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강하리의 허리를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강하리는 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씨...”마침내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 너 죽고 싶어?”강하리는 그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거친 손길로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부은 입술에 키스하니 입술 색이 더욱 붉어지고 화사했다.구승훈은 피식 웃더니 강하리의 입에 자기 손가락을 슥 집어넣었다.갑작스러운 행동에 강하리는 굴욕감을 느꼈다.구승훈에게 노리개처럼 놀아나는 느낌이 그녀를 너무 힘들게 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꽉 쥐었다. "움직이지 마!”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입속에서 한 바퀴 더듬더니 그녀의 뾰족한 이빨 위에 손을 얹었다."이 날카로운 이빨로 한 번만 더 물어봐!”이 말을 하고 나서야 그는 손가락을 거두었다.강하리는 무서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구승훈은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더니 이유 모를 쾌감이 밀려왔다.이래야 강하리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예전 늘 생기가 없고, 그와 거리를 두고 어려워하는 것보다 나았다."동창회에는 내가 같이 가줄게.”구승훈은 휴지 두 장을 꺼내 손을 천천히 닦으며 말했다강하리의 발걸음이 문득 무거워졌다.그녀는 구승훈을 돌아보았다."뭐라고요?”구승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동창회 때 같이 가자고.”강하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잠옷을 꽉 움켜쥐었다."왜요?”구승훈은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너랑 같이 가고 싶은데 왜 그래?”강하리는 한참 동안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물었다."무슨 자격으로 참가하실려고요?”동창회는 보통 혼자 참석하거나 가족이나 애인을 데리고 참석한다.구승훈이 그녀와 함께 가려고 하는 이 상황에 과연 어떤 신분이 어울릴까?그가 갑의 신분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다.구승훈은 그녀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강 부장은 내가 어떤 자격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강하리는
송유라는 문 앞에 서서 손에 쇼핑백 몇 개를 들고 있었다.송유라는 강하리를 보고 활짝 웃었다."강 부장님, 내가 오빠한테 뭘 좀 전해주러 왔는데, 괜찮으시죠?”강하리는 그녀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차갑게 웃으며 돌아섰다.그녀가 과연 무슨 의견을 제기할 처지나 될까?서재 문 앞에 도착하자 강하리는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송 유라 씨 오셨습니다.”서류를 뒤적거리던 구승훈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서재로 모셔.”거실에 서있던 송유라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강하리의 입술은 빨갛게 부어올랐다.방금 샤워를 했는데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이빨로 깨문 듯 더 발그스름해 보였다.바보가 아닌 이상, 그 둘이 키스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서재에 들어서서 구승훈의 찢어진 입술을 본 후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구승훈은 송유라를 보고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왜 이럴 때 왔지?”송유라는 그를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또 무슨 성질을 부리려고?”구승훈은 잠시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얼굴은 왜 그래?”오늘 강하리의 손이 꽤 매웠나 보다.송유라의 얼굴은 아직도 붉게 부어 있다.구승훈의 물음에 송유라는 바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시선은 강하리한테 머물렀다가 이내 구승훈한테 정착했다."제가 오늘 또 강 부장님을 화나게 했나 봐요.”구승훈의 표정은 한껏 무거워졌다.그는 눈을 돌려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 부장, 네가 때린 거야?”강하리는 부인하지 않았다.기왕 때린 이상, 그녀는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맞아요, 제가 때렸어요.”강하리는 말하면서 구승훈과 시선이 맞닿았다.그녀는 더 이상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의 곁에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송유라가 뭐 대단하다고 번번이 참아줘야 하겠는가!송유라가 구승훈의 첫사랑은 맞지만, 그녀의 거듭된 모욕을 참을 이유는 없었다.강하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심지어 조금의 두려움도 없다.구승훈의 눈에 서늘한
송유라는 억울한 듯 뾰로통해서 말했다.“다른 얘기는 안 했어요, 강 부장님께 오빠한테 선물할 옷 좀 같이 골라달라고 했는데 기분이 상하셨나 봐. 강 부장님은 내가 옷도 사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송유라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강하리는 이런 송유라의 즉석 연기를 보고 내심 감탄하였다. “유라 씨, 알면 됐어요. 다음부터 남의 남자 친구한테 함부로 옷 사주고 그러시지 않길 바라요.”남자 친구라는 말을 듣고 송유라는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구승훈은 의자에 기댄 채 부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송유라는 분해서 쇼핑백을 구승훈에게 내팽개치고 울면서 뛰쳐나갔다.구승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강하리만 응시하고 있었다.“이제 만족해?”구승훈은 냉소를 드리우며 물었다. “연인관계로 발표해도 된다고 대표님이 그러지 않으셨나요?”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구승훈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그는 강하리의 옆으로 다가와서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매만졌다. 마치 맘에든 장난감을 보는듯했다.“여자 친구라, 강 부장이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그러면 애인 사이에 하는 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저녁에 깨끗이 씻고 침대에서 기다려, 우리 재미를 좀 보자고. 응?”말을 마치고 구승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진 방안에는 강하리의 떨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번 판은 내가 이겼나?’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진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눈물을 참는 두 눈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가슴 아파할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닌가 그것도 이쁜 아이한테만 주는 건가, 송유라처럼.거실로 나온 강하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는 구승훈의 비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장난감을 보는 듯한 그 눈빛. 여자 친구라고 했지만,
손연지는 마침내 강하리의 목소리가 이상한 걸 알아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구승훈 그 개자식이 또 괴롭히던? ”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친구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지만, 말도 안 되는 자신의 감정을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는지 몰랐다.“아니야. 그냥 목감기인 것 같아.”“어이구.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져서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 해. 너 몸도 아직 회복되지 않았잖아. 조심해야지.” “알았어.”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통화를 끊었다. 그 순간 초인종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문밖에는 구승훈의 비서 신도윤이 서있었다. 손에는 쇼핑백들이 들려져 있었다. “대표님께서 의상과 액세서리 가져다드리라고 분부했습니다. 내일부터 강 부장님이 회사로 출근하실 거라고...”“네, 고마워요. 고생하셨어요. 신 비서님.”강하리는 비서의 손에서 쇼핑백을 받아 들면서 말했다.신비서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듯했지만 주저하고 있었다. “비서님, 무슨 일인가요?”강하리는 신도윤을 보면서 물었다.신도윤은 잠시 주저하다 이내 큰 결심한 듯 말했다.“강 부장님, 지금 자리에 대신 계시는 그 분, 같이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회사에서 주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비서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네. 그럴게요.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그제야 신도윤은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신 비서를 보내고 강하리의 시선은 쇼핑백으로 향했다. ‘그동안 이런 수작으로 여자들을 달랬던 건가?’아마 오늘 밤의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정말로 감동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이 쇼핑백들이 꼴 보기도 싫어졌다. 강하리는 옷과 액세서리들을 소파에 내동댕이치고 다시 술을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은 바닥이 났고 두 번째 병을 터뜨리려고 할 때쯤 현관문이 열렸다. “오셨네요.”강하리는 돌아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서 돌아온 구승훈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술에 취한 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
강하리가 술잔을 내려놓자, 구승훈은 바로 다시 가득 따라주었다.연속 여러 잔을 들이키는 그녀를 보고 구승훈의 미간이 찡그려졌다.“빨리 따라요. 승훈 씨 왜 안 따라줘요?”구승훈은 갑자기 재미가 없어졌다.막 들어왔을 때, 그는 확실히 화가 좀 났다.그의 앞에서 송유라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모자라 그가 준 선물을 아무렇게나 처박아 놓다니!그는 강하리를 괴롭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 술에 취한 여자를 괴롭히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번쩍 안고 침실로 향했다. 그녀는 진짜로 취했다. 주량이 아무리 센 사람도 이렇게 마셔대면 취할 수밖에 없을것이다.침대에 눕히려는 순간 강하리는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토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구승훈은 말없이 물을 따라왔다.그녀가 다 토한 후에야 그녀를 일으켜 세워 물을 마시게 했다.“물 좀 마셔!”기어코 마시려 하지 않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구승훈은 물을 들이키게 했다. 그의 강한 손아귀에 강하리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강하리!”구승훈의 큰소리에 강하리는 이내 얌전해졌다. 자신한테 화내는 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자니 강하리는 갑자기 서러워져 눈물이 뺨을 타고 머무르다 옷에 툭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이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승훈 씨 왜 이렇게 못되게 변했어요?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나요?”“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한번 말해봐.”그의 비웃는 듯한 말투에 그녀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강하리는 울먹이면서 얘기했다.“나한테 너무 거칠게 대하잖아요.”구승훈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면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뭐가 거칠다는 거지? 더 거친 것도 있는데 한번 해볼래?”말을 마치고 강하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강하리는 남자의 미간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왜 나를 찾지 않았어요? 왜 나를 잊은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다시 차가워졌다.“강하리, 지금 어떤 놈 생각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들도 나를 괴롭히고 당신도 나를 괴롭히고, 당신이 싫어
한밤중에 강하리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머리가 지끈거리고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옆에는 구승훈이 없었다.‘승훈 씨 왔던 것 같은데. 또 나갔나.’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물 마시러 거실로 나갔다.베란다에는 구승훈이 서있었다. 탄탄한 실루엣은 어두운 야경 속에서 더욱 외로워 보였다.그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걸 강하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하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의 기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송유라밖에 없으리라.강하리는 주방에서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려고 할 때 침실문이 열리고 구승훈이 들어왔다.문 앞에 서있는 그의 모습은 어렴풋했지만, 그의 몸에서 나는 짙은 담배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깼어?”그의 목소리에는 언짢음이 묻어있었다.“네, 구 대표님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없다면 죄송한데 더 자고 싶어요.”“강 부장은 자기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가 봐?”구승훈의 얼굴에는 냉소적인 비웃음이 가득했다.강하리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애써 기억을 떠올렸지만 구승훈이 술을 마시라고 강요한 것 외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죄송해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강하리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돌아누웠지만 구승훈이 이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강하리가 뿌리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몸에 올라탔다.“기억 안 난다고?”구승훈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그러면 다시 기억나게 해주지.”날카로운 이빨이 그녀의 보드라운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어왔다. 찌릿한 통증이 온몸을 타고 퍼졌다.“미쳤어요? 뭐 하는 짓이에요!”구승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래, 안 미치고서야.”구승훈은 정말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하리가 다시는 임신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순간 그의 가슴에는 불길이 타올랐다. 꺼지지도 않고 발산할 곳도 없었다.임신할 수 없다니. 하지만 그에겐 한마디도 하지
“아 진짜요. 지금은 괜찮나요?”“응, 많이 좋아졌어.”강하리는 대답하면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사무실 안에 들어선 그녀는 이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제 신 비서가 그녀에게 귀띔해 줬지만, 눈앞의 여자를 보고 여전히 조금 놀랐다.장서연.장진영의 조카이자 송유라의 사촌인 이 여자는 어릴 적 송유라와 같이 강하리를 적잖이 괴롭혔다.장서연을 발견한 안예서의 얼굴에도 불만이 가득했다.“구 대표님 관계로 들어 온 낙하산이잖아요. 소문에 의하면 그 송유라 친척이라 하데요. 그래서 여기로 배정된 거라고 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엉뚱한 일만 시키지 않나 또 맨날 부하에게 화내지 않나. 부서에 여러 명이 사직했어요. ”안예서는 강하리 귓가에 속삭였다.강하리는 안예서를 먼저 내보내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통화 중이던 장서연은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하고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언니, 지금 여기 누가 왔는지 알아?”상대방이 뭐라고 몇 마디 하자 장서연은 더 크게 웃은 뒤 전화를 끊고 비아냥거렸다.“난 또 누구라고. 첩이 낳은 내연녀네.”강하리는 굳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내색 하지 않고 맞받아쳤다.“장서연, 송유라에게 어제 왜 맞았는지는 물어봤어?” 비웃던 장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송유라가 어제 맞은 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구승훈은 그 일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강하리,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올라. 너는 그냥 첩이 낳은 딸이야. 그냥 남이 놀다 버린 장난감이라고,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주제는 모르겠고 그건 알겠네. 내가 돌아왔으니까 넌 이제 여기서 꺼져야 하는 건 알겠어.”순간 장서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그녀가 들어올 때 송유라는 분명히 마케팅부장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대리 부장이었다.몇 번이고 송유라를 찔러봤지만, 알겠다는 대답만 돌아오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장서연은 나중에 구승훈을 찾아갔지만, 매번 그의 비서에게 제지당했다. “꿈 깨! 어디서 내연녀가 나한테 나가라 마라야!”
강하리는 구승훈의 사무실 앞에서 심호흡 한번 하고 노크를 했다.“들어오세요.”구승훈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구 대표님, 부르셨나요?”“강 부장은 일을 크게 만드는 사람이네.”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일은 구 대표님이 크게 만드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오늘 출근하는 걸 뻔히 아시면서 왜 인사팀을 시켜서 장서연 씨랑 얘기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그래서 이렇게 막 나가는 건가?”강하리는 이해 안 되는 듯 물었다.“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하나요?”구승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나를 찾아올 생각은 안 했나 봐?”“구 대표님을 찾아오면, 저 대신 나서주시나요?”송유라의 괴롭힘을 못 이기고 구승훈을 찾아갔을 때 그가 강하리에게 못하겠으면 나가라고 했던 그 말이 그녀는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구승훈은 그녀를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송유라가 넘버원이고 그녀는 영원히 뒷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사서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자신의 힘으로 해야 했다.마치 강하리의 머릿속을 읽은 듯 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강 부장은 내가 미덥지 못한가 봐.”강하리는 웃음이 나왔다. ‘우리 사이에 아직 믿음이 남아있을 리가 있나?’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대답했다.“구 대표님을 못 믿는 게 아니라요. 제가 주제를 좀 알아서요.”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표시였다. “이리 와.”구승훈이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강하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있었다. “강하리.”강하리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결국 다가갔다.남자의 손아귀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강하리,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인가? 경고하는데 자꾸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그는 강하리의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몸이 뻣뻣해졌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 남자의 속을 긁었다가는 자신한테 무슨 짓이든 하리라는 것을. 아마 회사도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것
구승재는 문득 그날 밤의 부드러운 입술이 떠올랐다.목젖이 몇 번 움직이고, 심장은 어느새 통제가 안 되기 시작했다.술에 살짝 취한 채 그의 품에 안긴 천아름.붉은 입술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그의 목이 바짝 말라왔다.순간 정신을 차린 그는 천아름을 품에서 조심스레 떼어냈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꿀꺽 마셨다.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그건 천아름이 마시던 술이었다.그녀는 벌써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담배 뺏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 술까지 뺏어가?”구승재는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다행히도 조명은 어두웠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그럼 내가 한 잔 더 시켜줄까요? 아름 누나가 ‘술 마셔준다’ 해놓고 이 반 잔도 아까워해요?”“안 마셔. 재미없네.”그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구승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까 그건...정말 미쳤었다.순간 그 입술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뻔했으니까.“가요. 데려다줄게요.”“가기 싫어.”천아름은 비틀비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구승재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심장이 또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그럼 어디 가고 싶은데요? 별 보러 갈래요?”천아름은 피식 웃었다.“좋아.”차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 어깨에 덮어주고, 핫팩 하나를 손에 쥐여주었다.“이제 좀 말해줄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천아름은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구승재를 바라봤다.늘 ‘꼬마 강아지’라며 장난치던 그였지만, 구승재의 얼굴선은 결코 ‘강아지’ 같지 않았다.어딘가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느낌.하지만 성격은, 그 남자와는 달리 훨씬 부드럽고 따뜻했다.그녀는 벽에 살짝 기대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구승재는 그녀의 손짓에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누나 예뻐?”천아름의 목소리는 여전히 치명적이고 매혹적이었다.구승재는 순간 목이 탔고, 입술을 몇 번 떨다 겨
천아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붉은 입술에 가벼운 미소를 띄웠고, 눈꼬리에 스친 표정은 매력적인 얼굴에 한층 더 치명적인 분위기를 더했다.“왜요? 조명현 씨, 또 뭘 부탁하시려구요? 아니면 이번에도 아내분 보석 맞추는 거예요?먼저 말해두는데요...지금은 개인 오더 안 받아요.”조명현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여전히...하나도 안 변했구나.”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웃었다.“그럼. 난 나니까. 왜 변해야 하죠?”말투는 사근사근했고, 아까 그가 ‘아내를 위해’라며 장난처럼 던진 말에도 질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태연했다.혹여 느꼈다 한들, 그건 분명 ‘착각’일 것이다.그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조명현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그래서 내가 약혼했다는 말도, 신경 안 쓰는 거야?”“그건 너 사정이지, 나랑 무슨 상관?”천아름은 휴대폰을 내려다봤고, 마침 구승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더 할 말 없으면, 난 이만.”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명현의 폰도 울렸다.그가 화면을 보는 사이, 천아름은 벌써 자리를 떴다.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명현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전화를 받았다.표정이 단숨에 바뀌는 걸 보면, 전화기 너머에 있는 여자는 분명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겠지.도시는 이제 막 밤이 시작되는 시각.열 시 반, 술과 음악에 취해 어깨를 부대끼는 청춘들.하지만 바의 한 구석, 천아름 앞에는 이미 비워진 잔만 일곱, 여덟 개가 놓여 있었다.희미하게 흐려진 눈동자, 손끝에 살짝 집은 가느다란 담배. 옆으로는 수많은 남자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한편, 여초천의 수술이 끝나자 구승재는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천아름이 앉은 테이블 앞에 도착한 그는, 그녀 앞에 늘어선 빈 술잔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얼마나 마셨어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한 건지 천아름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그저 멍한 시선으로
심준호는 말끝을 망설였지만,강하리는 오히려 단호했다.“딱히 할 말 없어요. 어떤 길은 한두 번은 돌아갈 수 있어도,그 이상은 그냥 시간 낭비예요.”심준호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밤이 되자, 강하리와 가정부 이모가 병실에 남았다.조시욱은 끝까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전화 한 통에 결국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연정이는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고,눈을 뜨자마자 입을 열었다.“아빠는?”강하리는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아빠는 일이 있어서, 곧 시간 나면 올 거야.”연정이는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그래도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강하리의 가슴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저려왔고,그녀는 연정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손연지는 그날 몇 번이나 병실에 왔었고,밤에도 함께 있으려 했지만, 응급 수술 콜에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아름이 병실로 뛰어들어왔다.연정이를 꼭 안아 들며 말했다.“우리 공주님, 어떻게 이렇게 불쌍할 수가 있어?”강하리는 그저 웃었지만,속으론 같은 생각을 되뇌고 있었다.그래...내 아기, 왜 이렇게 어릴 때부터 힘든 일만 겪어야 해?천아름은 연정이와 잠깐 놀아주고,간단히 뭐라도 먹인 뒤 다시 잠들게 했다.병실이 조용해지자,두 사람은 새로 계약할 광고 모델 이야기를 꺼냈다.강하리는 병원에 있는 와중에도 기획팀에서 보내온 모델 리스트는 꼼꼼히 챙겨보고 있었다.하지만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기도 전에 병실 문이 다시 한 번 두드려졌다.이번엔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얼굴 생김새는 조시욱과 어딘가 닮은 듯했지만,더 노련하고 세련된 분위기.정장에 코트까지 걸친 모습.선 굵은 이목구비에,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위험한 기운.강하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시죠?”남자의 눈은 잠시 천아름을 스친 뒤 작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조명현입니다.시욱이 일이 생겨서 제가 대신 물건 좀 가져다드리려고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여초천의 자살 시도는 여초연에게도 꽤 큰 충격이었다.사실 지금이 그녀를 압박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지만, 구승훈은 오히려 이때 물러나겠다는 뜻을 보였다.준봉은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구승훈은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지금 내 상태로는 운전 못 해.”그는 말하면서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풀었다.“여초연한테 여초천이 지금 응급실에서 치료받는 걸 직접 보게 해. 그리고 말해. 이젠 약 하나만 넘기면 되는 게 아니라,임희주 약도 전부 내놓으라고. 그리고 노민준이 개발한 약, 진시연한테도 주사해. 압박 좀 줘.”준봉은 머뭇거리며 자꾸만 뒷좌석을 힐끗거렸다.구승훈은 눈매가 짙게 내려앉은 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선생님, 굳이...임희주까지 구할 필요가 있으신가요? 이런 거 부인께서 알게 되면, 오해가 더 깊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 없이 창밖을 응시했다.그의 눈동자엔 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다.준봉은 속으로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구승훈은 그저 조용히 말했다.“만약 네가 강하리 입장이었고 내가 다른 여자랑 껴안고 있는 사진이나,침대 위에 함께 있는 장면을 봤다면...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준봉의 이마가 순간 찌푸려졌다.이건 뭐라 말하긴 좀...어쩌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죽여버릴 수도 있고,어쩌면 두 번 다시 보기 싫다고 등을 돌릴 수도 있을 거다.어떤 경우든 자기 목숨은 보장 못 하는 대답이겠지...잠시 고민한 끝에 준봉은 조심스레 말했다.“제가 부인이라면, 아마 정말 많이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그렇지. 화도 안 내면 그땐 진짜 끝난 거지.”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거든 호텔 두 달 이내의 CCTV와 투숙 기록 전부 확인해. 임희주랑 나, 같이 드나든 기록이 있는지 봐.”준봉은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곧 “네” 하고 대답했다.호텔 쪽에서 꽤 빠르게 자료를 보내왔다.구승훈이 비행기를 타기 전, 영상이 도착했다.기록상으로는 구승훈과
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가끔은 자신이 너무 소심한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을까?구승훈도 강하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마침 조시욱을 보게 되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시선을 다시 돌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아직까지도 나한테 대답 하나 안 해줄 거야? ”구승훈의 말은 쓸쓸했고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강하리는 입술을 움직이다가 결국 짧게 말했다.“핸드폰 돌려줘.”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당장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얘기가 끝나고 나면 줄게.”강하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발로 차고 싶었지만 자신의 다친 다리를 생각하니 그럴 가치도 없었다.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누가 나한테 사진을 보냈더라...”구승훈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고 그는 조용히 그녀의 핸드폰을 꺼내 그녀 손에 건넸다. 처음 사진을 받았을 때 강하리가 삭제하지 않았다.그 후에 일이 터졌고 침대 위의 영상까지 본 뒤에는 그 사진조차 다시 보기 싫어졌기에 그냥 그대로 남겨두었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몇 번 화면을 터치하더니 이내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도촬로 찍힌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선명했다.임희주는 수줍고 애틋한 얼굴에 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래서 그때 이후로 구승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혐오감이 밀려왔다.구승훈의 눈동자엔 위험한 기운이 스쳤다.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이게 나 아니라고 하면...믿겠어?”강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핸드폰을 챙겨 들고 조시욱을 바라봤다.“집에 데려다줘.”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그의 눈빛은 복잡하고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고 있었다.“강하리, 넌 처음부터 나를 믿은 적이 없었던 거야?”강하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조소가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신뢰는 항상 서로 주고받는 거야, 구승훈 내가 널 믿지
강하리는 구승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누굴 만나든 그건 당신 자유야. 나랑은 상관없어.”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구승훈은 갑자기 장난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정말 누구든 괜찮아? 임희주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다 후처로 받아줄 수 있어?”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휠체어를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구승훈은 휠체어의 팔걸이를 단단히 잡고 그녀를 다시 제자리로 끌어당겼다.“나, 임희주랑 아무 사이 아니야. 네가 왜 그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강하리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다 아닌 거야?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되는데?”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귀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진짜 그 여자랑 뭔 일 있었으면... 평생 발기 부전 걸리게 해달라고 빌게. 음, 성기 썩어도 상관없어.”말투가 지나치게 능청스러웠다. 입김이 귓가에 닿자 강하리는 온몸이 얼어붙었고, 본능적으로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때리려 했다.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그 손바닥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댔다.“아니면, 내 심장이라도 파내고 싶어? 그것도 괜찮아.”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이내 손을 빼냈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말해봐. 도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거야? 정말 내가 잘못했다 쳐도 내 말을 한마디쯤은 들어줄 수 있잖아.”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마음은 이미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다행히도 이번엔 구승훈이 먼저 거리를 두었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진심인지 거짓인지 눈빛을 통해 알아내려 했다.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너무 깊고 어두워,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예전에 그녀는 구승훈이 호텔에서 임희주를 안고 있는 사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심지어 안현우의 핸드폰에서 그 장면의 영상까지 직접 본 적도 있었다.사진은 조작일 수 있어도, 영상도 조작일까?하지만 영상이 안현우의 폰에서 나온 거라는 점이 그녀 마음 어딘가에 작은 희망 하나를
조시욱은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디서 얘기할 건데? ”그녀는 구승훈과 눈을 마주쳤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병실을 나섰다.조시욱은 당황한 듯 따라가려 했지만 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등을 향한 채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조 선생은 그렇게 남의 집안일에 끼어드는 걸 좋아하나 보죠?”조시욱은 굳은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난 단지, 하리가 당신과 단둘이 가는 게 걱정될 뿐입니다.”구승훈이 고개를 돌렸고, 얼굴은 마치 한겨울 서리처럼 싸늘했다.그런데 그가 아무 말 꺼내기도 전에 강하리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따라오지 마.”조시욱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문제 생기면 바로 전화해.”“응.”구승훈은 그녀를 데리고 병원 아래 정원으로 향했다.겨울의 정원은 생각보다 을씨년스럽지 않았고, 몇 그루의 납매가 피어 있어 오히려 단정하고 고고한 느낌이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납매나무 아래로 데려갔다.금빛 꽃잎에서 은은한 향이 퍼졌지만 지금 두 사람 모두 향기를 느낄 여유는 없었다.“난 연정이 양육권 포기 안 해.”강하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구승훈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고 나무 아래에 섰다.노란 꽃잎들이 흩날리며 그녀의 얼굴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었다.“왜?”그는 갑자기 몸을 기울였고, 손으로 휠체어 양쪽 팔걸이를 움켜잡았다.너무 가까웠다.그의 숨결이 얼굴을 스칠 정도였다.이 자세는 마치 그녀를 품 안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졌다.“구승훈, 비켜.”강하리는 냉랭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익숙한 향수 냄새 속에서 임희주의 체취가 느껴져 역겨웠다.구승훈은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고, 눈빛엔 장난기 섞인 악의가 담겨 있었다.“안 비키면?”강하리는 온몸이 들끓었다.역시, 이 뻔뻔한 남자랑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핸드폰을 꺼내 조시욱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하지만 번호를
말이 끝나자마자 구승훈은 심준호의 손에 밀쳐 그대로 흡연실의 유리 벽에 쾅 하고 부딪쳤다.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마치 말려들까 봐 겁이라도 난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등이 세게 부딪쳤는데도 구승훈의 표정은 변함없었다.“임희주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심준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럼 임희주랑 관계 있는 사람은 나란 거냐? 한 사람과 자면서도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고, 너 구승훈, 정말 뻔뻔하구나.”구승훈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외삼촌.”그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짓눌러 껐다.“강하리랑 내 사이에서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해. 그래서 지금 벌을 받고 있잖아. 심지어 그녀가 화가 나서 칼로 내 가슴을 찔러도, 난 감수할 거야. 하지만, 내가 하지도 않은 일까지 뒤집어쓸 생각은 없어.”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왜 심준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하지만 최근 강하리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자신을 보면 역겨워 하고, 스치기만 해도 손을 씻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구승훈은 벌떡 일어나 나가려 했다.하지만 심준호가 막아 섰다.“어디 가?”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이미 죄를 뒤집어썼으니, 적어도 무슨 죄인지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심준호는 여전히 놓아주지 않았다.둘은 흡연실에서 대치하게 되었다.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거기에 살기까지 담겼다.“심준호, 나를 손쓰게 만들지 마.”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무슨 뜻이야?”구승훈은 그의 팔을 거칠게 밀치고 병실 쪽으로 향했다.병실 안에는 아직 몇 명이 연정아 곁을 지키고 있었다.가정부 이모는 백아영 옆에, 조시욱은 강하리 옆에 앉아 있었다.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네 사람 모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백아영은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는지 시선을 피했고, 강하리 역시 한 번 쳐다보곤 금방고개를 돌렸다.가정부 이모는 눈짓으로 구승훈에게 말했다.“조 선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