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두 사람이 설계를 수정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오후의 밝은 햇살로 가득했던 집무실은 어느새 어둠에 잠겨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빌딩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고, 서울의 야경이 검은 유리 위로 화려하게 펼쳐졌다.주연은 마지막 수정 사항을 확인한 뒤 노트북을 덮었다.“이 정도면 공사 기간을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도 다목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재혁도 완성된 도면을 바라보았다.주연이 제안한 단계별 시공과 자신이 요구한 다목적 공간 확장안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었다.“예상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군요.”“대표님 의견이 아니었다면 다목적 공간까지 추가할 생각은 못 했을 거예요.”주연은 솔직하게 인정했다.“현장을 보는 시선이…… 생각보다 세심하시네요.”재혁은 그녀의 표현을 놓치지 않았다.“생각보다라.”“…….”주연은 자신이 속마음을 드러1월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도심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재혁의 검은 세단은 익숙한 길을 따라 행복나무 보육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새 이 길도 낯설지 않았다. 행복나무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후, 두 사람은 여러 번 함께 이 길을 오갔다. 처음에는 어색한 침묵만 흐르던 차 안이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부담스럽지 않게 바라볼 만큼 편안해져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주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오늘 아이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재혁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무슨 행사가 있습니까?" "행사는 아니고요." "공사도 거의 끝나 가니까 아이들이 매일 밖에 나와 구경해요." "새 교실이 생긴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작은 변화에도 기뻐하는군요." 주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들은 원래 그래요." "어른들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거든요." 재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 잠시 후. 주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아이들하고 장래희망 발표를 했어요." "생각보다 정말 귀여웠어요." 재혁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꿈들이었습니까?" 주연은 하나씩 손가락을 접으며 이야기했다. "소방관이 되고 싶은 아이." "간호사가 되고 싶은 아이."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
1월 10일. 새해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열흘이 흘렀다. 창밖으로 내리는 겨울 햇살을 바라보던 주연은 책상 위 달력을 조용히 넘겼다. 1월 10일. 그리고 달력 한쪽에 작게 적혀 있는 날짜. 1월 31일.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출국일이었다. 주연은 손끝으로 그 날짜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두 달이라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재혁을 다시 만났고, 같이 점심도 먹었고, 행복나무에도 함께 다녀왔으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재혁은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친절했다. 배려도 넘쳤다. 하지만 그 이상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주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대표님답네." 그녀는 재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선을 그으면 누구도 쉽게 넘을 수 없는 사람. 게다가 그는 아직도 자신을 '유부남'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 '조급하면 안 돼.' 주연은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대표님은 부담을 주는 사람을 가장 싫어해.' 잠시 눈을 감은 그녀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좋아." "사랑을 서두르지 말자." "대신..." "좋은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가자."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다음 날 오후.대표실 창가에 서 있던 강민성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어젯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김지혜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행복나무는 제 직장이 아니라 가족이에요."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민성은 피식 웃었다."가족이라…."재혁과 함께 회사를 세운 지도 어느덧 수년.그동안 회사는 소년소녀가장 장학사업과 노인복지시설, 긴급 생계지원 등 다양한 사회공헌 사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하지만 행복나무 보육원은 달랐다.이번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계기로 주연과 지혜를 만나면서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곳이었다.재혁은 그 이후 유난히 행복나무에 관심을 보였다.공사 진행 상황을 직접 확인했고,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없는지 몇 번이나 물어보곤 했다.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재혁다운 일이군.'그 정도로만 생각했다.하지만 어젯밤 이후,민성은 문득 궁금해졌다.'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저 녀석이 저렇게 마음을 쓰는 걸까.'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차 키를 집어 들었다."한 번 직접 가보자."행복나무 보육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당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민성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그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김미숙 원장이었다.낯선 남자를 본 원장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안녕하세요.""실례지만 누구세요?"민성은 정중하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저는 뉴럴링크 공동대표 강민성입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던 주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민성 대표님?"뜻밖의 방문에 놀란 주연이 반갑게 다가왔다.그녀는 김미숙 원장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원장님.""이분은 최 대
늦은 밤. 민성은 텅 빈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을 열었다. 넓은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수억 원을 호가하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최고급 가구들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누군가는 부러워할 삶이었다. 하지만 민성에게 이 집은 언제나 너무 조용했다. 넥타이를 풀어 소파 위에 던진 그는 습관처럼 위스키를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주머니에서 작은 명함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지혜 행복나무 보육원 사회복지사 민성은 명함을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이름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피식 웃었다. "참 이상한 사람이네." 오늘 처음 만난 여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생각이 났다.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 반짝이던 눈. '행복나무는 저한테 직장이 아니라 가족이에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이상할 만큼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민성은 창가로 걸어가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 민성에게 돈은 부족한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최고급 옷을 입었고,
한강변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주연이 지혜의 차를 타고 가자, 재혁은 민성을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차를 몰았다. 차 안에는 잔잔한 음악만 흐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먼저 농담을 던졌을 민성도 오늘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의 야경이 차창 밖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민성이었다. "야." 재혁은 앞을 바라본 채 대답했다. "왜." 민성이 피식 웃었다. "주연 씨."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더라." 재혁은 말없이 운전만 했다. 그러자 민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네가 너무 과하게 신경 쓰는 줄 알았어." "그런데 오늘 직접 만나 보니까 알겠더라." 잠시 말을 멈춘 민성이 천천히 웃었다. "예쁜 사람은 많이 봤다." "우리 집안 모임만 가도 배우보다 예쁜 사람들 넘쳐나." "그런데..."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렇게 예쁜데." "자기 외모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다." 재혁의 손끝이 운전대를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민성은 그런 친구를 힐끗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아이들 이야기할 때 눈빛이 달라지더라." "행복나무 이야기할 때도 그렇고." "사람이 참..." "...맑더라." 잠시 침묵. 재혁이 낮게 말했다. "그래." "원래 그런 사람이다." 짧은 한마디. 하지
행복나무 보육원 마당.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저녁 햇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도윤과 인사를 마친 뒤, 주연이 다시 아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주연 씨." 뒤에서 들려온 재혁의 목소리에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네, 대표님." 재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 고열에 시달리던 창백한 얼굴 대신 조금은 혈색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제야 마음 한편이 놓이는 듯했다. "감기는 이제 괜찮습니까?" 주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기침은 조금 남았지만 많이 좋아졌어요." 재혁도 작게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감기 때문에 제대로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내일 저녁,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주연은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눈을 크게 떴다. "저하고요?" 재혁은 바로 덧붙였다. "김지혜 씨도 함께 오시면 좋겠습니다." "주연 씨를 간호하시느라 많이 고생하셨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주연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지혜도 같이요?" "네." "그럼... 저야 감사하죠." 주연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재혁의 입가에도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번졌다. 다음 날 저녁.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레스토랑. 창밖으로 노을이 강물 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연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감탄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