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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겁탈하지 마

자유를 겁탈하지 마

By:  블루 마운틴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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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 촬영을 하기로 약속한 날, 임가영은 새벽부터 서둘러 단장을 마쳤지만 정오가 넘도록 차선호는 데리러 오지 않았다. 이제 막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참인데 차선호가 금방 SNS에 올린 아홉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새틴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 속 여자는 눈매며 콧날까지 임가영과 판박이인 그녀의 쌍둥이 언니 임유진이었다. 게시물에는 이런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드디어 너의 공공연한 연인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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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임가영은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응시했다. 그때 마침 차선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온화했다.

“미안해, 가영아. 내가 또 착각했어. 유진이를 너인 줄 알았지 뭐야. 근데 스튜디오 촬영 일정이 이미 다 잡혀서 사진작가님도 재촉하시고 지금 다시 너를 데리러 가기엔 시간이 도저히 안 나네. 다행히 둘이 똑같이 생겼으니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임가영은 휴대폰을 꽉 쥐어서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벌써 20년을 넘게 들어온 말.

어릴 적 상을 타왔을 때, 부모님은 언니로 착각해 언니만 데리고 여행을 떠났었다.

중학교 시절, 언니가 수업을 빼먹고 징계를 받을 때, 임가영으로 오인되어 징계가 그녀 이름으로 내려졌다.

고등학교 시절, 밤낮으로 공부해서 명문대를 참관하는 자격을 따냈지만, 부모님은 언니와 함께 참가했고 돌아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던졌었다.

“유진이가 너인 줄로 착각했나 보지.”

그날 밤 임가영은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

그때 차선호가 그녀를 찾아냈다.

청량하던 소년은 그녀를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댄 채 단호하게 말했다.

“가영아, 난 절대 다른 사람을 너로 착각하는 일 없을 거야.”

그는 정말 약속을 지켰다. 인파 속에서도 언제나 임가영을 가장 먼저 찾아냈고 쌍둥이 언니 임유진과 착각하는 일도 결코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학교 축제 날, 쌍둥이 자매 임가영과 임유진이 똑같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차선호는 임유진을 보고 임가영이라 불렀다.

그 이후로 이 남자가 착각하는 횟수는 점차 늘어났다.

처음엔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지만, 나중에는 그 사과마저도 점점 건성으로 변해갔다.

심지어 오늘 웨딩 촬영을 하러 가서 사람을 착각했을 때도 그저 ‘똑같이 생겼으니 아무도 모를 거다’라고 퉁 칠 정도였다.

임가영이 입을 떼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임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호야, 이리 좀 와봐.”

차선호는 즉시 다정하게 대꾸하고는 임가영에게 말했다.

“됐어, 가영아. 우리 거의 다 찍었어. 곧 집에 갈게. 오늘 유진이가 너 대신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까 저녁에 맛있는 거라도 좀 해줘.”

전화가 끊어지고 화면이 어두워졌다.

임가영은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차선호가 그녀들을 헷갈리기 시작한 이후로 임가영은 쌍둥이 언니와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지 않았다.

수수한 옷차림으로 말없이 지내며 자신을 언니와 반대되는 존재로 만들었다. 오로지 착각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가영은 눈을 지그시 감고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구별하기가 힘들까?

그런데 왜 모든 좋은 일은 언니에게만 돌아가고 나쁜 일은 전부 임가영의 몫인 걸까?

그녀는 휴대폰을 끄고 집을 나섰다.

머리카락을 백금발로 물들이고 와인색 원피스를 골라 입은 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거실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부모님은 임유진을 가운데 두고 웨딩 사진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엄마 오수희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짜 예쁘다. 우리 유진이는 역시 사진발을 잘 받는다니까. 가영이었으면 이런 느낌 절대 안 났을 거야.”

아빠 임창균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얼굴은 똑같은데 분위기가 천지 차이라니까. 어릴 때부터 걔는 참... 볼품이 없었어.”

임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차선호가 그 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가영아, 나갔다 왔어? 유진이가 종일 너 대신 사진 찍느라 끼니도 못...”

다만 임가영을 본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다.

“너... 염색했니?”

오수희가 대뜸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가영이 너 지금 제정신이야? 머리는 또 왜 이 모양인데? 종일 돈 쓸 궁리만 하고! 어릴 때부터 왜 이렇게 사람 속을 썩여? 유진이 반만 닮아봐!”

임가영은 그저 실소가 터졌다.

언니 임유진은 매달 600만 원씩 용돈을 물 쓰듯 썼지만, 누구 하나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집에 손 한 번 벌린 적 없는데 이제 와 제 돈으로 염색 좀 했다고 죄가 되는 모양이었다.

임가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제가 뭘 하든 언니보다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잖아요. 돈이나 낭비하는 애라고 하셨으니 이왕 하는 거 확실히 해야 효도 아니겠어요? 그리고 두 분 맨날 언니랑 저랑 헷갈린다면서요. 이제는 확실히 구분하시겠죠? 설마 색깔까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시죠?”

오수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임가영! 말버릇이 그게 뭐야!”

그때 임유진이 재빨리 오수희를 부축하며 온화하면서도 훈계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가영아, 엄마한테 말이 너무 지나치잖아.”

임가영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참다못한 임창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임가영의 뺨을 후려치려 했다.

“이런 불효막심한 년이!”

임가영은 피할 새도 없었지만, 손바닥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차선호가 그녀 앞에 막아서며 임창균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다.

“아버님, 진정하세요.”

그는 뒤를 돌아 임가영을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낮췄다.

“가영아, 오늘 일 때문에 화났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우리 내일 다시 가서 예쁘게 찍자, 응? 괜히 토라져서 그런 말 하지 말고, 집안 분위기만 망치잖아.”

그렇게 말하며 차선호는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네가 좋아하는 웨딩 장식도 오늘 새로 주문했어. 한번 봐봐.”

평소 같았으면 이 남자 입에서 결혼식 이야기가 나오면 임가영은 금세 기분이 풀려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화면을 힐끗 쳐다보더니 태블릿을 밀어냈다.

“나 보라색 안 좋아해.”

그녀는 차선호를 올려다보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난 아이리스 꽃 알레르기 있어.”

온 가족이 아는 사실, 아이리스 꽃을 좋아하는 건 임유진이었다.

임가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선호의 표정이 굳었다.

임가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덤덤하게 내뱉었다.

“이왕 언니가 좋아하는 장식이라면 이 결혼도 언니한테 양보할게.”

말을 마친 그녀가 계단을 오르려 하자 차선호가 잠시 넋 놓고 있더니 다급하게 따라와 앞을 막아섰다.

“가영아, 아무리 화가 나도 이런 일로 농담하는 거 아니야. 내 신부 될 사람은 오직 너라고.”

임가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신부 자리도 언니한테 양보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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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임가영은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응시했다. 그때 마침 차선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온화했다.“미안해, 가영아. 내가 또 착각했어. 유진이를 너인 줄 알았지 뭐야. 근데 스튜디오 촬영 일정이 이미 다 잡혀서 사진작가님도 재촉하시고 지금 다시 너를 데리러 가기엔 시간이 도저히 안 나네. 다행히 둘이 똑같이 생겼으니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임가영은 휴대폰을 꽉 쥐어서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벌써 20년을 넘게 들어온 말.어릴 적 상을 타왔을 때, 부모님은 언니로 착각해 언니만 데리고 여행을 떠났었다.중학교 시절, 언니가 수업을 빼먹고 징계를 받을 때, 임가영으로 오인되어 징계가 그녀 이름으로 내려졌다.고등학교 시절, 밤낮으로 공부해서 명문대를 참관하는 자격을 따냈지만, 부모님은 언니와 함께 참가했고 돌아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던졌었다.“유진이가 너인 줄로 착각했나 보지.”그날 밤 임가영은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그때 차선호가 그녀를 찾아냈다.청량하던 소년은 그녀를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댄 채 단호하게 말했다.“가영아, 난 절대 다른 사람을 너로 착각하는 일 없을 거야.”그는 정말 약속을 지켰다. 인파 속에서도 언제나 임가영을 가장 먼저 찾아냈고 쌍둥이 언니 임유진과 착각하는 일도 결코 없었다.그러던 어느 학교 축제 날, 쌍둥이 자매 임가영과 임유진이 똑같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차선호는 임유진을 보고 임가영이라 불렀다.그 이후로 이 남자가 착각하는 횟수는 점차 늘어났다.처음엔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지만, 나중에는 그 사과마저도 점점 건성으로 변해갔다.심지어 오늘 웨딩 촬영을 하러 가서 사람을 착각했을 때도 그저 ‘똑같이 생겼으니 아무도 모를 거다’라고 퉁 칠 정도였다.임가영이 입을 떼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임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호야, 이리 좀 와봐.”차선호는 즉시 다정하게 대꾸하고는 임가영에게 말했다.“됐어, 가영아. 우리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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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차선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차선호는 임가영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가영이 너 예전엔 안 이랬잖아. 도대체 오늘 왜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구는 거야?”임가영은 아무 대꾸 없이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마디가 선명하고 길쭉하며 깨끗한 손, 한때는 이 손으로 그녀를 이끌고 수많은 거리를 함께 걸었고, 그녀가 울 때마다 눈물을 닦아주었으며, 인파 속에서 언제나 그녀를 가장 먼저 찾아냈었지...임가영은 무덤덤한 투로 내뱉었다.“나 지금 투정 부리는 거 아니야.”차선호는 임가영의 표정을 살피다 이내 손을 놓으며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됐어. 너 오늘 감정이 격해진 것 같으니까 일단 올라가서 쉬어. 괜히 홧김에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이든 내일 다시 얘기하자.”임가영은 시선을 거두고 그의 곁을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그녀가 했던 말은 결코 홧김에 내뱉은 빈말이 아니었다.이런 가족, 그리고 이런 연인이라면 이제 더 이상 미련을 둘 이유가 없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임가영은 집을 나섰다. 인사혁신처로 가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그녀는 시청 산하 기관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필기시험과 면접 모두 수석이었고 지금은 공시 기간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공시 기간이 끝나면 그녀는 정식 공무원으로 임용된다.집에서 손쉽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수도 있지만, 임가영은 누구보다 잘 안다. 회사에 들어가 봐야 임유진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고 가족들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합격만 하면 온전히 내 힘으로 당당하게 독립할 수 있을 테니까.이건 임유진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오직 그녀만의 것이었다.한편 임가영을 맞이한 것은 엄숙한 표정의 중년 남자였다.“임가영 씨 맞습니까?”“네.”상대방은 앞에 놓인 서류철을 넘기다 미간을 점점 더 깊게 찌푸리더니 마침내 한숨을 내쉬고는 인쇄된 종이 한 장을 탁자 위로 내밀었다.“직접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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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차선호의 목소리는 홀가분하기 그지없었지만, 임가영의 심장에는 천근만근 묵직하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그날 내가 분명 도서관에 있었다고 말했잖아.”“그때 상황이 너무 급박했어.”차선호는 침착하게 그녀를 달래면서 촉촉한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난 네가 그랬을까 봐 걱정도 됐고 마음이 급해 아무것도 살피지 못했어. 나중에 유진이라는 걸 알았어도 이미 처리된 걸 다시 바꿀 수도 없었고. 어차피 유진이는 네 친언니잖아?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 뒀으니까 누가 그랬든 상관없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걱정 마. 너한테 아무 영향 없을 거야.”임가영은 그 순간 너무나 어이없어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차선호는 그녀가 이번 시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쏟았는지 모를 리 없었다.또한 이 시험이 임가영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그는 단지 사고를 친 임유진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임가영의 앞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행동했던 것이다.차선호는 임가영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어깨를 감싸 안고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속삭였다.“됐어. 그깟 일 별거 아니잖아. 직장 하나 얻는 게 그렇게 걱정돼? 내가 널 먹여 살리지 못할까 봐?”임가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더 이상 차선호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손을 툭 털어내고 돌아섰다.“가영아...”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도 무시한 채 곧게 앞으로 걸어갔다.주머니 속 휴대폰이 몇 번 울렸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 않았다.두어 블록을 지나고 나서야 겨우 가슴을 짓누르던 울분이 조금 잦아들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향한 곳은 법률사무소였다.임가영은 사건 위임장에 서명했고 나머지는 담당 변호사가 절차에 맞춰 진행할 터였다.항소 절차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임유진 대신 ‘뺑소니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그녀는 휴대폰을 열고 차선호가 보낸 여러 통의 메시지를 무시한 채 곧장 연락처로 들어갔다.두어 번의 신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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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차선호는 소파에 반쯤 몸을 기댄 채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그의 옆자리엔 다름 아닌 임유진이 있었다.임가영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룸 안으로 들어섰다.그녀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곁에 있던 동창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잠시 후 차선호가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영아, 이틀 동안 내 문자에 답장도 없고 뭐가 그렇게 바빠?”임가영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한편 차선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하긴, 너도 좀 사회생활을 배울 필요가 있어. 유진이처럼 누구랑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성격을 본받아야지.”임가영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지만 대충 알겠다는 듯 짧게 대꾸할 뿐이었다.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누군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게임을 제안했고 임유진이 가장 먼저 호응하며 나섰다.“좋아, 그럼 술병 돌리기 하자. 병이 가리키는 사람이 질문에 즉답하는 거야. 망설이면 안 돼!”모두가 찬성하며 분위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몇 차례 술병이 돌아간 끝에 병구는 정확히 차선호를 가리키며 멈췄다.임유진이 생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그럼 우리 미래의 제부한테 첫 질문 할게. 고양이 아니면 강아지?”“강아지.”“샤브샤브? 일식?”“일식.”“여름? 겨울?”“겨울.”차선호는 쏟아지는 질문마다 망설임 없이 속사포처럼 대답했다.그러자 곁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어? 가영이 고양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맞아! 그리고 얘 날것은 냄새 때문에 힘들다고 일식도 안 먹잖아. 오히려 유진이는 좋아하지...”“그러게. 겨울 좋아하는 것도 유진이 아니야?”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소곤거림이 파도처럼 임가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다만 그녀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그때 임유진이 눈을 반짝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임가영? 임유진?”차선호의 대답은 찰나의 고민도 없이 튀어 나왔다.“임유진.”순간, 북적이던 룸 안의 소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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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낸 탓일까. 임가영은 속이 뒤틀리는 듯한 메스꺼움을 느꼈다.세면대 가장자리를 짚고 몸을 굽혀 헛구역질했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했다.그녀는 수도꼭지를 틀어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구토감을 억눌렀다.그때 등 뒤로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거울 속으로 임유진의 모습이 비쳤다.문틀에 기대 팔짱을 끼고서 임가영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평소의 온화하고 단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노골적인 승리감만이 감돌았다.“토했어?”임유진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겨우 이 정도로?”임가영은 대꾸하지 않고 휴지를 뽑아 손을 닦았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선호가 우리를 구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구분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임유진이 두어 걸음 다가와 낮게 읊조렸다.“걔가 기억하는 모든 취향은 다 나잖아. 무의식중에 선택한 사람도 결국은 나였고.”임가영의 손길이 멈칫했다. 임유진은 그 미묘한 반응을 놓치지 않고 더욱 의기양양해졌다.“참, 하나 더 알려줄까? 웨딩 촬영은 내가 찍고 싶다고 졸라서 데리고 간 거고 네가 시청 공무원 합격 명단에서 빠진 것도 내가 일부러 손쓴 거야. 가영이 너는 평생 내 들러리밖에 안 돼.”임가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에 쥐었던 휴지를 휴지통에 버렸다.이어서 천천히 몸을 돌려 세면대에 등을 기댄 채 임유진을 쳐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야, 임유진, 남을 짓밟아야만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거라면 네 인생도 참 비참하다. 아 그리고 차선호? 필요하면 너 가져. 마침 버리려던 참이었거든.”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유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임가영은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어깨를 밀치면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다시 모임 장소로 돌아가는 대신 그녀는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호텔 정문을 나섰다.밤바람이 불어오자 비로소 속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임가영은 인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는 찰나, 옆 골목에서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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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임가영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입을 열었지만,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 가며 통증이 느껴졌고 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뭐라고?”“화장실 앞에서 말이야.”차선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네가 유진이를 밀치는 바람에 애가 발목을 삐었어. 그 와중에 네가 감정이 격해진 것 같아 걱정된다며 쫓아 내려갔는데 네가 웬 남자랑 시비가 붙었다며? 유진이는 널 보호한답시고 달려들었다가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도 못했어.”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한층 가라앉은 어조로 덧붙였다.“유진이가 널 그렇게 아끼는데 왜 자꾸 애를 다치게 하는 거야? 설마 게임에서 내가 걔를 선택했다고 질투 나서 그래? 가영아, 그건 그냥 게임이잖아. 너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거니? 유진이 깨어나면 가서 제대로 사과해.”임가영이 이 어이없는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꼬박 10초가 걸렸다.그리고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내가 지금 누구한테 당한 건지 알긴 해? 임유진이 뺑소니로 죽인 그 피해자의 아들이야.”임가영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다.“유진이가 음주운전에 뺑소니 사고까지 친 걸 네가 나한테 덮어씌워서 처분 기록이 남았어. 피해자 아들이 내게 앙갚음하겠다고 덤빈 거라고. 얻어맞은 것도 나고 여기 누워있는 것도 나야! 유진이야말로 내게 사과하고 죗값을 치러야 하는 거 아니니?”차선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가영아, 유진이 지금 부상을 입고 의식도 없는데 꼭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야겠어?”임가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그것도 걔가 자초한 일이지.”차선호는 할 말을 잃은 듯 턱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한참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가영이 네가 이런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어머님, 아버님이 왜 유진이만 예뻐하시는지 이제야 알겠어.”그 말을 끝으로 차선호는 뒤돌아 병실을 나섰다.복도를 따라 그의 발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임가영은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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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차선호는 사인 된 합의서를 들고 임유진의 병실로 돌아왔다.임유진은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가 그가 들어오자 나지막이 물었다.“사인했어?”“응.”그는 서류를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사인 다 했으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임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사실 내 마음도 편치 않아. 가영이랑 나랑 둘 다 다치긴 했지만, 그분으로선 어머니를 잃었으니 오죽할까? 나도 이렇게까지 모질게 처리하고 싶진 않았어.”차선호는 건성으로 알겠다며 대답했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머릿속에는 임가영이 서류에 사인하던 모습이 자꾸만 맴돌았다.반박 한마디 없이 단호하게 서명하던 그녀, 차선호에게 눈길조차 안 주던 그녀, 모든 게 너무 차분하게 진행되었다.차선호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다시 표정을 풀었다.며칠 사이 너무 많은 일이 닥쳤으니 임가영도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겠지.이제 혼인신고를 마치고 천천히 달래주면 될 터였다.“선호야?”임유진의 부름에 남자는 그제야 정신을 다잡았다.그녀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손을 잡으려 했다.“가영이 걱정돼서 그래? 차라리 가서 보고 오는 게 어때? 난 혼자 있어도 괜찮아.”차선호는 고개를 숙여 그녀가 뻗은 손을 내려다보았다.가늘고 하얀 손가락, 임가영의 손과 무척 닮아 있었다.하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며 은근슬쩍 피했다.“됐어. 아마 벌써 퇴원했을 거야.”잠시 멈칫하던 남자가 한 마디 덧붙였다.“유진아, 나 며칠 뒤면 가영이랑 혼인신고 해. 우리도 이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임유진의 손이 허공에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이내 손을 거두고 눈을 내리깔며 애써 웃어 보였다.“그래, 맞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너희 결혼 앞두고 있는데 당연히 조심해야지.”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가늘었다. 딱 그만큼의 상실감이 섞인 지극히 계산된 슬픔이었다.차선호의 마음 한구석에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그는 임유진이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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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결혼식장을 알아보느라 바빴던 며칠 동안 차선호는 임가영을 따로 만나지 않았다.몇 번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어도 그는 딱히 불안해하지 않았다.기껏해야 임가영이 아직도 심술을 부리는 정도라고 여겼으니까.그녀의 어머니 오수희마저 가영이가 한창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으니 일말의 의심 없이 믿어주었다.임가영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또 얼마나 애착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차선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결혼식 준비에 온전히 몰두했다.식장을 바꾸고 꽃장식도 새로 했으며 사회자의 대본까지 다시 조정했다.그는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챙기며 완벽을 기했다.결혼식 당일,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드넓은 정원은 온통 새하얀 장미로 뒤덮였고 하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잔을 부딪치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차선호는 말끔하게 수트를 차려입고 단상 앞에 서서 레드카펫의 끝을 응시했다.음악이 울려 퍼지자 모든 하객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카펫 저편에서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로 다가왔다.베일에 얼굴을 가렸지만 가녀리고 아름다운 실루엣은 선명했다.차선호는 다가오는 신부의 실루엣을 보며 마음이 설렜다.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신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차선호는 손을 뻗어 베일을 걷어 올렸다.곧이어 남자의 얼굴에 띤 미소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베일 아래에는 다름 아닌 임유진이 있었다.정교한 화장을 하고 눈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여자.차선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한참 뒤에야 간신히 목소리를 되찾았다.“왜 네가 여기 있어? 가영이는?”임유진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고 품위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나 봐. 집에 돌아오질 않네. 결혼식 날짜는 이미 다가왔으니 엄마, 아빠가 일단 나보고 대신 올라오라고 하셨어. 하객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객석에서는 벌써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저거 임가영 맞아?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가영이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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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바로 그때, 예식장 문이 벌컥 열리고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그들은 식장을 쭉 훑어보더니 임유진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잠시 저희와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곧이어 장내가 술렁였다.임유진은 사색이 된 얼굴로 무심코 차선호의 등 뒤로 숨으려 했다.“저... 저한테 무슨 일로 오신 거죠?”차선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반걸음 앞으로 나서 그녀를 가려주며 깍듯이 말했다.“형사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이에 선두에 선 경찰이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임유진 씨가 음주운전 및 교통사고 후 도주 치사, 타인에게 죄를 전가한 혐의가 있다는 증거가 제출되었습니다. 수사에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말이 떨어지자마자 예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하객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소곤거렸고 그 웅성거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뭐야? 음주운전 뺑소니? 게다가 다른 사람한테 죄를 덮어씌웠다고?”“누구한테 덮어씌웠는데? 설마... 임가영?”“헐! 그럼 가영이가 전에 사고 쳐서 자격이 취소됐다는 것도...”임유진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나 아니라고! 다들 잘못 짚으신 거예요!”경찰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번 단호하게 반복했다.“수사에 협조해주십시오.”혼비백산해진 임유진은 차선호의 옷소매를 꽉 붙잡고 울먹였다.“선호야, 나 좀 도와줘!”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부모님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엄마, 아빠! 뭐라고 말 좀 해봐요!”오수희도 다급해져선 경찰 앞을 막아서며 소리를 질렀다.“우리 유진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분명 뭔가 잘못됐어. 유진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런 끔찍한 짓을 할 리가 없어!”이에 경찰은 예의를 갖추되 단호한 태도로 그녀를 제지했다.“지금 이건 공무 집행 방해입니다. 물러나 주십시오.”결국 임유진은 강제로 끌려나갔다.예식장은 발칵 뒤집혔고 하객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쉴 새 없이 수군거렸다.어떤 이들은 서둘러 짐을 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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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 호빠 선수랑 딱 한 번 잤는데 바로 애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냐고요?”임유진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몸이 안 좋아서 지우지도 못하고 결국 이렇게 된 이상 호구라도 하나 잡아야죠. 그래도 선호가 있잖아요. 원래는 그런 남자가 가영이 등 뒤에 서 있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살짝 흔들어본 것뿐인데 상황이 딱 맞아떨어졌어요. 걔는 돈도 많고 다루기도 쉬우니 내가 조금만 약한 척하면 금방 마음 약해진다니까요.”차선호는 문밖에 선 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좋아했던 게 아니라니.단지 임가영의 뒷배를 끊어내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을 뿐이라니.‘임유진! 그동안 나한테 온갖 눈웃음을 치고 유혹했던 건 내가 너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어 철저히 죄책감에 묶어두기 위함이었어? 그런 거야?’차선호는 발로 문을 걷어찼다.문짝이 벽에 부딪히며 엄청난 굉음을 냈다.임유진과 오수희는 표정이 얼어붙고 얼굴에서 핏기가 한순간에 씻겨 나갔다.“선... 선호야...”임유진이 무의식적으로 일어서며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언제 왔어?”차선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임신했어?”임유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입술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누구 애야?”“일단 내 말 좀 들어봐...”“누구 애냐고 묻잖아.”임유진은 그의 추궁에 연달아 뒷걸음질 쳤다. 입술을 깨물고 눈가가 붉어진 채 울먹이는 조로 변명했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거라고...”“그래서 가영이를 밀어내고 내가 그 설거지를 하게 만들 작정이었니?”차선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극도로 억눌린 분노가 소용돌이쳤다.임유진은 그의 추궁에 말문이 막히자 더는 잃을 게 없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그럼 어쩌라고? 그러는 넌 나한테 아무 감정 없었니? 네가 묵인하지 않았으면 무슨 수로 번마다 널 속여? 나랑 가영이랑 헷갈리는 척할 때마다 다 알고 즐겼잖아!”그녀는 점점 더 빠르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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