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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Auteur: 강시아
서인경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손을 가슴에 얹고 다급히 말했다.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맹은영을 구하지 못한다면 저를 바로 내치십시오. 모든 일의 책임은 저 홀로 책임지겠습니다. 만약 약속을 번복한다면 벼락 맞아 죽을….”

“그만!”

연기준은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뒤돌아섰다.

“어서 옷부터 갈아입거라!”

맹은영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방 안에 수요 이상으로 들여놓은 여러 개의 난로가 활활 타고 있어 다른 사람은 땀이 뻘뻘 흐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태의가 여러 방법으로 체온을 돌아오게 하려 시도했으나, 그녀의 몸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태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긴장해서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맹경운이 다가와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말하거라. 살릴 수 있어, 없어!”

겁에 질린 태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소… 소인… 최선을 다했지만….”

털썩.

“국공 어르신!”

이때 병풍 뒤에 있던 맹양산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저 생신연회에 참석했을 뿐인데 여기서 딸을 잃게 될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서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맹국공을 옆 별채까지 부축하게 했다.

주먹을 꽉 쥔 맹경운의 두 눈에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때, 문이 열리면서 연기준과 서인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원수를 앞에 둔 맹경운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왕야, 소인은 왕야의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동생을 죽인 범인을 살려둘 수는 없으니, 부탁드리건대 소인을 막지 말아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서인경은 가슴이 철렁했다.

‘내 예상이 맞았어. 태의는 속수무책이었던 거야.’

“나 서인경, 내가 한 잘못은 당당히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을 뒤집어쓸 생각도 없다. 내게 은영 소저를 살릴 방법이 있네. 그러니 맹 공자, 내게 반 시진만 주시게. 반 시진 후에 오늘 그곳에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다 설명하도록 하지.”

맹경운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은영이는 상왕비인 널 존경했기에 네게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넌 여러 차례 그 애를 위기로 몰아넣으려 했지. 오늘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난 내 여동생의 복수를 할 것이다.”

강력한 장풍이 불어오자 서인경은 이제 죽었다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연기준은 맹경운의 손목을 잡고 손쉽게 그를 제압했다.

서인경은 이 틈을 타서 다급히 말했다.

“은영 소저는 최근 매일 저녁 따뜻한 목욕물에 반 시진 동안 반신욕을 하면서 몸 상태가 현저하게 좋아졌네. 이는 내가 소저에게 제안한 것이지. 이처럼 소저는 내가 살릴 수 있으니, 날 믿어주시게.”

맹경운은 연기준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 없으니 분노한 눈길로 서인경을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악독한 계집애. 절대 네게 다시 내 여동생을 해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서인경은 한심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리석은 것.”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연기준이 맹경운을 잡고 있는 틈을 타서 재빨리 병풍 뒤쪽으로 들어갔다.

연기준은 벗어나려는 맹경운을 꽉 잡고 말했다.

“태의도 아무런 방법이 없다 하니, 한 번 시도는 해보게 놔두거라. 일이 생기면 내가 안사람과 함께 책임을 지겠다.”

목소리가 높은 편이 아니었기에 서인경은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맹은영의 맥박을 확인하고 옆에 있는 태의에게 말했다.

“옷을 벗겨야 하니 자넨 일단 나가 있게. 약상자는 거기에 두고 시녀 한 명을 불러주게.”

태의가 머뭇거리는 사이, 병풍 밖에 있던 연기준이 말했다.

“지시대로 하거라.”

모두가 맹은영을 살릴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국공의 딸을 살해한 서인경은 처결을 당하거나 운 좋게 목숨은 보전하더라도 상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단씨 가문의 자매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반 시진 후, 내실 안쪽에서 기쁨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께서 체온이 돌아오셨습니다! 정말 상왕비께서 아씨를 살리셨어요!”

그러자 내실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은 누군가에겐 기쁨이었고 또 누군가에겐 날벼락이었다.

연기준은 병풍 뒤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편, 서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은침을 정리하고 맹은영에게 옷을 다시 입혀주었다.

모든 일을 끝낸 후, 그녀는 병풍 밖으로 나왔다.

“비록 고비를 넘기긴 햇찌만, 이미 몸에 한기가 스며들었고, 체력 소모가 큰 탓에 오래 잠들어 있을 거네. 돌아가면 맹 공자는 소저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지키게 하고 내가 따로 처방을 써서 국공부로 보낼 테니 의식을 회복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탕약을 달이게.”

맹경운은 반신반의하며 침상 옆으로 다가가 손을 동생의 이마에 대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그는 또 여러 태의를 불러 확인한 후에야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가서 아버지께 은영이가 고비를 넘겼다고 전하거라.”

명을 들은 시종은 급히 밖으로 나갔고 서인경도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문을 나서기도 전에 맹경운이 성큼 쫓아왔다.

사내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치료에 모든 체력을 쏟아서 서인경은 지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공자, 지금도 내게 칼을 뽑고 싶은 건가?”

맹경운은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상왕비마마! 소인의 경솔했던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은영이를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리오나 오늘 일은….”

서인경은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은 나중에 해주겠네.”

“연풍, 데려왔느냐?”

등 뒤에 있던 연기준이 갑자기 입을 열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번갈아보았다.

밖으로 나가자 연풍이 한 시종을 끌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호위도 제 주인을 닮는다더니. 어쩜 저리 똑같을까. 저러니 혼인도 못하고 연기준 뒤치다꺼리나 하겠지!’

서인경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 시종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상왕비가 맹은영을 밀쳤다고 고발했던 시종이었다.

서인경은 다시 고개를 들고 사람들 틈에 서 있는 단씨 자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해결사가 대신 나서주었으니 그녀는 팔짱 끼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서인경은 가까이에 있는 기둥에 다가가 등을 기댔다.

아까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었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눈꺼풀이 무겁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왕야, 이 시종의 처소에서 수색한 백옥 비녀입니다. 금은방 주인장에게 확인 결과, 최소 은화 백냥 이상은 하는 최상급 백옥이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월 녹봉이 은화 한 냥 정도인 시종이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연기준은 비녀를 건네받고는 고개를 돌려 서왕 부부에게 물었다.

“숙부님, 숙모님, 혹시 왕부에서 이걸 저 시종에게 하사한 적이 있습니까?”

비녀를 건네받은 서왕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고얀 것, 이건 왕부의 물건이 아니다. 누구한테 받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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