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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6 12:14:24

​월요일 아침의 기획본부 TF팀은 여느 때처럼 전쟁터와 같았다.

​새롭게 시작되는 유럽 시장 교두보 확보 사업과 하반기 이사회 안건 준비로 팀원들은 걸음을 바쁘게 옮겼다. 그 치열한 업무의 중심에는 여전히 서늘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차도현 팀장과, 그의 지시를 칼 같이 수행하는 한소율 대리가 있었다.

​"한 대리, 10시 이사회 서류 출력하고 2분기 매출 분석표 재검토해서 보고해요."

​"네, 팀장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사무실 내에서 두 사람의 호칭은 완벽하게 '팀장님'과 '한 대리'로 돌아와 있었다. 지난 주말 청담동의 화려한 드레스숍과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나눴던 "도현 씨", "소율 씨"라는 호칭은 마치 꿈결 속 환상이었던 것처럼 싹 사라져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갭에 소율의 마음 한구석은 가끔 쓸쓸해졌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차도현은 완벽하게 공사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계약서 4번 조항인 '감정 과입 금지'를 지키는 비즈니스 파트너의 미덕이었으니까.

​그러나 오후 5시가 넘어갈 무렵, 도현이 메신저로 보낸 단 한 줄의 비밀 메시지가 소율의 평정심을 다시 흔들어 놓았다.

​[차도현 팀장: 오늘 퇴근 후 내 집으로 갑니다. 저녁 식사 겸 2차 작업이 있습니다.]

​소율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타자를 치던 손가락을 멈췄다. 도현의 집이라니.

​[한소율 대리: 팀장님 집 말씀이십니까? 혹시 다른 외부 장소가 아니라요?]

​[차도현 팀장: 회장님이 비서를 시켜 내 개인 SNS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연애를 시작했다면서 아무런 커플 사진도 없다는 걸 의심하더군요. 오늘 밤 가짜 커플 계정을 개설하고 연출 사진을 몇 장 찍어 올릴 겁니다. 외부 장소는 눈이 많으니 내 집이 가장 안전합니다.]

​도현의 메시지는 철저히 이성적이었고 타당했다. 주말 산책로에서 찍힌 스냅사진 하나만으로는 회장님의 집요한 의구심을 완전히 끌어내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율은 가슴을 짓누르는 어지러움을 누르며 짧게 답장을 보냈다.

​[한소율 대리: 알겠습니다. 준비해서 퇴근 시간에 맞춰 가겠습니다.]

​오후 8시, 성수동의 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도현이 거주하는 펜트하우스의 도어록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율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모던하고 차분한 무채색 톤의 넓은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리정돈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거실은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했지만, 동시에 사람이 사는 온기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편하게 들어와요."

​자켓을 벗어 의자에 걸치며 도현이 말했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모습은 회사에서보다 한결 나른해 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소율이 거실 한가운데에 어색하게 서 있자, 도현은 배달시킨 포장 음식을 식탁에 세팅하며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우선 저녁부터 먹죠. 일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니까."

​식사는 의외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고 도현이 최신 스마트폰과 삼각대를 거실 소파 앞으로 가져오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회장님 쪽 조사관들이 수긍하려면 전형적인 '집 데이트' 느낌이 나야 합니다. 일상적이고 다정한 커플의 순간들 말입니다."

​도현이 거실 조명을 약간 낮추어 따뜻한 주황빛이 돌게 조절했다. 그리고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한 뒤 타이머를 설정했다.

​"자, 소파에 앉아봐요."

​소율은 침을 꿀꺽 삼키며 푹신한 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도현은 망설임 없이 소율의 바로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두 사람의 허벅지가 옷깃 너머로 지척에 닿았다.

​"첫 번째 컷은 자연스럽게 함께 영화를 보며 웃는 포즈입니다. 소율 씨, 조금 더 밀착해요. 너무 멀어 보입니다."

​도현이 손을 뻗어 소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도현의 커다란 손이 소율의 어깨에 단단하게 올려졌다. 단번에 끌려간 소율의 몸이 도현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쿵, 쿵, 쿵….'

​소율의 귓가에 도현의 가슴속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가 정직하게 느껴졌다. 도현의 서늘한 체온과 와이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의 감촉에 소율은 호흡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자, 카메라 봐요. 웃고."

​찰칵—!

​타이머 셔터가 터졌다. 도현은 화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너무 굳어있군요. 긴장 풀어요. 진짜 연인처럼 나를 좀 더 다정하게 바라봐요."

​"…죄송합니다. 조금 어색해서요."

​"어색해도 해내야 하는 게 우리의 비즈니스입니다. 다음 컷 가죠."

​도현은 이번엔 소율의 손을 가져가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꼈다. 마디가 굵고 기다란 도현의 손가락이 소율의 좁고 부드러운 손가락 사이로 얽혀 들어왔다.

​손전등을 대어본 것처럼, 깍지를 낀 손바닥 사이로 서로의 열기가 고스란히 교환되었다.

​도현은 소율의 손을 잡은 채로 멍하니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3년 동안 서류를 주고받던 부하직원의 손이 이렇게 작고 따뜻했던가. 도현의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소율에게서 나는 은은한 샴푸 향과 귤꽃 향이 도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늘 사무실에서 나던 깔끔한 커피 향이 아닌, 오롯이 한소율이라는 사람 자체가 품고 있는 본연의 향기였다.

​"팀장님… 아니, 도현 씨?"

​소율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도현은 찰나의 순간 정신을 차렸다. 자기도 모르게 소율의 손을 쥐고 있는 악력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현은 미세하게 당황했다.

​"아… 미안합니다. 다음 포즈로 넘어가죠."

​도현은 손을 떼어내고 카메라 타이머를 3초로 다시 설정했다.

​"이번엔 조금 더 과감한 포즈가 필요합니다. 진짜 연인들이나 할 법한 포즈로."

​"어떤 포즈를 말씀하시는 건지…."

​"내가 소율 씨 무릎을 베고 눕거나, 소율 씨가 내 가슴에 편하게 기대는 포즈 말입니다. 카메라 앵글을 위에서 잡죠."

​도현은 소파 앞 러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소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를 내려다봐요."

​도현이 지시하는 대로 소율은 몸을 기울여 도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소율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위와 아래에서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선.

​조명이 주황빛으로 붉게 감도는 거실 안에는, 카메라의 타이머 카운트다운 소리만이 붉게 울려 퍼졌다.

​삐— 삐— 삐—

​3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열기에 압도당했다. 도현의 눈빛은 더 이상 차가운 오피스의 완벽주의자 팀장이 아니었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낯선 호기심과 끌림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도현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단지 연기일 뿐이고, 할머니를 속이기 위한 비즈니스일 뿐인데. 부하직원인 한소율의 얼굴이 이토록 가깝게 다가왔을 때, 왜 자신의 가슴이 이토록 답답하게 조여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찰칵—!

​사진이 찍히는 소리와 함께 소율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너무 오래 밀착해 있던 탓에 다리에 쥐가 내린 듯 휘청였다.

​"앗!"

​소율의 중심이 무너지며 자세가 크게 틀어졌다. 소율은 균형을 잡기 위해 얼결에 도현의 어깨를 꽉 잡았으나, 도현 역시 소율을 받쳐 들려다 함께 균형을 잃고 러그 위로 쓰러졌다.

​콰당-!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율의 몸이 도현의 가슴 위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읏…!"

​도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고요해진 거실. 소율은 도현의 단단한 가슴에 완전히 엎드린 형태가 되어 있었다. 소율의 두 손은 도현의 와이셔츠 깃을 잡고 있었고, 두 사람의 얼굴은 불과 3cm도 되지 않는 거리에 멈춰 서 있었다.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상대방의 뺨과 입술에 직격으로 닿았다.

​쿵- 쿵- 쿵- 쿵-!

​도현의 가슴 밑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터질 것처럼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소율의 심장 소리인지, 아니면 도현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얽혀 있었다.

​소율의 긴 머리카락이 도현의 뺨을 간지럽히며 내려왔다. 도현의 시선이 소율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부터, 발갛게 달아오른 뺨, 그리고 잘게 떨리고 있는 입술로 천천히 내려갔다.

​감정 과입 금지.

계약서 4번 조항.

​도현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그 단단한 이성의 끈에 단단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가슴 위에 엎드린 소율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더 깊이 밀착하도록.

​"도현… 씨…."

​소율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도현의 입술 앞에서 부서졌다.

​도현의 눈동자에 짙은 열망의 빛이 깃들었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비즈니스도 아니었다. 도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소율을 자신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한소율 대리."

​도현의 낮게 갈라진 음성이 정적을 깨뜨렸다.

​"계약서 조항… 지키기가 생각보다 어렵군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처럼 맞닿은 채, 거실의 시간은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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