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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허락 없이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Author: 릴리박

1화.

Author: 릴리박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4 08:40:51

1화.

봄이 서서히 퇴색되고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이다.

그 계절의 경계를 걸으며 나는 지친 표정으로 단골 카페 ‘Moment’에 들어섰다.

“에스프레소 더블, 주세요.”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주문했다.

“오늘 무슨 일 있으셨나 봐요?”

나의 안색을 살피며 남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렇지 않아도 새로 맡은 일이 진행이 느려 답답한 하루를 보냈었다.

“네. 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어요.”

“흠. 더블인데 절반만 받아드리면 되죠?”

나에게 확인차 물어보던 남자는 이내 몸을 돌려 그라인더 안에 커피를 갈았다.

음료를 만드는 시간은 고작 1분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범한 동네, 평범한 풍경. 카페를 마주 보고 있는 건 이 동네에서 유명한 수제 빵집이었다.

그 짧은 시간,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바게트를 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나왔습니다.”

담백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오늘 남자는 가슴팍이 살짝 보일 정도로 루즈한 반팔티를 입고 있었다.

갈색의 얇은 테의 안경을 낀 남자가 커피를 주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시원스럽게 뻗은 또렷한 눈매와 날카로우면서도 상냥한, 모순된 눈빛이 오늘따라 심장을 더 간질거리게 했다.

높은 콧대 아래로 립글로스라도 바른 듯 촉촉한 입술을 가지고 있는 어린 남자를 향해 내가 입을 열었다.

“계산 안 했었죠?”

나는 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눈이 몇 번 깜빡거리는 시간 동안 나의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왜 안 받아요? 계산해야죠, 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남자의 시선이 내 핸드폰에 머물고, 아마 손이었을까.

“오늘은, 그냥 드릴게요.”

“…?”

“저… 이제 곧, 그만둬요.”

“아.”

찰나의 시간.

그래서? 나한테 왜 커피를 그냥 주는 건데? 그만두니까 선물하는 거니?

대놓고 묻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입을 열면 나와버렸을 아쉬움 때문이었는지도.

남자와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한 지도, 웃기지 않는 말장난을 한 지도, 3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겨울의 끝자락에 이곳에서 처음 만났었다.

그사이 봄날은 가고, 무더운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날.

그런 날, 네가 마치 내게 이별을 고하듯 말한다.

이곳을 그만둔다고.

고작 커피 한잔, 적선하듯 서비스로 주면서 마지막 인사를 한다.

너, 그동안 나 가지고 놀아서 재밌었겠다? 어리다고 봐줬더니 이렇게 뒤통수야, 진짜.

남자를 향한 서운함은 나의 예민한 신경을 건들었고, 점차 신경질로 변해갔다.

“시급 받는 알바생에게 얻어먹고 싶지는 않네요. 그리고 나 그냥 받는 거 싫어해요.”

그 신경질은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발동했다.

나는 핸드폰을 살짝 흔들며 어서 계산하라고 재촉했다.

남자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의 눈빛은 점점 안경을 뚫을 것처럼 날카롭게 변해갔다. 이내 피식 입가를 올린다.

이윽고 커다란 상체를 내게 숙이며 은밀한 말을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아닌데.”

그럼 뭔데?

나는 그런 눈빛으로 남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3개월 내내 남자의 감당 안 되는 말과 행동에 어리숙하게 넋이 나가길 여러 번.

마지막까지 그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기자님이 싫다니까.”

말을 마친 그가, 내 손에 든 핸드폰을 휙 가져갔다.

뭐야…. 이렇게 순순히 계산할 거였으면서, 왜 사람 마음은 쥐락펴락하는 건데?

나는 유치했던 신경질을 금세 후회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어른스럽게 이성적으로 대할 걸 그랬나?

이 남자 앞에서는 왜 이렇게 바보가 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태로는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갈 수는 없었다.

“테이크아웃 할게요. 종이컵에 옮겨줘요.”

나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서운해요?”

남자는 나의 속을 다 들여다본 듯 말했다.

“…!”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그만둔다니까, 서운하냐고요.”

“설마, 서운할 리가요.”

“완전 거짓말.”

또다시 시작된 말 따먹기.

그것도 기분 좋을 때 받아주는 거다. 지금은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 헤퍼요? 아님, 내가 헤퍼 보이나?”

“아, 그랬나요? 오해하지 마요. 나 헤픈 사람 아니니까.”

“그럼, 나한테 장난치니? 재밌어?”

“와… 기자님이 나한테 반말하니까 더 섹시해.”

“뭐, 뭐?”

“나, 기자님 좋아해요.”

“…!”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하지? 너 제정신이냐고 물어봐야 하나?

이 남자는 훅하고 들어오는 게 특기인 게 분명했다. 그 공격에 나는 바보처럼 언제나 넋이 나갔다. 어처구니없게도.

“기자님, 나랑 사귈래요?”

“너, 미쳤구나?”

“사랑하면, 원래 미치는 거예요.”

드디어 고은별,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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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4화.

    164화.진료실을 나온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시간은 오후를 훌쩍 넘어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은별은 곧장 2층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많이 피곤해?”재훈이 누워있는 은별을 살피며 물었다.“조금….”피곤하다기보다 반짝이의 심장 소리를 듣지 못해선지 기운이 없었다.“잘래?”“응. 그런데 여보는 내일부터 회사 출근하는 거지?”은별이 졸린 표정으로 물었다.“당신이 원하면 당분간 회사 안 나가려고.”“그래도 돼?”“안 될 게 뭐 있나. 회사 망하면 또 차리면 되지.”“뭐야, 훗. 이상한 말 할 거면 나 잘래.”은별은 재훈의 장난말에 빙긋 웃고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그래, 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2주 뒤에 반짝이가 쿵쾅쿵쾅하며 인사할 거야, 분명히.”재훈은 은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가 깊은 잠이 들 때까지 그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늦은 저녁.은별이 눈을 떴을 때 재훈은 제 옆에서 몸을 엎드린 채로 자고 있었다.고개는 은별을 향해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오늘 산부인과에서 받은 반짝이의 초음파 사진이 있었다.그 초음파 사진이 그의 얼굴 쪽에 놓인 것을 보니, 아마도 한참을 들여다보다 그도 모르게 잠이 든 것 같았다.은별은 몸을 일으켜 앉아 재훈의 얼굴에 있는 안경을 살며시 빼내었다. 그러곤 안경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자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순둥이 강아지 같았다.26살에 아이 아빠가 된 정재훈을 은별이 찬찬히 훑었다.일주일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은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씻고, 입고, 먹는 것- 며칠 못가 재훈은 아주머니 앞에서도 은별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심지어 그녀가 잠드는 순간까지 함께하면서 은별을 보살폈다.반짝이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잘 때는 자장가를 불러줬는데, ‘반짝반짝 작은 별’만 끊임없이 불러대 종국엔 은별이 귀를 막는 사태까지 다다랐다.그제야 재훈은 자장가를 바꿨다.그 바뀐 자장가가 ‘Twinkle Twinkle Little Star’였다.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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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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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1화.

    161화.재훈이 은별을 부축하듯 껴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현관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김 여사가 반갑게 맞았다.병원을 나서면서 재훈은 김 여사에게 자신과 은별이 같이 들어가니 식사를 차려달라 미리 말한 터였다.“오셨어요? 제가 저녁밥 따뜻하게 지워놨어요.”“네, 잘 먹겠습니다. 아주머니, 오늘은 이만 퇴근하셔도 돼요.”재훈이 김 여사에게 말했다.“벌써요?”김 여사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오늘 이래저래 수고가 많으셨잖아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아, 네, 사장님. 근데 사모님, 괜찮으세요? 안색이….”김 여사가 힘없이 재훈에게 기대어 있는 은별을 보며 물었다.분명 오후에 외출할 때까지만 해도 안색이 밝았던 은별이었다.한데 저녁이 다 된 시간에 들어온 은별은 멍한 시선으로 기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이 사람이 좀 피곤해서 그래요.”재훈이 대신 대답했다.김 여사는 안쓰러운 얼굴로 은별을 보며 편히 쉬라는 말을 하고는 곧장 퇴근을 했다.재훈이 은별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음식 따뜻할 때 뭐 좀 먹을래?”“…응.”은별은 딱히 음식 생각이 없었으나,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잠시 뒤.두 사람이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재훈은 항상 하던 대로 은별의 밥 위에 반찬들을 올려주었다.그렇다고 예전처럼, 강요하지는 않았다.은별에게 먹고 싶은 반찬을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밥 위에 올렸다.은별은 속이 좋지 않았으나, 그것 또한 아이가 제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였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그 모습을 재훈이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그 또한 초음파에서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이 큰 게 사실이었다.한데 의사에게 ‘유산’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동안 자신이 은별의 몸을 함부로한 것에 대한 심한 죄책감이 몰려왔다.불과 어제만 해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양껏 은별을 가졌었다.아이가 놀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0화.

    160화.“당신이 무슨 말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 당신도 아이도 절대 포기 안 해.”“재훈아, 그런 거 아니야.”“아니야? 진짜야?”은별의 말에 재훈은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화색이 돌았다.그는 은별이 아이를 포기한다고 말할까 봐, 더는 말을 하지 못하게 끊어냈었다.그 말을 듣게 되면,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도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재훈은 스스로가 두려웠다.“정말 그런 거 아니야. 나, 아이 포기하지 않아. 그런 걱정, 하지 마.”은별의 확답을 듣자, 재훈은 솟구치는 안도감에 와락, 은별을 껴안았다.“하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하아….”은별은 재훈의 어깨 위로 턱이 들린 채 그가 연신 쏟아내는 안도의 숨을 느꼈다.사실 그녀는 재훈에게 어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고백하려 했었다.어제부터 임신을 알고 있었다고.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서 너에게 잠시 숨긴 것뿐이라고.아이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재훈아.”“어….”그가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로 대답했다.“파리에서 일, 숨기고 사라져 버렸던 거 미안해.”“….”“너랑 결혼한 사실,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네가 아이 빨리 갖길 원했었는데, 같은 마음이 아니었어서 미안해.”“….”“여보, 아무래도 나, 아이 가진 것 같아.”“…!”은별을 품에 안고 있던 재훈은 그녀의 마지막 고백에 놀란 눈으로 그녀와 마주 보았다.안경 너머 수려하게 뻗은 아름다운 재훈의 눈이 은별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가, 이내 흐릿해졌다.멈출 줄 모르는 눈물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순식간에 적셨다.이 고백이 이리도 어려웠을까.은별은 더는 제 남편, 정재훈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아이를 위해서라도.좋은 엄마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제 뱃속의 아이에게 문제 앞에 회피하고 거짓을 말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아이의 아빠인,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정재훈을 위해서라도.재훈아,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사실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59화.

    159화.재훈은 은별을 찾기 위해, 일부러 편의점에 차를 주차해 놓고 집으로 가는 인도를 빠르게 올라갔다.고급 빌라의 주택 단지라도 중간중간 골목들이 있었다. 그 골목 곳곳을 매의 눈으로 살피며 올라갈 때였다.그의 눈에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인도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묻고 우는 여자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자신의 아내, 고은별이었다.왜 저렇게 세상이 다 무너진 것처럼 울고 있는 것일까.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가 임신한 상태일 수도 있다는 것을.그래서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일까.원하지 않은 아이가 생겨서….엄마도 저를 가졌을 때 저렇게 울었을까.원하지 않은 아이, 정재훈을 가져서.우느라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도 모르는 아내, 고은별을 보며 재훈은 자신의 엄마를 덧씌웠다.아버지랑 살면서 평생 행복하지 못했던 엄마.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엄마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서였다.결국에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모양을 찾아 떠났고, 사랑을 잃은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었다.그리고 자신은 미운 오리 새끼가 되었다.미운 오리 새끼는 나 하나로 충분해.내 아이에겐 절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할 거야.그렇다면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아버지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아내의 의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휘둘렀던 남편이 아닌, 아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억압하지 않는 남편.내가 그런 남편이 된다면, 은별은 엄마와 다르게 내 옆에서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우리의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키우면서, 평생 헤어지지 않고 사랑하며 살지 않을까.지금처럼 전혀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행동은 이제 안 하지 않을까.“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거짓말이지.”재훈은 쭈그려 앉아 있는 은별을 일으켜 세웠다.은별은 재훈에게 어깨가 붙들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꽤 오랫동안 앉아 있었기에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윽.”“하아, 안 되겠다. 이러다가 기절하지.”순식간에 재훈은 은별을 들어 옆으로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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