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외할아버지와의 감정이 깊다는 사실을 곽승재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사람들에게 고은서가 모르도록 이 사건을 숨기라고 지시했었다.곽승재는 정신병원 곳곳에 적들의 눈이 있다는 것도 짐작했다. 그는 돌아가서 관련자 모두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곽승재가 사건의 배후를 잡아내야 할 중요한 순간이었다. 고은서를 데리고 나가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터라 곽승재는 나중에 보상해 줄 심산으로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비꼬며 백유미와의 결혼식을 망치려 들지 말라고 경고했다.고은서는 마지못해 목숨으로 그를 위협했다. 이런 일은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2년간의 결혼 생활 중에도 고은서는 몇 차례 이렇게 난동을 부렸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여전히 백유미 때문에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화가 나서 냉정하게 소리쳤다.“죽고 싶으면 죽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곽승재는 고은서가 정말로 심장을 칼로 찌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은서가 칼로 자기의 심장을 찌르는 모습을 직관한 곽승재는 당황해하며 고은서의 이름을 외치면서 허둥지둥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고은서는 땅에 쓰러졌고 심장 부위에서 새빨간 피가 쏟아졌다.그녀는 입술을 떨며 낮게 읊조렸다.“곽승재, 다음 생에는 절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피에 젖은 듯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곽승재가 고은서를 살리려 사람을 불렀다...이야기하는 동안 곽승재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했는지 이제야 심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걸 장악할 수 있다고 착각했고 앞으로 고은서에게 보상할 기회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결국 곽승재는 고은서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고은서도 곽승재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전생의 그녀는 절망 그 자체였고 자결하는 그 순간이 해방이라고 느낄 정도였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자기 죽음에 그렇게 크게 반응할 줄은
이에 의문을 품은 곽승재는 그들의 범행과 배후 세력이 고은서를 노린 것이라 추측했고 상대방의 계략을 역이용해서 그 검은 속내를 알아보려 했다.그래서 겉으로는 누구도 고은서를 위해 변호하지 못하게 하면서 은밀히 진상을 파헤치고 있었다.그렇게 곽승재가 바쁘게 움직이던 중에 외할아버지로부터 고은서가 정신병원에 보내졌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다. 곽승재가 알아보니 당시 비서장으로 승진한 한 비서가 한 행동이었다.한 비서는 경찰서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힘들어서 고은서가 그곳에 있으면 괴롭힘을 당하기 쉽다며 차라리 정신병원에 보내는데 낫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은서를 전담 보호할 사람도 안배하겠다고 약속했다.외부엔 모두 곽승재가 분노에 휩싸여 고은서를 단죄한 것처럼 보였기에 그는 더 반대하지 않고 누구의 탄원도 거절했다.곽승재는 조사 끝에 두 명의 범인이 한 레이싱 클럽 사장과 밀접한 관계였으며 거기서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때 곽승재는 송민준을 몰랐기에 단서는 그만 끊겨버렸고 오랜 시간 수사와 확인을 거치며 어려움을 겪었다.한편, 백유미는 곽승재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업무에 누구보다 성실했으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전혀 의심받지 않았다.점점 난관에 빠지자 곽승재는 누군가가 고은서를 함정에 빠뜨린 일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확신했다.진상 규명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 곽현수가 갑자기 귀국해 그를 견제하며 그룹 실권을 다시 장악하려 하자 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맞서 권력 쟁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그 과정에서 곽승재는 아버지가 강성 여씨 가문 딸과 혼인을 시키려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그리고 백유미와 아버지가 어떤 거래를 한 것 같다는 의심도 생겼다.그 사이 고은서가 정신병원에 갇힌 지도 일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곽승재에게 매주 고은서의 상태가 보고됐다. 곽승재도 짬을 내 몇 번 정신병원에 들러 고은서가 충분히 잘 먹고 잘 지내며 전담 간병인이 곁에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그 후
고은서는 휠체어를 사무실 안으로 밀며 물었다.“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곽승재의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은서야, 너 요 며칠 병원에 안 왔잖아. 전에 왔을 때도 날 피해 다녔고. 그래서 그냥...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러 왔어.”고은서는 조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요 며칠 좀 바빴어.”그녀는 티테이블 옆에 앉아 도시락을 열고 곽승재에게 물었다.“밥은 먹었어?”곽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럼 같이 먹어.”고은서는 그에게 수저를 건넸다.곽승재가 포장해 온 음식은 고은서 입맛에 딱 맞아 그녀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다.반면 곽승재는 몇 입 뜨지도 못하고 틈틈이 반찬을 집어 고은서에게 주려 했지만 거리 탓에 쉽지 않았다.고은서는 배부르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곽승재를 향해 재촉했다.“빨리 병원으로 돌아가. 의사가 이렇게 몰래 나온 거 알면 화낼 거야.”하지만 곽승재는 움직일 념을 하지 않았다.“은서야, 사실 오늘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왔어.”고은서는 피할 수 없는 순간임을 알아채고 조용히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승재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네가 말했던 그 악몽... 나도 꿨어...”“잠깐!”고은서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식기를 치우게 한 다음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셨다.“말해도 좋아. 하지만 내가 감정을 조절 못 할 수도 있어.”그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동자엔 고통과 후회가 가득 찼다.“은서야, 내가 쓰레기였어.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해도 당연한 거야.”“네가 그때 꿈 얘기했을 때 난 믿지 않았어. 그렇게까지 비극적일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꿈속에서의 너는 네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어. 너는... 너무 괴로워서...”그 장면을 떠올렸는지 곽승재는 목이 멘 듯 자살이라는 단어를 끝내 말하지 못했다.고은서도 전생의 고통이 떠올라 숨이 막히듯 힘들었다. 그녀는 손에 쥔 찻잔을 꼭 쥐며 곽승재를 바라봤다.“그래서 이제 내가
민시아는 고은서의 전화를 받고 조금 놀란 듯했다.“은서 씨, 무슨 일인가요?”고은서는 먼저 민 회장의 건강 상태를 물은 뒤 말했다.“시아 씨, 민시후가 한동안 북성에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혹시 회장님 뵈러 한번 가야 하지 않을까요?”민시아는 늘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민씨 가문을 책임져 온 매우 영민하고 스마트한 여성이었기에 고은서의 말을 듣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시후가 기억을 되찾고 당신을 다시 찾아온 건가요?”민시후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고은서는 민씨 가문 사람들에게 이를 밝힐 생각이 없었다.“아뇨.”“다만, 시아 씨도 최근 강성과 해성에서 일어난 뉴스를 보셨을 테고 저와 여시은 사이의 갈등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고은서는 담담히 말했다.“여시은이 이렇게까지 날뛰게 된 건 어느 정도 저와도 관련이 있어요. 여시은은 민시후와 저 사이의 일들을 전부 알고 있어서 저한테 복수하지 못하면 민시후에게 화풀이할까 봐 걱정돼요.”민시아는 고은서가 이 말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약간 의아해했다.“지금 시후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곁엔 소영이가 있잖아요. 여시은이 복수하려 한다면 당신이 아니라 곽승재를 노리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요?”민시아의 의문도 타당했다. 고은서 역시 이전에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 송민준이 너무 이상했다. 계속해서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 느낌이었다.“만일을 대비하는 게 나쁘진 않잖아요.” 고은서가 말했다.“저도 곽승재도 여시은을 경계하고 있어서 쉽게 접근하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민시후는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여시은은 제가 그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다는 걸 잘 알아요. 그 사람을 다치게 하면 제가 괴로워질 거란 걸 알죠.”“시아 씨, 어떤 경우든 조심하는 게 좋아요. 시후가 또다시 무슨 일을 겪게 되길 바라지 않으시잖아요?”민시아 역시 동생이 다시 다치는 걸 절대 원치 않았다.“하지만 시후 말로는 해성에 간 건 어머니의 유
고은서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송민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런 걸 묻는 거죠?”“그냥 추측일 뿐이야.”송민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잡담하듯 말을 이었다.“시후는 어릴 때부터 잠시도 조용한 적이 없었지. 싸우고 문제 일으키는 게 일상이었어. 아저씨도 그 애 때문에 많이 속상해하셨고. 난 한때 민아가 왜 그런 애를 좋아했는지 이해 못 했어.”고은서는 송민준이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그러다 시후가 널 좋아하게 됐잖아?”송민준이 눈을 뜨고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때 깨달았지. 시후도 꽤 예리하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그래서?”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송민준은 웃으며 머리를 다시 좌석에 기대었다.“시후는 예전처럼 방탕한 부잣집 아들로 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라. 민씨 집안은 다들 유능하잖아. 걔 한 명 없어도 문제없지. 가끔은 능력이 없을수록 인생이 더 편할 수도 있어.”무심한 말투였지만 고은서는 그 안에 숨은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고은서는 몇 달 전 자신과 민시후가 당한 교통사고를 떠올렸다. 그 배후가 송민준일지도 모른다.그 말은 곧, 민시후가 유능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라는 암시 같았다.고은서는 송민준이 인정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따져 묻지도 않았다.그가 C 선생이라면 못 할 일이 없을 테니까.하지만 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 당신은 자신이 한 일들이 송씨 가문에 어떤 피해를 줄지 생각해 본 적 없어?”“당신 부모님, 그리고 송민아까지, 다들 당신을 그렇게 믿고 ST 그룹 전체를 당신에게 맡겼잖아. 친어머니에게는 실망을 안 주고 싶다면서 송씨 가문 사람들은 실망하게 해도 되는 거야?”그 말을 들은 송민준은 잠시 멈칫한 듯했지만 곧 눈을 감고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 듯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그 후로 차 안은 침묵이 흘렀다.차가 라이트문 아파트에 도착하자 고은서는 송민준에게 하차를 알렸다.송민준은 별말 없이
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여재훈은 강성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많아 당분간 해성으로 올 수 없었다. 그가 보낸 사람들이 조사한 결과, 손문호는 생전에 전혜라와 여러 차례 접촉이 있었고 그 단서를 이미 경찰에 넘겼다고 했다.이어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건강을 잘 챙기라며 몇 가지 주의점을 당부했다.전화를 끊은 뒤 고은서는 본가에 들러 곽승연과 전미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말동무가 되어주었다.요즘 전미자는 곽현수와 곽승재가 무슨 사고를 당한 게 아닌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고은서에게 여러 번 캐물었다.곽현수의 화상 부위는 아직 피부이식이 끝나지 않았고 곽승재의 상처 또한 완전히 낫지 않아 고은서는 전미자가 걱정하지 않도록 여전히 핑계를 대며 진실을 숨겼다.비록 전미자는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지만 고은서가 애써 태연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오후가 되자 고은서는 고객과의 약속이 있어 본가를 떠났다.상대와의 대화는 꽤 순조로웠고 시간이 꽤 흐른 것을 본 고은서는 함께 식사하자고 제안했다.식사를 마친 시각은 밤 9시 무렵이었다.고객 몇 명이 술을 꽤 마셔 고은서는 그들을 기사에게 태워 보냈고 본인은 로비에서 자신을 데리러 올 또 다른 기사를 기다렸다.소파에 앉자마자 고은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오는 송민준과 그의 두 명의 조수를 보게 되었다.송민준은 술을 마신 듯 얼굴에 평소의 신사적인 기색은 없었지만 양미간 사이에는 은근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송민준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송민아가 북성으로 돌아간 후 고은서는 송민준과 다시 마주한 적이 없었다.전에 육현석이 송민준의 증거가 확보되어 조사를 위해 해성에 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풀려난 걸까? 보석으로 나온 걸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긴 사이, 송민준이 어느새 그녀 앞으로 다가왔고 그의 조수들은 눈치껏 먼저 자리를 떴다.고은서의 경호원은 송민준을 알아보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앞을 가로막았다.송민준은 경호원을 흘끗 쳐다봤지만 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