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화

Auteur: 강시아
한편 단씨 가문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삼대독자인 귀한 아들이 곤장 백 대를 맞고 숨만 붙어서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당분간은 사내구실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상 정도가 조금만 더 심했어도 가문의 대가 끊어질 뻔했다.

단효산은 크게 화를 내며 왕부로 찾아가 따지려고 했으나, 다행히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는 단은설이 이를 말렸다.

“아버지, 지금은 경거망동할 때가 아닙니다.”

분노에 찬 단효산의 고함소리가 저택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럼 네 동생이 저렇게 되었는데 가만히 있으란 것이냐!”

단은설은 그런 그를 위로했다.

“아버지, 관아는 상왕의 명을 따른 것뿐입니다. 지금 따지러 가면 책임을 상왕께 돌리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일은 서인경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상왕비라는 신분을 내세워 대놓고 악행을 저질렀지요. 그러니 이 원한은 서씨 가문에게 풀어야 합니다.”

“언니 말이 다 맞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단여월이 말했다.

“맹국공부 쪽에 지시한 일이 거의 성사되고 있었을 때, 맹은영이 서인경이랑 접촉해서 독을 탄 간식들을 찾아냈어요. 분명 서인경이 중간에서 무슨 짓을 한 걸 거예요!”

단효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서인경 그 계집은 그 일을 무슨 수로 안 거지?”

단여월은 고개를 돌려 단은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단은설은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저는 한 번도 그년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낸 적이 없습니다.”

단여월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그년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원래는 앙숙이었어야 할 두 사람이 수상하게 친구가 되었어요. 듣기로 평안이가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맹영은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단효산은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질렀다.

“서인경! 내 아들의 원수는 반드시 갚을지어다!”

금족의 기간에 서인경은 틈틈이 평이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주었다.

이날 아침도 배불리 먹고 정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째 꾹 닫혔던 대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관리인이 하인들과 함께 뭔가를 가득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오늘은 서왕비마마의 칠순 생신연이 있는 날입니다. 왕야께서 치장하시고 대기하고 계시라 명하였습니다. 조회가 끝나고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두 분이 함께 서왕부로 가게 되실 겁니다.”

원주인의 기억에 의하면 서왕은 황제와 연기준의 숙부였다.

젊었을 때는 덕망 높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모든 직권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그는 어떤 당파와 조정의 일에도 간섭하지 않고 늘 중립을 유지해 왔고, 그로 인해 황제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니 서왕비의 생신 연회라면 당연히 문무백관들이 찾아올 것이고, 서인경 또한 불참석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평이의 시중을 받으며 연노랑색 치마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렸다.

두 사람이 웃고 떠들며 대청을 향해 가고 있는데 조회에 갔던 연기준이 돌아왔다.

멀리서 연노랑색 치마가 하늘거리는 모습이 보이자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이와 무슨 재미난 얘기를 하는지 꽃처럼 어여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는데, 며칠 동안 보지 않았던 사내를 보자, 웃음기가 싹 사라진 듯했다.

“왕야께서 드디어 왕부에 저도 산다는 걸 기억해내셨나 봅니다.”

그 말을 들은 연기준 또한 조금 전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서왕비의 생신연회를 축하해 드리러 갈 것이다. 왕부에 누가 될 짓은 하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해야 할 것이야.”

서인경은 시큰둥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건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저를 안 건드린다면 조용히 있다 오겠지만, 만약에 누가 저를 건드린다면 조용히 당해줄 생각은 없으니까요. 이런 제가 창피하다 생각되시면 이혼을 해주십시오. 그럼 제 일언반구가 왕부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것도 싫으시다면 그냥 장기 금족령을 내리셔도 좋습니다.”

너무도 당당해서 약을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평생 연기준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내가 언제 조용히 당하고 있으라 했지? 지난번엔 네 스스로 맹은영을 모함해서 무릎을 꿇린 것이야. 맹국공이 이 일을 폐하 안전에 찾아가서 고자질하면 무릎 한번 꿇는 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다.”

‘지금 내게… 해명을 하는 건가?’

서인경도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하기에 그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이혼은 끝까지 못해준다는 상왕의 태도였다. 상왕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그녀에게 쏠리고 있었다.

서인경은 이런 상황이 불편하고 짜증이 났다.

“제 기분 따라 행동할 겁니다.”

상왕은 그런 그녀를 빤히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거란 착각은 하지 말거라. 지금 전쟁터에 계신 서 노장군께서 빨리 귀경하게 하고 싶으면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할 것이야.”

서인경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어쩜 그렇게 야비하십니까? 제 할아버지께선 그 연세에 나라를 위해 적들과 싸우고 계신데 그분을 빌미로 저를 협박하시다니! 이건 직권 남용입니다!”

연기준은 잔뜩 약이 오른 그녀의 얼굴이 만족스러웠다.

“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하지. 난 이치를 따지며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야. 네가 간청을 들여서 하게 된 혼인이니 마음에 안 들어도 참을 수밖에. 언젠가 내가 네게 흥미를 잃으면 그때 이혼을 고려해 보마.”

서인경은 가슴 속에 불덩이가 곧 폭발할 것 같았다.

‘그 얼간이는 대체 얼마나 남자 보는 눈이 없으면 저런 것에게 마음을 주었을까?’

서왕부로 가는 내내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문안인사를 건넨 후, 연기준은 남자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구역으로 가고 서인경은 여자 손님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관가의 아씨와 부인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얘기를 나누었다.

과거의 서인경은 이 사람 저 사람 의심하느라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렸었다.

사람들은 비록 겉으로는 예를 지켰지만, 사실 상 아무도 그녀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했다.

서인경도 굳이 그런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주변을 살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서왕부의 시종을 잡고 물었다.

“혹시 맹국공부의 맹은영 소저도 도착했느냐?”

시종은 공손히 그녀에게 예를 행하고는 뒷정원을 가리켰다.

“방금 전에 맹 소저께서 저쪽 정자로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고맙다.”

서인경이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인경아, 왕야께서 네게 금족령을 내렸단 이야기는 들었단다. 또 그분의 심기를 건드린 거니?”

‘단은설?’

서왕비의 생신 연회에 아무런 관직도 없는 단씨 가문을 초대한 게 이상했다.

서인경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친근한 척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니? 내가 왜 금족에 처해졌는지 정말 몰라서 물어?! 모르면 돌아가서 네 동생에게 물어봐. 듣기로, 하마터면 남은 평생 사내구실을 못할 뻔했다던데?”

“너….”

단은설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길게 심호흡했다.

두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날을 세우는 바람에 뭇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두사람을 향해 쏠렸다.

단은설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서러운 얼굴로 표정을 바꾸었다.

“제 동생이 술기운에 정신이 혼미해져 상왕비마마께 결례를 범했다 들었습니다. 허나, 마마께서도 그에 대한 벌로 동생을 구타하시고 혹독한 처벌을 내리셨지요. 그러고도 그 일로 저를 이리 몰아세우시는 건 좀 너무하시단 생각이 안 드십니까?”

“길 막지 말고 비켜라. 너랑 얘기할 생각 없으니.”

말을 마친 서인경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

그러나 단은설은 눈치가 없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인경아, 나 믿어줘. 난 상왕께 불순한 마음을 품은 적이 없어. 제발 오해를 풀어줘. 이 일로 나와 멀어지지 말아줘, 응?”

초대받은 아씨와 부인들은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둘이 서로 등을 돌렸다는 얘기는 이미 경성에 소문이 퍼져서 다들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의심 많고 성질 고약한 서인경이 친척 동생까지 의심한다고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경은 그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단은설이 이상해. 의도적으로 내 길을 막고 시간을 끌고 있어.’

Continuez à lire ce livre gratuitement
Scanner le code pour télécharger l'application

Latest chapter

  • 시간을 거슬러   제271화

    그는 자신의 곁에서 고요히 잠든 서인경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연기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을 걸쳐 입고 조용히 문을 나섰다.막부, 주원막수한과 봉수정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그때, 하인이 다급히 문을 두드리며 아뢰었다.“성주, 상왕께서 뵙기를 청하시옵니다.”막수한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이 늦은 시각에? 그가 무슨 일로?”막수한은 사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조정의 사람들과 그 어떠한 인연도 맺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일이 끝나면 곧장 구실을 붙여 그들을 흑시에서 내보낼 작정이었다. 봉수정은 조용히 겉옷을 들어 막수한에게 건넸다.“오라버니, 나가 보세요. 만약 조정이 정말 흑시에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도 일찍 대비하는 게 나아요.”막수한은 외투를 받아 걸치며 탁자 위의 약탕을 들어 올렸다.“약은 반드시 뜨거울 때 마시거라. 다 마시면 곧장 쉬고. 날 기다릴 것 없다.”봉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막수한은 연기준을 서재로 맞아들였다.“왕야께서 이 심야에 어쩐 일로 오신 것입니까?”연기준이 입을 열었다.“막 성주와 그 아이들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왔습니다.”막수한은 태연히 답했다.“지금 그 아이들은 대장로의 득월산장에 있습니다. 상왕과 상왕비께서 떠나실 적에 함께 데려가시면 될 일이지요.”연기준은 손끝으로 찻잔을 어루만지다 문득 화제를 꺾었다.“본왕은 막 성주께 한 사람을 묻고 싶습니다.”“누구요?”“도팔천입니다.”막수한의 동공이 순간 흔들리더니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들어는 보았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독왕이라 불리던 자. 오십 해 전 흑수암 독왕곡으로 은거한 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지요. 왕야께서 그를 찾고자 한다면 직접 흑수암에 찾아가 보심이 더 빠를 듯합니다.”연기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흑수암이라… 본왕은 이미 다녀온 바 있습니다. 십오 해 전 중추절, 막 성주께서

  • 시간을 거슬러   제270화

    평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아하니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서인경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팔불출 같은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소문을 캐내고 싶을 지경이었다.그때, 연기준의 목소리가 불쑥 흘러나왔다.“궁금하다면 들어오너라. 본왕이 직접 알려 주마.”평이는 그 말을 듣자 잽싸게 돌아서더니 마치 도망치듯 바깥으로 달아나 버렸다. 서인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을 옮겨 병풍 너머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침상에 반쯤 기대앉아 책을 펼쳐 든 미남자가 있었다.“왕야께서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까?”연기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무심히 책장을 넘겼다.“너보다 한 시진은 먼저 알았다.”그제야 서인경은 기억을 더듬었다. 방에 들어오기 직전, 안포가 막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결국, 얼음덩이 같은 이 사내 역시 은근히 루머를 즐기는 심성을 가진 셈이었다.“그럼 말해 보세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이제 라가에는 멀쩡한 사람이 라운석 한 명뿐이었다. 그는 아내를 맞이하기는커녕 침소를 덥혀 줄 작은 하녀조차 없었다고 들었는데... 설마 라채월의 압박이 사라지자 라운석이 본성을 드러낸 것일까?연기준은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서인경을 바라보았다.“라북명은 다리가 망가졌으나 하반신의 기능은 멀쩡하다. 그는 집안의 권한을 라운석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저택의 외진 뜰로 거처를 옮겼지. 라채월은 정실의 지위를 박탈당해 천한 첩으로 떨어졌다. 그 대신, 라북명은 뜰 안의 하녀 열여 명 남짓을 줄줄이 첩으로 삼아 밤마다 흥청망청 놀아댔다. 그 하녀들은 수년간 라채월의 설움에 짓눌려 살아왔으니 이제야 비로소 그녀를 밟고 누르며 울분을 풀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들이 어찌 이것을 놓치겠느냐?”서인경은 머릿속에서 과거 거만하고 오만하던 라채월의 자태를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참혹한 처지를 들으니 문득 허무한 감정이 밀려왔다. 인과응보, 돌고 도는 보응이었다.“그러니까, 그 하녀

  • 시간을 거슬러   제269화

    출입을 위하여 아주 작은 뒷문 하나만 남겨 두었다.날마다 그 뒷문으로 ‘병에 걸려 구제불능으로 죽은 자’들의 ‘시체’가 실려 나갔다.이틀 내내 연기준은 마치 노인이라도 된 듯 하나부터 열까지 서인경을 부려 먹었다.차를 따르는 것부터 물을 길어오는 것까지, 온갖 자질구레한 시중을 드는 일에 그녀를 내몰았다. 서인경은 속으로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그저 억지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연기준은 여전히 아이들을 어떻게 안배할지에 대해선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이대로라면 그냥 집어치우고 도망쳐 버릴 것이다.밤이 되자, 서인경은 속으로 이렇게 결심하며 곧장 연기준에게 따져 물었다.’“왕야, 저를 속여서 하녀 부리듯 쓰려는 겁니까?”연기준은 그녀가 정성껏 깎아 내고 잘게 썰어 건넨 사과 조각을 받아 입에 물고 있었다. 지금껏 그는 이렇게 정갈히 손질된 과일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늘 귀찮아했고 군영 같은 곳에서는 지나치게 까탈스럽게 굴면 대번에 장정들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군가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니 연기준은 인생 처음으로 자신이 구름 위에라도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세 조각의 사과를 더 받아먹은 후에야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곧 알게 될 것이다.”이에 서인경은 속수무책이었다. 남은 사과를 연기준의 머리통이라도 되는 듯 와작와작 씹어댔다. 그녀는 밖에 나가지도 않고 매일 방에 틀어박혀 평이가 실시간으로 전해 오는 소식을 들었다.“왕비 마마, 온 성안의 사람들 마음이 흉흉하옵니다. 다들 집 밖을 나오려 하지 않고 거리에서는 약 냄새만 진동하옵니다.”“막 성주께서 성황묘에 임시 격리소를 세우셨사옵니다. 열이 있는 자들은 모두 그곳으로 옮겨졌고 성안의 의원들이 총동원되어 환자들을 돌보고 있사옵니다.”“왕비 마마, 오늘은 사망자가 나왔다 하옵니다. 남쪽 큰 구덩이에서 수십 구의 역병 환자 시신을 불태웠다는데 그 타는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퍼졌다더군요. 듣기만 해도 오싹하옵니다.”“오늘도 막부에서

  • 시간을 거슬러   제268화

    연기준의 눈빛에 잠시 짜증이 스쳤다.“머리가… 아프다.”서인경은 그의 손목을 놓고 이마에 살며시 손을 대보았다.“몸속에 아직 독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약을 지어드릴게요. 며칠만 더 복용하면 괜찮아질 겁니다.”아직 독성이 그의 기맥 속을 떠도는 탓일까? 연기준의 눈에는 피로가 깊이 깔려 있었고 말하기조차 귀찮은 듯한 나른한 기색이 번져 있었다. 서인경은 아까 연풍이 말한, 황제가 두 사람에게 조속히 경성으로 돌아오라 명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저는 흑시에 며칠 더 머물러 아이들을 제대로 안배한 뒤에야 돌아가고 싶습니다. 왕야께서 급하다면 먼저 가셔도 됩니다.”이어 그녀는 막수한과 상의했던, 가짜 역병을 조작하는 계획도 그대로 이야기했다.이에 대해 연기준은 뜻밖에도 반대하지 않았다.“본왕도 함께 돌아가겠다. 네가 그 아이들을 어디에 두고자 하는 것이냐?”서인경은 솔직하게 말했다.“몰래 경성으로 데려가 서가군의 군영에 두고 싶습니다.”그러나 연기준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군영은 온통 사내들뿐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지. 그뿐만 아니라 가는 길이 위험천만하다. 일단 발각이라도 되면 수십 명의 아이들 중 단 한 명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폐하께서 눈치라도 챈다면 서가군이 반심을 품었다 의심할 수도 있다.”이미 하나의 영패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서가군의 머리 위에는 날 선 도끼가 매달린 형국이었다. 거기에 특별한 아이들 오십 명까지 더해진다면...황제라면 차라리 몰살을 택할 것이었다.서인경은 맥이 풀린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그럼 왕야께서는 뭐가 옳다고 보십니까?”연기준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본왕에게 방도가 있다.”“어떻게요?”그녀가 물었으나 연기준은 답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부축하거라. 밖에 나가 걸어야겠다.”방 안에 오래 누워 있다 보니 사지가 무뎌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서인경은 움직이지 않고 단칼에 그의 제안을 잘라냈다.“안 됩니다. 지금 움

  • 시간을 거슬러   제267화

    서인경은 대청 앞 계단에 그대로 앉아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잠깐의 정적 끝에, 아직 기운이 다 돌아오지 않은 듯 허약한 기색이 묻어나는 연기준의 목소리가 울렸다.“그 아이들 몸에 새겨진 단 자는 무슨 연유인 것이냐?”“낙철로 지져 만든 자국이옵니다. 이 방식은 야랑국 황실에서 유래된 것이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속 노예 등 뒤에 가문의 성씨를 낙인처럼 남겨 주권을 과시하옵니다.”“야랑국?”연기준의 목소리에는 의혹이 담겨 있었다. 그 이름이 귀에 스치자 서인경의 심장도 순간적으로 쿵 내려앉았다. 전생에서 바로 그 나라가 진국의 국방도를 손에 넣은 뒤 모든 죄를 서회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야랑국의 손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국의 심장부까지 스며들어 있었다.연기준은 낮게 중얼거렸다.“본왕의 기억으로는 단 가와 야랑국 사이에 교역왕래가 있던 것으로 안다.”그러자 연풍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왕야의 기억이 옳사옵니다. 예전에는 단효산이 자주 야랑국에 드나들었사옵니다. 다만 근래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경성에 뿌리를 내린 것이옵니다.”“사람을 보내거라. 야랑국에서 단 가의 내막을 샅샅이 뒤져 오거라!”“예, 명 받들겠사옵니다.”연기준이 다시 말을 잇지 않자 연풍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황자의 가례가 정월 이일에 거행되옵니다. 폐하께서 두 분이 조속히 경성으로 귀환하라 명하셨사옵니다.”“알겠다.”연기준이 짧게 대답하자 연풍이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문간에 앉아 있던 서인경을 보고는 급히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왕비 마마를 뵙습니다.”서인경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웃음을 띠었다.“오랜만이구나.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틈날 때 우리 평이도 좀 챙겨주렴. 아직 손이 성치 않잖니.”연풍은 순간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마주한 서인경의 눈빛은 의외로 지극히 진지했다. 섣불리 억측할 수 없었기에 그는 억지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연풍이 떠나자 서인경은 방 안으로 발걸

  • 시간을 거슬러   제266화

    다행인 것은 그녀에게는 아직 포기를 원하지 않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막수한은 봉수정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낮게 말했다.“너는 나에게 약속하지 않았느냐?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봉수정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곁에 있던 서인경을 바라보았다.“상왕비, 세상 누구나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마마께서는 아이들을 지키고자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지하흑시가 있지요. 흑시는 우리 목숨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저 아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인간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 결코 누군가의 조건이나 요구 때문이 아닙니다.”그 말은 서인경의 예상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뜻을 보였다.“제가 성급했네요. 이미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내주신 것만으로도 은혜가 지극합니다. 역병의 일은 막 성주께 부탁드리되 그 밖의 일은 제가 따로 방법을 찾겠습니다.”사인경이 떠난 뒤, 막수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봉수정을 바라보았다.“아니, 너도 아이들을 구하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상왕비께서 말하자마자 왜 거절한 것이냐?”봉수정은 담담히 말했다.“저는 이곳이 더럽혀지는 걸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곳을 이용하게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흑시는 오라버니와 어머니께서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곳입니다. 제발 저 때문에 흥정하지 말아 주세요.”막수한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낮게 맹세했다.“걱정 말거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해낼 것이다.”봉수정은 미소를 지으며 손끝으로 그의 어깨에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오라버니는 저를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지요. 제 몸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차라리 먼저 상왕비께서 준 약을 확인해 봅시다.”막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 꾸러미를 열었다. 하지만 내용물을 보는 순간, 그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지고 얼굴이 굳어졌다. 봉수정은 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Plus de chapitres
Découvrez et lisez de bons romans gratuitement
Accédez gratuitement à un grand nombre de bons romans sur GoodNovel. Téléchargez les livres que vous aimez et lisez où et quand vous voulez.
Lisez des livres gratuitement sur l'APP
Scanner le code pour lire sur l'applicatio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