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 가는 자들의 왕이 되었다

죽어 가는 자들의 왕이 되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1
By:  해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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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버림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서강현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남은 시간을 보는 능력 ‘생사안’을 각성한다. 누구도 구하지 못했던 환자를 살려낸 순간, 그는 생명을 거래하는 거대한 세력의 표적이 된다. 의료계의 비리와 제약 재벌의 음모, 인간의 수명을 사고파는 국제 조직까지 그의 앞을 가로막지만, 강현은 사람을 살릴수록 자신의 생명이 소모되는 운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백서하, 윤채원, 진소령과 함께 죽음을 지배하려는 자들에 맞서는 동안 아버지가 남긴 비밀과 생명권의 진실이 드러난다. 모든 생명을 통제하려는 적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강현은 왕의 자리에 오르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지배가 아닌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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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Chapters
1화
병원 로비의 대형 전광판에 약혼 사진이 나타난 것은 오전 일곱 시 정각, 서강현이 열두 시간의 야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려던 순간이었다.평소라면 지하 직원 통로를 이용했겠지만, 새벽에 갑자기 변경된 근무표 때문에 정문 로비의 물품 정리까지 맡게 된 참이었다. 마지막 운반 카트를 창고에 밀어 넣은 강현은 어머니에게 가져갈 죽이 식지 않았는지 확인하며 걸어 나오다가, 천장에서 흘러나오는 축하 음악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화면 속에는 삼 년 동안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한유림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남자는 세명대병원 이사장의 아들 오준혁이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사진 아래로 금빛 글씨가 떠오르자 강현은 걸음을 멈춘 채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오준혁 이사 · 한유림 양의 약혼을 축하합니다.]밤샘 근무 때문에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진이 바뀌어도 유림의 얼굴은 그대로였고, 그녀의 왼손 약지에서는 자신이 한 번도 사 줄 수 없었던 커다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강현은 어젯밤에도 유림에게 전화를 걸었었다.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된다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고, 그보다 앞서 유림은 일이 복잡해졌으니 당분간 병원에서 아는 척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무슨 사정이 생겼을 것이라 믿었기에 기다려 주기로 했는데, 자신이 잠을 줄여 가며 걱정하는 동안 유림은 다른 남자와 약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었다.전광판 앞에 모여든 직원들이 감탄을 쏟아 냈다."오 이사님 약혼하시나 봐. 신부가 정말 예쁘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사진이 올라왔던데, 홍보팀에서 준비했나 보네.""병원 이사장 집안 경사니까 당연하지. 저 정도면 약혼식도 엄청났겠어."사람들이 웃으며 화면을 구경하는 동안 강현은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봉투 안에는 어머니에게 가져다드릴 죽과 두유가 들어 있었고, 아직 따뜻한 용기의 온기가 손가락에 전해졌지만 정작 그의 손끝은 점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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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전광판도, 갑작스럽게 바뀐 근무표도 우연이 아니었다.준혁은 강현이 유림의 약혼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출근하는 직원들 앞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구경하려 하고 있었다."유림아, 우리가 무슨 사이였는지 네 입으로 말해 봐."강현이 다시 묻자 유림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주변의 시선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망설이던 얼굴을 지우고 낯선 사람에게 선을 긋듯 차갑게 입을 열었다."강현아, 네가 나한테 잘해 준 건 고마워. 하지만 그걸 전부 연애라고 생각했다면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강현은 그녀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오해라고?""네가 힘들 때 내가 위로해 준 적도 있고, 네가 나한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말하면 곤란하지."삼 년 동안 함께 보낸 시간이 그녀의 입에서 몇 번의 친절과 도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강현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삼키며 유림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준혁의 팔을 더욱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네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잖아. 엄마가 퇴원하시면 우리 둘이 살 집을 구하자고 했던 것도 너였고."유림의 얼굴이 굳었다."그때는 네가 너무 힘들어하니까…….""아버지 장례식장에서 평생 곁에 있겠다고 했던 말도 내가 잘못 들은 거야?"유림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강현은 그 침묵 속에서 오래전 장례식장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영정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자신에게 유림은 따뜻한 손을 내밀었고, 이제 혼자가 아니니 자신을 믿으라고 말했었다. 그때만큼은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유림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그건 위로였어. 그때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잖아."가까이 서 있던 직원 하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가렸다. 그 옆의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남자는 오히려 화면을 조금 더 높이 올렸다.강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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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준혁은 조금 전까지 즐기던 표정을 거두었고, 강현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은반지를 주머니에 넣었다."사람들 앞에서 나를 망신 주고 싶었다면 성공했어. 하지만 네가 가진 돈과 권력으로 남의 인생을 짓밟는다고 해서 네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준혁의 입꼬리가 굳었다."아직도 말은 잘하네. 그러니까 네가 그 모양인 거야."유림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가자. 더 이야기할 필요 없잖아."그녀는 강현을 한 번 돌아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준혁을 따라갔다. 강현 역시 붙잡지 않았는데, 자신이 사랑했던 삼 년까지 거짓이었다고 인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미 다른 남자의 손을 잡은 여자를 붙잡아 구걸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몇 걸음 떨어졌던 준혁이 다시 돌아보았다."아, 서강현. 오늘 인사팀에서 연락 갈 거야. 중요한 일이니까 피하지 마."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떠오른 발신자는 인사팀이었다.준혁은 그것을 확인한 사람처럼 웃으며 유림을 데리고 로비를 빠져나갔고, 전광판에서는 두 사람의 약혼 사진이 다시 처음부터 재생되기 시작했다.강현은 한동안 울리는 전화기를 내려다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서강현입니다."수화기 너머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바로 인사팀으로 올라와 주시겠습니까?"***인사팀 회의실에는 강현이 도착하기도 전에 계약 해지 통보서가 준비되어 있었다.긴 책상 끝에 놓인 서류와 그 옆의 펜을 보자 강현은 준혁이 마지막에 남긴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유림을 빼앗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이제는 그가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까지 빼앗으려는 것이었다.인사팀 직원은 강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서류를 밀었다."병원 측에서 근로계약을 종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확인 서명만 하시면 절차가 진행됩니다."강현은 의자에 앉아 첫 장부터 천천히 읽었다.근무 태도 불량, 조직 질서 위반, VIP 병동 업무 지침 미준수.세 가지 사유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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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괜히 일을 크게 만들지 마세요.""일을 크게 만든 건 제가 아닙니다."강현은 계약 해지 통보서를 다시 책상 중앙에 놓았다."제 잘못이 있다면 확인하겠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까지 인정하는 서명은 못 합니다."회의실을 나온 강현은 곧바로 급여 명세를 확인했다.기본급 일부만 입금되어 있었고, 예정되어 있던 야간 수당 옆에는 지급 보류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혹시 전산 오류일까 싶어 화면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 보았지만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으며, 생활비 통장과 남은 적금 잔액을 모두 합쳐도 당장 필요한 치료비에는 한참 모자랐다.그때 휴대전화에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다.[정기 자동이체 실패 안내]어머니의 입원 치료비였다.강현은 계좌를 다시 확인했지만 부족한 잔액만 표시되었고, 곧이어 원무과 확인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까지 도착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오늘 수당이 들어오면 해결될 문제였는데, 몇 시간 사이에 약혼식 전광판과 계약 해지 통보서, 지급 보류된 급여가 차례로 그의 앞에 놓이면서 어머니의 치료마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강현은 병동으로 전화를 걸었다."보호자 서강현입니다. 조금 전에 치료비 관련 연락을 받았는데요."수화기 너머에서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원무과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아침부터 아드님을 계속 찾고 계세요.""몸이 안 좋으십니까?""현재 확인된 급격한 변화는 없습니다. 다만 보호자분이 한번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전화를 끊은 강현은 엘리베이터 앞에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을 보고 곧바로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머니가 계신 병동까지 뛰어 올라가는 동안 편의점 봉투가 몇 번이나 난간에 부딪혔지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보다 병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가 더 걱정스러웠다.***서미경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자마자 웃으려 했다.그러나 창백한 얼굴과 가늘어진 손목 때문에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고, 강현은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베개부터 고쳐 준 뒤 침대 옆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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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현아, 엄마가 바라는 건 하나야. 너까지 아프지 않는 거."강현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평소처럼 웃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그렇게 약한 사람은 아니잖아요."병실을 나서기 전 그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물컵을 손 닿는 곳에 놓은 뒤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했고, 벽에 등을 기댄 채 한동안 눈을 감아야 했다.사랑했던 여자는 자신과의 삼 년을 오해라고 했고, 준혁은 그를 병원에서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당장 오늘 안에 치료비를 마련할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았다.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서명만 하면 수당 처리해 줄게. 어머님 병원비 급하다며?]오준혁이었다.강현은 메시지를 끝까지 읽은 뒤 화면을 껐다. 준혁은 자신이 어느 부분을 누르면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이 공개적인 모욕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려던 순간 손목 안쪽에서 작은 통증이 일었다.아버지가 남긴 낡은 손목시계였다.가죽줄에는 오래된 금이 가 있었고 시계판 유리에는 작은 흠집이 남아 있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강현은 한 번도 수리를 맡기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던 아버지가 늘 차고 있던 물건이었고, 연구 노트와 함께 그가 끝까지 간직해 온 유품이기도 했다.강현은 무심코 시계를 들어 올렸다.딸깍.멈춰 있던 초침이 한 칸 움직였다.그는 숨을 멈춘 채 시계판을 바라보았지만, 다시 들여다본 초침은 원래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오래된 유리 표면에는 복도의 형광등만 희미하게 비쳤고, 방금 느꼈던 열기마저 손목 안쪽에 남은 착각처럼 사라지고 있었다.아버지가 남긴 시계가 왜 하필 오늘 움직였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복도 끝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VIP 병동 응급 호출입니다!"***백태산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병동을 가로질렀다.백린그룹 명예회장이자 병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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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붉은 숫자가 바뀌는 순간 손목시계 아래에서 다시 통증이 일었다.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저 숫자가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망설이는 동안 한 사람이 죽을지도 몰랐다.그는 병실 문 쪽으로 다가갔다."잠깐만요! 윤채원 선생님 계십니까?"경호원이 즉시 팔을 뻗어 길을 막았다."관계자 외 출입 금지입니다. 물러나세요.""의료진에게 확인해 달라고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최근 변경된 약물 때문에 이상 반응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경호원은 강현의 근무복을 훑어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당신 누구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진단하려는 게 아닙니다. 투여 기록을 다시 확인해 달라는 겁니다."경호원이 강현을 밀어내려는 순간 병실 안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입니까?"흰 가운을 입은 윤채원이 문 앞으로 나왔다.그녀는 강현의 얼굴과 경호원의 팔을 차례로 살펴보더니 불필요한 실랑이를 멈추라는 듯 손짓했다."말씀하세요."강현은 조금 전 기록지에서 확인한 약물명을 이야기했다."최근 처방이 변경된 걸 봤습니다. 기존 투여 약물과 상호작용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한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채원의 눈빛이 달라졌다."그걸 어떻게 알았죠?""예전에 관련 자료를 읽었습니다.""어떤 자료요?"강현은 잠시 망설였다가 대답했다."아버지가 남긴 연구 노트입니다."채원은 그를 한 번 더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자세히 물을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곧바로 병실 안으로 돌아섰다."최근 처방 변경 내역과 실제 투여 기록을 다시 대조해 주세요. 약제팀에도 바로 확인 요청하고요."의료진이 기록을 확인하기 시작하자 강현은 문밖으로 물러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고, 실제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고 치료하는 일은 의료진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붉은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04:11.갑자기 시야가 흔들리더니 백태산의 가슴 위에 떠 있던 숫자 아래로 가느다란 붉은 선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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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곧 의료진의 흉부압박과 응급 처치가 시작되었다.채원은 환자의 반응과 모니터를 확인하며 지시를 내렸고, 간호사들은 필요한 장비와 기록을 전달했다. 의료진이 교대로 움직이는 동안 짧고 분명한 지시가 이어졌지만, 강현에게는 그 모든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01:36.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세었다.한 번, 두 번.의료진의 움직임이 이어지는 동안 붉은 선들은 노인의 몸을 따라 뒤엉켰고,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손목시계의 열기는 더욱 강해졌다.00:59.시계 뒷면이 피부에 달라붙은 것처럼 뜨거워지자 강현은 반사적으로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아버지가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기억에 매달릴 여유도 없이 숫자는 다시 줄어들었다.00:41.강현의 귀에서는 병실의 경고음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붉은 선들이 끊어질 듯 가늘어지자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전히 같은 광경이었고, 의료진이 환자를 살리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에도 숫자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그는 손목시계를 세게 쥐었다.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유림의 손을 붙잡고 울었던 그날처럼, 지금도 눈앞에서 누군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제발.'누구를 향한 부탁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때 병실 안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맥박 돌아옵니다!"강현이 고개를 들었다.채원은 즉시 환자의 반응을 재확인했고, 의료진은 소생 이후의 불안정한 상태에 대응하며 필요한 처치를 이어 갔다. 그 사이 백태산의 가슴 위에 떠 있던 붉은 숫자가 크게 흔들렸다.00:17.숫자가 멈췄다.강현은 숨을 삼켰다.조금 전까지 일정하게 줄어들던 숫자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 아래로 얽혀 있던 붉은 선들이 한꺼번에 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그리고 다음 순간 숫자가 유리 조각처럼 갈라지더니 산산이 흩어졌다.눈앞을 가득 채운 붉은 빛이 사라지자 강현은 뒤로 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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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채원은 더 묻지 않았다.병실 안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돌아갔고, 강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그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붉은 숫자와 사람의 몸을 따라 움직이던 빛,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시계가 하나의 일처럼 이어져 있었지만 아직 무엇도 설명할 수 없었다.***백태산이 강현을 찾은 것은 그날 오후였다.채원에게 연락을 받은 강현은 VIP 병실 앞에 섰다. 계약 해지 통보서는 여전히 처리되지 않았고 어머니의 치료비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백린그룹 명예회장이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은 반가움보다 불안함을 먼저 불러왔다."회장님 의식이 돌아오셨습니다. 다만 오래 이야기하실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니 짧게 면담해 주세요."채원의 당부를 듣고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낮은 기계음이 들려왔다.백태산은 침대 머리를 조금 올린 채 누워 있었고, 아침보다 얼굴빛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지쳐 보였다. 강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회장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살폈는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오래전 누군가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자네가 서강현인가?""그렇습니다.""내 약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지."강현은 침대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가능성을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회장님을 살리신 건 윤채원 선생님과 의료진입니다."백태산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공을 탐내지 않는군."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회장은 물컵을 바라보다가 다시 강현에게 시선을 돌렸다."자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나?"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강현은 잠시 멈칫했다."연구원이셨습니다."백태산의 손가락이 이불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서명진입니다."그 이름을 듣는 순간 백태산의 표정이 바뀌었다.조금 전까지 차분하던 눈빛이 흔들렸고, 이불을 쥔 손등에는 핏줄이 드러났다. 회장은 강현의 얼굴을 다시 살폈으며,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눈가를 좁혔다."서명진……."그가 이름을 되뇌는 목소리가 낮아졌다."자네가 그 사람 아들이었군."강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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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아직 가지고 있었군."아침에 보았던 붉은 숫자와 멈춰 있던 초침이 움직였던 일이 동시에 떠올랐다. 강현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백태산을 바라보았다."이 시계도 아십니까?"백태산은 대답하려 했지만 갑자기 기침을 터뜨렸다.채원이 곧바로 다가와 환자의 상태를 확인했고, 더는 면담을 이어 가기 어렵다고 알렸다. 강현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이름과 죽음에 관한 의혹, 손목시계까지 알아보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병실 문을 열려는 순간 백태산의 목소리가 들렸다."서강현."강현이 돌아보았다.회장은 힘겹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자네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싶다면…… 이 병원을 떠나지 말게."***병실 밖으로 나온 강현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초침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아침에 느꼈던 열기와 백태산의 반응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동안은 사고라는 설명을 받아들이고 살아왔으나, 이제는 아버지가 무엇을 연구했고 왜 갑자기 죽었으며 그 자료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사팀에서 보낸 계약 해지 통보서를 다시 열었다.서명란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어머니의 치료비 때문에라도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이 병원 어딘가에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고, 백태산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현에게는 충분히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되었다.그때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오준혁이었다.준혁은 VIP 병실 앞에 서 있는 강현을 발견하자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느긋하게 걷던 그의 시선이 병실 문과 강현 사이를 빠르게 오갔고, 곧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너 여기서 뭐 해?"강현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회장님이 부르셨습니다."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설마 안에 들어갔어?""담당 의료진이 안내했습니다."준혁은 병실 문을 한 번 돌아보더니 다시 강현을 노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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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서강현의 출입증이 거부된 것은 오전 일곱 시 십이 분이었다.세명대병원 직원 출입구의 자동문은 평소처럼 열리지 않았고, 출입증 인식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강현이 카드를 다시 갖다 대자 화면에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출입 권한 정지.*그는 한동안 그 문구를 바라보았다.어젯밤까지만 해도 이곳은 강현이 매일 드나들던 출입구였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나올 때면 청소용 카트와 마주쳤고, 새벽 교대를 하러 들어오는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던 곳이었다.그런데 하루아침에 자신이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서강현 씨.”보안실에서 나온 직원이 강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손에 든 서류와 강현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출입증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직원 출입증은 회수 대상입니다.”“계약 해지 절차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출입 제한에 대한 통보도 받지 못했고요.”“인사팀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저희는 그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강현은 출입증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밤마다 병동과 물품 창고를 오가며 닳아 버린 카드였다. 플라스틱 모서리에는 작은 금이 가 있었고, 사진 속 얼굴은 지금보다 훨씬 멀쩡해 보였다.그 카드가 대단한 신분을 보장해 준 적은 없었다. 의대에서 쫓겨난 뒤 어렵게 구한 계약직 일자리였고, 병원 안에서도 누구나 대신할 수 있는 직원으로 취급받았다.그래도 그곳에서 일한 시간만큼은 자신의 것이었다.“회수 사유를 서면으로 주십시오.”“그런 건 인사팀에 요청하셔야 합니다.”보안 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하는 사이, 뒤쪽에 출근하던 직원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무슨 일이에요?”누군가 물었고, 다른 사람이 강현을 알아보았다.“어제 VIP 병실에 들어갔던 사람 아니야?”“그 사람 때문에 법무팀이 조사한다던데.”속삭임은 멀리서 시작됐지만, 강현이 서 있는 곳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직원들의 발소리가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고, 조금 전까지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오던 사람들은 일부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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