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가요.”서운혁이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지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백하린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예전에 백하린에게 했던 약속과, 그녀가 해성 그룹과 자신 때문에 입은 여러 상처를 생각해 보상할 방법은 제시했다.“하린 씨와 윤후에게 충분한 돈을 줄게요. 둘이 해외로 나가요.”“하린 씨 부모님도 이제 은퇴할 나이에요. 해성 그룹에서 정식 절차를 밟아 서경시에서 노후 생활에 문제없도록 해 드릴 거고. 원하면 부모님까지 함께 데려가도 돼요.”그 말을 듣고도 백하린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서운혁이 나를 내쫓겠다고? 해원시도 안 되고 서경시도 안 되고, 이제는 아예 국내에조차 내가 머물 곳이 없다는 건가? 그럼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노력은 뭐였지? 또 하나의 우스운 농담이었나?’예전에는 강지현 때문에 가정을 잃었고... 이제 또 강지현 때문에 마지막 남은 행복의 희망까지 사라졌다.‘왜 또 강지현이야!’“운혁 씨... 운혁 씨가 저를 돌봐 주겠다고 했잖아요. 제 과거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다시 시작해 보자고 했잖아요. 세상 남자가 다 이도운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했잖아요!”백하린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점점 무너졌다. 결국 서운혁에게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하지만 서운혁은 예상하였다는 듯 오히려 차분했다.그녀가 분노를 다 쏟아 내고 나서야 차갑게 말했다.“미안해요.”어떤 설명도 없었다. 마치 자신이 백하린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 한 마디뿐이라는 듯했다.백하린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아팠다.그녀는 옆 테이블에 놓인 과도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나 칼을 집어 들고 자기 목을 찌르려 했다.서운혁은 재빨리 손잡이를 붙잡고 힘으로 몇 번 제압해 칼을 빼앗은 뒤 멀리 내던졌다.“미쳤어요? 또 이 짓이에요?”“그래요. 저 미쳤어요! 다들 저만 상처 입힐 거면 차라리 죽는 게 당신들한테 더 좋은 거 아니에요?”백하린이 거세게 몸부림쳤지만 결국 서운혁이 두 팔을
비서와 탐정사무소 직원들이 동시에 움찔했다.“서 대표님...”“나가라고 했잖아요!”서운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비서는 더 묻지 못하고 곧바로 탐정사무소 직원들에게 눈짓해 함께 방을 빠져 나갔다.스위트룸 안에는 죽은 듯한 정적만 남았다.서운혁은 홀로 소파에 앉아 있다가 한참 뒤 다시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눈은 종이에 적힌 이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드디어 여동생을 찾았다.그런데 자신은... 이미 그 여동생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바로 그때 백하린도 방 앞까지 도착했다.문밖에 서 있는 비서와 탐정사무소 직원들이 한눈에 들어왔다.탐정사무소 직원은 작은 목소리로 비서에게 따지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요? 서 대표님이 오늘 잔금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우리 대표님이 그 돈 몇 푼 떼먹을 사람 같아요? 분명 당신들 조사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겠죠. 강지현이 누군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요?”“강지현이 누군데요?”비서는 할 말을 잃었다.‘이 사람들은 평소 뉴스도 안 보나?’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하린이 다가왔다.“무슨 얘기예요? 강지현이 왜 나와요?”비서는 백하린을 한번 바라봤다.최근 서운혁과 백하린의 관계가 다시 조금 가까워져서, 비서는 그녀에게 여전히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만큼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별일 아니에요. 백하린 씨, 대표님이 지금 머리가 복잡하셔서요. 찾으실 거면 조금 뒤에 오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탐정사무소 직원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비서가 눈빛으로 강하게 막았다.백하린은 무언가 짐작한 듯 눈빛을 움직이다 들고 온 도시락을 들어 보였다.“운혁 씨랑 같이 밥 먹기로 했어요.”말을 마친 뒤 비서의 만류는 무시하고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한참 뒤 안에서 서운혁이 대답했다.그제야 백하린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방 안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가득했다.서운혁은 소파에 앉아 양팔을 허벅지에 얹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이렇게 무너지고
그런데 정말 여동생을 찾았다니!‘잘됐어!’최근 안 좋은 일이 아무리 많이 생겼어도 이 소식 하나면 전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지금 바로 가져오겠습니다!”비서가 놀라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서운혁이 이제야 결과를 들은 듯하여 보이자 탐정사무소 직원들도 안도했다.“역시 서 대표님이 너무 바쁘셨던 거군요. 저희는 혹시 조사 결과를 믿지 않으시는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그래도 저희가 뿌리부터 아주 꼼꼼히 추적했기 때문에 거의 틀리지 않을 겁니다. 연락처까지 확보했습니다. 마지막 DNA 확인은 대표님이 직접 상대와 연락한 뒤 검체를 받아 진행하셔야 하고요.”서운혁은 기분이 크게 풀렸다.“물론이죠. 고생 많았습니다.”“그 사람에게 연락하는 즉시 오늘 잔금부터 보내겠습니다. DNA 결과까지 나오면 사례금도 별도로 드리죠.”후한 보상을 약속하자 탐정사무소 사람들은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그때 비서도 보고서를 가져왔다.서운혁은 조사 과정을 볼 생각도 없이 바로 결론이 있는 페이지부터 펼쳤다.그곳에는 상대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그런데 익숙한 이름을 보는 순간 서운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는 입술을 살짝 열었다가 고개를 들어 옆 사람을 봤다. 상대는 당황한 표정이었다.“서 대표님, 왜 그러십니까?”“당신들이 찾아낸 사람이...”서운혁은 다시 고개를 내려 보고서를 응시했다.“강지현이라고요?”상대가 이어 말했다.“저희가 굉장히 오래 추적했습니다. 당시 겨울 캠프를 주최했던 기관부터 찾았어요. 참가했던 아이들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여러 학교를 일일이 확인했고요. 운이 좋게도 마침 그쪽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강지현은 당시 학교에서도 성적이 특히 뛰어난 학생이었고 겨울 캠프에 참여한 사실이 학교 기록에 남아 있었다.탐정사무소는 당시 교사를 수소문해 마침내 강지현이 지냈던 보육원까지 알아냈다.그 뒤로는 사람을 찾는 일이 훨씬 쉬웠다.“동명이인이 이렇게 많은데... 이 연락처가 그 사람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주단우는 이미 식사를 끝낸 뒤였다. 소파에 기대 눈을 감고 규칙적으로 숨을 쉬는 모습이 잠든 것 같았다.햇살이 창백한 얼굴에 내려앉아 긴 속눈썹 아래에 작은 그림자를 만들었다.기분 탓일 수도 있고 지금 주단우가 워낙 약해져서일 수도 있었다.평소의 거만하고 건들거리는 분위기가 사라진 얼굴은 의외로 조용하고 얌전해 보여 전처럼 밉게 느껴지지 않았다.현다영은 옆에 있던 얇은 담요를 들어 조심히 그에게 덮어 주었다.그 순간 주단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손바닥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피곤함이 묻은 눈빛은 복잡했다.“피곤하면 방에 들어가서 자요. 제가 부축해 줄게요.”현다영은 약간 불편했지만 곧바로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주단우의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본능적인 욕구였다.원래 주단우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대로 해 버리는 사람이었다.그런데 오늘 현다영의 눈에는 예전처럼 경계심과 혐오만 가득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손을 함부로 댈 수 없었다.주단우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인제 가려고?”“네.”현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푹 쉬고 상처 잘 낫게 해요. 당분간 매일 한 끼씩은 와서 만들어 줄게요.”“강지현이 시킨 거야?”“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그 말을 듣자 주단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하지만 바로 기침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강지현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주단우가 다시 말했다.현다영이 올 수 있었던 것도 강지현이 특별히 휴가를 허락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 여자는 사람 마음을 살피는 데 유난히 능해서, 누가 힘들 때 꼭 따뜻한 걸 챙겨 주곤 했다.사실 주단우가 일찍 퇴원한 이유도 강지현이 병문안을 올까 봐서였다. 예전에는 서로 날을 세웠고 이제 적대 관계를 끝냈다 해도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앞으로 주상 그룹에서 강지현보다 선배이자 오빠처럼 굴고 싶었으니까.“전해 줄게요. 잘 쉬어요.”“..
현다영은 반박하지 않았다. 주단우가 천루비가 절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짚은 건 맞았다.그렇다 해도 천루비는 여전히 피해자였다.현다영은 차마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그럼 착한 사람, 남에게 잘해 주고 싶은 사람은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인 거예요?”주단우가 잠시 침묵했다.“잘못은 아니야. 그냥... 사람 마음이 그렇고 인생이 그런 거지.”“그 쓰레기 남자는요...”“이미 사람 시켜 처리했어.”현다영이 자신의 설명을 믿은 것 같아 보이자 주단우는 그제야 죽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천루비의 일에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인간들을 주단우 역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법적으로 돈을 돌려받게 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하는 정도는 주단우에게 너무 약한 처벌이었다.그도 원래 말로 좋게 해결하는 성격은 아니었다.갚으려면 받은 것보다 더 심하게 돌려줘야 했다.가장 좋은 방법은 똑같은 방식으로 당하게 하는 것이었다.주단우는 곧 수를 써 그 남자의 집안에 연달아 문제가 터지도록 만들었다.아버지 빚은 자식이 갚는다는 명목으로 남자는 가족에게 떠밀려 똑같이 거액의 채무를 떠안았다.하지만 그의 채권자는 주단우가 붙인 사람들이었다. 과거 천루비를 찾아오던 채권자들보다 독촉 방식이 훨씬 거칠어 사흘에 한 번 병원에 실려 가는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새 여자친구 역시 함께 빚쟁이들에게 찍혔다.그녀가 서둘러 헤어져도 소용없었다. 남자 대신 돈을 내놓지 않으면 함께 얻어맞고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다.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단우는 궁지에 몰린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돈 많은 여자를 상대하게 했다.새 여자친구는 결국 천루비와 똑같은 방식으로 하루아침에 버림받았다. 화가 난 그녀는 학교에 남자의 악행을 폭로했고 두 사람은 크게 싸우다 경찰서까지 갔다.남자는 완전히 망신을 당했고 여자와 함께 학교도 자퇴했다.하지만 주단우는 그걸로 끝낼 생각도 없었다.천루비의 목숨을 생각하면 그 남자는 최소한 평생을 대
남자는 갈수록 욕심이 커졌고 소비도 심해졌다. 결국 천루비는 집에 생활비를 보태던 모범생에서 대출에 허덕이며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으로 변했다.경제적인 부담은 점점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채권 추심 메시지가 남자친구에게까지 전달되자 그는 귀찮은 일에 얽히기 싫다며 바로 헤어지자고 했다.천루비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비참할 정도로 매달려 재결합을 부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남자친구가 이미 더 어린 후배와 사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루비의 피땀 어린 돈으로 산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었고 새 여자친구에게는 비싼 선물을 아낌없이 사 줬다.천루비는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천루비는 남자에게 모든 걸 내줬지만 그가 준 가장 비싼 선물이라곤 생일날 할인해서 5000원에 산 케이크 하나가 전부였다.그런데도 당시에는 감동해 울었던 기억이 났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그 순간에는 바람피운 남자를 미워하는 마음보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깊은 무력감이 그녀를 집어삼켰다.그런데 남자와 새 여자친구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천루비를 조롱한 데 이어, 그녀가 거액의 빚을 졌다는 사실까지 학교에 퍼뜨렸다.사람들은 천루비를 피하기 시작했고 학교 측도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채권자들의 독촉으로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빨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절망에 빠진 천루비는 주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시 바빴던 주단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돈만 조금 이체해 주며 연애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 위로했다.하지만 천루비는 끝내 그 돈을 받지 않았다.주단우가 다시 그녀의 소식을 들었을 때 천루비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천루비는 끝까지 나한테 빚진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알았으면 내가 도와줬을 거야. 그 정도 돈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었어.”주단우는 현다영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걸 보고 적당한 순간 덧붙였다.진심이었다. 천루비에게 그 역시 깊은 죄책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