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느 깊은 밤, 휴대폰이 울렸다.한지성이었다.“여보, 누구야?”“한지성이야.”우재현이 잠시 멈칫했다.“받아 봐. 혹시 급한 일일지도 모르잖아.”나는 전화를 받았다.[유진아.]“무슨 일 있어?”[나 너무 지쳤어.]한지성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우재현이 송규리의 영상을 재생했다.영상 속 송규리는 또다시 미친 듯이 날뛰며,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한지성을 협박하고 있었다.그리고 배경은 두 사람이 N시에서 함께 살던 집이었다.집 안은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얼마나 격한 몸싸움이 있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나 후회해.]“너무 늦었어. 이제 그만 자.”[3년 전에 내가 네 곁을 떠난 건 송규리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냥 내가 진 게 싫었어. 송규리한테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반드시 알려주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틀렸어. 너를 잃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다 지난 일이야. 송규리는 아직 네가 필요해.”[나 이제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휴대폰 너머에서 한지성의 울음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그때 우재현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제 아내를 방해하지 말아주세요.”전화기 너머의 울음소리는 뚝 멈췄다.[너... 결혼했어?]“네. 2년 전에 결혼했고, 아이도 하나 생겼어요.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제 아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유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보름 후, 송규리의 브이로그에 마지막 영상이 올라왔다.바로 부고였다.송규리가 장기 거부 반응으로 세상을 떠났다.송규리의 장례식은 한지성이 치렀다.송규리의 남편 자격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 한지성의 얼굴에는 슬픔이라고는 없었다.그저 중병에 짓눌린 사람에게서 보이는 무감각함만 남아 있었다.한지성은 담담하게 단상 앞에 섰다.하지만 한지성이 입 밖에 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위한 부고와도 같은
한지성은 우리 집을 떠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대신 N시로 향했다.그곳에는 아직 송규리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러고 나서 3년 동안 멈춰 있던 송규리의 브이로그가 다시 업데이트되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지성은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반년이 지났을 무렵, 엄마가 내게 소개팅을 주선했다.장소는 한 카페였다.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소개팅 상대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우재현입니다.”“저는...”“강유진 씨.”“엄마가 제 이름을 알려줬나요?”우재현이 고개를 저었다.“오해하지 마세요. 어머님께 들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얼굴을 보고 알아봤습니다.”“혹시 그 영상 때문인가요?”“네. 사실 소개팅 자체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상대가 유진 씨라는 걸 알고 나니까... 오늘 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고마워요.”“한지성 씨는 유진 씨를 놓친 걸 진작부터 후회하고 있었어요.”“네?”“모르셨어요?”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뭘요?”우재현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두 번 눌렀다.이건 우재현이 내가 자리에 앉은 후로 처음으로 휴대폰을 만진 순간이었다.우재현은 손을 돌려 휴대폰을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송규리의 계정이었다.최신 영상 속 송규리는 예전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송규리예요?”“많이 놀라셨죠?”“네, 왜 이렇게 된 거예요?”“반년 전쯤, 의사 말로는 송규리 씨 병이 재발했대요. 장기 거부 반응도 아주 심하다고 했어요.”“한지성은요?”우재현은 휴대폰 쪽으로 턱짓을 했다.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휴대폰을 응시했다.영상 속 한지성은 훨씬 초췌해졌고, 입꼬리는 축 처져 있었다.[약 먹어.][안 먹어.]한지성이 심호흡을 깊게 했다.[10분 후에 CT 촬영하러 가야 해. 지금 달랠 시간 없어.]송규리가 한지성의 손을 쳐서 약을 떨어뜨렸다.약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한지성은 그런 송규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3년간 타지에서 지내던 나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밤, 한지성이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아래에 나타났다.나는 위층에 서서 한지성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한지성은 많이 야위었고, 수염은 덥수룩했으며, 입고 있는 옷도 마치 3년 전 그대로인 듯했다.머리카락마저 하얗게 세어 있었다.엄마가 내 곁으로 다가와, 감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없는 동안에도 지성이 가끔씩 나를 보러 왔어.”“어떤 날은 네 어릴 적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고, 어떤 날은 네 사진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지.”“그리고 대부분은 네 방 안에서 너희 결혼사진을 손에 꼭 쥔 채,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있었어.”엄마는 집 안에 하나둘 늘어난 물건들을 가리키며 복잡한 얼굴을 했다.“재작년에 내가 허리 아프다고 했더니 저 안마의자도 사다 줬어.”“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의사가 면역력이 약하다고 하니까, 냉장고가 가득 찰 만큼 몸에 좋다는 것들을 사다 놓더라.”“이것도 다 지성이가 가져온 거야.”엄마는 나를 옷장 앞으로 데려갔다.그리고 문을 열어보라는 듯 손짓했다.문을 열자 옷장 안에는 새 옷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옷들이었다.하얀 원피스는 작은 사이즈부터 중간 사이즈, 큰 사이즈까지 전부 갖춰져 있었다.그 옷마다 어울리는 가방까지 함께 걸려 있었다.색상도 가지각색이었다.내가 하나하나 꼼꼼히 세어 보니, 계절마다 한지성이 나를 위해 다섯 벌씩 사다 놓은 것이었다.3년이면 무려 60벌이나 샀던 것이다.“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더니, 메뉴를 바꿔가며 요리를 해줬어.”“내가 다 먹고 나면 꼭 물었어. 네가 좋아할 거냐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엄마가 한숨을 쉬었다.그리고는 서랍 속에서 손으로 직접 쓴 요리 레시피 노트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나는 책장을 넘겨 보았다.전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뿐이었다.하지만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한다.6년이 지나고 나니 음식은 이미 식었고, 사람도 이제 각자의 길
한 달 후,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언니, 저예요.]송규리였다.“무슨 일이야?”[지성 오빠는 저를 살리려고 그런 것뿐이에요. 언니가 어떻게 오빠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나랑 이혼했으니까 이제 그 사람도 아무 걱정 없어 너를 돌볼 수 있잖아.”[그건 달라요.]“뭐가 다른데?”[오빠한테는 아직 돌봐야 할 할머니가 계시잖아요.]“그럼 당연히 돌봐야 하는 거 아니야?”[하지만 그건 원래 언니의 책임이었잖아요.]나는 헛웃음이 나왔다.“그건 한지성의 할머니지, 내 할머니가 아니야.”[이러면 안 돼요. 다 잘못됐어요. 오빠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오빠가 앞으로는 제가 병원에 갈 때도 같이 안 가겠대요. 그리고 저한테도 이제 자기는 할 만큼 했다고 하더라고요.]이게 바로 송규리가 이 전화를 건 진짜 이유였다.결국 나를 따지러 온 거였다.하지만 예전의 송규리에게도 이런 자격은 없었다.그리고 지금의 송규리에게는 더더욱 없었다.“그런 얘기를 하려고 전화한 거라면, 더 이야기할 필요 없을 것 같아.”그러자 송규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애처롭게 변했다.[끊지 마세요!][그냥 부탁 하나만 하려고요. 오빠한테 제가 병원에 갈 때 같이 가달라고 말 좀 해주세요.][지난번에 의사 선생님께서 제 상태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이식받은 장기가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대요. 혼자 병원에 가는 게 너무 무서워요.]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어이없어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나랑 그 사람은 이미 이혼했어. 그 사람한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하지만 오빠는 두 분이 이혼한 걸 전부... 제 탓으로 돌리고 있단 말이에요.]“네 탓이 아니야?”[약간의 영향이 있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 오빠가 저한테 느끼는 건 정 때문이지, 사랑이 아니에요.]“정이라고?”내가 되묻자 송규리가 침묵했다.[오빠가 집으로 돌아갔잖아요.
첫 번째 여행지는 Y시이었다.사람들은 5월과 6월이 Y시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했다.나는 청운산과 해월호를 둘러봤고, 설백산에 올랐으며, 해 질 무렵 산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장관도 감상했다.그리고 마지막에는 해월호에 머물렀다.민박에 입실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내가 진실게임 질문을 뽑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민박집 주인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한지성 씨가 강유진 씨의 남편이에요?”나는 잠시 멈칫했다.“전남편이에요.”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 사람을 알아요?”그중 한 여자가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한지성 씨가 올린 사과 영상을 봤거든요.”“혼자 여행을 떠난 아내를 걱정하면서,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이 대신 잘 챙겨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또, 자기가 아내가 집에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래요.”나는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그래서요? 저한테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설득하려는 거예요?”여자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단지 강유진 씨의 기분 좀 나아지시라고요. 그 사람이 아내가 없이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강유진 씨가 없으니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고마워요.”“한지성 씨... 다시 출근했대요.”“네.”“그리고 강유진 씨가 그때 병원에서 받았던 수술 기록을 뒤늦게 찾아봤대요.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울 것 같더라고요.”술잔을 기울이던 손이 멈칫했다.“그때 앓았던 병, 많이 심각했어요?”“심각하진 않았어요. 급성 맹장염이었어요. 작은 수술이었죠.”“영상에서 말했는데, 한지성 씨가 그때 강유진 씨를 담당했던 수간호사에게 물어봤대요. 그제야 자기 아내가 혼자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혼자 입원 수속 밟고, 혼자 퇴원했던 사실을 전부 알게 됐다고. 자기만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네, 그 사람은 몰랐어요.”“사과 영상 마지막에는 울면서 계속 ‘미안해’ 라고, 그리고 ‘만약’이라고 되뇌었어요
한지성이었다.“정말 떠날 거야?”한지성이 차 앞을 막아서며 내뱉은 첫 마디였다.그리고 두 번째로 내뱉은 말은 단 한 글자였다.“왜?”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두 눈은 겁에 질려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나는 차에서 내렸다.“내가 브레이크를 못 밟았으면 당신 죽었어.”“왜?”“당신이 왜 여기 있어?”“장모님께서 네가 떠난다고 연락 주셨어.”“알았으면 비켜!”“왜? 우리 분명 잘 지내고 있었잖아.”나는 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전에는 왜 떠났어?”“어머니가 아파서...”“2021년 5월 28일, 당신 어머니 기일이잖아. 아직도 물어?”“혹시 전부 알고 있었던 거야?”“응.”한지성의 목소리가 금세 잠겼다.“나랑 규리는 그냥 친한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야. 그리고 나 이제 돌아왔잖아. 이제 두 번 다시 떠날 일 없어.”돌아왔다고?그러니까 나는 지난 3년을 전부 없는 일로 깨끗이 지워야만 하는 걸까?한지성이 외도한 적은 없다고, 내가 너무 유난을 떨고 있는 거라고.한지성이 이제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니, 나는 그동안의 서러움까지 전부 삼켜야 하는 걸까?게다가 방금 전에도 한지성은 송규리를 따라 나갔었다.나와 함께 꽃을 심겠다고, 내 대답을 기다리겠다고 했다.하지만 한지성이 했던 말들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었다.“우리 이미 이혼했어.”“말도 안 돼!”한지성이 단호하게 부정했다.“나는 어떤 이혼 서류에도 사인한 적 없어.”“우린 3년이나 별거했어. 이혼 사유도 충분해.”한지성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달싹일 뿐 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나는 한지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회색빛 캐주얼 재킷, 올해 나온 최신 제품이었다.내가 사준 옷이 아니었다.검은색 운동화는 작년에 유행했던 디자인이다.역시 내가 사준 게 아니었다.한지성이 입은 옷부터 걸친 것, 사용하는 물건까지 모두 송규리의 흔적이었다.나는 몸을 돌렸다.그러자 한지성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나한테 대답해 주겠다던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