주가 정말 살아 있다고 해도 고은영은 고은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