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변수린은 사람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여럿 발견했다. 바로 사모님들 모임에서 보던 사람들이었다.투자사 관계자들도 섞여 있었다.김설이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더니 강서이에게 전했다. “바스테크 쪽 손님들이래요. 저쪽 로드쇼가 일찍 끝나서 여기도 한번 둘러보러 오셨다고요. 따로 자리까지 마련해 줄 필요는 없다고 하세요.”그쪽에서 그렇게 말했고 해도 강서이는 김설에게 얼른 좌석을 다시 조정하도록 했다.문제는 행사장이 너무 좁고 새로 몰려든 사람은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금세 행사장 안이 사람으로 꽉 찼다. 출입구까지 발 디딜 틈조차 없어서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했다.놀라울 만큼 뜨거운 반응이었다.이런 상황이 처음인 김설은 강서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신 물었다.제품을 더 제대로 보여 주려면 장소부터 바꿔야 했다. 강서이는 바로 구정태 총장에게 연락해서 운동장을 빌렸다. 즉석에서 야외 로드쇼를 열 생각이었다.강서이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던 구정태 총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학교 측에도 적극 협조하라고 일렀다.노아리 일행이 A관을 나섰을 때, 운동장으로 몰려가는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바스테크에서 초대한 손님들도 꽤 많았다.“잠깐만요! 좀 지나갈게요!”일행에 길이 막힌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이예수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사람과 부딪쳤다.노아리가 얼른 이예수를 붙잡은 덕분에 더 밀려서 넘어지는 일은 피했다.부딪친 사람이 서둘러 사과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정 여사님?” 이예수가 상대를 알아봤다. 상대는 진창현 회장의 부인이자, 바스테크 로드쇼에 직접 초대한 손님 중 하나인 정희영이었다.아까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집에서 자식처럼 키우는 반려견이 사라졌다며, 강아지를 찾으러 급히 돌아간 사람이었다.이예수는 정말 개가 없어진 줄 알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까지 해 줬다.그런데... ‘문심’ 로드쇼를 보러 가고 있었다니.정희영도 딱 걸린 마당이라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하필 여기서 이예
이예수가 조희경을 툭 밀었다.그제야 조희경이 황급히 앞으로 나서면서 말을 더듬었다.“여, 여기요.”여성 경찰관 두 명이 곧바로 다가왔다. 신분증을 보여 준 뒤 차갑게 말했다.“두 건의 교통사고와 관련된 혐의로 조사받으셔야 합니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출석을 요구하는 것이니 협조해 주십시오.”조희경은 바로 당황했다.“경찰관님, 뭔가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제가 교통사고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분명 잘못 아신 거예요.”여성 경찰관이 큰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조희경 씨, 협조해 주십시오!”“일단 경찰관들하고 경찰서로 가세요.”이예수는 조희경의 성격을 잘 알았다. 겁을 먹고 말실수를 할까 봐 얼른 말을 보탰다.“여기 끝나면 저도 갈게요.”눈빛으로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다.조희경은 새하얗게 질린 채 경찰관들과 함께 나갔다.영상도 거기서 끝났다.정말... 사건·사고 순위에 오를 만했다.다만 강서이는 한 가지가 의아했다.“이런 상황인데 왜 방송을 안 끊었지?”이 정도로 큰 일이 알려지면 파장이 엄청났다.그런데도 바스테크는 방송을 급히 중단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소식이 그대로 퍼지게 놔뒀다.바스테크에는 치명적인 위기였다.보통의 민도하라면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리 없었다.강서이가 영상을 다시 돌려 봤다. 그제야 민도하가 내내 노아리만 살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아주 사랑에 눈이 멀어서 방송을 끄는 것도 잊었네.’‘그러니까 사랑이 좋은 게 아니라니까. 사람 잡는 게 따로 없어.’김설도 말했다.“사고는 났는데 시청자 수는 계속 높아요. 가끔은 이런 것도 특별한 홍보 전략인가 싶다니까요.”강서이는 말문이 막혔다.‘누군가 하나 희생시켜서 관심을 끌겠다는 건가?’그렇다면 참 별난 방식이었다.‘문심’의 방송은 바스테크만큼 시청자가 많지 않았지만, 로드쇼 자체는 폭넓은 관심을 받았다.하장현의 발표가 끝나기도 전에 남유환과 변수린이 강서이를 찾아왔다.“강 대표님, ‘문심’ 상장하면 제가 제일 먼저 공모주 청약을
강서이는 A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서한승에게 들은 것은 교수님이 오실 때 안내판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뿐이었다.밖에 나가 보고서야 ‘문심’ 안내판이 바스테크 안내판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부러 더 크고 눈에 잘 띄는 안내판을 세운 것이었다.참으로 치졸한 수법이었다.뒤에 오는 손님들이 잘못 찾아가지 않도록 강서이는 안내판을 50미터 앞쪽으로 옮겼다.재수 없는 일에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돌아가려는데 경찰관이 다가와 길을 물었다.“안녕하세요. 혹시 바스테크 로드쇼 행사장이 어디인지 아십니까?”강서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래도 길을 알려 줬다.B관으로 돌아가면서도 의문이 들었다.‘바스테크는 경찰을 왜 초대한 거지?’‘민도하의 인맥이 이제 경찰 쪽까지 뻗은 건가?’물론 답은 알 수 없었다.행사장으로 돌아온 뒤에는 그 일도 머릿속에서 지웠다.강서이는 정말 바빴다.이번 로드쇼는 ‘문심’의 상장에 너무도 중요했다. 사소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하장현이 무대에 오르자 강서이는 아래에서 지켜보며 힘을 보탰다.확실히 사전 연습은 효과가 있었다.하장현은 눈에 띄게 덜 긴장했다. 원고 없이 하는 발표와 시연도 막힘없이 쭉 이어졌다.발표 원고에 담긴 각종 수치 역시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강서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김설에게 실시간 방송 반응이 어떤지 물었다.그런데 김설의 표정이 묘했다.“왜 그래?”강서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김설이 곧바로 대답했다.“우리 방송 반응도 좋은데요... 바스테크보다는 낮아요.”강서이도 뜻밖이었다.바스테크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주요 대상도 업계 투자자들이었다.그래서 노아리가 대학에서 로드쇼를 연다는 것부터 강서이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반면 ‘문심’은 서비스 출시 후 이미 이용자도, 고객사도 확보했다.AI 열풍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어떻게 봐도 바스테크보다 관심도가 낮을 이유가 없었다.물론 바스테크가 돈
다른 사모님들도 맞장구를 쳤다. 딸을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키웠냐며 이예수에게 비결을 묻기도 했다.이예수가 겸손하게 노아리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고 똑똑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사모님 한 명이 갑자기 놀라 소리쳤다.“민 회장님이세요! 민 회장님이 오셨어요!”이예수가 멈칫한 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정말 민두해가 와 있었다.민두해의 등장에 행사장 안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민도하도 손님들을 두고 서둘러 다가왔다.“아버지,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민두해는 날카로운 눈으로 행사장을 한 바퀴 훑었다. 마지막에야 민도하의 얼굴에 시선이 멎었다.차갑고,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표정이었다.부자 사이라기보다 낯선 사람들 같았다.노아리도 따라왔다. 속으로 들뜬 마음을 누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회장님, 안녕하세요.”이예수 곁에 있던 사모님들도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목소리를 낮춰서 이예수에게 물었다.“민 회장님이 아리 씨 응원하러 오신 거예요? 그럼 이제 아리 씨를 받아들이셨다는 뜻인가요?”“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직접 응원하러 오셨잖아요!”“외아들이잖아요. 자식 안 아끼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니까요.”“...”이예수도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민두해의 첫마디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짐작을 무너뜨렸다.민두해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잘못 찾아왔군.”이내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더니 지팡이를 짚으며 떠났다.노아리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행사장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이번 침묵은 조금 전과 분명히 달랐다.사교에 능하고 사람을 대하는 데 노련한 이예수조차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사모님 한 명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드디어 아리 씨를 받아들이셨나 했는데...”그동안은 모두 소문으로만 들었다. 오늘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속으로 하는 생각도 제각각이었다.성이남조차 이런 일이.
노아리와 성이남이 거의 동시에 앞다퉈 대답했다.“네.”“A관입니다.”고상만이 미간을 더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이남아, 혹시 다른 행사장에서도 상장 로드쇼를 해?”노아리의 눈빛이 곧바로 굳어졌다.성이남은 어리둥절했다.‘바스테크 로드쇼에 오신 게 아닌가?’두 사람 모두 잠깐 말이 없었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됐어. 전화해서 물어보지.”고상만은 더 기다릴 생각이 없는 듯 핸드폰을 꺼내 서한승에게 전화했다.강서이에게 전화하지 않은 것은 지금 바쁠까 염려해서였다.전화를 받은 서한승은 바로 고상만을 모시러 왔다.두 행사장 사이가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노아리는 아직 표정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상태였다.서한승은 두 사람을 보고 예의상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그러고는 고상만에게 설명했다.“행사장이 갑자기 B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교수님께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고상만이 못마땅하게 콧소리를 냈다.“그럼 안내판이라도 세워 둬야지. 다른 손님들도 나처럼 잘못 찾아오면 어쩌려고?”서한승이 대답했다.“세워 뒀습니다. 초대장을 보낸 분들께도 전부 변경 안내를 했고요.”“밖에서는 못 봤는데?”“잠시 후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입구까지 걸어간 고상만은 그제야 성이남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너는 안 가냐?”성이남이 잠깐 침묵하다가 답했다.“저는 친구를 응원하러 왔습니다.”고상만은 더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노아리와 성이남, 고상만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A관의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떠났다.노아리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성이남도 마찬가지였다.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서한승이 강서이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고상만을 불렀다고 생각했다.‘서한승은 정말 모르나?’‘강서이처럼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력은 없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올려 봐야 더 크게 추락할 뿐인데.’‘뭔가에 아주 제대로 홀렸네.’‘강서이가 그렇게
고상만은 성이남에게 바둑 로봇도 추천했다. 심심할 때 AI와 바둑을 두면서 얼마나 뛰어난지 직접 느껴 보라고 했다.성이남은 궁금해서 왜 갑자기 AI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물었다.옆에 있던 가사도우미가 대신 대답했다.“아끼는 제자가 추천했거든요.”고상만은 괜히 새침하게 말했다.“아끼는 제자는 무슨. 아직 제자로 받아들인 적 없어. 내 연구실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 할 얘기지.”가사도우미는 말만 그렇게 한다며 웃었다.속으로는 끔찍이도 신경을 쓰면서 매일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회사가 요즘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확인했다. 뒤에서는 재계의 오래된 지인들에게 몰래 전화해 잘 챙겨 달라는 부탁까지 해 뒀다.고상만은 전화로 곧 도착한다고 했다. 성이남은 계속 밖에서 기다렸다.강서이와 하장현은 손님을 맞으러 B관에서 나왔다. 하장현의 지도교수인 오병태를 마중하러 나온 것이었다.오병태는 현재 인공지능협회 부이사장이었다.연구팀 전체를 데리고 왔다. 응원하려는 뜻도 있었고,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문심’의 상장은 국내 인공지능 분야 전체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그래서 오병태가 직접 참석해서 힘을 보태려는 것이었다.하장현은 오병태를 만나자 예의를 갖추고 준비 상황을 보고했다.강서이는 두 사람이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일부러 맨 뒤에서 걸었다.성이남은 행사장 밖에서도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서 있었다. 강서이도 당연히 봤지만 관심을 두지 않고 그대로 무시했다.성이남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입꼬리를 당기며 대놓고 깔보는 말을 던졌다.“남이 닦아 놓은 길로 가면 성공하기야 쉽겠죠.”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성이남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알 리 없었다. 강서이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확신했다.성이남이 편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상대하기 귀찮아 넘겼을 뿐, 끝없이 참아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강서이는 걸음을 멈추고 성이남과 눈을 맞췄다. 눈빛에는 냉기가 스며 있었다.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