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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꼬미 요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지강산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냈다.

뽑은 벌칙 대신 술을 택했다.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유하가 티슈를 던지면서 씩씩거렸다.

“재미없어, 정말.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

지강산이 한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술기운을 눌러 내렸다.

게임이 계속되었다. 술병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허서령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벌칙이 지나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술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

“진실을 말하는 걸 선택할게요.”

그러자 소유하가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 허서령, 5년 전 그 일 후회한 적 있어?”

지강산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새로 채워진 독주를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궁금증 가득한 눈빛으로 허서령을 쳐다봤다.

그 순간 허서령은 마음이 칠흑처럼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후회 안 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허서령의 목소리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소유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했다.

“자, 계속하자.”

바로 그때 지강산이 갑자기 앞에 놓인 독주를 집어 들더니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자진해서 벌주를 마신 걸까?

“계속들 놀아. 화장실 좀 다녀올게.”

지강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허서령이 멀어지는 지강산의 뒷모습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전의 지강산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았고 술도 약했다.

‘방금 그 독한 술을 두 잔이나 마셔서 속이 엄청 안 좋을 텐데. 내가 왜 저 사람 걱정을 해? 이젠 옆에 소유하가 있잖아. 걱정해도 소유하가 해야지.’

허서령이 시선을 거두던 찰나 소유하의 날카롭고 분노 섞인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를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심인혜가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달리 허서령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동안 허서령은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상 기류를 눈치챈 심인혜가 허서령을 이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커다란 거울 앞, 허서령이 흐르는 찬물에 손을 씻었다. 심인혜가 립스틱을 덧바르며 거울 속의 풀죽은 허서령을 살폈다.

“오늘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야.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

허서령이 티슈를 뽑아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손을 닦았다.

“거의 끝나가.”

심인혜가 안쓰러워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서 푹 쉬어.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다 잘 될 거야.”

“응.”

허서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인혜야, 너의 예비 남편이랑 지강산 씨 많이 친해?”

“꽤 친해. 지강산 씨 제산 사람인데 6개월 전에 그쪽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울심으로 발령받았어.”

심인혜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왜? 혹시 지강산 씨한테 관심 있어?”

허서령이 서둘러 해명했다.

“아니야. 그냥...”

“이해해, 이해해.”

심인혜가 다 안다는 듯 눈을 찡긋하며 말을 가로챘다.

“지강산 씨가 워낙 잘생기고 몸도 좋은 데다 명문대 출신에 항공 엔지니어잖아. 앞날이 창창하긴 하지.”

허서령은 더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내쉰 뒤 젖은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심인혜는 남부 지역에서, 허서령은 북부 지역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두 도시라 허서령이 대학교 때 4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그 상대가 지강산인 건 알지 못했다. 오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줄 알고 심인혜가 충고를 건넸다.

“서령아, 너도 예쁘니까 지강산 씨랑 잘 어울리긴 하지만... 그 남자가 사는 세상이 우리랑 좀 달라. 우리 남편 말로는 지강산 씨 할아버지가 군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다신 분이고 제산 본가에 일등공신 현판까지 걸려 있대.”

“아버지는 정계 거물이고 어머니는 은퇴한 판사, 형은 마약 수사대 경찰, 여동생은 종군 기자, 큰아버지도 검찰청 요직에 계신대. 대단한 사람들만 모인 집안이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옆에 소유하 씨도 있잖아. 내가 좋은 남자를 소개해주지 않는 게 아니라 네가 상처받을까 봐 그래.”

허서령은 심인혜의 말을 끝까지 덤덤하게 듣기만 할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5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니까.

심지어 지강산의 형이 순직한 게 아니라 신변 위협을 받아 대외적으로만 그렇게 발표하고 숨어 지내며 가족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4년을 연애했고 3년 넘게 동거하며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였다. 연애 시절 지강산은 허서령을 자주 집에 데려가곤 했다.

지강산의 가족들 모두 품위 있고 선량하며 따뜻한 분들이라 가족 분위기도 아주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진심으로 잘해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렇게 좋은 집안에 시집갈 복이 없었다.

대학교 때 지강산은 학교의 전설 같은 인물이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고 외모까지 완벽했다.

모두가 우러러봤고 수많은 여학생이 밤잠을 설쳐가며 짝사랑하던 만인의 연인이었다.

그런 지강산에게 4년 동안 사랑을 받았으니 허서령은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두 사람이 긴 복도를 거닐었다.

허서령의 시선이 흡연실 앞 한적한 공간에 멈춘 그때 벽에 기대어 나른한 자세로 서 있는 지강산이 보였다. 지강산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타오르는 담배를 끼우고 있었다.

입가에 담배를 가져가 가볍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내뱉자 정교하게 빚어진 얼굴 위로 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넓은 어깨가 무거운 짐이라도 진 것처럼 축 처져 있었다.

허서령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도저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예전엔 담배라면 질색하던 그가, 생활 습관이 누구보다도 건강했던 그가 이제는 술과 담배를 모두 입에 댔다.

허서령과 심인혜가 흡연실을 거의 지나가던 그때 지강산이 쓰레기통 위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흡연실을 나와 복도 끝에 섰다.

서로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지강산이 허서령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 모습에 충격에 빠진 심인혜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지강산과 허서령을 번갈아 봤다.

‘두 사람 뭐야? 첫 만남에 눈이 맞은 거야?’

허서령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고 불안한 눈빛으로 지강산을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깊게 가라앉은 지강산의 두 눈이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얘기 좀 해.”

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에 술기운이 배어 있었다.

“두... 두 사람 얘기 나눠.”

심인혜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거의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허서령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지강산이 도망치는 심인혜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허서령을 잡고 흡연실 쪽으로 끌고 갔다.

흡연실도 사람들의 눈이 닿는 공공장소였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흡연실 옆에 있던 비상문을 밀어젖히고 허서령을 어두컴컴한 비상계단으로 끌고 가 벽 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허서령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지강산이 그녀의 양쪽 어깨를 꽉 잡더니 고개를 숙여 거칠게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입맞춤에 허서령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옅은 술 냄새와 좋은 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어떤 예고도, 어떤 설명도 없었다.

지강산의 키스가 사나운 폭풍 같았다. 그 안에 처벌과 해소, 강압, 그리고 억눌린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읍...”

허서령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입술이 짓눌려 터질 것처럼 아팠다.

당황한 허서령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지강산의 단단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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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0화

    동거 첫날.어쩔 수 없이 어색함이 감돌았다.허서령은 방에 틀어박혀 사건 자료를 보고, 맞은편 건물의 이은경을 관찰했다.해 질 무렵, 이은경이 중년 남성을 데리고 집에 들어오는 걸 발견했다.두 사람은 거실에서 포옹하고 키스하더니 곧바로 커튼을 닫았다.허서령은 놀랐다.‘이은경은 도대체 몇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 진성호가 집에 들어와 보면 어쩌려고?’똑똑.노크 소리에 허서령은 생각에서 깨어나 급히 망원경을 서랍에 넣고 문을 바라봤다.“무슨 일이에요?”“저녁을 좀 많이 했는데 같이 먹을래?”허서령은 휴대폰을 확인했다.늘 바빠서 끼니를 놓치기 일쑤였는데, 벌써 6시였다.“네.”허서령은 휴대폰을 들고나와 식탁에 앉았다.지강산 맞은편 자리였다.식탁에는 세 가지 반찬과 국 하나가 놓여 있었다.소고기 달걀 볶음, 생선찜, 야채볶음, 갈비탕, 그리고 이미 담아놓은 밥 두 그릇.이렇게 제대로 된 집밥을 먹는 건 5년 만이었다.마지막은 태풍 오던 날, 지강산 집에서였다.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지강산은 젓가락으로 소고기를 집어 그녀의 밥그릇에 올려줬다.허서령은 당황했다.“제가 할게요.”지강산은 아무 말 없이 자기 밥을 먹기 시작했다.허서령은 젓가락을 들지 못한 채 말했다.“이거 얼마 들었어요? 반씩 낼게요.”지강산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한 만 원쯤.”“그보다 더 들었을 것 같은데요?”허서령은 가격을 잘 몰라도 소고기, 생선, 갈비가 싸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럼 얼마라고 생각해?”지강산이 담담하게 물었다.허서령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일단 만 원 줄게요. 그리고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필요 없어. 식기세척기 있어.”허서령은 돈을 송금하고 말했다.“그럼 제가 그릇 정리하고 식탁 닦을게요.”“응.”지강산은 그녀가 보낸 돈을 확인하고 받았다.돈을 내고 나니 허서령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했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29화

    마지막에는 서명과 지장까지 찍는, 법적 효력을 갖춘 계약서였다.지강산은 물병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다 읽은 뒤, 펜을 들어 이름을 적고 준비된 인주에 손가락을 찍어 지장을 남겼다.그때 허서령이 큰 봉투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그녀는 고개를 들다가 그의 눈과 마주치더니 순간 멍해졌다.혼자 살던 집에 전 남자친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슬리퍼를 갈아 신고 물었다.“서명했어요?”“했어.”지강산은 휴대폰을 꺼냈다.허서령은 내려다봤다.“이건 뭐예요?”“계약서에 상호 협조, 비용 분담 의무 있잖아. 연락처 없으면 돈은 어떻게 보내려고?”동거라면 연락처 교환은 필수였다.비 오는 날 빨래 거두기, 가스 확인, 월세 송금 등, 연락할 일이 많았다.허서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내 그의 친구신청을 수락했다.친구 추가 후, 전화번호도 보냈다.지강산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말이 없었다.마치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허서령이 말했다.“이번 달 월세는 이미 인혜한테 줬어요. 다음 달부터 강산 씨한테 드릴게요.”“그래.”그는 휴대폰을 넣고 물었다.“짐 도와줄까?”“괜찮아요.”허서령은 짐을 나눠 들고 하나는 방으로, 하나는 부엌으로 옮겼다.지강산도 부엌으로 따라 들어왔다.“점심 먹었어?”“네. 밖에서 족발 덮밥 먹고 왔어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방금 일어난 거예요?”지강산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허서령은 봉투를 뒤적이다가 내일 아침으로 사 온 영양죽 한 캔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먹을래요?”지강산은 그녀 손에 들린 영양죽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요리를 잘 못 하는 허서령은 먹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배달이나 간편식으로 때우는 모습이 떠올라 왠지 씁쓸했다.그는 받아들었다.“고마워. 나중에 두 개로 갚을게.”“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먹어요.”허서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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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27화

    “안 가요.”허서령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단순한 거주 문제도, 가격 문제도 아니었다.이곳에 사는 건 진성호의 어머니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사실 반년 전부터 이 동네로 이사 오고 싶었지만, 비싼 월세와 부족한 매물 때문에 미뤄왔던 계획이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게다가 지강산 집 맞은편에는 소유하가 살고 있었다.계속 마주친다면 그것도 큰 스트레스였다.지강산은 휴대폰을 꺼내 채팅 기록을 열어 보여줬다.“너 변호사잖아. 문자나 송금 기록도 법적 효력 있는 거 알지?”허서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강산이 말했다.“이 집은 반달 전에 내가 먼저 들어와서 살았고, 반년 치 월세도 냈어. 뭐든 선후가 있는 거야. 지금 네가 억지로 뺏는 거야.”허서령은 숨을 고르며 후드 끈을 만지작거렸다.조금은 찔리는 표정이었다.“이 집은 심인혜 소유예요. 저는 집주인이랑 직접 계약했으니 더 합법적이고 정식적인 거예요. 싸운다면... 제가 질 것 같진 않아요.”지강산은 피식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머리를 손으로 받친 채, 피곤하고 골치 아픈 듯한 표정이었다.허서령은 자세를 낮추고 조용히 부탁했다.“강산 씨... 저 진짜 이 집 필요해요. 강산 씨는 돈도 집도 부족하지 않잖아요. 회사에서도 숙소 제공되고요. 손해는 제가 보상해줄게요. 더 좋은 집도 찾아줄게요. 그러니까 강산 씨가 나가주면 안 될까요?”지강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깊고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한참을 보다가, 담담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안 돼.”“그래요. 얘기가 안 통하니까 집주인 올 때까지 기다리죠.”허서령은 힘없이 소파에 기대앉아 고개를 숙인 채 심인혜에게 빨리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30분 후, 심인혜와 백시욱이 도착했다.두 사람은 다투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심인혜는 왜 반달 전에 집을 세를 주고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냐며 계속 화를 냈고, 백시욱은 바빠서 잊었다며 연신 사과했다.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거실은 아수라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26화

    구름타워.허서령은 주말을 쪼개 혼자 이사를 했다.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온몸이 부서질 듯 피곤했던 그녀는 샤워하고 곧바로 잠들었다.비몽사몽 사이, 집 밖에서 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혼자 사는 시간이 길어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생긴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새벽 5시 30분.도둑이 활동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허서령은 긴장과 불안 속에 얇은 겉옷을 걸치고, 가방에서 전기충격기를 꺼내 들었다.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갔다.문에 귀를 대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놀라 두 걸음 물러났다.‘도둑이 문을 두드린다고? 이렇게 대담하게? 혹시 심인혜일까?’심장이 빠르게 뛰며 손에 땀이 났다.그녀는 전기충격기를 꽉 쥐고 외쳤다.“누구세요?”“잠깐 나와.”문밖에서 들려온 건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부드럽고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는 지강산 같았다.허서령은 믿기지 않았다.“누구세요? 어떻게 제집에 들어온 거예요? 경찰에 신고했어요. 당장 가세요!”“나 지강산이야. 나와서 얘기 좀 하자.”이번에는 확실했다.문 밖의 남자는 지강산이었다.허서령은 멍해진 채 전기충격기를 내려놓고 급히 휴대폰을 들어 심인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너머의 심인혜는 아직 잠에 취해 짜증이 가득했다.“뭐야... 지금 새벽 다섯 시 반이야... 우리 남편도 안 깨웠는데 네 전화 때문에 깼어...”허서령은 불안하게 말했다.“지강산이 지금 내 방 문 앞에 있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내가 어떻게 알아! 가서 본인한테 물어봐!”“네 집이잖아, 너도 몰라?”심인혜는 반쯤 잠든 상태로 소리쳤다.“자기야! 지강산이 왜 구름타워 집에 있어?”멀리서 백시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참, 말하려던 거 깜빡했네... 반달 전에 그 집 지강산한테 세 줬어. 반년 치 월세 한 번에 받았고.”“헐...”심인혜는 완전히 잠에서 깨고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말했다.“서령아, 큰일났어. 반달 전에 우리 남편이 그 집을 지강산한테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25화

    지강산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울음보다 더 보기 힘든 미소를 지은 채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뒤 길게 숨을 내쉬었다.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에는 실망이 타오르고 있었다.그는 단호하게 돌아서서 소파를 지나며 재킷과 넥타이를 집어 들고 집을 나갔다.허서령은 힘없이 벽에 기대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심장이 도려내진 듯했고, 숨이 막힐 것처럼 아팠다.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울음을 참고 있었지만, 눈물은 무너진 둑처럼 쏟아졌다.벽을 따라 주저앉아 웅크린 채 몸을 떨었다.입을 막고 있어 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목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시야는 눈물로 흐려졌고, 얼굴과 손등은 흠뻑 젖었다.‘아파... 너무 아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미안해요. 강산 씨... 미안해요...’...11월, 울심시에 폭우가 쏟아졌다.바닷가에 가까운 이 지역은 마침내 첫 한기를 맞았다.기온 18도, 습하고 차가운 공기, 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들어 이가 덜덜 떨렸다.며칠 전, 허서령은 집주인에게서 통보를 받았다.재개발로 인해 보름 안에 이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원래도 일이 바쁜 그녀에게 이 통보는 완전히 날벼락이었다.주말에 심인혜를 만나 이사 이야기를 꺼냈고, 심인혜는 탁자를 치며 호쾌하게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 나 구름타워에 투룸 하나 더 있어. 거기 가서 살아. 월세 안 받을게.”구름타워는 백시욱이 심인혜에게 결혼 전 선물로 준 것으로, 심인혜 개인 소유였다.그 공증은 허서령이 맡아 처리했었다.허서령은 그 집에 가본 적이 있었다.100㎡가 넘는 꽤 넓은 집이었고, 인테리어도 세련되고 아늑했다.무엇보다 방 창문 밖으로 진성호의 집이 보인다는 점이 중요했다.이 점이 허서령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인혜야, 비어 있다면 나한테 임대해줘. 앞으로 조사하기에도 편할 것 같아.”심인혜는 그제야 떠올랐다.“진성호가 바로 맞은편 동에 사는데, 그 사람이 너한테 들러붙을까 봐 안 무서워?”허서령은 단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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