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꼬미 요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지강산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냈다.

뽑은 벌칙 대신 술을 택했다.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유하가 티슈를 던지면서 씩씩거렸다.

“재미없어, 정말.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

지강산이 한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술기운을 눌러 내렸다.

게임이 계속되었다. 술병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허서령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벌칙이 지나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술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

“진실을 말하는 걸 선택할게요.”

그러자 소유하가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 허서령, 5년 전 그 일 후회한 적 있어?”

지강산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새로 채워진 독주를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궁금증 가득한 눈빛으로 허서령을 쳐다봤다.

그 순간 허서령은 마음이 칠흑처럼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후회 안 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허서령의 목소리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소유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했다.

“자, 계속하자.”

바로 그때 지강산이 갑자기 앞에 놓인 독주를 집어 들더니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자진해서 벌주를 마신 걸까?

“계속들 놀아. 화장실 좀 다녀올게.”

지강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허서령이 멀어지는 지강산의 뒷모습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전의 지강산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았고 술도 약했다.

‘방금 그 독한 술을 두 잔이나 마셔서 속이 엄청 안 좋을 텐데. 내가 왜 저 사람 걱정을 해? 이젠 옆에 소유하가 있잖아. 걱정해도 소유하가 해야지.’

허서령이 시선을 거두던 찰나 소유하의 날카롭고 분노 섞인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를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심인혜가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달리 허서령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동안 허서령은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상 기류를 눈치챈 심인혜가 허서령을 이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커다란 거울 앞, 허서령이 흐르는 찬물에 손을 씻었다. 심인혜가 립스틱을 덧바르며 거울 속의 풀죽은 허서령을 살폈다.

“오늘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야.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

허서령이 티슈를 뽑아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손을 닦았다.

“거의 끝나가.”

심인혜가 안쓰러워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서 푹 쉬어.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다 잘 될 거야.”

“응.”

허서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인혜야, 너의 예비 남편이랑 지강산 씨 많이 친해?”

“꽤 친해. 지강산 씨 제산 사람인데 6개월 전에 그쪽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울심으로 발령받았어.”

심인혜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왜? 혹시 지강산 씨한테 관심 있어?”

허서령이 서둘러 해명했다.

“아니야. 그냥...”

“이해해, 이해해.”

심인혜가 다 안다는 듯 눈을 찡긋하며 말을 가로챘다.

“지강산 씨가 워낙 잘생기고 몸도 좋은 데다 명문대 출신에 항공 엔지니어잖아. 앞날이 창창하긴 하지.”

허서령은 더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한숨을 내쉰 뒤 젖은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심인혜는 남부 지역에서, 허서령은 북부 지역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두 도시라 허서령이 대학교 때 4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그 상대가 지강산인 건 알지 못했다. 오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줄 알고 심인혜가 충고를 건넸다.

“서령아, 너도 예쁘니까 지강산 씨랑 잘 어울리긴 하지만... 그 남자가 사는 세상이 우리랑 좀 달라. 우리 남편 말로는 지강산 씨 할아버지가 군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다신 분이고 제산 본가에 일등공신 현판까지 걸려 있대.”

“아버지는 정계 거물이고 어머니는 은퇴한 판사, 형은 마약 수사대 경찰, 여동생은 종군 기자, 큰아버지도 검찰청 요직에 계신대. 대단한 사람들만 모인 집안이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옆에 소유하 씨도 있잖아. 내가 좋은 남자를 소개해주지 않는 게 아니라 네가 상처받을까 봐 그래.”

허서령은 심인혜의 말을 끝까지 덤덤하게 듣기만 할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5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니까.

심지어 지강산의 형이 순직한 게 아니라 신변 위협을 받아 대외적으로만 그렇게 발표하고 숨어 지내며 가족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4년을 연애했고 3년 넘게 동거하며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였다. 연애 시절 지강산은 허서령을 자주 집에 데려가곤 했다.

지강산의 가족들 모두 품위 있고 선량하며 따뜻한 분들이라 가족 분위기도 아주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진심으로 잘해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렇게 좋은 집안에 시집갈 복이 없었다.

대학교 때 지강산은 학교의 전설 같은 인물이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고 외모까지 완벽했다.

모두가 우러러봤고 수많은 여학생이 밤잠을 설쳐가며 짝사랑하던 만인의 연인이었다.

그런 지강산에게 4년 동안 사랑을 받았으니 허서령은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두 사람이 긴 복도를 거닐었다.

허서령의 시선이 흡연실 앞 한적한 공간에 멈춘 그때 벽에 기대어 나른한 자세로 서 있는 지강산이 보였다. 지강산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타오르는 담배를 끼우고 있었다.

입가에 담배를 가져가 가볍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내뱉자 정교하게 빚어진 얼굴 위로 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넓은 어깨가 무거운 짐이라도 진 것처럼 축 처져 있었다.

허서령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도저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예전엔 담배라면 질색하던 그가, 생활 습관이 누구보다도 건강했던 그가 이제는 술과 담배를 모두 입에 댔다.

허서령과 심인혜가 흡연실을 거의 지나가던 그때 지강산이 쓰레기통 위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흡연실을 나와 복도 끝에 섰다.

서로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지강산이 허서령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 모습에 충격에 빠진 심인혜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지강산과 허서령을 번갈아 봤다.

‘두 사람 뭐야? 첫 만남에 눈이 맞은 거야?’

허서령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고 불안한 눈빛으로 지강산을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깊게 가라앉은 지강산의 두 눈이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얘기 좀 해.”

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에 술기운이 배어 있었다.

“두... 두 사람 얘기 나눠.”

심인혜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거의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허서령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지강산이 도망치는 심인혜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허서령을 잡고 흡연실 쪽으로 끌고 갔다.

흡연실도 사람들의 눈이 닿는 공공장소였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흡연실 옆에 있던 비상문을 밀어젖히고 허서령을 어두컴컴한 비상계단으로 끌고 가 벽 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허서령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지강산이 그녀의 양쪽 어깨를 꽉 잡더니 고개를 숙여 거칠게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입맞춤에 허서령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옅은 술 냄새와 좋은 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어떤 예고도, 어떤 설명도 없었다.

지강산의 키스가 사나운 폭풍 같았다. 그 안에 처벌과 해소, 강압, 그리고 억눌린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읍...”

허서령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입술이 짓눌려 터질 것처럼 아팠다.

당황한 허서령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지강산의 단단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00화

    허서령은 순간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골목길은 텅 빈 채 고요하고 아무도 없었다.순간 차오르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손목을 비틀더니 전기충격기를 빼앗아 덤불 속으로 던져버렸다.허서령은 겁에 질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살려주세요!”진성호가 빠르게 따라붙더니 그녀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아악!”두피가 찢어질 듯 아팠다.그녀는 더는 앞으로 달릴 수 없었다.진성호는 덩치가 크진 않았지만 남녀 간 힘 차이는 명확했다.그의 앞에서 허서령은 여전히 약자였다.진성호는 한 손으로 그녀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끌며 덤불 사이 좁은 길로 끌고 갔다.그의 집 방향이었다.“읍읍...”허서령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두피가 너무 아파 눈물이 핑 돌았고, 공포는 수많은 독화살처럼 그녀 심장을 찔러댔다.몸부림치는 사이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그 순간 그녀는 휴대폰이 아직 외투 주머니 안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녀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휴대폰을 꺼내 뒤로 숨긴 뒤 익숙한 동작으로 지문 잠금을 해제했다.아마 채팅 화면이 그대로 떠 있을 터였다.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 아래 ‘말하기’ 버튼을 길게 눌렀다.그리고 있는 힘껏 진성호의 손을 물어버렸다.“젠장!”고통을 느낀 진성호는 그녀의 입을 놓았다.그 틈을 타 허서령은 소리 높이 외쳤다.“진성호! 왜 날 네 집으로 끌고 가는 건데! 살려줘...”진성호는 분노에 눈이 뒤집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짝!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허서령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뺨은 화끈거렸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으며 휴대폰도 멀리 튕겨 나갔다.진성호는 즉시 그녀 휴대폰을 주워 확인했다.잠금 화면 상태인 걸 보고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허서령이 겨우 몸을 일으키자 그는 다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힘이 너무 세서 턱과 볼이 부서질 듯 아팠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9화

    “직접 만드는 거예요?”“그건 진짜 무리야. 포장된 거 사와야 해.”허서령은 걸어가며 음성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입가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지강산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음성 메시지로 들어도, 직접 들어도 여전히 좋았다.그녀는 일부러 서운한 척 늘어진 말투로 답했다.“아쉽네요...”그러자 지강산이 바로 물었다.“삐졌어?”허서령은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괜히 자기 한마디에 또 레시피를 찾아보며 복잡한 팥죽을 만들려고 애쓸까 봐 서둘러 말했다.“안 삐졌어요. 기대 중이에요. 내일 동지라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랑 드론쇼 한다더라고요.”“같이 보러 갈까?”“내일 봐서요. 야근할지도 모르잖아요.”허서령은 고개를 숙인 채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집에 가서 이야기하길 기다릴 수조차 없는 것처럼 지강산과의 음성 메시지는 끊임없이 이어졌다.밤안개가 내려앉은 단지 산책로에는 사람 그림자도 드물었고 가로등 불빛도 희미했다.“허서령!”갑자기 남자의 익숙하면서도 분노에 찬 고함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허서령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움켜쥔 채 뒤를 돌아봤다.진성호였다.그는 얼굴이 잔뜩 굳은 채 음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분노에 휩싸인 모습이었다.허서령은 즉시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전기충격기를 움켜쥐었다.“무슨 일이야?”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네 엄마 대체 왜 그러는데?”진성호는 폭발하듯 소리쳤다.“네 동생 결혼식이 다음 달 1일, 새해 첫날이잖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내 돈 필요 없다 그러고, 네가 나랑 결혼하기 싫어하면 강요 안 하겠다고 하고, 나더러 너 괴롭히지 말라더라.”허서령 역시 궁금했다.지강산이 도대체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을 한 건지.하지만 그 뒤로 어머니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그녀의 삶은 오랜만에 평온하고 편안해졌다.“법적으로 성인은 결혼의 자유가 있어. 내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 못 해. 그러니까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8화

    지강산은 방 안으로 들어가, 한 손엔 간식 상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허서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방문을 두 손으로 붙잡고 또박또박 말했다.“저 혼자 지하철 타고 출근할 거예요. 안 데려다줘도 돼요. 알겠어요?”지강산은 태연하게 웃었다.“친구끼리 왜 그래?. 부담 갖지 마. 차비 안 받을게.”“차비 문제가 아니에요.”허서령은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시간이랑 체력 문제라고요.”“난 시간도 체력도 남아돌아.”“강산 씨...”지강산은 여유롭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문 안 놓으면 오늘 밤 나랑 자고 싶은 거로 알 거야.”갑자기 날아든 노골적인 농담에 허서령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손을 뗐다. 얼굴은 또다시 새빨개졌다.“잘 자.”지강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허서령은 그의 방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머릿속엔 방금 그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친구끼리잖아.”‘세상 어느 평범한 친구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아침 차려주고, 출근도 데려다주고.’성인이면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감정이 있었다.허서령의 입가엔 문득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그와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행운이었다.이제 더는 괜한 감정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평범한 관계라고 해도, 그게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몰랐다.‘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다음 날, 허서령은 평소보다 30분 더 자고 일어나, 바라던 대로 지강산이 만들어준 달걀 요리와 야채죽을 먹었다.더는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 안에서 끼어 있을 필요도 없었고, 서서 갈 필요도, 급하게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다.그저 지강산의 따뜻하고 편안한 차 안에 앉아 그가 준비해준 작은 간식을 먹으며 편하게 회사에 도착하면 됐다.그녀의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고, 야근하고 늦게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지강산은 그녀를 데리러 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집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7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허서령은 손가락으로 그가 들고 있는 간식 세 개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가리켰다.“쌀과자, 깨강정, 전남친 토스트.”지강산의 코가 순식간에 붉어졌다.그는 입을 다물고 웃음을 참으며 조금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들었어.”“우리 지역 특산물인데 혹시 안 먹어봤을까 봐 가져온 거예요.”“토스트를 많이 먹어봤어도 전남친 토스트는 처음이네. 무슨 맛이야?”“고소하고 부드러워요. 강산 씨 너무 단 거 안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단 과자는 안 가져왔어요.”지강산은 입술을 가볍게 깨문 채 손에 든 과자를 몇 번이나 다시 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깊어졌다.“일부러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허서령은 순간 마음이 요동치는 걸 느끼며 급히 해명하듯 말했다.“제가 큰 상품 못 뽑아서 회사에서 위로차 선물 준 건데, 대부분 엄청나게 달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이 세 개만 골랐어요. 깨강정이 조금 달긴 한데 나머진 괜찮아요. 강산 씨 입맛에 맞을 것 같아요.”“내가 너무 단 거 안 좋아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네?”지강산은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허서령은 그 시선에 가슴 깊은 곳이 살짝 떨렸다.두 사람 사이로 묘한 온기가 흐르기 시작하며 눈빛이 오가고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허서령은 얼굴이 뜨거워진 채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결국 지강산이 먼저 침묵을 깼다.“고마워.”그는 간식 세 개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씻고 자.”허서령은 TV를 가리켰다.“농구 아직 안 끝났잖아요.”그제야 지강산은 TV를 아직 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리모컨을 집어 TV를 끄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목소리도 따라서 부드러워졌다.“내일 아침 뭐 먹고 싶어?”“네?”허서령은 멍해졌다.“죽? 아니면 국수?”지강산은 면 요리를 좋아했지만 허서령은 밥 종류를 더 좋아했다.허서령은 가방을 들고 일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6화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새벽 무렵, 회사 단체 버스가 구름타워 밖에 멈춰 섰다.허서령은 마지막 두 동료와 인사를 나눈 뒤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이번 워크숍은 울심시 근교 민박으로 떠나 자연을 즐기고 현지 음식을 맛보는 일정이었다.집 앞에 도착한 허서령은 지문으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밀었다.거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본 순간 그녀는 조금 놀랐다.‘이 시간이라면 강산 씨는 벌써 자고 있어야 정상인데...’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갈아신고 거실 쪽을 바라봤다.예상대로 지강산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그는 편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이 시간까지 농구 경기를 본다고?허서령은 슬리퍼를 끌고 거실로 들어가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지강산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허서령은 화면 오른쪽 위의 선명한 세 글자를 발견했다.[재방송.]“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농구 보고 있었어요?”허서령은 가방을 소파 위에 올리고 간식 봉투를 테이블에 둔 뒤 그의 옆에 앉았다.지강산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대신 갑자기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예상치 못한 접근에 허서령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고는 두 손으로 소파를 짚은 채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댔다.심장 박동이 순식간에 빨라졌다.쿵, 쿵쿵, 쿵쿵쿵...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라 그녀는 지강산의 짧은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을 수 있었고, 뜨거운 숨결까지 느껴졌다.호흡이 흐트러지고 몸이 긴장된 그녀는 침을 삼키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예요?”그녀는 지강산이 키스하려는 줄 알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녀가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지강산은 입 맞추지 않았다.그는 그대로 멈춘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냄새를 맡더니 다시 몸을 세워 앉았다.“좋아. 술 냄새 안 나.”지강산은 담담하게 한마디 던지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허서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5화

    차에 올라탄 지강산은 봉투에서 생수를 꺼낸 뒤 남은 봉투를 허서령의 무릎 위에 올려놨다.“물 사니까 같이 주더라.”허서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어봤다.안에는 우유 한 병과 달걀 샌드위치 하나가 들어 있었다.그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지강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마워요.”허서령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감정이 가슴속을 어지럽게 휘젓는 걸 느꼈다.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지강산은 물병을 내려놓고 다시 차를 출발했다.아침밥을 품에 꼭 안은 허서령의 마음속에 씁쓸한 감정이 천천히 번졌다.지강산은 원래부터 정말 좋은 남자였다.언젠가 그와 결혼하는 여자는 분명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로펌 앞에 도착하자 지강산은 차를 세우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가 일하는 곳이 조금 궁금한 듯했다.허서령은 아침거리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차 앞을 돌아 로펌 입구에 선 그녀는 몸을 돌려 차 안의 지강산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지강산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그녀의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순간 멈칫했다.“좋은 아침, 서령 씨.”그때 허서령의 뒤쪽에서 다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돌아보니 현리아가 서류를 안고 하이힐을 신은 채 안에서 급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리아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허서령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현리아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다가 차 안의 지강산을 보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남자친구 엄청 잘생겼네. 오늘 저녁 모임에 남친도 데려와.”“그 사람은...”허서령이 해명할 틈도 없이 현리아는 이미 옆에 대기 중이던 호출 차량에 타버렸다.허서령은 얼굴이 뜨거워진 채 민망하게 지강산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반면 지강산은 태연하기만 했다.허서령은 용기를 내어 차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두 사람... 서로 몰라요?”지강산은 미간을 좁혔다.“우리가 알아야 해?”‘아니라고?’전에 분명 그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42화

    도시 밤거리의 정체가 조금 심했다. 붉게 물든 자동차 꼬리등이 길 위를 길게 늘어선 채 느릿하게 움직였다.조수석에 앉은 허서령이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지강산을 바라봤다. 왠지 무거운 안개가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정체가 조금 풀리자 지강산이 속도를 올렸다. 차선을 바꿔 가며 몇 대의 차량을 빠르게 추월했다.반대로 허서령은 점점 차분해졌고 조금 전의 두려움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휴대폰을 꺼내 도시 반려견 관리법을 꼼꼼히 살펴봤다. 복수 준비를 슬슬 시작해야 했다.20분 뒤 차가 병원 응급실 앞에 멈춰 섰다.허서령이 안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41화

    사람들이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허서령을 짓누르던 개가 2m 밖으로 나가떨어졌다.압도적인 속도와 힘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개가 나가떨어짐과 동시에 다부진 체격의 한 사내가 허서령을 가로질러 개를 향해 돌진했다.바닥에 처박힌 도사견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경련하는 사이 남자가 들고 있던 몽둥이로 개의 머리를 내리쳤다.연거푸 가해진 일격에 개의 머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사방으로 튀었다. 개의 사지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지켜보던 이들은 놀란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40화

    허서령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결국 가져온 석류를 벤치 위에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허서령?”한 남자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허서령이 고개를 돌려보니 진성호가 개를 끌고 흥분한 기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목줄을 한 험상궂게 생긴 거대한 도사견을 보자마자 허서령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진성호는 허서령이 개를 아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사견을 꽉 잡고 가만히 서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나 만나러 왔어?”“아니.”“심인혜도 시집간 마당에 네가 여기에 나 말고 아는 사람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9화

    지강산이 실험실에서 나왔다.사무실로 돌아와 작업복을 벗어 던진 뒤 서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머니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지강산이 의자에 앉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되자마자 깍듯하게 말했다.“어머니, 전화하셨어요?”하선희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강산아, 유하한테 들었는데 울심에서 서령이를 만났다며? 지금 동거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니?”“동거가 아니라 셰어하우스예요. 집을 나누어 쓰는 거죠.”지강산의 말투가 한없이 다정했다.“셰어하우스라니? 울심에서 집까지 샀으면서 왜 세를 맡고 살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