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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개업 축하 사절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3 23:36:10

월요일 아침, 해담은 셔터를 올리다 말고 길 건너 늘봄약국을 봤다. 약국 문 앞에 봉숙자가 서 있었다. 손에는 가위집이 들려 있었다.

서후가 약국 문을 열고 나왔다. 흰 가운 안에는 남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봉숙자는 서후를 보자마자 가위집을 들어 보였다.

“진 약사, 개업 축하한다.”

서후가 봉숙자를 바라봤다.

“무슨 개업을 말씀하십니까?”

“그럼 어젯밤에 새로 연다는 가게가 뭔데?”

해담의 손이 셔터 손잡이에서 멈췄다. 서후는 잠시 해담 쪽을 보았다가 다시 봉숙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개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축하해야지. 개업이면 떡도 돌리고, 돼지머리도 놔야지.”

“약국에 돼지머리를 놓을 자리는 없습니다.”

“약국 말고 네 마음에 놓으라는 거야.”

봉숙자는 해담 쪽을 흘끗 봤다. 해담은 셔터를 끝까지 올렸다. 금속이 위로 말려 들어가는 소리가 골목에 났다.

“원장님, 아침부터 남의 장사에 왜 돼지머리를 놔요?”

“축하하는 거지. 개업한다잖아.”

“누가요?”

“진 약사가.”

“약국 문은 어제도 열려 있었는데요.”

“그 가게 말이야.”

봉숙자는 손가락으로 구씨열쇠를 가리켰다. 해담은 앞치마 끈을 묶으며 봉숙자를 봤다.

“우리 가게는 폐업했어요.”

“그러니까 진 약사가 새로 연다잖아.”

“제 가게예요.”

“알지. 내가 옆 가게잖아.”

봉숙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해담은 대꾸를 멈췄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봉 원장이 정말 뭘 봤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원장님, 미용실 문 여셔야죠.”

“열었어. 손님도 안 왔고.”

“그럼 들어가 계세요.”

“개업 축하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들어가.”

서후가 약국 문을 잡고 있었다. 봉숙자는 가위집을 겨드랑이에 끼고 서후에게 한마디 더 보탰다.

“진 약사, 돼지머리는 내가 알아볼까?”

“필요하지 않습니다.”

“개업하는 사람이 벌써 사양하면 안 돼.”

“축하만으로 충분합니다.”

봉숙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담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벽의 블랭크 판을 봤다. 한쪽 열쇠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해담은 그 열쇠를 빼서 똑바로 걸었다.

「아침부터 뭐야.」

봉숙자는 결국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후는 약국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담은 작업대에 앉아 어제 정리한 장부를 펼쳤다. 기록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장부를 펴 둔 채 한동안 펜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오전에는 탁종팔이 가게 앞에 고기를 담은 통을 들고 지나갔다. 정육점 안쪽에서 칼 가는 소리가 멈추더니 탁 사장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구 사장.”

“네.”

“약사 양반이 개업한다며.”

“저한테 물어보세요.”

“물어봤더니 돼지머리 필요 없대.”

“그럼 안 놓으면 되죠.”

“개업에 돼지머리가 없으면 손님이 안 들어와.”

“약국이 아니라 제 가게라니까요.”

탁 사장은 잠깐 생각하더니 통을 내려놓았다.

“그럼 고기라도 가져다줄까?”

“괜찮아요.”

“축하는 해야 할 거 아냐.”

“축하받을 일도 없어요.”

탁 사장은 대답 대신 통을 다시 들었다. 정육점 쪽으로 돌아서다가 짧게 말했다.

“오늘은 손님이 뜸하네.”

해담은 작업대에 놓인 펜을 굴렸다. 탁 사장은 칼을 갈 때처럼 말을 짧게 꺼내고는 늘 끝을 자르고 갔다. 이번에는 그 말에 뭘 붙여야 할지 해담도 몰랐다.

“사장님, 집 열쇠 복사돼요?”

문 앞에 선 손님이 낡은 열쇠를 내밀었다. 해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됩니다.”

손님은 열쇠를 맡기고 기다렸다. 해담은 기계에 열쇠를 물리고 전원을 켰다. 위잉 소리와 함께 쇳가루가 작업대 위에 얇게 떨어졌다.

손님이 작업대와 벽의 열쇠판을 둘러봤다.

“아까 약국에서 개업 얘기하던데요.”

“저희 가게는 원래 여기 있어요.”

“약사님이 새로 하신다던데.”

“그 얘기는 약사님한테 물어보세요.”

“두 가게가 붙어 있어서 좋네요. 열쇠 만들고 약도 사고.”

해담은 기계를 멈추고 복사한 열쇠를 꺼냈다.

“손님은 열쇠만 잘 맞으면 됩니다.”

“그렇죠. 다른 건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고.”

손님은 웃으며 열쇠를 받았다. 해담은 원본과 새 열쇠를 나란히 놓아 홈을 확인했다. 손님은 값을 치르고 돌아갔다.

해담은 장부에 거래를 적었다. 글씨가 한쪽으로 쏠려 다시 썼다. 서랍을 열어 펜을 넣은 뒤, 서랍을 닫았다.

점심이 지나자 봉숙자가 미용실 앞에서 해담을 불렀다.

“해담아, 잠깐 와 봐.”

“왜요?”

“머리가 눈을 찌르잖아.”

“묶으면 돼요.”

“뒤로 묶어도 옆머리는 내려오네. 내가 조금 다듬어 줄게.”

“돈 낼게요.”

“오늘은 공짜.”

“왜요?”

“폐업 기념.”

해담은 입을 다물었다. 봉숙자는 이미 미용실 문을 열고 있었다.

“들어와. 오래 안 걸려.”

“장사해야 해요.”

“미용실이 바로 옆인데, 문 열어 놓고 다듬으면 되지.”

“손님 오면요?”

“내가 네 가게까지 달려가서 부를게.”

“달려오다가 넘어지면요?”

“그럼 네가 열쇠로 내 머리도 수리해.”

봉숙자는 해담이 대답하기 전에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해담은 가게 문을 반쯤 열어 둔 채 옆 가게로 갔다. 봉숙자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정말 조금만 자를 거예요.”

“알았어. 손님 머리 자르면서 사람 머리까지 망친 적은 없어.”

해담은 의자에 앉았다. 봉숙자는 빗으로 해담의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를 정리했다. 짧게 묶어 둔 머리끈을 풀자 옆머리가 얼굴 앞으로 떨어졌다.

“얼굴은 안 가리네.”

“일할 때 걸리면 잘라야죠.”

“그래서 열쇠도 깎고 머리도 깎고 다 깎네.”

“머리까지 깎는 건 원장님이잖아요.”

“맞아. 오늘은 내가 깎아 줄게.”

봉숙자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나눠 가위로 끝을 다듬었다. 해담은 거울 속 자신의 앞머리를 바라봤다.

“많이 자르지 마세요.”

“조금만 자른다니까.”

“지난번에도 조금이라고 했어요.”

“지난번엔 네가 가만히 있어서 그랬지.”

“제가 안 움직였는데요.”

“그러니까 더 잘 잘렸잖아.”

해담은 거울로 봉숙자를 봤다. 봉숙자는 가위질을 멈추지 않았다. 잘린 머리카락이 어깨에 떨어졌다.

“원장님은 어제 뭘 들으셨어요?”

“뭐가?”

“제가 폐업했다고 한 거요. 약사님이 개업한다고 한 거요.”

“그대로 들었지.”

“제가 짝사랑을 정리한다고 말한 건 아니고요?”

봉숙자의 손이 잠깐 멈췄다. 곧 가위가 다시 움직였다.

“네가 그 말을 썼잖아. 종이에도 적었고.”

해담은 거울에서 시선을 거뒀다. 어제 버린 종이를 봉 원장이 주워 읽었다는 말을 떠올렸다. 종이에 적힌 말은 숨길 수 없었다.

“그걸 다 읽으셨어요?”

“내가 주웠으니까.”

“주웠으면 그냥 돌려주면 되잖아요.”

“너는 가게 안에 있었고, 나는 네가 뭘 적었는지 궁금했어.”

“남의 종이를 읽는 게 궁금하면 되는 일이에요?”

“아니지. 그런데 읽었어.”

봉숙자는 가위질을 마치고 빗으로 잔머리를 털었다. 해담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져 길이를 살폈다.

“많이 짧아진 것 같은데요.”

“많이는 안 잘랐어.”

“그럼 조금 짧아진 거네요.”

“그래. 공짜니까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고쳐.”

“다음에도 공짜예요?”

“그건 그때 가서 봐야지.”

해담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카락을 털었다. 봉숙자는 빗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폐업 기념이니까 오늘은 돈 안 받을게.”

“고맙습니다.”

“그런데 가게를 진짜 닫을 건 아니지?”

해담은 봉숙자를 바라봤다.

“뭘요?”

“구씨열쇠 말이야.”

“안 닫아요.”

“그럼 폐업은 뭐야?”

“짝사랑이요.”

“가게 말로 써 놓으니까 헷갈리잖아.”

“저는 안 헷갈려요.”

봉숙자는 해담의 어깨에 남은 머리카락을 털어 냈다. 해담은 손으로 털어 내고 미용실 문을 열었다.

“너는 안 헷갈려도 골목 사람은 헷갈려.”

“골목 사람들은 원래 남의 장사에 관심이 많잖아요.”

“그게 동네 장사야.”

해담은 가게로 돌아왔다. 작업대에 앉아 머리끈을 다시 묶었다. 옆머리가 전보다 깔끔해졌다. 손끝에 머리카락이 걸려 해담은 앞치마에 털어 냈다.

오후에는 은결이 약국에서 나왔다. 큰 책가방을 멘 채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은결은 약국 문을 닫고 난 뒤에도 약국 안을 한번 돌아봤다. 그러고는 골목을 건너 구씨열쇠로 왔다.

“누나.”

“왜?”

“약국에서 연고 샀어요.”

“그래서?”

은결은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엄마가 손에 바르래요.”

“손 다쳤어?”

“책상에 긁혔어요. 별거 아니에요.”

은결은 봉투를 앞주머니에 넣었다. 해담은 아이의 손을 살폈다. 손등에 가느다란 긁힌 자국이 있었다.

“연고는 설명 듣고 샀어?”

“약사 삼촌이 조금씩 바르라고 했어요.”

“잘했네.”

은결은 해담의 머리를 빤히 봤다.

“누나 머리 잘랐어요?”

“조금.”

“원장님이요?”

“응.”

“돈 냈어요?”

“오늘은 안 냈어.”

“왜요?”

“폐업 기념이라네.”

은결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나 가게 폐업해요?”

“아니.”

“그럼 뭘 폐업해요?”

해담은 은결을 봤다. 은결은 책가방 끈을 붙들고 답을 기다렸다.

“그런 게 있어.”

“약사 삼촌이 개업한다고 했어요.”

“누가 그래?”

“약국에서 들었어요. 제가 연고 살 때 염 여사님이 말했어요. 약사 삼촌이 새 가게 연다고요.”

“새 가게 아니야.”

“그럼 새로 여는 게 아닌데 개업이에요?”

“그 사람한테 물어봐.”

“물어봤어요. 사장님이랑 얘기해서 개업한대요.”

해담은 계산대 위에 놓인 펜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그런 말도 했어?”

“네.”

“염 여사님이 그걸 들었어?”

“염 여사님이 저한테 말했어요. 약사 삼촌은 똑바로 말한다고요.”

“그건 맞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약국 쪽을 돌아봤다. 해담도 시선을 따라갔다. 유리문 안쪽에서 염금옥이 계산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서후는 조제대 앞에서 약통을 정리했다.

“누나, 약사 삼촌 서랍에 똑같은 열쇠가 병에 잔뜩 있어요.”

해담은 은결을 돌아봤다.

“뭐라고?”

“약사 삼촌이 서랍을 열었는데, 유리병이 있었어요. 안에 열쇠가 들어 있었어요.”

“약국 열쇠야?”

“잘 모르겠어요. 작은 열쇠였어요. 열쇠가 여러 개 있었고 모양은 거의 같았어요.”

해담은 손바닥에 묻은 쇳가루를 앞치마에 닦았다.

“그걸 왜 봤어?”

“연고 찾을 때 약사 삼촌이 서랍을 열었어요. 계산대 밑에 있는 서랍이요.”

“네가 들여다봤어?”

“그냥 보였어요. 병이 투명했어요.”

“열쇠는 몇 개였는데?”

“잘 모르겠어요. 많았어요.”

“작은 병이었어?”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요.”

은결은 손으로 병의 크기를 그려 보였다. 해담은 그 손의 폭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열쇠를 왜 모아 놓았대?”

“안 물어봤어요.”

“그럼 나도 모르지.”

“누나가 물어보면 되잖아요.”

해담은 손을 작업대 위에 놓았다. 어제 서후가 말한 건 마음이었다. 그 열쇠 얘기는 아니었다. 해담은 은결에게 더 묻지 않았다.

“연고는 가방에 잘 넣었어?”

“네.”

“손 씻고 바르라고 해.”

“네.”

은결은 문 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섰다.

“누나, 열쇠도 연고처럼 바르면 나아요?”

“열쇠에 연고 바르면 문이 끈적해져.”

“그럼 바르면 안 되겠네요.”

“그래.”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고 골목으로 나갔다. 해담은 아이가 약국 쪽으로 가는 것을 잠시 봤다. 약국 문이 열리고 서후가 나와 은결의 손에 들린 봉투를 확인했다.

“손에 바를 연고입니까?”

“네. 책상에 긁혔어요.”

“집에 가서 손을 씻고 바르세요.”

“알겠어요.”

“가방 안에서 새지 않게 봉투를 세워 두세요.”

은결은 종이봉투를 바로 세워 가방에 넣었다. 서후는 약국 문을 잡아 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담은 벽의 열쇠판으로 가서 방금 고쳐 건 열쇠를 다시 만졌다. 열쇠는 똑바로 걸려 있었다.

저녁이 다가오자 골목에서 가게 문 닫는 소리가 이어졌다. 탁씨정육에서 물을 뿌리는 소리가 났고, 봉미용실에서는 가위가 서랍에 들어갔다. 엄분이는 슈퍼 앞 평상에 앉아 깜이의 등을 쓸어 주었다.

해담은 장부를 정리하고 작업대의 쇳가루를 쓸어 냈다. 오전에 적은 거래 기록 옆에 펜을 내려놓았다. 낮 동안 서후의 말은 골목을 돌았고, 은결은 약국 서랍의 유리병을 봤다고 했다.

해담은 약국 쪽 창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손이 블랭크 판에 닿았다. 작은 열쇠 하나가 걸이에서 빠져나와 기울어 있었다. 해담은 그것을 바로 걸고, 옆의 열쇠도 확인했다.

셔터를 내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해담은 가게 앞을 쓸고 계산대의 돈을 정리했다. 문을 닫기 전, 맞은편 약국 쪽에서 염 여사가 서후를 불렀다.

“약사님, 제가 계산대 볼게요.”

“부탁드립니다.”

해담은 빗자루를 세워 두었다. 약국 문이 열렸다. 서후가 놋쇠 열쇠를 들고 골목을 건너왔다. 해담은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서후는 가게 앞에 멈췄다.

“복사하러 오셨죠?”

“네.”

“들어오세요.”

해담은 작업대 위에 열쇠를 받았다. 놋쇠 표면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 해담은 홈을 확인하고 맞는 블랭크를 골랐다. 기계를 켜자 위잉 소리가 가게 안에 찼다.

서후는 계산대 앞에서 기다렸다. 해담은 복사한 열쇠를 기계에서 빼고 줄로 날을 다듬었다. 원본과 나란히 놓아 확인한 뒤 서후에게 건넸다.

서후는 새 1,000원짜리 지폐 세 장을 계산대에 놓았다. 해담은 돈을 서랍에 넣고 영수증을 건넸다.

“오늘 골목에서 개업 축하를 받았어요.”

“들었습니다.”

“돼지머리도 놓으라고 하던데요.”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서후는 영수증을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었다. 해담은 장부에 거래를 적었다.

“약사님은 정말 7년 동안 제가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서후는 해담을 바라봤다.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확실히는 몰랐습니다.”

“왜요?”

“사장님은 제 약국에 오셔서 약을 사셨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요.”

“그랬습니다.”

“늘 피로회복제 한 병을 샀고요.”

“네.”

“그런데도 몰랐어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있습니다.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해담은 손끝에 묻은 쇳가루를 닦았다.

“그럼 제가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도 말은 안 했겠네요.”

“네.”

“왜요?”

“알았어도 손님한테는 안 했을 겁니다.”

해담은 서후를 똑바로 봤다.

“7년 동안 알았으면서 가만있었어요?”

“확실히는 몰랐습니다. 알았어도 손님한테는 안 했을 겁니다.”

서후는 앞서 한 대답을 되풀이했다.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해담은 그게 더 화가 났다.

“손님한테 그러면 안 된다면서요.”

“사장님이 약국에 못 오실까 봐 그랬습니다.”

“그럼 제가 안 왔으면요?”

“오늘처럼 말씀드렸을 겁니다.”

“오늘은 제가 약국에 안 가겠다고 한 날이잖아요.”

“네.”

“제가 짝사랑을 그만둔다고 적었잖아요.”

“네.”

“그걸 봤어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알았어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요?”

“손님이 아니시니까 말한다고 했을 때, 폐업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해담은 장부의 모서리를 눌렀다. 서후의 대답은 틀린 데가 없었다. 틀린 데가 없어서 더 따져 묻기가 어려웠다.

“저는 7년 동안 약사님한테 가서 피로회복제 한 병을 샀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사님은 제가 손님이니까 아무 말도 안 했고요.”

“그렇습니다.”

“제가 좋아한다고 눈치를 줬어도요?”

“확실하지 않으면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약국 손님한테 마음을 말할 수 없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서후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답했다.

“사장님이 약국을 편하게 오실 수 있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럼 지금은요?”

“지금도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매일 와요?”

“열쇠를 복사하러 옵니다.”

“같은 열쇠를요.”

“네.”

해담은 서후의 손에 들린 열쇠를 봤다. 서후는 열쇠를 흔들거나 감추지 않았다.

“그걸 그렇게 계속 복사해야 해요?”

“필요합니다.”

“어디에 쓰는데요?”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해담은 손을 멈췄다. 서후는 덧붙였다.

“숨기려는 건 아닙니다. 사장님이 물으시면 답하고 싶습니다. 다만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물어봤잖아요.”

“어디에 쓰는지는 아직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담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후는 열쇠를 받아 들고 약국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어제 제가 말했잖아요. 저 폐업했다고.”

“네.”

“그럼 더는 오지 않아도 돼요.”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하고 또 올 거잖아요.”

서후는 잠시 해담을 보았다.

“열쇠를 복사할 수 있다면 오겠습니다.”

해담은 장부를 닫았다. 마음속에 엉킨 말은 어느 쪽으로 꺼내도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속상한 건 7년 동안 말하지 않은 일이었다. 화가 나는 건 그 7년이 지나고서야 들은 고백이었다. 그런데 서후가 늦었다고 탓할 수도 없었다. 손님에게 마음을 말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처음부터 같았다.

해담은 서후가 건넨 돈과 영수증을 계산대 안에 넣었다. 문밖에서는 봉숙자가 빗자루를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 탁씨정육의 셔터가 내려갔다.

해담은 서후를 바라봤다.

“내일부터 오지 마세요.”

“내일 8시 20분에 오겠습니다.”

(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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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담은 셔터 손잡이를 잡고 아래로 당겼다. 금속이 레일을 따라 내려오며 골목에 소리를 냈다. 셔터가 바닥에 닿자 해담은 손을 떼고 문 앞에 섰다.간판 귀퉁이의 글씨가 새로 붙인 글씨였다. 노란 바탕과 검은 글씨로 적힌 『구씨열쇠』는 그대로였고, 오른쪽 아래에는 『일요일은 쉽니다』라고 붙어 있었다. 새 글씨는 예전 『연중무휴』와 비슷한 크기였다. 간판 아래쪽에 새로 덧댄 판이 조금 눈에 띄었지만, 멀리서 봐도 자연스러웠다.해담은 고개를 들어 한 번 더 읽었다.『일요일은 쉽니다』오늘은 1월 2일, 새해 첫 일요일이었다. 해담이 가게 셔터를 내려 둔 첫 정기 휴무일이기도 했다.길 건너 늘봄약국의 유리문에도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기존 영업시간 안내 아래에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일요일 휴무』해담은 약국 문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확인했다가, 자기 가게 간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리의 열쇠 꾸러미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오늘은 열쇠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진짜 쉬네.」골목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셔터를 올린 가게는 몇 곳에 그쳤다. 두레슈퍼는 문을 열어 두었고, 엄분이는 평상에 앉아 깜이의 등을 쓸어 주고 있었다. 봉미용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안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탁씨정육 앞에는 흰 앞치마가 걸려 있었다.엄분이가 고개를 들었다.“담이야, 간판이 바뀌었네.”“네. 오늘부터 일요일은 쉬려고요.”“쉬는 날도 생겼어?”“생겼어요.”“좋다. 문 닫혀 있으면 괜히 어디 아픈가 걱정했는데.”“그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걱정은 내가 알아서 한다.”엄분이는 깜이의 등을 한 번 더 쓸었다. 깜이는 평상에서 내려와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약국도 쉬나?”“안내판 보세요.”엄분이는 안경을 코 위로 올리고 맞은편을 바라봤다. 약국 유리문 아래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저기도 일요일 휴무네.”“그러네요.”“둘이 같이 쉬네.”해담은 대답 대신 간판을 올려다봤다. 그 말을 들으니 귀퉁이의 글씨가 더 선명해 보였다. 새 안내판을 붙인 약국 문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9화. 열쇠 일괄 양도

    셔터를 내린 지 10분이 지났다. 해담은 가게 앞에 서서 허리에 걸린 열쇠 꾸러미를 손으로 눌렀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멎었다.길 건너 늘봄약국 문이 열렸다. 서후가 밖으로 나왔다. 흰 가운 안에는 남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두 손으로 유리병을 받쳐 들었다.“8시 40분입니다.”“알아요.”해담은 약국 시계를 보지 않았다. 7년 동안 늘 8시 40분에 길을 건넜다. 오늘은 그 자리에 서서 약국에서 나오는 사람을 기다렸다.서후는 몇 걸음 앞에서 멈췄다. 병 안에는 놋쇠 열쇠가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유리병을 기울이지 않아도 열쇠 머리마다 새긴 작은 홈이 보였다.해담은 병을 바라봤다.“다 찼네요.”“네. 가득 찼습니다.”“뚜껑 닫을 때 부딪히는 소리가 났겠어요.”“병을 들면 났습니다.”“그걸 매일 들고 다녔어요?”“약국 서랍에 두었습니다.”“매일 복사한 열쇠도요?”“네.”해담은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쇳가루가 묻은 손끝이 남색 천에 닿았다.서후는 병을 내밀었다. 해담은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유리가 차가웠다. 안에서 열쇠들이 작게 부딪혔다.“제 약국 뒷문 열쇠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해담 씨가 깎았습니다.”해담은 병을 들어 안을 들여다봤다. 서로 다른 날 깎은 열쇠들이 모여 있었다. 날의 높이가 조금씩 달랐다. 열쇠 머리에 난 ㄱ자 홈도 하나씩 보였다.“제가 깎은 걸 어떻게 알아요?”“해담 씨가 처음 깎은 열쇠라서요.”“복사한 열쇠도 전부 제가 깎았다고요?”“네.”“약사님이 같은 열쇠를 가져올 때마다요?”“그렇습니다.”“하나도 안 빠지고?”“하나도 빠짐없이요.”해담은 병을 다시 내려다봤다. 유리 너머로 열쇠들이 겹쳤다. 어떤 것은 머리 부분이 반들거렸고, 어떤 것은 옆면에 쇳가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으로 깎은 흔적이 서로 달랐다.“이걸 다 모아 놓고 뭘 하려고 했어요?”“해담 씨께 드리려고 했습니다.”“왜요?”“해담 씨가 깎은 열쇠니까요.”“그건 이유가 아니잖아요.”“제게 중요했습니다.”해담은 입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8화. 부재 시 옆집 문의

    “새 공책을 사 오면 첫 줄은 제가 쓸 거예요.”해담은 펜을 계산대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 서후는 계단 아래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깜이는 공책 위에서 내려와 난간 옆을 지나갔다. 해담은 고양이가 떠난 뒤 공책을 덮어 품에 안았다.“첫 줄에 뭘 쓸 겁니까?”“그건 공책을 보고 정할 거예요.”“알겠습니다.”“약사님은 뭘 쓸 건데요?”“해담 씨가 정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또 기다려요?”“네.”해담은 대답 대신 공책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서후는 계단 아래에 남아 있었다. 철계단을 오르는 동안 공책 모서리가 앞치마에 닿았다.11월 20일 토요일 아침, 해담은 가게 문 옆에 안내문을 붙였다. 종이 위에는 『부재 시 길 건너로 문의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늘봄약국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길 건너에 있는 가게는 하나뿐이었다.해담은 테이프가 들뜨지 않도록 네 귀퉁이를 눌렀다. 문을 닫고 밖에 나와 살펴보니 안내문이 유리문에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약국 문에도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부재 시 길 건너로 문의하세요』. 서후가 약국 안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흰 가운은 없었고 남색 니트 위에 겉옷을 걸쳤다. 한 손에는 종이가 든 봉투가 있었다.해담은 약국 문에 붙은 안내문을 읽었다.“똑같네요.”“문구를 맞추는 편이 알아보기 쉽습니다.”“누가 먼저 붙였어요?”“해담 씨가 먼저 붙이셨습니다.”“제가 붙이는 걸 보셨어요?”“약국 안에서 봤습니다.”서후가 문 옆의 안내문을 한 번 확인했다. 봉투를 든 손은 내려가 있었다.“이쪽은 오늘 붙이실 겁니까?”“네. 붙일 종이도 가지고 오셨나 봐요.”“그렇습니다.”“약국 문에 붙이면 되겠네요.”“그렇게 하겠습니다.”서후는 약국 유리문에 종이를 대고 테이프를 눌렀다. 해담은 구씨열쇠 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두 안내문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했다.두레슈퍼 평상에 앉아 있던 엄분이가 안경을 코 위로 올렸다.“이제 한쪽 문이 닫히면 건너가면 되겠네.”“문 닫고 어디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7화. 장부 마감

    해담은 공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서후는 철계단 가운데쯤에 앉아 공책을 내려다봤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계단 한 칸이 비어 있었다.해담은 표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모서리가 닳아 종이 속이 드러난 곳도 있었고, 표지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공책을 펼치자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계단 아래 가게에서는 셔터가 내려간 뒤의 쇳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이게 그 출근부예요?”“네.”“매일 적으셨다고 하셨죠.”“매일은 아니에요.”서후가 공책에서 해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빠진 날이 있습니다.”“몸이 안 좋으셨을 때요?”“그런 날도 있고요. 설이나 추석 당일에는 약국도 쉬었어요. 아빠가 가게를 넘겨주고 나서도 명절 당일만큼은 문을 닫으라고 했어요.”해담은 공책을 조금 돌려 서후가 보기 편하게 했다. 첫 장에는 날짜 대신 짧은 작대기들이 줄을 맞춰 그어져 있었다. 볼펜으로 그은 것도 있고, 연필 자국도 있었다. 중간에는 진하게 눌러 쓴 흔적이 있었다.“하나씩 그은 거예요?”“피로회복제 한 병 사러 갈 때마다요. 가게 셔터 내리고, 8시 40분에 건너가서 한 병 샀어요. 돌아오면 여기다 작대기 하나.”“2,523개가 있습니까?”“네.”“직접 세어 보셨습니까?”“세어 봤죠. 몇 번이나요.”“제가 봐도 됩니까?”“보여 드리려고 가져왔어요.”서후는 공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해담은 그걸 보고 한쪽 입술을 살짝 올렸다.“읽으셔도 돼요. 페이지 넘기는 것도요.”“제가 넘기겠습니다.”“그럼 넘기세요. 종이가 약해서 조심해야 해요.”“알겠습니다.”서후는 손가락 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잡아 천천히 넘겼다. 작대기들은 줄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끝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페이지도 있었고, 중간에 듬성듬성한 곳도 있었다. 해담은 서후가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무릎 위 공책을 잡고 있었다.“날짜를 쓰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그냥 작대기만 그었어요. 날짜를 쓰면 장부가 되잖아요.”“출근부라고 부르셨습니다.”“가게 출근부랑은 달라요. 그건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6화. 간판 상담

    “저 간판, 내가 손으로 쓴 거다.”아빠의 말이 끝난 뒤에도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해담은 사진 아래쪽을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두지 않았다. 사진 속 간판은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지금 구씨열쇠에 걸린 간판도 그랬다. 글자 획이 조금 굵고, ‘열’의 마지막 획은 오른쪽으로 짧게 올라가 있었다.“아빠가 직접 쓴 거예요?”“가게 열 때 급하게 썼다. 간판집에 맡길 돈도 아꼈고.”“그 글씨가 지금 간판까지 온 거네요.”“그렇지.”구판길은 사진을 해담에게 돌려줬다. 사진 모서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담은 아래를 받쳤다. 간판 아래에 선 아빠는 지금보다 얼굴이 덜 탔고, 앞치마도 새것처럼 보였다.“아빠는 저때도 무뚝뚝했어요?”“사진에 말투가 나오냐?”“안 나오니까 물어보는 거죠.”“그때도 지금도 똑같다.”봉숙자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그건 내가 똑똑히 봤어. 구 사장님은 가게 열 때도 말이 별로 없었어.”“봉 원장님이 그때부터 골목에 계셨어요?”“내가 미용실을 하기 전에도 이 골목에 살았지. 모르는 게 없어.”“저 사진은 아빠가 몇 살 때예요?”“그걸 왜 나한테 묻니. 네 아빠한테 물어.”“사진 속 아빠가 대답을 안 하시잖아요.”구판길이 해담을 보았다.“가게 문 열던 때니까 지금보다 젊었지.”“그건 저도 알아요.”“그럼 됐다.”사진을 다시 장부 옆에 놓은 뒤에도 해담은 간판 글씨를 몇 번 더 봤다. 아빠 손글씨가 원래부터 간판에 새겨진 줄 알았다. 글씨를 본떠 간판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그날 밤, 가게 셔터를 내린 뒤에도 해담은 계산대 안쪽에서 사진을 펼쳐 놓았다. 사진 속 간판과 유리문 밖 간판을 번갈아 보았다. 사진 속 글자와 현재 간판의 글자 모양은 일치했다. 검은 칠이 벗겨진 모서리와 오른쪽 아래에 붙은 작은 글씨만 달랐다.해담은 사진을 접지 않고 서랍에 넣었다.10월 25일 오전, 벽의 열쇠 블랭크 판을 종류별로 다시 걸었다. 모양이 맞는 열쇠를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5화. 금고 개봉 행사

    “다이얼은 제가 돌릴게요. 손대지 마세요.”해담은 옛 솔매우체국 안쪽에 놓인 금고 앞에 섰다. 남색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에 열쇠 꾸러미를 찼다. 가을 장터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문 안으로 모여들어 금고 주위에 둥글게 섰다. 문밖에서는 상인들이 장터 물건을 소개하는 소리와 사람들 발소리가 들렸다.봉숙자가 금고 옆에서 손바닥을 내저었다.“다들 조금만 뒤로 물러서요. 해담이가 돌릴 자리가 있어야지.”“저 정도면 넉넉한데.”탁종팔이 말했다. 봉 원장이 탁 사장을 돌아봤다.“사장님은 더 물러서세요. 나중에 금고 열리면 제일 먼저 안에 들어가실 것 같으니까.”“내가 왜 들어가.”“사진에 젊은 모습이 있으면 가져가실 수도 있잖아요.”“사진은 안 가져가.”탁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도 금고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났다.구판길은 사람들 뒤에 서서 금고를 바라봤다. 햇볕에 탄 얼굴에 낚시 조끼를 걸쳤고, 손에는 오래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해담은 아빠를 보았다.“아빠, 안쪽으로 더 들어오세요. 문 열리면 잘 안 보일 수도 있어요.”“여기서도 보인다.”“다들 보러 왔는데 아빠만 안 보이면 안 되잖아요.”구판길은 대꾸하지 않고 사람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에 있던 진서후가 해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해담 씨.”“서후 씨. 오셨어요?”“네. 아버지는 퇴원하셨습니다.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다행이에요.”“오늘 장터에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도 사진이 궁금하다고 하셨습니다.”해담은 서후의 얼굴을 살폈다. 왼쪽 눈 아래 작은 점이 그대로 보였다. 서후는 약국에서 입던 흰 가운 대신 남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해담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금고로 몸을 돌렸다.“그럼 잘 열어야겠네요.”“해담 씨가 여시면 됩니다.”“그 말은 부담되는데요.”“제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해담은 다이얼을 내려다봤다.「말이 늘 정확해.」금고는 무릎 높이보다 조금 큰 철제 금고였다. 표면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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