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태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렇다고 반지를 억지로 밀어 넣을 수도 없었다.고태준은 당황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아니야, 하린아. 내가 손이 미끄러져서 그래. 조금만 다시 해 보면 금방 들어갈 거야. 잠깐만 기다려 줘!”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손을 빼냈다.고태준의 땀이 묻은 반지가 바닥에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냈다.“나 9년을 기다렸어, 고태준.”“대학생 때부터 널 좋아했고, 기다렸어. 졸업할 때까지, 우리랑 비슷한 시기에 사귀기 시작한 커플들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난 여전히 너를 기다렸어.”“내가 뭘 기다렸는지 알아?”나는 고태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네가 한 번쯤 뒤돌아서 나만 바라봐 주길 기다렸어.”“유채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나랑 비교하고,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대신에 말이야.”“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아봐 주길 기다렸어. 내가 유채원보다 훨씬 말라서 조수석에 앉아도 네 시야를 조금도 가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봐 주길 바랐어.”“구급차를 불러 주길 기다렸어. 한밤중에 정신을 차려 혼자 택시 타고 병원에 가게 만들지 말고. 그러면서 너희 둘이 얼마나 애틋한지 봐야 했잖아!”“겨우 상처를 치료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넌 나더러 유채원한테 사과하라고 했지. 네 엄마는 결혼할 함에 드라이버와 스패너 같은 쇠붙이나 넣어 주겠다며 나를 모욕했고.”“고태준, 말해 봐. 내가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유채원이 없어져도 다른 사람이 나타나겠지. 넌 언제든 핑계를 찾아 나를 달래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할 테니까.”“하지만 난 이제 안 기다려. 70, 80살이 되어서야 네 여자친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맞고 싶지 않아.”“이제부터는 내 인생을 살 거야. 가고 싶으면 가고, 하고 싶은 건 하고,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고,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을 거야!”고태준은 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서 있으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언제부터인지 고태준의 얼굴은 눈물
고태준은 울고불고 매달리는 유채원을 무시한 채 집 안에서 유채원의 흔적을 모조리 치웠다.유채원도 짐과 함께 집 밖으로 내쫓았다.도어록에 등록된 지문까지 남김없이 삭제했다.지문을 지우려다가 유채원 전용 출입 알림음도 다시 들었다.처음 유채원의 지문을 등록할 때는 심하린의 절친이니 편하게 놀러 오라고 배려했을 뿐이었다.그런데 그 틈을 타 유채원이 다른 속셈까지 부렸을 줄은 몰랐다.심하린도 그 알림음을 들었다면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자기 여자친구에게는 열쇠 하나만 던져 주고, 유채원에게는 지문 출입까지 허락한 셈이었다.후회가 밀려오자 유채원을 향한 목소리에도 독기가 실렸다.“하린이 친구라서 나도 잘해 줬던 거야. 널 의심하지 않아서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거고.”“하지만 앞으로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 마. 또 찾아오면 네가 남의 연애에 끼어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회사 본부장한테 알릴 테니까!”김명희가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고태준의 매서운 눈길에 입을 다물었다.“엄마, 이번에는 정말 너무하셨어요. 앞으로 급한 일 없으면 저랑 하린이 신혼집에 오지 마세요.”그제야 김명희가 심하린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떠올랐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 더욱 원망스러웠다.집을 정리한 뒤 고태준은 그제야 자신이 심하린의 파견 근무지가 어디인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차단당한 뒤였다.심하린에게 메시지를 보내도 빨간 느낌표만 뜰 뿐이었다.이제야 잘못을 깨닫고 돌아가려 했지만 그는 돌아갈 길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태준은 심하린과 공통으로 아는 친구들에게 닥치는 대로 연락하며, 소식 한 줄만이라도 듣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그 무렵 나는 이미 바다 건너 작은 섬에 자리를 잡았다.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프로젝트라 직접 발로 뛰며 알아봐야 할 것이 많았다.바빴지만 그만큼 보람찼다.지난날의 답답하고 괴로웠던 기억을 잊고 새로운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주하영도 나와 함께 이곳에 파견됐다. 오랜 시간 함께 지
고태준은 미친 듯이 가속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달렸다.그는 짐을 챙겨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당장 심하린을 찾아갈 생각이었다.용서를 받지 못해도 좋았다. 모든 걸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적어도 자신의 마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하린 한 사람뿐이었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랐다.고태준이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심하린이었다고 말이다.그런데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원래 휑하던 안방은 온통 다른 여자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유채원의 하이힐과 가방, 화장품이 방 곳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마치 처음부터 유채원의 방이었던 것처럼.침대 위 이불이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도 유채원이었다.“태준아, 왔어? 어때? 하린이랑 혼인신고 잘했어?”유채원은 원래 심하린이 누워야 할 침대 자리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과 경계심이 어렸다.예전 같았으면 고태준은 피곤해서 잠깐 쉬고 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것이다.하지만 심하린을 잃고 나서야 유채원의 속셈이 똑똑히 보였다.고태준은 유채원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네가 왜 나랑 하린이가 쓰는 침대에 누워 있어? 방 안에 있는 이 물건들은 또 뭐야? 내가 안방에서 나가라고 하지 않았어?”매서운 목소리에 유채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유채원은 금세 눈물을 보이며 힘겹게 일어나는 척했다.“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배가 아직 아파서 잠깐 누워 있었어. 이 물건들은 어머니가 옮겨 주신 거야. 나도 안방에서 나가려고 했지. 그런데 생리통이 안 나아서 어머니가 며칠만 더 있으라고 하셨어.”“내가 바보로 보여?”고태준은 가슴을 들썩였다.“벌써 일주일이 지났어. 네 생리는 진작 끝났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넌 애초에 나갈 생각이 없었던 거야. 하린이가 와서 네가 아직 우리 신혼집 안방에서, 그것도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걸 보게 하려고!”“하린이가 오해해서 나랑 헤어지면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거잖아!”유채원의 눈
그 말을 들은 고태준은 전화를 걸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그럴 리가요. 오늘 혼인신고 하기로 약속했는데 하린이가 해외에 파견되었다고요? 그것도 5년이나?”“당신 지금 저한테 거짓말하는 거죠? 지금 하린이가 옆에 있는 거 맞죠!”“하린이한테 전해주세요. 한 시간 안에 안 나타나면 앞으로 혼인신고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요!”고태준의 성난 목소리를 듣던 동료는 잠시 침묵하더니 참지 못하고 물었다.“고태준 씨, 정말 하린이랑 약속한 거 맞아요?”고태준이 멈칫했다.“무슨 뜻이에요?”동료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오랫동안 참아 온 말을 한꺼번에 쏟아 낼 기세였다.“하린이한테 제대로 물어본 적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고태준 씨랑 그 여우 같은 유채원이 둘이서만 정한 거 아닌가요?”“하린이 시간은 되는지, 고태준 씨랑 혼인신고 하고 싶은지는 물어봤어요?”고태준은 표정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채원이가 하린이보다 꼼꼼해서 맡긴 건데 뭐가 잘못됐어요? 고작 그 일로 심술을 부린다는 게 말이 돼요?”“그리고 하린이 나랑 혼인신고 하기 싫을 리가 없잖아요. 9년이나 기다렸는데.”“고태준 씨도 하린이가 9년이나 기다린 건 알잖아요.”동료의 목소리가 단숨에 높아졌다.“그래서 고태준 씨는 하린이한테 어떻게 했어요?”“그 9년 동안 기념일을 하린이랑 보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유채원이 더 꼼꼼하다고요? 그럼 채원이 그 여우년은 하린이 일정을 한 번이라도 배려했어요?”“하린이가 그렇게 기대하던 기념일 여행도 채원이가 그저께 가자니까 둘이 그때 떠났잖아요. 하린이는 공항에서 8시간이나 혼자 기다렸다고요.”“지난주 혼인신고도 마찬가지예요. 채원이가 당신들 두 분이 쉬는 날로 잡았다고 하더라고요. 하린이도 그날 쉬는지는 생각해 봤어요?”“하린이는 하루 휴가 내려고 일주일 내내 야근했어요. 다크서클이 판다처럼 내려올 지경이었는데, 고태준 씨는 그때 뭐했어요?”동료의 말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고태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이 모든 것
끝내 고태준은 구급차도 불러주지 않았다.나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헛된 기대를 품었다.내가 유채원에게 사과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고태준이 구급차 한 대쯤은 불러 줄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고태준은 그러지 않았다.한밤중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핏자국은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직접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갔다.응급실 의사는 내 상처를 치료하면서 혀를 찼다.“이제 나이도 적지 않으신데 남자친구라도 사귀어야죠. 그렇지 않으면 한밤중에 다치면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잖아요.”“아까도 어떤 여자가 생리통 때문에 왔는데, 남자친구가 공주님처럼 안고 응급실 침대까지 데려다주더라고요. 의사들한테 제대로 치료 못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의사 면허까지 들먹였다니까요.”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는 몰랐다. 내게도 남자친구가 있고, 하마터면 결혼까지 할 뻔했다는 사실을.다만 내 약혼자는 다친 나를 한밤중에 내버려 둔 채 다른 여자의 기사가 되러 갔을 뿐이었다.나는 이마를 다섯 바늘 꿰맨 뒤 병원 로비에서 밤을 지새웠다.아침 첫 환자들이 몰려들 무렵, 나는 쑤시는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문을 열자 단란한 세 식구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유채원은 소파에 앉아 대추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고태준은 그 옆에 바짝 붙어 커다란 손으로 유채원의 배를 문질러 주었다.예비 시어머니 김명희는 기운을 보충하라며 따뜻한 반찬을 한 상 차려 놓고 유채원의 그릇에 국을 가득 담아 주었다. 안색은 어떤지, 배는 괜찮은지 연신 묻고 있었다.내가 들어오는 순간, 김명희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금세 차갑게 굳었다.“대체 낯짝도 얼마나 두꺼우면 내 귀한 수양딸을 다치게 해 놓고도 다시 기어들어 와?”김명희는 유채원을 유난히 아꼈다. 며느리보다 더 귀한 존재였다.그런데 내가 며느리가 될 사람이었기에 유채원은 수양딸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명희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나는 신혼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옆 여행 가방을 열어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사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내 물건은 많지 않았다.9년 동안 간직했던 반지 상자마저 쓰레기통에 버리니 가방이 한결 가벼웠고 더 비어 보였다.막 가방을 닫았을 때 현관에서 전자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유채원 아가씨 납시오! 모두 길을 비켜라!”바다의 짭조름한 공기와 함께 유채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하린아, 왜 먼저 왔으면 왔다고 말을 안 해? 나랑 태준이가 바닷가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나는 유채원의 타박하는 눈길은 무시하고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너 어떻게 들어왔어?”“태준이가 이사 첫날부터 내 지문을 등록해 줬어. 방금 들었지? 나만의 도어록 알림음, 완전 멋있지 않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은 쓸개를 씹은 것보다 더 썼다.이사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고태준이 내게 준 건 열쇠 한 개가 전부였다.열쇠를 두고 나온 날이면 고태준이 퇴근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새집에 들어온 첫날부터 고태준은 유채원의 지문을 등록해 두었던 것이다.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신혼집에 유채원의 전용 알림음까지 설치하다니.내가 더 묻기도 전에 유채원이 흥분한 얼굴로 오늘 산 예물들을 꺼냈다.“하린아, 태준이는 신경 쓰지 마. 나 대신 생리대 사러 갔어. 우리 먼저 반지나 껴 보자.”유채원은 내 약지에 금반지를 밀어 넣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유채원의 손에만 맞춰 보았던 반지가 내 손가락에 들어갈 리 없었다.손가락 마디가 쓸려 아파서 나도 모르게 유채원의 손을 쳐 냈다.유채원은 비틀거리다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결국 우리 둘 다 바닥으로 넘어졌다.유채원은 엉덩방아를 찧었고, 나는 이마를 부딪쳐 피부가 찢어졌다.그때 고태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다급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갈라졌다.“심하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고태준은 달려와 유채원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예전에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