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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손님 사절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3 23:36:03

해담은 대답 대신 팻말을 접어 계산대 아래에 넣었다.

“기다렸으면 됐잖아요. 이제 가세요.”

“열쇠를 복사해야 합니다.”

“문 닫을 시간이에요.”

“8시 30분입니다.”

“저도 알아요.”

해담은 서후가 든 놋쇠 열쇠를 받아 작업대에 놓았다. 문을 닫을 시간은 지났지만, 열쇠를 맡겨 놓고 그냥 보내기도 애매했다. 기계를 켜자 익숙한 위잉 소리가 났다. 서후는 문 옆에서 기다렸다.

복사한 열쇠를 줄로 다듬어 원본과 나란히 놓았다. 해담은 두 열쇠를 비교해 보고 서후에게 건넸다. 서후는 새 1,000원짜리 지폐 세 장을 계산대에 놓았다.

“오늘은 팻말을 다시 걸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해요.”

“네.”

서후는 영수증을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었다. 해담은 셔터를 내렸다. 서후는 약국 쪽으로 건너갔고, 해담은 잠금장치를 확인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

다음 날 낮, 엄분이는 두레슈퍼에서 나온 해담을 불러 세웠다. 손에는 녹슨 자물쇠가 들려 있었다.

“담이야, 장독대 문이 안 열린다.”

“열쇠는요?”

“여기 있지.”

엄분이는 낡은 열쇠를 내밀었다. 날에 검은 때가 묻어 있고 손잡이에는 긁힌 자국이 많았다. 해담은 열쇠를 받아 손끝으로 홈을 살폈다.

“자물쇠가 녹슬었나 봐요.”

“문은 열어야 하는데, 열쇠가 안 돌아가.”

“억지로 돌리면 부러질 수 있어요. 제가 볼게요.”

해담은 앞치마에 손을 닦고 공구함을 들었다. 엄분이의 장독대는 두레슈퍼 뒤쪽에 있었다. 가게 옆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낮은 문이 나왔다. 해담은 자물쇠를 살피고 열쇠를 넣어 봤다. 반쯤 들어갔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한참 됐지. 며칠 전부터는 아예 안 열리더라.”

“그동안 장독대는 안 쓰셨어요?”

“쓰긴 썼지. 된장도 꺼내고 간장도 꺼내고. 문은 안 잠그고.”

엄분이는 장독대 문에 손을 얹었다. 해담은 자물쇠 몸통을 손가락으로 눌러 흔들림을 확인했다.

“잠금쇠는 괜찮아요. 안에 녹이 많이 꼈어요. 열쇠도 같이 다듬어야겠어요.”

“새 걸로 바꾸면 안 되나?”

“고칠 수 있으면 고치는 게 나아요. 자물쇠가 오래돼서 새 제품이랑 맞는지도 봐야 하고요.”

엄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발 물러났다. 해담은 공구함을 열어 작은 솔과 기름을 꺼냈다. 자물쇠 틈에 낀 먼지를 걷어 내고, 안쪽에 굳은 녹을 조금씩 긁었다. 검은 가루가 손등에 묻었다.

“이렇게 오래 열어 두면 녹이 슬어요?”

“안 써도 습기 차면 슬어요. 그래도 자주 열고 닫으면 덜하죠.”

“그러니까 내가 잘못했네.”

“잘못까지는 아니에요. 자물쇠는 오래 쓰면 손봐야 해요.”

해담은 열쇠를 가져와 날을 살짝 다듬었다. 너무 많이 갈면 맞지 않을 수 있어 조금씩 확인해야 했다. 엄분이는 옆에서 해담의 손을 지켜봤다.

“손끝에 쇳가루가 늘 묻어 있구나.”

“열쇠 만지면 묻어요.”

“손 씻어도 남고?”

“손톱 밑에 들어가면 좀 남죠.”

“그럼 밥 먹을 때도 먹겠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엄분이는 입을 다물었다가 웃음을 흘렸다. 해담은 열쇠를 자물쇠에 넣어 조심히 돌려 봤다. 안쪽에서 걸리는 느낌이 났다. 해담은 억지로 힘을 주지 않고 열쇠를 뺐다.

“조금 더 손봐야겠어요.”

“급한 건 아니야. 장독대는 도망 안 가.”

“문이 열려 있으면 깜이가 들어갈 수 있어요.”

엄분이는 슈퍼 고양이 이름을 듣자 뒤를 돌아봤다. 장독대 옆 담장 위에 깜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는 해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녀석은 장독대보다 평상이 좋다.”

“그래도 문은 잠그는 게 낫죠.”

해담은 자물쇠를 떼어 내지 않고 안쪽을 더 닦았다. 솔 끝에 녹이 묻어 나왔다. 기름을 조금 더 바른 뒤 열쇠를 넣고 돌렸다. 이번에는 걸리는 데가 덜했다. 해담은 몇 번 천천히 움직여 보고 다시 열쇠를 뺐다.

“돌아가네요.”

“그럼 된 거야?”

“아직 새로 하나 맞춰야 해요. 원래 열쇠는 많이 닳았어요. 지금은 열리지만 계속 쓰면 또 안 돌아갈 수 있어요.”

“새 열쇠 하나 만들어 줘.”

해담은 장독대 자물쇠의 홈을 확인했다. 손으로 열쇠를 대고 모양을 살핀 뒤, 가져온 공구함에서 맞는 재료를 골랐다. 자물쇠를 풀어 통째로 들고 가게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해담은 작업할 수 있도록 오래된 열쇠를 본떠 모양을 기록했다.

엄분이는 문 옆에서 장독대 안을 들여다봤다.

“저 항아리에는 된장이 있어. 이쪽은 간장이고.”

“제가 열쇠를 만드는 동안 다 말씀하실 거예요?”

“네가 물어보면 대답은 해야지.”

“아직 안 물어봤어요.”

“그러면 내가 먼저 말하면 되잖아.”

해담은 장부에 자물쇠와 열쇠 모양을 적었다.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천으로 닦고 공구함 뚜껑을 닫았다.

“오후에 새 열쇠 가져올게요.”

“급하게 하지 마. 문은 내가 지키면 돼.”

“문을 지키지 말고 자물쇠를 잠그세요.”

“그게 더 어렵네.”

해담은 자물쇠가 제자리에 붙어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엄분이는 장독대 문을 닫아 보았다. 자물쇠는 걸리지 않았지만 문은 맞게 닫혔다.

가게로 돌아온 해담은 장부에 자물쇠 손본 일을 적었다. 열쇠 모양을 기록한 종이 옆에 공구를 놓고, 맞는 블랭크를 골랐다. 기계를 켜자 쇳가루가 작업대에 얇게 떨어졌다. 해담은 날을 조금씩 깎아 자물쇠에 맞춰 나갔다.

엄분이는 잠시 뒤 가게 문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그릇이 들려 있었다.

“이건 뭐예요?”

“깜이 밥그릇. 씻어 달라고 가져온 건 아니고, 아까 네가 들고 씻었으니 돌려받으러 왔어.”

“오늘은 제가 안 씻었는데요.”

“그럼 그냥 들고 온 거야.”

엄분이는 그릇을 계산대 한쪽에 올려놓았다. 해담은 열쇠를 기계에서 꺼내 모서리를 다듬었다.

“자물쇠가 열려서 다행이네요.”

“그래. 오래 안 열어서 녹이 슨 거야.”

엄분이는 그릇을 들고 가게 문으로 향했다. 해담은 작업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장독대는 이제 자주 열어 주세요.”

“그건 자신 있어.”

“자물쇠도요.”

“그건 해 볼게.”

엄분이는 문을 나섰다. 해담은 새 열쇠를 자물쇠에 넣어 볼 때까지 몇 번 더 다듬었다. 무리하게 힘을 주지 않고 홈을 조금씩 맞췄다. 열쇠가 부드럽게 돌아가자 해담은 기계 전원을 끄고 작업대의 쇳가루를 쓸어 냈다.

오후가 지나 엄분이에게 새 열쇠를 가져다줬다. 장독대 문은 한 번에 잠겼다. 엄분이는 열쇠를 손에 쥐고 직접 열었다가 다시 잠갔다.

“잘 돌아가네.”

“이제 너무 오래 두지 마세요.”

“알았다. 밥그릇도 자주 씻고, 자물쇠도 자주 열고.”

“그릇은 제가 안 씻었어요.”

“오늘은 그렇지.”

엄분이는 열쇠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장독대 문을 다시 확인했다. 해담은 돌아서기 전에 자물쇠가 단단히 붙어 있는지 한 번 더 살폈다.

저녁이 되자 골목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해담은 복사 장부를 정리하고, 작업대에 놓인 공구를 제자리에 넣었다. 계산대 아래에 넣어 둔 팻말은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자리를 비울 이유가 없었다.

8시 19분, 해담은 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벽의 열쇠 블랭크 판을 정리했다. 종류가 다른 열쇠 하나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해담은 그것을 빼서 걸이를 확인하고 다시 걸었다.

문이 열렸다.

서후가 들어왔다. 손에는 놋쇠 열쇠가 들려 있었다. 해담은 작업대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복사예요?”

“네.”

해담은 열쇠를 받아 원본의 홈을 확인했다. 서후는 계산대 앞에서 기다렸다. 해담은 블랭크를 기계에 물리고 손잡이를 돌렸다. 기계에서 위잉 소리가 났다.

“오늘은 손님이 없었어요?”

“몇 분 오셨습니다.”

“그럼 약국은 염 여사님이 봐 주셨고요?”

“네.”

“매일 맡기면 미안하지 않아요?”

“염 여사님이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들었어요.”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해담은 기계를 멈추고 복사한 열쇠를 꺼냈다. 줄로 날을 다듬는 동안 서후는 말을 더 하지 않았다. 해담은 두 열쇠를 나란히 놓고 홈을 비교했다.

“문에서 확인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서후는 새 1,000원짜리 지폐 세 장을 계산대에 놓았다. 해담은 돈을 받아 서랍에 넣고 영수증을 뽑았다. 서후가 영수증을 반으로 접는 동안 해담은 열쇠를 작업대에 내려놓았다.

“사장님.”

“네.”

“7년 동안 사장님이 손님이셔서 말 못 했습니다.”

해담은 손에 들고 있던 줄을 내려놓았다.

서후는 열쇠를 보지 않고 해담을 바라봤다.

“약 사러 오시는 분한테 마음을 말하면, 그분이 약국에 못 오실까 봐서요.”

해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업대 위 복사 열쇠가 원본 옆에 놓여 있었다. 서후는 그 열쇠를 집지 않았다.

“이제 손님이 아니시니까 말합니다. 좋아합니다.”

「뭐?」

해담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가게 안에 기계가 식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계산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저 폐업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짝사랑 폐업했다고요.”

“네.”

“그런데 왜 지금 그런 말을 해요?”

“손님이 아니시니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약국에 안 가면, 이제 손님 아닌 거예요?”

“네. 약국에 오지 않으시니까요.”

“그럼 제가 다시 가면요?”

“손님이 되십니다.”

해담은 눈을 깜빡였다. 서후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숨기거나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그럼 제가 약국에 가면 말 못 하는 거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장님이 다시 오셔도 제 마음은 같습니다.”

“손님한테는 말 못 한다면서요.”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사장님이 약국에 오지 못하게 될까 봐 말하지 않았습니다.”

해담은 팔짱을 꼈다가 풀었다.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그걸 지금 말하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하는데요?”

“원하시는 대로 대답하시면 됩니다.”

“저는 폐업했어요.”

“네.”

“다시 열 생각 없어요.”

“알겠습니다.”

서후는 열쇠를 집어 들었다. 해담은 그 손을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그럼 제가 개업하겠습니다.”

“누가 하래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폐업했다니까요.”

“네. 그럼 제가 개업하겠습니다.”

해담은 입술을 다물었다. 서후는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열쇠를 쥔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해담은 계산대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가 닫았다. 장부를 펼쳐 놓고는 오늘 기록을 다시 확인했다.

서후가 문 쪽으로 돌아섰다.

“내일도 열쇠를 복사하러 오겠습니다.”

“매일 오지 말라고는 안 했어요.”

“네.”

“그렇다고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요.”

“알고 있습니다.”

“그 열쇠는 하나면 충분하잖아요.”

“복사한 열쇠도 필요합니다.”

해담은 서후를 바라봤다. 이유를 더 묻고 싶었지만, 서후는 이미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했다. 오늘은 다른 말을 들었다. 그 말이면 충분한지, 아직 모자란지 해담도 알 수 없었다.

서후는 인사하고 가게를 나갔다. 해담은 문을 닫지 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그가 약국으로 건너가는 모습이 유리문 너머로 보였다. 해담은 시선을 거두고 작업대 위 남은 쇳가루를 쓸어 모았다.

◎

약국 안에서 염 여사가 계산대를 정리했다. 서후는 약국 불을 끄고 가운 단추를 풀었다.

“뭐래요?”

서후는 흰 가운을 벗어 걸었다.

“폐업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개업했습니다.”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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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간판, 내가 손으로 쓴 거다.”아빠의 말이 끝난 뒤에도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해담은 사진 아래쪽을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두지 않았다. 사진 속 간판은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지금 구씨열쇠에 걸린 간판도 그랬다. 글자 획이 조금 굵고, ‘열’의 마지막 획은 오른쪽으로 짧게 올라가 있었다.“아빠가 직접 쓴 거예요?”“가게 열 때 급하게 썼다. 간판집에 맡길 돈도 아꼈고.”“그 글씨가 지금 간판까지 온 거네요.”“그렇지.”구판길은 사진을 해담에게 돌려줬다. 사진 모서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담은 아래를 받쳤다. 간판 아래에 선 아빠는 지금보다 얼굴이 덜 탔고, 앞치마도 새것처럼 보였다.“아빠는 저때도 무뚝뚝했어요?”“사진에 말투가 나오냐?”“안 나오니까 물어보는 거죠.”“그때도 지금도 똑같다.”봉숙자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그건 내가 똑똑히 봤어. 구 사장님은 가게 열 때도 말이 별로 없었어.”“봉 원장님이 그때부터 골목에 계셨어요?”“내가 미용실을 하기 전에도 이 골목에 살았지. 모르는 게 없어.”“저 사진은 아빠가 몇 살 때예요?”“그걸 왜 나한테 묻니. 네 아빠한테 물어.”“사진 속 아빠가 대답을 안 하시잖아요.”구판길이 해담을 보았다.“가게 문 열던 때니까 지금보다 젊었지.”“그건 저도 알아요.”“그럼 됐다.”사진을 다시 장부 옆에 놓은 뒤에도 해담은 간판 글씨를 몇 번 더 봤다. 아빠 손글씨가 원래부터 간판에 새겨진 줄 알았다. 글씨를 본떠 간판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그날 밤, 가게 셔터를 내린 뒤에도 해담은 계산대 안쪽에서 사진을 펼쳐 놓았다. 사진 속 간판과 유리문 밖 간판을 번갈아 보았다. 사진 속 글자와 현재 간판의 글자 모양은 일치했다. 검은 칠이 벗겨진 모서리와 오른쪽 아래에 붙은 작은 글씨만 달랐다.해담은 사진을 접지 않고 서랍에 넣었다.10월 25일 오전, 벽의 열쇠 블랭크 판을 종류별로 다시 걸었다. 모양이 맞는 열쇠를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5화. 금고 개봉 행사

    “다이얼은 제가 돌릴게요. 손대지 마세요.”해담은 옛 솔매우체국 안쪽에 놓인 금고 앞에 섰다. 남색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에 열쇠 꾸러미를 찼다. 가을 장터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문 안으로 모여들어 금고 주위에 둥글게 섰다. 문밖에서는 상인들이 장터 물건을 소개하는 소리와 사람들 발소리가 들렸다.봉숙자가 금고 옆에서 손바닥을 내저었다.“다들 조금만 뒤로 물러서요. 해담이가 돌릴 자리가 있어야지.”“저 정도면 넉넉한데.”탁종팔이 말했다. 봉 원장이 탁 사장을 돌아봤다.“사장님은 더 물러서세요. 나중에 금고 열리면 제일 먼저 안에 들어가실 것 같으니까.”“내가 왜 들어가.”“사진에 젊은 모습이 있으면 가져가실 수도 있잖아요.”“사진은 안 가져가.”탁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도 금고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났다.구판길은 사람들 뒤에 서서 금고를 바라봤다. 햇볕에 탄 얼굴에 낚시 조끼를 걸쳤고, 손에는 오래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해담은 아빠를 보았다.“아빠, 안쪽으로 더 들어오세요. 문 열리면 잘 안 보일 수도 있어요.”“여기서도 보인다.”“다들 보러 왔는데 아빠만 안 보이면 안 되잖아요.”구판길은 대꾸하지 않고 사람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에 있던 진서후가 해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해담 씨.”“서후 씨. 오셨어요?”“네. 아버지는 퇴원하셨습니다.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다행이에요.”“오늘 장터에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도 사진이 궁금하다고 하셨습니다.”해담은 서후의 얼굴을 살폈다. 왼쪽 눈 아래 작은 점이 그대로 보였다. 서후는 약국에서 입던 흰 가운 대신 남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해담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금고로 몸을 돌렸다.“그럼 잘 열어야겠네요.”“해담 씨가 여시면 됩니다.”“그 말은 부담되는데요.”“제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해담은 다이얼을 내려다봤다.「말이 늘 정확해.」금고는 무릎 높이보다 조금 큰 철제 금고였다. 표면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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