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밥벌이요정
“허연수에게... 딸이 있다고요?”

송서윤은 안마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원주는 송서윤이 관심을 보이자, 조각난 사진들을 차분히 테이블 위에 맞춰가며 말했다.

“오늘 허연수 씨 짐을 정리하는데, 사진첩 하나가 있더라고요. 어린 여자아이 사진이었어요. 단발머리였는데, 처음엔 하준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이원주는 멋쩍은 듯 허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송서윤의 얼굴을 더 창백하게 만들었다.

송서윤은 이원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사진첩, 나한테 좀 가져다줘요.”

그때, 방문 밖에서 고영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뭐 찾고 있어?”

송서윤이 천천히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노란 조명 아래, 실크 파자마를 입은 고영훈의 차가운 인상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며칠 전, 그가 클럽에서 입었던 정장은 그녀 앞에서 직접 도우미들에게 버리라고 지시했고, 지금쯤이면 쓰레기 더미 속에 처박혀 있을 터였다.

송서윤은 여전히 그에게 단 한 마디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테이블 위에 흩어진 사진 조각들을 쓸어내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직접 사진첩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고영훈이 어디선가 사진첩을 들고 와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이거 찾는 거야?”

그는 사진첩을 천천히 한 장씩 넘겼다. 눈짓을 보고 이원주는 빠르게 조각난 사진을 치우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사진 속, 한 여자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부터 자라온 모습이 차례차례 펼쳐졌다.

“보육원 원장님이 소개해 준 아이야. 며칠 전에 보내온 사진첩이거든. 하준이랑 많이 닮지 않았어?”

고영훈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눈빛에는 자상한 아버지의 기운이 어렸다.

“아까 하준이가 친구를 사귀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아이래. 지난번에 보육원 아이들도 킹더랜드에 같이 갔었잖아.”

사진첩을 받아 든 송서윤의 마음은 한결 누그러졌다.

허연수는 몸도 워낙 연약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메시지 내역 어디에도 아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순간, 송서윤은 자신이 괜한 의심을 한 건 아닌지 머쓱해졌다.

더구나, 이 보육원은 원래 송서윤의 어머니가 남긴 재산이었고 지금은 재단에서 관리 중이라 고영훈이 내부 사정까지 알 리가 없었다.

원장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그 사실에 송서윤도 안심했다.

고영훈은 송서윤이 다시 미소를 되찾는 것을 보며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싸안았다.

“여보, 우리 이 아이 입양해서 하준이랑 같이 키우면 어떨까?”

사진 속 아이는 하준이와 닮은 구석이 분명히 있었고 또 하준이와 친구가 된 것도 신기한 인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곧, 송서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머지않아 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이를 입양할 생각 없어.”

“정말? 갑자기 왜?”

고영훈은 금세 불안한 눈빛이 되더니,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애타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딸을 그렇게 갖고 싶어 했잖아.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거야?”

그가 가까이 다가와 송서윤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 검은 눈동자에는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집요함이 담겨 있었다.

“여보,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함께한 10년, 그는 송서윤의 모든 습관과 취향, 심지어 약점까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를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송서윤은 얼마 전 묘지에서 그가 자신을 너무 쉽게 찾아냈던 순간이 떠올랐다.

‘모건 쪽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하기 전까지, 고영훈의 의심을 사면 안 돼.’

“하준이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 아이야. 여기서 또 아이를 들이면... 내가 제대로 돌봐줄 자신이 없어서 그래.”

고하준이 몰래 숨겨놓았던 ‘그들 세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이 떠올라 송서윤은 고개를 떨구며 시선을 피했다.

고영훈의 눈동자가 순간 어두워지더니,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졌다.

“여보, 미안해. 내가 엄마 말만 듣고 허연수를 집에 들인 것도, 하준이 키우는 모든 부담을 혼자 지게 만든 것도, 다 내 잘못이야.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네가 딸을 얼마나 원했는지 나도 잘 알아. 우리 그냥 아이만 한번 만나보자. 직접 보고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잖아. 응?”

송서윤은 사진첩 속 여자아이의 얼굴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마음 한구석이 아리게 저렸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영훈이 그녀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보, 앞으로는 몰래 병원 다니거나 약 먹는 일 없게 해. 알았지?”

그 한마디에 송서윤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동안 딸을 갖기 위해 5년을 넘게 병원을 전전하며 약을 먹고 별의별 노력을 다했던 시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그는 또 다른 여자와 함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고영훈은 송서윤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달래듯 속삭였다.

“여보, 울지 마. 이제 곧 우리가 바랐던 딸을 찾게 될 거야. 곧 우리 가족은 네 식구가 되는 거야. 진짜 행복해질 거야.”

‘행복?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고씨 집안에 들어와 고영훈과 사랑에 빠졌을 때, 정말 행복할 줄 알았지. 내 꿈을 산산조각 낸 건 바로 너야!’

고영훈의 부드러운 말들은 이미 산산조각 난 그녀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찔렀다.

더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송서윤은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고영훈은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워 송서윤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그녀의 두 발을 늘 하던 대로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끼워 따뜻하게 덥혔다.

그의 보살핌과 다정함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지금, 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송서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방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였다.

송서윤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직 남아 있는 그의 체온이 서려 있는 자리를 손끝으로 쓸어봤지만 그 온기마저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젠 정말, 아무런 미련도 없어..’

스스로 수십 번을 다짐해도 마음은 자꾸만 그의 뒤를 쫓았다.

송서윤의 발걸음은 어느새 지하 2층 차고까지 향했다.

가지런히 주차된 럭셔리카들 사이, 그녀의 파나메라가 보였다.

고영훈은 상반신에 실크 잠옷을 걸친 채, 허연수와 마주하고 있었다.

허연수는 송서윤의 시선을 느끼고도 태연하게 고영훈의 목을 감았다.

“오빠가 밖에서 욕먹을까 봐, 서윤 언니한테 뭐라고 못 한 거 다 알아. 나 오빠 원망하지 않아. 조심할게.”

‘겨우 몇 시간 떨어졌다고 참지도 못하고 또 불러들였어? 이제는 아예 내 눈앞에서 바람까지 피우네?’

송서윤은 무너져 내릴 듯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머릿속에서는 허연수가 별장에 들어온 뒤 두 사람이 밤마다 뜨거운 시간을 보냈던 CCTV 속 장면과 귓가를 맴도는 신음까지 모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 고영훈이 불현듯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고영훈은 잠깐 착각한 것으로 생각하며 입술을 허연수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냉담했다.

“조심하겠다고? 한밤중에 온몸 성한 데 없이 뛰어와 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뻔하잖아.”

“난 오빠 없이 하루도 못 살아...”

그 말을 들은 고영훈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는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시는 서윤이 건드리지 마. 또 이 집에 기어들면, 널 진짜 아무 데나 갖다 버릴 수도 있어.”

허연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돌아봤다.

두려움이 깃든 얼굴이었지만, 곧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을 찾아와 애태웠던 고영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진짜 날 버리겠어? 오빠는 날 절대 포기 못 해.’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이며 아까 송서윤이 자신들을 목격했을 때의 그 참담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몸 구석구석 아팠던 통증도 어느새 가라앉은 듯했다.

‘그렇게 자존심 강한 여자가 남편한테 저리도 처참하게 배신당했는데,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분명 집을 나갈 거야. 그때가 되면 나는 대표이사 사모님이 돼서, 그 여자를 밟고 올라설 수 있겠지.’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 채, 송서윤은 밤새 침대에 앉아 밤을 꼬박 새웠다.

고영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두 사람은 마주쳤다.

고영훈은 깔끔하게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머리는 단정히 넘겼고 샤워 후의 청량한 샴푸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어젯밤, 갑자기 국제 화상회의가 잡혀서... 방해될까 봐, 회의 끝나고 그냥 서재에서 잤어. 여보, 오늘따라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여?”

고영훈은 송서윤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하지만 송서윤은 그 손을 뿌리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손에 쥔 펜만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그녀는 달력 위 어제 날짜에 굵고 큰 X를 그었다.

그리고 곧 떠날 날짜를 동그라미로 표시했다.

‘이제 정말 29일 남았어.’

잠시 뒤, 그녀는 도우미들을 불렀다.

그리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별장 안에 있는 물건 전부, 다 부숴버리세요. 지하 차고에 있는 파나메라는 특히요.”

이제는 이 집의 모든 것이 역겨웠다. 더는 이 공간에서 단 1초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도우미들은 놀랐지만, 이 집에서 누가 진짜 ‘주인’인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서윤이 결정한 일이라면, 고영훈조차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이란 걸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 침묵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3)
goodnovel comment avatar
이호정
2025. 12. 20. AM. 01:18
goodnovel comment avatar
이호정
그 댓 달려고 했는데요;; 매일 매일 지날 때마다 29일이라네요~ 나가기 전까지 많은 에피소드를 보여줘서 그런가요?^^
goodnovel comment avatar
날잊지마
깜짝 놀랐네.아직도 29일 남았다고? 여긴 시간이 멈췄나?ㅋ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가장 가까운 배신   제412화

    고영훈은 심건모의 멱살을 놓더니 허둥지둥 송서윤에게 다가가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그는 송서윤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벽에 기대어 위태롭게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과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실망과 분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송서윤의 차가운 목소리는 마치 칼날처럼 고영훈의 심장을 파고들어 죽느니만 못한 고통을 안겨주었다.“내 몸이 안 좋으면.” 그녀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나랑 이혼하면 그만이었어. 나를 속이고 내 뒤에서 바람을 피울 게 아니라.”“고영훈, 넌 나한테 상처를 줬고 우리 결혼 생활을 배신했어. 하준이를 온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게 만든 건 전부 네 잘못이야.”“내 몸이 안 좋다는 건 그저 너의 사욕을 위해 찾아낸 핑계일 뿐이야.”“아니야. 서윤아.” 고영훈은 특수경찰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심건모가 송서윤 앞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송서윤은 심건모의 손을 떼어냈고 감정을 억누른 채 그를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깜빡했어요.”“응.”심건모가 다른 쪽 손을 펴보였다. 송서윤의 휴대폰이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송서윤은 심건모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는 심건모보다 더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운이었다.송서윤이 휴대폰을 집으려던 찰나 심건모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조심해. 물 닿지 않게 하고.”심건모가 송서윤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고 그의 손바닥에서 손을 빼낸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송서윤은 녹음기를 켜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수영이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송서윤이 수영을 가로막았다. “증언 전날 밤에 왜 사라진 거죠? 지금은 왜 고영훈이랑 같이 있는 거고요? 고영훈이 협박했나요?”수영은 송서윤을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가 잘못 본 거예요. 고 대표님은 킬러와 같이 있지 않았어요.”수영은 정말 송서윤이 싫었다. 왜 남의 마음은 아예 보지 않는 걸까.고영훈이든 심건

  • 가장 가까운 배신   제411화

    동봉우는 자리에 앉아 모든 상황을 예리하게 지켜보았고 정계 인사들은 앞다투어 심건모에게 말을 건넸다.그는 시종일관 무심하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며 가끔 응답했다. 대화는 늘 관심 밖의 주제에 머물 뿐 핵심에 닿는 법이 없었다.이때 종업원의 안내로 피부과 과장이 들어왔다.“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심건모가 덤덤하게 말했다.피부과 과장은 황송해하며 송서윤의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아주었다. “사모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상처가 자꾸 벌어지면 흉터가 남아서 보기 흉해질 수 있어요.”고영훈은 촉촉한 송서윤의 눈동자가 심건모와 마주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다친 손가락을 보니 오늘 아침 학교 정문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리던 모습이 떠올랐다.고영훈은 초조하게 다가가 물었다. “내가 아침에 다치게 한 거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룸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송서윤은 고영훈을 상대하는 대신 심건모의 손을 꼭 잡았고 심건모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안에 가두어 감싸안았다.그때 고영훈은 초라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는 결국 자리로 돌아갔다.음식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아진시 정통 요리들이었다.동봉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별미를 좀 맛보게나.”사람들이 젓가락을 들기 시작했다.송서윤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끊임없이 그녀의 눈앞에 놓였다.그녀는 무척 맛있게 식사를 이어갔다.심건모는 송서윤의 곁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그녀가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까지.심건모가 입을 열었다. “맛있어?”그는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와 분홍빛 입술에 남은 마지막 디저트, 크림케이크의 흔적을 가만히 응시했다.“네. 맛있어요.” 송서윤이 나직하게 답했다.“나도 좀 맛볼까?” 심건모가 다시 물었다.“네?”송서윤이 심건모에게도 케이크 한 조각을 챙겨주려던 찰나였다.송서윤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심건모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고개를 숙여

  • 가장 가까운 배신   제410화

    송서윤은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손을 댈 가치조차 없어.” 심건모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채 무심한 듯 말을 이었다. “손만 아프잖아.”그의 숨결이 조금씩 그녀의 입술에 닿았고 그녀의 마음까지 닿으려 애쓰는 듯했다.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렀고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낮아졌다. 그녀가 들을까 봐 겁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어주길 바라는 듯한 목소리였다.심건모가 말했다.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송서윤은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툭 떨어진 눈물이 입을 맞추고 있던 그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키스는 부드럽고 애틋했으며 동시에 씁쓸했다.한바탕 정적이 흐른 뒤였다.“왜 울어?”“그만 울어.”심건모는 송서윤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랬다. “밥은 먹었어?”송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선배는요?”“선배한테 밥 사줘야 하는데.” 송서윤이 차 문을 열려 하자 심건모가 말렸다. 지금은 안 된다.심건모의 시선이 붉게 달아오른 송서윤의 얼굴에 머물렀다. 너무나 가냘프고 고왔다.“왜 소 교수에게 밥을 사려는 거야?”“아까...” 송서윤은 이정희와 그 한약 그릇을 떠올리더니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트북이 합선돼서 타버렸는데 마침 선배가 와서 도와주셨거든요.”“당연히 사줘야죠.”심건모의 품에 안겨 있던 송서윤은 노트북을 꺼내 두 사람 사이에 펼쳐 보이며 웃었다. “다행히 제가 끌 때 인터페이스를 숨겨두는 습관이 있어서 아까 성범이랑 여수진한테 지뢰 찾기 시스템을 들킬 뻔했는데 빠져나갔어요.”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물론 봤어도 알아내진 못했겠지만요.”심건모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소 교수가 널 찾아온 용건이 뭐야?”“밥 먹자고요.” 송서윤이 회상하며 답했다.“참 한가한 사람이군.”심건모는 나직이 한마디 하고는 송서윤을 안아 옆 좌석에 앉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치맛자락을 끌어 내려

  • 가장 가까운 배신   제409화

    서지원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사진이 모두 삭제된 휴대폰을 돌려받았다. 특수경찰이 그녀의 귓가에 차갑게 경고했다.“허가 없이 타인의 사생활을 촬영한 사진은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발생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습니다!”그들은 서지원을 지나쳐 곧장 차 주변을 에워쌌고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게 차단했다.서지원은 방금 송서윤을 안았던 남자를 떠올렸다. 꼿꼿하고 건장한 체구, 송서윤을 감싸안은 팔목에서는 엄청난 힘이 느껴졌고 힘을 줄 때마다 손등에 핏줄이 드러나며 팽팽한 긴장감과 섹시함이 넘쳐흘렀다.무심하고 소외감이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분위기의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송서윤을 바라볼 때만큼은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온몸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그가 송서윤의 새 남편인 모양이었다.서지원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고영은에게 듣기로는 송서윤이 고영훈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대단한 권력자와 결혼했다고 했다.서지원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하면 TV에서 보던 것처럼 기품은 있어도 늙고 못생긴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고영훈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분위기를 가진 남자일 줄이야.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영훈이 송서윤이 재혼했는데도 그녀를 놓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서지원의 마음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찼다.송서윤이 대체 뭐라고 내로라하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그녀를 사랑한단 말인가.서지원의 시선이 소주원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또 한 명 더 있네!’소주원이 다가가려 했지만 특수경찰에게 제지당했다.차는 내부가 보이지 않는 안전유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방음 처리까지 완벽했다. 차 밖의 사람들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그럼에도 소주원은 포기하지 못한 채 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 안.묘한 기류가 감돌며 실내 온도가 끊임없이 상승했다.심건모의 키스는 애틋하면서도 다정했고 동시에 절제되어 있었다.송서윤은 정신을 잃은 채 그의 부드러움에 빠져들었다.심건모는 입술을 떼고 그녀

  • 가장 가까운 배신   제408화

    그림자 하나가 순식간에 날아들더니 짝 하고 뺨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서지원은 자신이 때린 소주원의 얼굴을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선배, 괜찮아?” 송서윤이 걱정스레 소주원을 살폈다.소주원은 뺨을 문질렀다. 사실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송서윤이 걱정해 주자 내심 기분이 좋아 조금 더 문질러 보였다.“너 미쳤어?”“아직도 네가 고고한 사장 부인이라도 되는 줄 아니? 너만 사람을 때릴 수 있고 너는 맞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예전에 네 비위를 맞춰준 건 다 영훈이의 체면을 봐서였어.”서지원은 송서윤을 향해 악에 받쳐 말을 쏟아냈다. “예전에 나랑 영훈이 사이를 망쳐놓더니 이제는 나랑 민호 씨 사이까지 망치려 들어?”“경고하는데 민호 씨 근처엔 얼씬도 마. 안 그러면 나도 더 이상은 안 봐줘!”서원 그룹은 무너지기 직전이고 고영훈이 서지원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상황에서 이민호는 그녀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남자였다.송서윤은 대꾸 대신 곧바로 서지원의 뺨을 갈겼다. 서지원이 멍해진 틈을 타 다시 한번 뺨을 내리쳤고 서지원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송서윤은 바닥에 쓰러진 서지원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서지원은 양 볼을 감싸 쥔 채 아픔에 눈물을 흘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송서윤을 쳐다봤다.그랬다. 예전의 송서윤은 손찌검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연달아 손을 올리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부드럽기만 했던 그녀였다.그래서 그들 모두가 마음 놓고 송서윤을 속여왔던 것이다.“나를 협박해?” 송서윤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 말 못 알아들었니?”“매달리는 건 이민호 쪽이야!”“능력이 있으면 이민호가 내 근처에 못 오게 잘 간수해 봐.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않게.”소주원은 송서윤이 자신 때문에 서지원을 응징하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그는 송서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서윤아, 네 손에서 피가 나.”그제야 송서윤은 레이저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았던 손가락을 떠올렸다. 레이저 치

  • 가장 가까운 배신   제407화

    “서윤이의 실력으로는 로봇 시스템은커녕 어떤 시스템도 해킹할 수 없어요.”“하지만 여수진 씨를 이겼잖아요.” 성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수진은 성범이 개발한 로봇 시스템을 단 몇 초 만에 뚫을 능력이 전혀 없었다. 성범은 송서윤이 여수진을 두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이겼던 일을 떠올렸다. 어쩌면 요행이나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럴 리가요. 분명 부정행위였을 거예요.” 서지원은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그 순간, 송서윤이 다가와 서지원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행사장 안의 모든 사람이 일순간 조용해졌다.서지원은 한쪽 뺨을 감싸 쥔 채 송서윤을 노려보았다. “네가 뭔데 나를 때려?”송서윤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빛에는 서늘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 명예를 더럽힌 대가치고는 가벼운 줄 알아.”“명예를 더럽혀?” 서지원이 비웃었다. “너랑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네 실력을 내가 모를 줄 아니? 예전에 영훈이가 오냐오냐해주고 다들 네 비위를 맞춰주니까 정말 네가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어?” 서지원이 비웃으며 조롱 섞인 투로 말을 이었다. “소문 들었어. 이제는 권력자가 뒤를 봐주는 사모님이 됐다며? 그래서 예전처럼 사람들이 다 네 비위를 맞춰줄 줄 알았니?”“꿈 깨!”“경원시에서는 아무리 대단해도 네 멋대로 할 수 없어.”서지원의 말을 들은 성범과 여수진은 서로 눈을 맞추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송서윤이 그렇게 대단할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지원은 송서윤을 아예 진흙탕 속으로 처박으려는 듯 점점 더 심한 말을 내뱉었다.송서윤은 서지원이 이토록 추악하게 변했을 줄은 몰랐다. 과거의 실낱같은 정마저도 완전히 타버려 재가 되었다.“누가 감히 내 동생을 괴롭히나?”그때, 귓가에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이민호가 지팡이를 짚으며 사람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은 이산 그룹의 로봇 시범 운영일이었기에 주인인 그가 현장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