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Z급 파일럿의 생존 본능이 10,000퍼센트 가동되며 내 다리가 바닥을 찼다.나는 화장실 문짝을 박차고 마당을 향해 빛의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어데 도망가노, 이 자식아! 다 니 생각해서 침 놔주겠다는데 어른 성의를 무시하나! 거기 안 서나!”다행히 최 여사님이 가장 아끼는 드라마 방송 시간이 다가왔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한 방 찔렸다면 턱을 뚫고 들어간 침에 뇌까지 깜짝 놀라 두개골이 확 벌어졌을지도 모른다.“어휴, 진짜 두 번 다시 물놀이 따라가나 봐라.”나는 절레절레 도리질을 치고 입을 삐죽거리며 평상 위를 뒹굴거렸다.일요일 저녁 9시.직장인들에게는 주말의 끝자락을 알리는 사형 선고와도 같은 시간.하숙집의 널찍한 거실에서는 최 여사님과 할머니가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앉아 주말 연속극의 클라이맥스를 보며 훌쩍이고 계셨다.랩실에서 밤을 새우다 기어 들어온 윤철수는 씻지도 않고 제 방에 틀어박혀 시체처럼 곯아떨어졌고, 워터파크에서 체력을 쏙 빼고 온 희선이와 히나 역시 방 안에서 쥐죽은 듯 조용했다."오빠. 여기 시원한 수박 화채 드세요."그때 마루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하루가 커다란 유리 볼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방금 샤워를 마친 듯 물기 어린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은은한 샴푸 향기가 훅 끼쳐왔다.하루는 평상 구석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아 유리 볼에서 얼음이 동동 뜬 화채를 작은 그릇에 소복하게 덜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어, 고마워. 너도 어제 피곤했을 텐데 좀 쉬지.""전 하나도 안 피곤했어요. 튜브 부느라 오빠가 고생을 다 하셨죠, 뭐."하루가 풋 하고 웃으며 내 턱관절을 놀리는 듯한 장난스러운 시선을 보냈다.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쑤시개로 수박 한 조각을 찍어 입에 쏙 집어넣었다.아삭하게 씹히는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밤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고요한 마당.선풍기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의 대사.
[2026년 8월 하순. 시각 불명. 태평양 마리아나 해구 심연의 밑바닥]빛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수심 1만 미터의 캄캄한 해저.수만 기압의 끔찍한 수압이 짓누르고 있는 심연의 진흙탕 위에는 한때 바다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던 거대한 제국의 흉악한 잔해가 볼품없이 나뒹굴고 있었다.바로 판탈라사 제국의 제1 군단장 에레보스의 부서진 분신체 조각들.심연의 군주들마저 궤멸당하고, 남은 잔챙이 해귀들만이 목적지를 잃고 심해를 부유하는 고요한 폐허 속에서, 에레보스의 잔해에 남아있던 미세한 심연의 마력이 명멸을 반복하며 사그라들고 있었다.그때였다.우르르르릉-!!!!절대적인 정적이 지배하던 해저 산맥의 한가운데서 기괴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지진이나 해저 화산의 폭발 같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공간 자체가 물리적인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는 끔찍한 파열음.에레보스의 잔해가 나뒹구는 진흙탕 바로 위쪽의 바닷물이 시퍼렇게 갈라지며 거대한 차원의 틈새가 아가리를 벌렸다.그리고 그 찢어진 차원의 균열 너머에서 칠흑보다 더 짙고 끈적이는 무형의 그림자 하나가 해저 바닥을 향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그것은 특정한 짐승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마치 수압 자체를 집어삼키는 듯한 거대한 어둠의 해일.그림자가 해저 바닥에 닿는 순간 주변을 배회하던 심해의 포식자들과 잔챙이 괴수들이 본능적인 공포에 짓눌려 형체도 없이 으스러지며 핏물로 터져 나갔다.황제의 부활을 준비하던 군단장들이 모조리 도륙당하고 심연의 본성이 박살 난 지금.제국의 가장 깊고 은밀한 그림자 속에 웅크려 있던, 황제의 옥좌만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던 진정한 재앙의 파편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즈즈즈즉-! 콰직-!무형의 그림자가 진흙탕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여 에레보스의 조각난 시체 위로 덮쳐들었다.그림자의 표면에서 수백 개의 날카로운 가시 같은 촉수들이 솟아나오더니 에레보스의 잔해를 사정없이 꿰뚫어 흡수하기 시작했다.에레보스의 육신에 미약하게 남아있던 심연의 지식과, 그가
미혜의 입김이 귓가에 맴도는 끈적하고도 장난기 어린 속삭임.조금 전까지 패닉에 빠져있던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특유의 과감한 연상녀 텐션이 폭발하고 있었다."아니, 나는 뭐, 그, 그래! 준비운동 안하고 무, 물에 갑자기 뛰어들어서..."내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미혜가 내 등짝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아까 나 구하러 왔을 때 힐끗 봤지. 좋았어?"도발적이고 직설적인 질문.나는 귀 끝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잘, 잘 모르겠는데.""거짓말."미혜가 내 등짝의 근육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따끔한 감각에 놀란 내가 움찔하자 그녀가 킥킥 웃으며 다시 물었다."그럼 싫었어?""......아니. 뭐, 좋았다고."결국 내가 체념한 듯 툭 내뱉자 미혜의 맑은 웃음소리가 물보라 위로 흩어졌다.그녀는 내 볼에 기습적으로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나를 뒤에서 살짝 밀쳐냈다."이건 내 목숨을 구해준 용사님에게 주는 보너스야. 나 먼저 하루한테 갈 테니까 태수는 얼른 가서 튜브나 불고 와."미혜는 여유롭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파도풀 저편으로 얄밉게 헤엄쳐 가버렸다.나는 멍하니 서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마른세수를 했다."진짜... 여우 같은 사람."하지만 그 아찔하고 달콤했던 로맨스 텐션의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펑-!!!!고막을 찢는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파도풀 한가운데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꺄하하하학! 언니, 파도 온다!"파도풀의 정점에 있던 희선이와 히나가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흥분하여 하이파이브를 치는 순간.S급 검사와 A급 격투가의 근력을 주체하지 못한 두 여중생의 손아귀 힘에 의해, 그들이 타고 있던 2미터짜리 대형 플라밍고 튜브가 뻥 소리를 내며 압사당하고 말았다."어머머! 주여, 악귀가 몰려옵니다!"그 옆에서 파도를 피하려던 소피아 역시 종교적 텐션이 끓어올라 힘을 주는 바람에 그녀가 껴안고 있던 노란색 도넛 튜브가 비명을 지르며 반 토막으로 터져버렸다.문제는 여자들의
"어이, 이쁜이들. 오빠들이랑 같이 놀까? 우리가 VIP 카바나 잡아놨는데 샴페인이나 한잔하지?"파도풀 가장자리 쪽에서 몸에 문신을 잔뜩 새긴 껄렁한 근육질의 사내 서넛이 미혜와 하루를 에워싸고 치근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딱 봐도 질 나쁜 중소 길드의 C급이나 B급 헌터 무리였다.각성자의 힘을 믿고 민간인 구역에서 헌팅이랍시고 행패를 부리는 전형적인 양아치들.하루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고 미혜가 쌀쌀맞은 얼굴로 쏘아붙였다."일행 있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가시죠.""에이, 튕기지 말고. 오빠들이 재밌게 해줄게."문신 헌터 하나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하루의 손목을 낚아채려던 찰나였다.쩌저적-.놈의 발밑에서 찰랑거리던 파도풀의 물이 순식간에 시퍼런 얼음장으로 변하며 놈의 발목을 옥죄었다."어, 엇? 뭐야 이거!"당황한 놈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때.썬베드에서 상체를 일으킨 내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놈들을 향해 무심한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내 빙정에서 시작되어 청옥팔찌를 통과한, 아주 미세하게 흘러나온 창백한 한기특별한 동작도, 거창한 협박도 필요 없었다.수십만의 심연 군단을 갈아버린 Z급 포식자의 압도적인 살기가 놈들의 척수를 찌르자, 문신 헌터들은 사색이 되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재수 없는 새끼들. 어딜 와서 수작이야."나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 되겠다. 저렇게 눈에 띄는 여자들끼리만 물에 놔두면 또 무슨 벌레들이 꼬일지 모를 일이었다.나는 구명조끼를 대충 걸쳐 입고 파도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거대한 인공 파도가 출렁이는 유수풀 근처.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틈바구니 속에서 식구들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중, 내 시야에 묘한 물건 하나가 포착되었다.응?"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수면 위로 빨간색 천 쪼가리 하나가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누군가 흘린 머리끈이나 수건인가 싶어 근처에 있던 긴 막대 뜰채로 쓱 건져 올린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강렬한 붉
[2026년 8월 하순. 낮. 대한민국 영남권 내륙 초대형 워터파크]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8월 말의 끔찍한 폭염.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당연히 부산 해운대나 광안리의 탁 트인 바닷가로 피서를 떠났겠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랐다.수심 깊은 외해는 여전히 돌연변이 해귀들과 심연의 잔당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험 구역이었기 때문이다.덕분에 바다를 대신하여 내륙 한가운데 지어진 초대형 인공 워터파크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서객들로 그야말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아, 진짜 덥네. 물놀이고 나발이고 그냥 에어컨 밑에 누워있는 게 최고인데."나는 파도풀 앞의 커다란 파라솔 그늘 아래 놓인 썬베드에 누워 얼음이 가득 든 콜라를 쭉 빨아당겼다.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지친 하숙집 식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운전대를 잡고 이곳까지 실려 온 참이었다.어르신들인 최 여사님과 할머니, 성배 아저씨는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며 하숙집 평상에 남아 수박을 드시기로 했고, 젊은 피들만 총출동한 피서 작전이었다.내 옆자리 썬베드에는 하와이안 셔츠를 대충 걸쳐 입은 윤철수가 선글라스를 낀 채 늘어져 있었다."태수야. 불평하지 마라. 나는 랩실에서 황좌 프로젝트 진행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느니라. 오늘 하루 햇빛 좀 본다고 죽지 않는다."철수가 능글거리며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그때 탈의실 쪽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함께 여자 식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오빠! 우리 왔어요!"가장 먼저 래시가드를 스포티하게 차려입은 희선이와 히나가 물 만난 강아지들처럼 꺄르르 웃으며 뛰어왔다.뒤이어 걸어 나오는 세 여자의 모습에 주변을 지나가던 수많은 피서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태수야. 오래 기다렸어?"가장 먼저 내 시선을 강탈한 것은 다름 아닌 미혜였다.그녀는 강렬한 붉은색과 검은색이 교차하는 파격적인 끈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군살 하나 없이 매끄러운 허리 라인과 볼륨감 넘치는 몸매를 가감 없이 드러낸 연상녀의 과감한 어필에 나도
"와아! 오빠 짱! 이거 패밀리 사이즈 우리 둘이 다 먹어도 괘안나?!"히나와 같이 나온 영혼의 단짝, 희선이가 양손으로 들기도 버거운 거대한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고 두 눈을 반짝였다.나는 카드를 긁으며 픽 웃었다."어, 다 먹어. 배탈 나서 혼나는 건 너희니까.""아싸! 우린 저쪽에 같이 먹을 테니까 둘이 오붓하게 놀아!"눈치 빠른 녀석들이 헤헤 웃으며 일부러 멀찍이 떨어진 창가 자리로 쪼르르 도망쳤다.가게 안쪽의 조용한 테이블.하루는 내 앞에 앉은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아까 제단에서 흘렸던 눈물 탓에 눈가가 약간 부어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안 먹냐. 다 녹는다."내가 숟가락으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무심하게 툭 던지자 하루가 고개를 들었다."오빠... 오늘 아줌마랑 다들 와주셔서 정말 든든했어요. 오빠가 부르신 거죠?""내가 안 불렀어. 최 여사님이 눈치채고 알아서 끌고 간 거지."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하루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하루야."내 진지한 부름에 하루의 어깨가 작게 흠칫거렸다."가라앉은 옛날 땅 같은 거 이젠 신경 쓰지 마라."내 투박한 목소리에 하루의 붉어진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누가 뭐라 떠들든, 옛날 국적이 어땠든 그런 건 다 쓸데없는 소리야. 너네 자매는 10년 동안 우리랑 한솥밥 먹고 뒹굴었어. 최 여사님 등짝 스매싱 맞아가면서 같이 컸으면 그냥 우리 집 식구지 무슨 피난민 타령이야."나는 냅킨을 뽑아 하루의 눈가에 아직 맺혀 있는 물기를 슥슥 닦아주었다.조금은 거칠지만 진심이 담긴 따뜻한 손길."아침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