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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연중무휴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3 23:36:17

서후는 열쇠를 쥔 채 가게 문을 나섰다.

해담은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다가 손잡이를 잡았다. 골목 건너 약국으로 돌아가는 서후의 뒷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해담은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작업대 위에는 장부와 펜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내일부터 오지 말라니까.」

해담은 장부를 덮었다. 벽의 열쇠 블랭크 판에서 비스듬히 기울어진 열쇠를 찾아 똑바로 걸었다. 손을 떼고 나니 맞은편 열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해담은 그것도 고쳐 걸었다.

가게 밖에서 빗소리가 났다.

해담은 앞치마를 풀어 의자 등받이에 걸고 2층으로 올라갔다. 철계단을 밟을 때마다 신발 밑창에 물기가 묻어 미끄러웠다. 방에 올라가 창을 닫고, 젖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창 너머 늘봄약국의 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아침이 되자 비는 더 굵어졌다.

해담은 셔터 앞에 서서 빗줄기를 잠깐 살폈다. 처마 끝에서 물이 떨어졌고, 골목 바닥에는 얕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해담은 앞치마를 두르고 셔터를 올렸다. 금속이 말려 올라가는 소리가 빗소리를 밀어냈다.

맞은편 약국 문도 열렸다. 염 여사가 먼저 나와 입구 앞을 살폈고, 뒤이어 서후가 안에서 문을 잡았다. 서후는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해담은 시선을 거두고 빗자루를 들었다.

물이 가게 앞까지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문턱을 쓸었다. 빗자루 끝에 젖은 먼지가 뭉쳤다. 해담은 그걸 한쪽으로 모아 물이 고인 곳에서 치웠다. 빗줄기는 멈추지 않았다.

해담은 문 안으로 들어가 작업대에 앉았다. 손님이 오면 들으려고 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골목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맞은편 정육점 셔터는 올라갔지만 탁종팔은 안쪽에서 나오지 않았다. 봉미용실 문에는 아직 불이 꺼져 있었다.

해담은 장부를 펼쳤다. 어제 적은 거래 내역을 다시 읽고, 장부를 덮었다. 오늘 적을 것은 없었다.

벽의 열쇠 블랭크 판이 눈에 들어왔다. 해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쇠를 종류별로 살폈다. 작은 것과 긴 것을 나누고, 손잡이 모양이 비슷한 것끼리 한쪽에 걸었다. 잘못 놓인 열쇠를 옮기고 나니 빈 자리가 생겼다. 해담은 그 빈 곳도 다른 열쇠로 채웠다.

문밖에서 가위가 짧게 울렸다.

봉숙자가 미용실 문을 열고 나왔다. 어깨에 얇은 비옷을 걸쳤다. 봉숙자는 빗물이 떨어지는 처마 밑을 피해 구씨열쇠 앞까지 걸어왔다.

“또 판 다시 거네.”

해담은 열쇠를 걸던 손을 멈췄다.

“뭘요?”

“벽에 걸린 것들. 아까도 봤는데 지금도 다시 만지잖아.”

“기울어진 게 있어서요.”

“기울어진 게 아니라 네 마음이 기울었나 보지.”

“원장님, 아침부터 남의 마음까지 손보지 마세요.”

“내가 손보는 건 머리야. 마음은 네가 알아서 해.”

봉숙자는 문턱 바깥에서 안쪽을 들여다봤다. 젖은 바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해담은 문을 조금 더 당겨 닫았다.

“비 오는데 밖에 서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들어가면 손님처럼 돈 내야 하잖아.”

“오늘은 손님 없어요.”

“그럼 더 들어가면 안 되지. 사장님이 손님 없다고 마음 놓으면 장사가 되겠어?”

“장사 안 하고 열쇠만 걸고 있잖아요.”

봉숙자는 웃지 않고 가게 안쪽을 한번 더 살폈다.

“그 열쇠들은 안 도망가. 앉아 있어.”

“앉아 있으면 더 생각나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봉숙자는 더 묻지 않았다. 앞치마 끈을 묶은 해담은 작업대 앞으로 돌아갔다. 봉숙자는 빗속으로 물러나 미용실 쪽으로 걸었다. 몇 걸음 뒤에 돌아서서 한마디를 보탰다.

“기계도 안 켜고 열쇠만 정리하면 손님이 더 안 와.”

“오늘은 비가 와서 안 오는 거예요.”

“그래. 비가 오면 다들 열쇠를 안 잃어버리나 보지.”

봉숙자는 미용실로 들어갔다. 해담은 벽을 봤다. 열쇠는 종류별로 잘 걸려 있었다. 해담은 제일 위쪽에 걸린 열쇠 하나를 다시 만졌다.

「정리 끝.」

정오가 지나도록 손님은 오지 않았다. 빗줄기는 가늘어졌다가 다시 굵어졌다. 해담은 커피를 타서 작업대 한쪽에 놓았다. 한 모금 마시고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커피는 금세 식었다.

맞은편 약국에서는 손님이 몇 차례 드나들었다. 염 여사가 문 앞까지 나와 우산을 접는 손님에게 길을 내줬다. 서후는 계산대 안쪽에서 약을 정리했다. 해담은 약국을 보는 대신 작업대의 쇳가루를 쓸어 모았다.

문 위 종이 종이 울렸다.

해담은 빗자루를 내려놓고 문 쪽으로 갔다. 젖은 비옷을 입은 남자가 문턱에 서 있었다. 손에는 차 열쇠가 들려 있었다. 비옷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열쇠 복사되나요?”

“네, 됩니다. 이쪽으로 주세요.”

남자는 열쇠를 건넸다. 금속 손잡이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해담은 수건으로 열쇠를 닦고 모양을 살폈다.

“차 키네요.”

“예. 하나 더 있어야 하는데, 차 안에 두면 자꾸 잊어버려서요.”

“그럼 복사한 건 집에 두실 건가요?”

“그럴 생각입니다. 차 안에 둔 걸 또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해담은 열쇠를 기계에 물렸다. 남자는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비옷 소매를 털었다. 물방울이 바닥에 튀었다.

“안쪽에 앉아 계셔도 돼요.”

“젖어서 괜찮습니다. 여기 서 있을게요.”

해담은 기계를 켰다. 위잉 소리가 가게 안을 채웠다. 열쇠가 돌아가며 쇳가루가 작업대에 떨어졌다. 해담은 손잡이를 천천히 움직였다. 복사한 열쇠를 빼서 날을 다듬고, 원본과 나란히 놓아 비교했다.

“확인해 보세요.”

남자는 두 열쇠를 받아 번갈아 살폈다.

“같아 보이네요.”

“차에 맞춰 보셔야 해요. 안 맞으면 가져오세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해담은 값을 받고 영수증을 내밀었다. 남자는 젖은 손바닥을 비옷에 닦은 뒤 영수증을 받아 접어 넣었다.

밖을 살핀 남자가 다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그치질 않네요.”

“아직 굵게 오네요.”

“잠깐 피해도 되겠습니까? 차는 저쪽에 세웠는데, 이대로 나가면 옷이 더 젖을 것 같습니다.”

해담은 출입문을 조금 더 열어 빗물이 안으로 튀지 않는지 확인했다. 문 옆에는 손님용 의자가 하나 있었다. 해담은 의자를 남자 쪽으로 밀었다.

“잠깐 앉아 계세요.”

“고맙습니다.”

남자는 비옷을 벗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았다. 해담은 식은 커피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안쪽 선반에서 종이컵을 꺼냈다. 물을 끓일 정도는 아니었다. 해담은 보온병에 담아 둔 따뜻한 물을 컵에 붓고 커피 가루를 넣었다. 숟가락으로 저어 남자에게 내밀었다.

“커피 드세요. 따뜻한 건 아니지만요.”

남자는 컵을 받아 손으로 감쌌다.

“이런 것까지 주셔도 됩니까?”

“비 피하는 값이에요.”

“그럼 나중에 열쇠 하나 더 복사하러 와야겠네요.”

“커피값은 안 받아요.”

“그래도 다음에 오겠습니다.”

해담은 대답 대신 작업대를 정리했다. 남자는 컵을 두 손으로 들고 천천히 마셨다. 밖에서 빗물이 처마를 두드렸다. 남자는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열쇠판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여기 열쇠집 30년 됐죠?”

“아버지 때부터요.”

“아버님 손 기억나요.”

해담은 쓸어 모은 쇳가루를 작은 통에 털었다.

“손을 보신 적 있어요?”

“예전에 집 문 열쇠가 잘 안 맞아서 온 적이 있습니다. 제가 열쇠를 들고 갔는데, 아버님이 손가락으로 날을 몇 번 만져 보시더군요. 기계에 걸기 전에 어디가 닳았는지 먼저 보셨어요.”

남자는 종이컵을 내려다봤다.

“그때 손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저분은 열쇠를 많이 만져 보셨구나. 손이 익숙해 보였어요.”

해담은 작업대 위의 줄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손에 굳은살이 많았다. 낚싯대를 잡을 때도, 열쇠를 깎을 때도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담은 그 손을 몇 번 떠올렸다가 줄을 제자리에 놓았다.

“저는 아버지 손을 오래 봤어요.”

“그렇겠네요.”

“일할 때마다 옆에 있었으니까요.”

“따님도 손이 익숙해 보입니다.”

해담은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끝에 쇳가루가 남아 있었다. 왼손 엄지의 굳은살은 앞치마에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 만지니까요.”

“열쇠는 잘 맞아야 하니까요.”

“안 맞으면 다시 손봐야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컵을 비운 뒤 일어났다. 비는 조금 약해졌지만 골목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잘 마셨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열쇠도 잘 맞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남자는 비옷 모자를 눌러쓰고 가게를 나갔다. 해담은 문 앞에 남은 물방울을 걸레로 닦았다. 문을 닫으려다 남자가 가게 앞에서 차 열쇠를 확인하는 모습을 봤다. 그는 손에 든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해담은 빈 종이컵을 치우고 작업대로 돌아왔다. 택시 손님이 두고 간 물기는 바닥에 작은 얼룩을 남겼다. 해담은 걸레를 빨아 그 자리까지 닦았다.

오후에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봉숙자는 미용실 안에서 손님 머리를 말리는 소리를 냈다. 탁종팔은 정육점 안쪽에서 칼을 갈았다. 해담은 벽의 열쇠를 더 만지지 않으려고 의자에 앉았다. 손은 작업대 위에 놓였고, 시선은 장부에 머물렀다.

날이 어두워지자 비가 다시 굵어졌다. 해담은 셔터를 반쯤 내렸다가 멈췄다. 오늘은 아직 닫을 시간이 아니었다. 가게 문에 붙은 안내를 확인하고, 문턱에 고인 물을 다시 밀어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비가 왔다.

해담은 셔터를 올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날 닦은 문턱에 물이 다시 고여 있었다. 빗자루로 물을 쓸어낸 뒤 작업대와 기계를 살폈다. 해담은 장부를 펴고 어제 택시 기사의 거래를 적었다. ‘차 열쇠 복사’라고 쓰고 값을 기록했다. 옆에 커피를 적을까 하다가 펜을 멈췄다. 돈을 받지 않은 일은 장부에 쓸 필요가 없었다.

봉숙자는 미용실 문을 열기 전에 구씨열쇠 앞에 잠깐 섰다.

“오늘도 비네.”

“그러네요.”

“어제 온 손님은 차 열쇠 맞았대?”

“확인해 보신다고 했어요.”

“커피값은 받았고?”

“안 받았어요.”

“그럼 열쇠집이 아니라 찻집을 해야겠네.”

“커피 한 잔 드렸다고 찻집은 아니죠.”

“그럼 내가 비 맞을 때도 한 잔 줘.”

“원장님은 미용실에 계시잖아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봉숙자는 미용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담은 대꾸하지 않고 장부를 덮었다. 다시 비가 굵어졌다. 가게 안으로 빗물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문밖의 바닥은 금세 젖었다.

점심 무렵, 채순임이 동명탕에서 걸어왔다. 한 손에는 걸레와 작은 물통이 들려 있었다. 순임은 비를 맞지 않도록 머리에 수건을 얹고 문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왜 걸레를 들고 왔어요?”

“간판 닦으려고.”

“비 오는데요?”

“비 오니까 먼지가 불었잖아. 닦기 편해.”

순임은 물통을 문 옆에 내려놓았다. 해담은 앞치마에 손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가게 간판은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구씨열쇠가 적혀 있었다.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는 작은 글씨로 『연중무휴』가 붙어 있었다.

“비 맞으면 미끄러워요.”

“문 앞에서 닦을 거야. 멀리 안 가.”

순임은 걸레를 물통에 적셨다가 물기를 짰다. 해담은 문턱 안쪽에서 간판 아래를 받쳐 살폈다. 순임은 손을 뻗어 간판 귀퉁이의 먼지를 닦았다. 작은 글씨 주변에 빗물과 먼지가 섞여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기까지 닦으면 돼요?”

“아래쪽도 조금.”

해담은 손을 뻗어 순임이 닿지 않는 곳을 닦았다. 손끝이 간판 모서리에 닿았다. 물이 장갑 없는 손등을 타고 흘렀다.

“이 글씨가 그렇게 작았나.”

“원래 작아요.”

“네 아버지가 작게 썼어.”

“간판은 아빠가 직접 만든 게 아니잖아요.”

“글씨는 아빠가 그렸지. 간판집에 갖다 줬어.”

해담은 『연중무휴』의 마지막 글자를 닦았다. 걸레가 검게 물들었다.

“이것도 오래됐네.”

“가게가 오래됐으니까요.”

순임은 간판을 올려다봤다. 빗줄기가 간판 위를 흘렀다. 순임은 물통에 걸레를 헹구고 물기를 짰다.

“너 7년 동안 하루도 안 쉰 이유, 엄마는 안다.”

해담은 걸레를 받으려던 손을 멈췄다.

“뭐요?”

“네가 왜 매일 가게 문을 열었는지.”

“가게가 있으니까 연 거죠.”

“그게 다야?”

“손님 오면 열쇠 깎아야 하잖아요.”

순임은 해담의 얼굴을 보지 않고 간판을 닦았다. 해담은 물통 가장자리에 맺힌 빗물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엄마는 안다고 했잖아요.”

“응.”

“그럼 말해 봐요.”

순임은 걸레를 접어 다른 쪽으로 닦았다.

“오늘은 말 안 할 거야.”

“왜요?”

“네가 알잖아.”

“저는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네가 먼저 생각해 봐.”

해담은 어머니 손에 든 걸레를 받아 간판 모서리를 닦았다. 순임은 물통을 들고 조금 옆으로 비켰다. 『연중무휴』 글씨가 물에 젖어 선명해졌다.

“엄마, 간판 닦으러 온 거 맞아요?”

“그럼. 간판 닦았잖아.”

“나한테 말하러 온 줄 알았어요.”

“말했잖아. 안다고.”

“그게 대답이에요?”

“아니.”

순임은 물통을 들었다. 해담은 걸레를 짜서 돌려줬다.

“더 닦을 데 있어요?”

“아래쪽만 닦으면 돼.”

“그럼 마저 닦아요.”

두 사람은 간판을 마저 닦았다. 순임은 간판 아래에 떨어진 물을 걸레로 훔쳤다. 해담은 입구의 물웅덩이를 빗자루로 밀었다.

“밥은 먹었어?”

“아직요.”

“가게는 손님이 없고?”

“네.”

“그럼 조금 있다가 와서 밥 먹어.”

“동명탕에 가면 돼요?”

“거기서 먹든 여기서 먹든 알아서 해. 내가 말한 건 밥을 먹으라는 거야.”

“알았어요.”

순임은 물통을 들고 골목 끝을 향해 걸었다. 해담은 간판을 올려다봤다. 빗물에 씻긴 글씨가 또렷했다. 해담은 문 안으로 들어가 걸레를 빨아 널었다.

해가 기울 무렵에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해담은 작업대에 앉아 열쇠 블랭크를 닦았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한 개씩 천으로 훑고, 제자리에 걸었다. 손이 자꾸 한쪽으로 향할 때마다 해담은 다른 열쇠를 집었다.

시간이 지나도 빗소리는 계속됐다. 해담은 셔터를 내릴 준비를 했다. 장부를 서랍에 넣고, 기계 전원을 확인했다. 문밖으로 나와 빗물을 쓸어낸 뒤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저녁 장사를 정리하고 있을 때, 맞은편 약국에서 염 여사가 계산대를 나왔다. 서후가 문 안쪽에서 기다렸다가 약국 문을 닫았다. 해담은 작업대에 놓인 걸레를 접었다.

시계가 8시 20분을 가리켰다.

가게 문이 열렸다.

서후가 젖은 채 들어왔다. 남색 니트 어깨에 빗물이 맺혀 있었고, 짧은 머리 끝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서후의 손에는 놋쇠 열쇠가 들려 있었다.

해담은 손에 쥔 걸레를 내려놓았다.

“비 와도 옵니다.”

“안 물어봤어요.”

(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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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공책을 사 오면 첫 줄은 제가 쓸 거예요.”해담은 펜을 계산대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 서후는 계단 아래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깜이는 공책 위에서 내려와 난간 옆을 지나갔다. 해담은 고양이가 떠난 뒤 공책을 덮어 품에 안았다.“첫 줄에 뭘 쓸 겁니까?”“그건 공책을 보고 정할 거예요.”“알겠습니다.”“약사님은 뭘 쓸 건데요?”“해담 씨가 정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또 기다려요?”“네.”해담은 대답 대신 공책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서후는 계단 아래에 남아 있었다. 철계단을 오르는 동안 공책 모서리가 앞치마에 닿았다.11월 20일 토요일 아침, 해담은 가게 문 옆에 안내문을 붙였다. 종이 위에는 『부재 시 길 건너로 문의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늘봄약국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길 건너에 있는 가게는 하나뿐이었다.해담은 테이프가 들뜨지 않도록 네 귀퉁이를 눌렀다. 문을 닫고 밖에 나와 살펴보니 안내문이 유리문에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약국 문에도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부재 시 길 건너로 문의하세요』. 서후가 약국 안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흰 가운은 없었고 남색 니트 위에 겉옷을 걸쳤다. 한 손에는 종이가 든 봉투가 있었다.해담은 약국 문에 붙은 안내문을 읽었다.“똑같네요.”“문구를 맞추는 편이 알아보기 쉽습니다.”“누가 먼저 붙였어요?”“해담 씨가 먼저 붙이셨습니다.”“제가 붙이는 걸 보셨어요?”“약국 안에서 봤습니다.”서후가 문 옆의 안내문을 한 번 확인했다. 봉투를 든 손은 내려가 있었다.“이쪽은 오늘 붙이실 겁니까?”“네. 붙일 종이도 가지고 오셨나 봐요.”“그렇습니다.”“약국 문에 붙이면 되겠네요.”“그렇게 하겠습니다.”서후는 약국 유리문에 종이를 대고 테이프를 눌렀다. 해담은 구씨열쇠 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두 안내문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했다.두레슈퍼 평상에 앉아 있던 엄분이가 안경을 코 위로 올렸다.“이제 한쪽 문이 닫히면 건너가면 되겠네.”“문 닫고 어디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7화. 장부 마감

    해담은 공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서후는 철계단 가운데쯤에 앉아 공책을 내려다봤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계단 한 칸이 비어 있었다.해담은 표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모서리가 닳아 종이 속이 드러난 곳도 있었고, 표지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공책을 펼치자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계단 아래 가게에서는 셔터가 내려간 뒤의 쇳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이게 그 출근부예요?”“네.”“매일 적으셨다고 하셨죠.”“매일은 아니에요.”서후가 공책에서 해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빠진 날이 있습니다.”“몸이 안 좋으셨을 때요?”“그런 날도 있고요. 설이나 추석 당일에는 약국도 쉬었어요. 아빠가 가게를 넘겨주고 나서도 명절 당일만큼은 문을 닫으라고 했어요.”해담은 공책을 조금 돌려 서후가 보기 편하게 했다. 첫 장에는 날짜 대신 짧은 작대기들이 줄을 맞춰 그어져 있었다. 볼펜으로 그은 것도 있고, 연필 자국도 있었다. 중간에는 진하게 눌러 쓴 흔적이 있었다.“하나씩 그은 거예요?”“피로회복제 한 병 사러 갈 때마다요. 가게 셔터 내리고, 8시 40분에 건너가서 한 병 샀어요. 돌아오면 여기다 작대기 하나.”“2,523개가 있습니까?”“네.”“직접 세어 보셨습니까?”“세어 봤죠. 몇 번이나요.”“제가 봐도 됩니까?”“보여 드리려고 가져왔어요.”서후는 공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해담은 그걸 보고 한쪽 입술을 살짝 올렸다.“읽으셔도 돼요. 페이지 넘기는 것도요.”“제가 넘기겠습니다.”“그럼 넘기세요. 종이가 약해서 조심해야 해요.”“알겠습니다.”서후는 손가락 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잡아 천천히 넘겼다. 작대기들은 줄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끝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페이지도 있었고, 중간에 듬성듬성한 곳도 있었다. 해담은 서후가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무릎 위 공책을 잡고 있었다.“날짜를 쓰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그냥 작대기만 그었어요. 날짜를 쓰면 장부가 되잖아요.”“출근부라고 부르셨습니다.”“가게 출근부랑은 달라요. 그건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6화. 간판 상담

    “저 간판, 내가 손으로 쓴 거다.”아빠의 말이 끝난 뒤에도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해담은 사진 아래쪽을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두지 않았다. 사진 속 간판은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지금 구씨열쇠에 걸린 간판도 그랬다. 글자 획이 조금 굵고, ‘열’의 마지막 획은 오른쪽으로 짧게 올라가 있었다.“아빠가 직접 쓴 거예요?”“가게 열 때 급하게 썼다. 간판집에 맡길 돈도 아꼈고.”“그 글씨가 지금 간판까지 온 거네요.”“그렇지.”구판길은 사진을 해담에게 돌려줬다. 사진 모서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담은 아래를 받쳤다. 간판 아래에 선 아빠는 지금보다 얼굴이 덜 탔고, 앞치마도 새것처럼 보였다.“아빠는 저때도 무뚝뚝했어요?”“사진에 말투가 나오냐?”“안 나오니까 물어보는 거죠.”“그때도 지금도 똑같다.”봉숙자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그건 내가 똑똑히 봤어. 구 사장님은 가게 열 때도 말이 별로 없었어.”“봉 원장님이 그때부터 골목에 계셨어요?”“내가 미용실을 하기 전에도 이 골목에 살았지. 모르는 게 없어.”“저 사진은 아빠가 몇 살 때예요?”“그걸 왜 나한테 묻니. 네 아빠한테 물어.”“사진 속 아빠가 대답을 안 하시잖아요.”구판길이 해담을 보았다.“가게 문 열던 때니까 지금보다 젊었지.”“그건 저도 알아요.”“그럼 됐다.”사진을 다시 장부 옆에 놓은 뒤에도 해담은 간판 글씨를 몇 번 더 봤다. 아빠 손글씨가 원래부터 간판에 새겨진 줄 알았다. 글씨를 본떠 간판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그날 밤, 가게 셔터를 내린 뒤에도 해담은 계산대 안쪽에서 사진을 펼쳐 놓았다. 사진 속 간판과 유리문 밖 간판을 번갈아 보았다. 사진 속 글자와 현재 간판의 글자 모양은 일치했다. 검은 칠이 벗겨진 모서리와 오른쪽 아래에 붙은 작은 글씨만 달랐다.해담은 사진을 접지 않고 서랍에 넣었다.10월 25일 오전, 벽의 열쇠 블랭크 판을 종류별로 다시 걸었다. 모양이 맞는 열쇠를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5화. 금고 개봉 행사

    “다이얼은 제가 돌릴게요. 손대지 마세요.”해담은 옛 솔매우체국 안쪽에 놓인 금고 앞에 섰다. 남색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에 열쇠 꾸러미를 찼다. 가을 장터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문 안으로 모여들어 금고 주위에 둥글게 섰다. 문밖에서는 상인들이 장터 물건을 소개하는 소리와 사람들 발소리가 들렸다.봉숙자가 금고 옆에서 손바닥을 내저었다.“다들 조금만 뒤로 물러서요. 해담이가 돌릴 자리가 있어야지.”“저 정도면 넉넉한데.”탁종팔이 말했다. 봉 원장이 탁 사장을 돌아봤다.“사장님은 더 물러서세요. 나중에 금고 열리면 제일 먼저 안에 들어가실 것 같으니까.”“내가 왜 들어가.”“사진에 젊은 모습이 있으면 가져가실 수도 있잖아요.”“사진은 안 가져가.”탁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도 금고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났다.구판길은 사람들 뒤에 서서 금고를 바라봤다. 햇볕에 탄 얼굴에 낚시 조끼를 걸쳤고, 손에는 오래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해담은 아빠를 보았다.“아빠, 안쪽으로 더 들어오세요. 문 열리면 잘 안 보일 수도 있어요.”“여기서도 보인다.”“다들 보러 왔는데 아빠만 안 보이면 안 되잖아요.”구판길은 대꾸하지 않고 사람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에 있던 진서후가 해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해담 씨.”“서후 씨. 오셨어요?”“네. 아버지는 퇴원하셨습니다.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다행이에요.”“오늘 장터에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도 사진이 궁금하다고 하셨습니다.”해담은 서후의 얼굴을 살폈다. 왼쪽 눈 아래 작은 점이 그대로 보였다. 서후는 약국에서 입던 흰 가운 대신 남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해담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금고로 몸을 돌렸다.“그럼 잘 열어야겠네요.”“해담 씨가 여시면 됩니다.”“그 말은 부담되는데요.”“제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해담은 다이얼을 내려다봤다.「말이 늘 정확해.」금고는 무릎 높이보다 조금 큰 철제 금고였다. 표면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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