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차 안에는 잔잔한 히터 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재혁은 말없이 운전했다. 조수석에 앉은 주연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몇 번인가 재혁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오늘 왜 호텔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 몇 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옆을 돌아볼 때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연은 지쳐 보였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차창 밖을 바라보는 눈에도 힘이 없었다. 결국 재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갈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았다. 주연의 차림으로 늦은 시간까지 밖에 있을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오늘만큼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두 사람이 조용히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재혁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신호를 기다리던 재혁이 무심코 옆을 돌아봤다. 주연의 눈이 감겨 있었다. 잠든 모양이었다. 따뜻한 차 안에 들어오면서 긴장이 풀린 데다, 몇 시간을 차가운 거리에서 걸어 다닌 탓에 몸이 버티지 못한 듯했다. 재혁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오늘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신호가 바뀌었다. 재혁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차는 어느덧 재혁의 집 지하 주차장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와 멈춰 섰다. 익숙한 자리에 차를 세운 재혁은 시동을 껐다. 그러나 바로 내리지 않았다. 옆을 돌아봤다. 주연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재혁은 안전벨트를 풀려다가 손을 멈췄다. “…….”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깊이 잠들었을까!. 재혁은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시끌벅적했던 경제인 모임이 끝난 직후, 재혁은 곧바로 차를 몰아 주연이 머무는 임대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다. 하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재혁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지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혜 씨.” “네, 재혁 씨.” “주연 씨 들어왔습니까?” “아니요. 아직이요.” 지혜의 목소리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저도 계속 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 도대체 어디 간 건지…….” 재혁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알겠습니다.” “혹시 연락 오면 바로 알려주세요.” 아파트 입구 어두운 그늘에 차를 세운 채, 그는 핸들에 기대어 주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중간에 지혜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지만, 주연은 여전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 바늘이 자정을 향해 묵묵히 치닫고 있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재혁의 마음속에는 걱정과 실망,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과 화가 뒤엉켜 끓어올랐다. 재혁은 운전석에 앉아 계속 입구만 바라봤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주연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겠다고 생각했다. 왜 오지 않았습니까. 왜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언제까지 나에게서 도망칠 겁니까.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직접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렸다고. 그런데 왜 아직도 자신을 믿지 못하느냐고. 수십 번도 넘게 머릿속으로 말을 만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질수록 분노는 점점 다른 감정에 밀려났다. 걱정이었다. 재혁은 다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연락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낮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
재혁은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내렸다. 끝내 주연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몇 시간 전 집을 나섰다는 지혜의 말을 들은 뒤부터 마음 한편에서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감정도 있었다. 실망이었다. 오늘만큼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직접 파트너로 함께 가자고 했고, 주연 역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재혁은 굳은 표정으로 행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호텔 최상층의 회원제 사교 클럽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은은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로 국내 주요 기업의 회장과 대표들이 배우자 혹은 파트너와 함께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잔잔한 현악 연주가 흐르고, 검은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들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재혁이 들어서자 몇몇 사람들이 곧바로 그를 알아봤다. “최 대표.” 중견기업의 한 회장이 반갑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재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정돈하고 예의를 갖춰 악수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뭐 늘 똑같지.” 남자가 웃으며 재혁의 옆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최 대표는 올해도 혼자입니까?” 재혁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 “분명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부인을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서 말이야.” 옆에 있던 다른 기업인도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러게요. 최 대표 부인은 얼굴 보기가 대통령 만나기보다 어렵다니까.” 주변에서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언제 한번 소개 좀 해줘요.” 재혁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기회가 되면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함께 오는 줄 알았는데.” “개인적인 사정이 생긴 것 같습니다.” 재혁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화려한 호텔 로비의 회전문 앞에서 발길을 돌린 주연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도 모른 채 차가운 밤거리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주연은 목적지도 없이 계속 걸었다. 화려한 호텔 앞을 떠난 뒤 처음에는 그저 그곳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한 블록. 두 블록. 높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상가를 지나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어디를 걷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토요일 밤의 서울은 화려했다. 거리마다 불빛이 반짝였고,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는 사람들이 웃으며 쏟아져 나왔다. 봄이 가까워지고 있다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얇은 드레스 위에 걸친 코트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주연은 추운 줄도 몰랐다. 높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픈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느껴졌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멈추면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멈추면 자신이 지금까지 외면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것 같아서. 그러다 어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주연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연은 황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왜 울어.’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 시작된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2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호텔에서 벌어진 최진태와의 사건. 그날 이후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얼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결정했다. 최재혁. 처음에는 이름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그리고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결혼. 3년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공부하고 싶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건축은 자신의 오랜 꿈이었다. 하지만— 유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버지에게서도. 집
토요일 오후. 주연은 거울 앞에 앉아 평소보다 오랫동안 화장을 하고 있었다. 파운데이션을 얇게 펴 바르고, 눈매를 차분하게 정돈했다. 입술에는 드레스와 어울리는 은은한 색을 더했다. 평소의 주연이라면 벌써 준비를 끝내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손이 느렸다. 아이라인을 그렸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우고 다시 그렸고, 귀걸이를 골랐다가 다른 것으로 바꾸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지혜가 그런 주연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너 오늘 화장만 한 시간째인 거 알아?” 주연이 거울을 보며 대답했다. “그렇게 오래 했어?” “응.” “이상해?” “아니.” 지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예뻐서 문제지.” 주연이 피식 웃었다. “아픈 사람이 빈말도 잘하네.” “빈말 아닌데?” 지혜가 진지하게 주연을 바라봤다. 오늘의 주연은 평소와 확실히 달랐다. 길게 내려오던 머리는 하얀 목선이 드러나도록 단정하게 틀어 올렸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만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얼굴선을 부드럽게 감쌌다. 며칠 전 지혜와 함께 백화점에서 고른 드레스는 주연의 가느다란 몸선을 우아하게 살려주었다. 과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러웠다. 누구라도 한 번쯤 뒤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지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 드레스 고르길 잘했지?” “네, 김지혜 선생님. 안목 인정합니다.” “재혁 씨 오늘 정신 못 차리겠는데?” 주연은 웃으려 했지만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오래가지 못했다. 지혜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왜 그래?” “뭐가?”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아.” “…….” 주연은 대답하지 않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설렜다. 재혁에게 처음으로 파트너 동반 모임에 함께 가자는 말을 들었을
지민의 가벼운 농담 덕분에 생각보다 편안하게 시작된 저녁이었다. 처음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지민은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었다. 이경환에게 민성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를 가볍게 만나고 술집을 자주 드나들며,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반대로 하는 아들. 마음대로 살아온 철없는 남자. 이경환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민성은 대략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민성은 달랐다. 적어도 오늘 자신에게 보여준 모습만 놓고 보면 그랬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자신이 도착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다. 대화하는 동안에도 무례한 농담이나 불편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억지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을 들켰다고 생각했을 때는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지민은 그런 민성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이경환 사장님이 아들을 너무 안 좋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 물론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의 민성은 이경환이 말했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 그 여자가 나타난 뒤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민은 물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며 맞은편의 민성을 바라보았다. 민성은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몸만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시선은 계속 레스토랑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민은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조금 전 들어온 두 여자 중 한 사람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여자. 화려하지도, 특별히 눈에 띄는 차림도 아니었다. 하지만 민성이 그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너무나 분명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깊은 애정. 지민은 여자인 자신이 그 눈빛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저 여자구나.’ 민성이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