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며칠 동안 깊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지수는 청담동 제이아우라 사무실로 박진우와 이현을 불렀다. 차분한 찻잔의 김이 피어오르는 정적 속에서, 지수가 두 사람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김미자를 공격할 생각이에요."진우와 이현의 시선이 동시에 지수에게로 쏠렸다. 지수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그 첫 단추로, 그녀가 오랫동안 후원해 온 유전자 연구소를 타깃으로 잡았어요."지수의 결연한 선언에 진우는 가만히 지수의 손등을 따뜻하게 토닥여주며 묵묵한 응원을 보냈다.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이현이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유전자 검사 결과 조작 비리를 터뜨리는 게 가장 파급력이 크겠네요. 우선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소문을 퍼뜨려 밑작업을 치고, 그 뒤에 대형 탐사보도 프로그램에 익명 제보를 때리는 건 어떻습니까?""저도 그게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보를 하려면 확실하고 명백한 물증이 있어야 해요."지수가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나지막하게 내쉬었다."우리가 가진 건 과거 강수한에게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임신했던 유진 씨가, 가온이를 데리고 강도진의 본가에 갔을 때 김미자에게 직접 들었다는 정황 증언뿐이에요. 김미자가 자신이 후원하는 곳의 검사 결과가 아니면 믿지 않겠다고 했던 그 이야기요."그러자 이현이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전혀 걱정할 게 없다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아, 그 걱정이라면 접어두셔도 됩니다, 대표님.""네?""예전에 강도진 아이 건으로 김미자의 뒤를 캐고 조사할 때, 이미 그 유전자 연구원 내부 비리 장부랑 검사 결과 조작 모의 정황이 담긴 녹음 파일까지 싹 다 확보해 뒀거든요."지수가 놀란 눈으로 이
성수동 메인 쇼와 바이어 피칭이 끝난 뒤, CB의 이번 F/W 시즌 수주 실적은 강도진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제이아우라가 보여준 파격적인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찰스 킴의 이름으로 발표한 세컨드 잡화 라인의 대박 덕분에 지난 시즌과 비슷한 수준의 매출은 방어할 수 있었다. 패션계의 냉정한 시선 속에서도 최소한의 체면은 차린 셈이었다.지난 수주일 동안 대표실과 작업실을 오가며 지쳐있던 도진은 드디어 며칠 만에 포스트 빌리지 자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집은 그저 몇 시간 눈만 붙이고 나가는 거처에 불과했다.거대한 포스트 빌리지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도진을 맞이한 것은 서늘하고 묵직한 적막뿐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사람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한때 이 집을 채우고 있던 이지수와의 흔적은 이제 희미하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예전처럼 지수의 부재가 도진의 가슴을 짓누르거나 괴롭히지는 않았다. 서서히 지수의 잔상은 도진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중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도진의 가슴 한구석을 송곳처럼 파고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수진이 낳았던 그 작은 아이. 핏덩이 시절 인큐베이터 안에서 힘겹게 숨을 내쉬다, 마침내 도진의 품에 안겨 가냘픈 온기를 전해주던 그 어린 생명의 촉감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블랙다이아몬드 사건으로 온 세상이 자신을 압박해 올 때, 도진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던 그 아이.도진은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 수진이 아이를 위해 화려하게 꾸며두었던 아기방 앞이었다. 아이를 보낸 뒤 문을 잠가버린 채 단 한 번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곳이었다.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자, 오랫동안 갇혀있던 건조하고 먼지 쌓인 공기가 밀려 나왔다.불을 켜지 않은 어스름한 방 안, 도진은 천천히 아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침대 모서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작은 오프화이트 빛 겉싸개가 눈에 들어
공기 중에 가죽 무두질 냄새와 특수 접착제 향이 서늘하게 감돌고 있었다. 한유현은 며칠째 밤을 지새운 탓에 핏발이 선 눈으로 정면에 올려진 세 종류의 구두와 두 종류의 가방 샘플을 바라보고 있었다.은은하면서도 묵직한 광택을 내뿜는 앤티크 샴페인 골드 장식, 절제되면서도 여성의 발목 라인을 가장 완벽하게 감싸 안는 사선 스트랩, 그리고 과한 장식을 배제한 채 오직 최고급 가죽의 결과 클래식한 골드 버클만으로 품격을 완성한 토트백. 강도진 대표가 지시했던 ‘찰스 킴의 드레스와 어우러지면서도 그 자체로 독보적인 상품성을 지닌 스페셜 잡화 라인’의 완성이었다."유현 디자이너님, 이거…… 진짜 미쳤는데요?"도진이 붙여준 보조 어시스턴트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샘플 구두의 골드 장식을 쓸어내렸다."찰스 디렉터님이 만든 그 딱딱한 드레스 아래에 이 앤티크 골드가 배치되면, 드레스까지 살고 구두는 구두대로 빛날 것 같아요. 당장 바이어 피칭에 내놓아도 대박 날 것 같습니다."유현의 가슴이 뜨겁게 요동쳤다. 찰스 킴의 그늘 아래서 이름 없는 어시스턴트로 짓밟히며 도면을 빼앗기고 뺨을 맞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강도진 대표님이 내준 칼날이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유현이 결연한 표정으로 샘플들을 박스에 정성껏 포장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 작품들은 도진이 준비한 프리오더 바이어 피칭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을 발할 터였다.다음 날 오전, VIP 및 글로벌 바이어 대상 CB 프리오더 피칭 현장.넓은 피칭룸 내부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찰스 킴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바이어들에게 자신의 F/W 메인 드레스 라인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어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미 며칠 전 제이아우라의 밤 쇼를 경험한 그들에게, 찰스의 전통적인 드레스는 다소 답
유현은 밤을 새워 수십 장의 드레스를 그려 나갔다. 연필심이 무뎌지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짓무를 때까지 종이를 채웠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도진의 마음에 들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원석으로서는 아주 훌륭하지만…… 하이엔드 드레스의 중량감을 잡아줄 입체적인 구조나 패턴 계산에서는 다소 미숙하고 불안정한 스케치입니다."도진의 차갑고도 정교한 지적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초조함과 절망감에 입술을 깨물던 유현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도진의 손수건에 닿았다. 깨진 찻잔 파편에 손을 벨 뻔했을 때, 도진이 손수 손가락을 감싸며 다정하게 닦아주었던 그 고급스러운 실크 손수건.유현은 홀린 듯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향수 냄새. 찰스의 그늘 아래서 이름 없는 어시스턴트로 짓밟히던 자신을 처음으로 '디자이너'로 바라봐 준 유일한 사람. 자신을 알아봐 준 첫 번째 구원자.'대표님에게 인정받고 싶어. 대표님이 완성된 내 드레스를 보고 미소 짓게 만들고 싶어…….'간절한 갈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피어오른 순간, 유현의 손가락 사이로 실크 손수건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책상 위에 우아하고 입체적인 곡선의 주름을 만들어냈다.유현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억지로 계산해서 그려 넣은 각도가 아니었다. 겹겹이 층을 이루며 아래로 떨어지는 실크 특유의 자연스럽고 깊이감 있는 무게감!유현은 멈췄던 연필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도진이 지적했던 미숙한 중량감과 패턴 계산을 완벽하게 보완한, 마치 겹겹의 장미 꽃잎이 피어나는 듯한 드라마틱한 실크 러플 피날레 드레스가 스케치북 위로 미친 듯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그렇게 완성된 디자인이 도진의 앞에 펼쳐졌다.그곳에는 쇄골 라인을 과감하게 드러낸 오프화이트 튜브톱 드레스가 그려져 있었
성수동 ‘더 문’ 최상층 초승달 정원.자연이 내뿜는 서늘한 밤바람과 수천 송이 생화가 머금은 짙은 향기가 정원 전체를 몽환적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낮 동안 CB의 파티장을 조용히 빠져나왔던 VIP들과 거장 배우, 그리고 패션계에서 가장 깐깐하기로 소문난 시니어 평론가들이 최상층 애프터 파티장에 빈틈없이 모여든 상태였다.투명한 특수 강화 글라스 파사드너머로 성수동의 야경과 은은한 달빛이 정원 중앙의 분수대 위로 영롱하게 산란했다. 은은한 어쿠스틱 현악 4중주의 유연한 선율 속에서 최고급 빈티지 샴페인 잔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지수 대표, 오늘 쇼는 정말이지 패션계의 패러다임을 바꾼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해외 하이엔드 부티크의 수석 바이어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지수에게 잔을 건븸을 청했다."인공적인 조명 하나 없이 밤하늘의 달빛과 살아있는 생화만으로 이런 고품격 캣워크를 완성하다니…… 찰스 킴이 보여준 CB의 딱딱하고 인공적인 '각'에 질려있던 참에 진짜 오트쿠튀르의 정수를 봤습니다. 특히 Z의 루비 네크리스는 드레스의 관능미를 완벽하게 통제한 최고의 예술작품이었습니다.""과찬이십니다. 제이아우라가 지향하는 건 틀에 갇힌 미학이 아니라, 인물과 주얼리가 함께 숨 쉬는 생명력이니까요."지수가 우아한 미소로 응수하는 동안, 옆에 서 있던 진우는 와인 잔을 가볍게 기울이며 파티장의 온도를 정교하게 살폈다.평소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던 은둔형 재벌가의 수장들과 글로벌 주얼리 컬렉터들이 지수와 지나 디렉터 주위로 길게 줄을 서서 명함을 내밀고 있었다. 신생 브랜드에 불과했던 제이아우라가, 오늘 밤 단 한 번의 쇼로 하이엔드 패션계의 왕좌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완벽하고도 화려한 풍경이었다.지루할 법도 한 파티 내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던 진우가 지수에게 한 걸음 다가앉으며 나지막이 잔
성수동 폐물류창고 ‘더 글로브’.낮 동안 열린 CB의 런칭 쇼가 끝난 직후 마련된 애프터 파티는 외견상 하이엔드 브랜드다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트레이 위에 놓인 샴페인 잔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셀럽들의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며 홀 안을 채웠다.하지만 공기 중에 감도는 기류는 기묘하게 산만하고 서늘했다. VIP 바이어들과 패션 에디터들의 대화는 건조한 겉치레 인사로 겉돌았고, 찰스 킴을 둘러싼 찬사 역시 그의 명성에 비하면 빈껍데기에 가까웠다."찰스 디렉터님, 오늘 쇼 멋졌습니다. 그런데 정식 납품 때는 배포된 룩북 피스 기준으로 실루엣이 맞춰지는 건가요? 현장 실물 핏과 차이가 좀 있던데요.""아, 그건 현장감 있는 연출을 위한 약간의 수정이었습니다. 정식 납품은 당연히 룩북 기준으로 들어갑니다."바이어들의 깐깐한 질문에 찰스 킴은 손에 쥔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아, 아쉽군요. 저는 룩북보다는 오늘 실물 핏이 훨씬 마음에 들었는데…… 혹시 변경은 불가능한가요?""글쎄요. 그건 대표님과 상의해 봐야겠습니다."찰스는 능숙하게 표정을 숨겼지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까지 다스리지는 못했다. 샴페인 잔을 쥐어짠 손가락 마디가 허옇게 불거졌다. 수개월간 제 이름을 걸고 공을 들인 메인 디자인이, 오늘 백스테이지에서 임기응변으로 손댄 핏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찰스의 오만한 자존심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그리고 그의 일렁이는 시선은 백스테이지 한편에서 연신 전화를 받느라 정신없는 스태프들에게 향해 있었다. 프리오더 수치의 80% 이상이 자신이 목숨을 걸었던 메인 라인이 아닌, 막내 어시스턴트의 디자인을 가로채 급조한 '세컨드 구두'로 쏠리고 있다는 보고에 찰스의 속은 타들어가다 못해 까맣게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한편, 파티장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
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