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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별거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별거

By:  돼지빛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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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소송 재판이 열리던 날, 재판부는 먼저 우리의 혼인 관계에 대해 물었다. “두 분은 결혼한 지 3년 정도 됐는데, 혼인 관계가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탄됐다고 보십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 조용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결혼한 뒤 3년 내내 저희는 줄곧 따로 살았습니다.” “재판장님, 이런 관계에 아직 부부로서의 애정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 사람과 5년을 연애했다. 연애할 때부터 그 사람의 카톡 상단에 고정된 채팅방은 언제나 나와의 대화방이었다. 휴대폰 긴급 연락처에도 내가 등록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 사람이 가입한 생명보험의 보험금 수익자도 나였다. 그래서 나는 정말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그 사람은 전화 한 통을 받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아프셔.” 그 사람은 모든 걸 뒤로한 채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 3년 동안, 그 사람은 매일 끼니때마다 내게 밥 사진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진 속에 그의 어머니가 찍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런 그 사람이 안쓰러워 회사를 그만두고 직접 내려가 함께 어머니를 간호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힘들어하는 건 싫어.” 그리고 한 달 전. 나는 우연히 암 투병 일상을 올리는 한 인플루언서의 계정을 발견했다. 그 여자의 브이로그 속에는 그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나온 영상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사람이 있고, 하루 세 끼도 그 사람과 함께. 꼭 맞잡은 두 손 역시 그 사람의 손.] 그럼 나는? 1095일 동안 내 곁에 있었던 건 오직 나 자신뿐이었다. 그 사람은 나를 속이고 있었다. 재판장은 마지막으로 내 의사를 확인했다. “그래도 이혼하겠다는 의사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나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이혼 판결이 내려진 순간, 판결문을 바라보던 나는 끝내 참아왔던 눈물을 쏟았다. ‘한지성, 이제 너를 놓아줄게.’ 그리고 나 자신도, 이제는 자유롭게 놓아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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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이혼 판결 나온 거야?”

법원을 나서자 엄마가 다가왔다.

“네, 나왔어요.”

“그 사람은 끝내 안 온 거야?”

“안 왔어요.”

“그럼 자기가 이혼당한 건 알고는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법원에서 공시송달까지 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요. 아마 확인할 겨를조차 없었겠죠.”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송규리 때문이야?”

“네, 마침 그때 수술 중이었거든요. 생사의 고비였어요.”

엄마가 눈가를 닦으며 물었다.

“그럼 그 아이 병은 이제 나아지는 거야?”

“아마도요.”

“너 아직도 그 사람 사랑하는 거 아니야?”

“결혼 3년 동안, 그 사람은 송규리 세 끼를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어요. 엄마, 그 마음속에 나도 있긴 하겠지만, 송규리도 있는 거예요.”

엄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

5년 전, 나는 병원에서 한지성을 처음 만났다.

그때 한지성은 이미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흉부외과 의사였다.

그리고 나는 한지성의 환자였다.

매일 아침 8시가 되면 의료진을 이끌고 회진을 왔지만, 한지성의 시선은 좀처럼 내게 머물지 않았다.

그런데도 회진이 끝날 때면 늘 내게 사탕 하나를 남겨주곤 했다.

“약이 좀 쓰죠? 사탕 하나 먹으면 덜 쓰게 느껴질 거예요.”

퇴원하던 날, 한지성이 혼자 회진을 왔다.

“이제 검사 결과는 다 괜찮으니까, 앞으로 병원 안 와도 됩니다.

내 눈에 실망이 어렸다.

그런데 바로 다음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제 강유진 씨는 제 환자가 아니잖아요. 그럼 제가 강유진 씨를 좋아해도 될까요?”

그때 병원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한지성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입원해 있던 한 달 동안, 한지성은 바꿀 수 있는 근무는 모조리 바꿔가며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했다.

어떤 날에는 야간 근무가 끝나자마자 다시 낮 근무를 서기도 했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내게 와서 꼭 한마디를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발신자는 한지성이었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N시에서 B시로 향하는 비행기표였다.

출발 시간은 내일, 이어서 메시지가 하나 더 와 있었다.

[여보, 나 금방 돌아갈게!]

나는 현관문 앞에 서서 그 메시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작년, 급성 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 갔을 때, 나도 한지성에게 비슷한 문자를 보냈다.

다른 점은 내 문자는 의문문이었다는 것이다.

[여보, 혹시 돌아올 수 있어?]

그날 내 휴대폰은 하루 종일 조용했다.

나중에 나는 송규리의 브이로그에서 한지성을 봤다.

영상 속 한지성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자, 한지성이 케이크 위에 조심스럽게 생크림을 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케이크 위에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규리야, 건강하고 아무 걱정 없이 지내길.]

3년 만에 정말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바로 그날, 한지성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현관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신발을 갈아 신으며, 나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눈에 닿는 곳마다 나 혼자만 살아온 흔적뿐이었다.

신발장에는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남성용 실내화가 3년째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베란다 빨랫대에도 내 옷만 걸려 있다.

한지성의 물건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송규리 채널에 고정된 영상을 눌렀다.

송규리의 영상 중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는 N시에 있는 두 사람의 집이 담겨 있었다.

신발장 아래에는 실내화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분홍색과 하늘색이었다.

그중 하늘색 실내화는 밑창이 거의 닳아 있었다.

베란다에는 두 사람의 옷이 마치 부부처럼 나란히 널려 있었다.

카메라 앵글이 아래로 내려가자, 온통 화려한 꽃들로 가득했다.

송규리가 렌즈 앞에 나타나 환하게 웃으며 꽃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장미도 있었고, 데이지도 있었고, 해바라기도 있었다.

모두 한지성이 송규리를 위해 직접 키운 꽃들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송규리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했을 뿐이었다.

동거 2년째, 나도 베란다에 화분을 들여 꽃을 키웠다.

하지만 한지성은 물 주는 일을 번번이 잊었다.

내가 말했다.

“좀 신경 써 주면 안 돼?”

한지성이 대답했다.

“그냥 꽃일 뿐인데 뭘.”

그 말은 나에게만 해당했다.

한지성은 그저 나에게만 마음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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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이혼 판결 나온 거야?”법원을 나서자 엄마가 다가왔다.“네, 나왔어요.”“그 사람은 끝내 안 온 거야?”“안 왔어요.”“그럼 자기가 이혼당한 건 알고는 있어?”나는 고개를 저었다.“법원에서 공시송달까지 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요. 아마 확인할 겨를조차 없었겠죠.”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송규리 때문이야?”“네, 마침 그때 수술 중이었거든요. 생사의 고비였어요.”엄마가 눈가를 닦으며 물었다.“그럼 그 아이 병은 이제 나아지는 거야?”“아마도요.”“너 아직도 그 사람 사랑하는 거 아니야?”“결혼 3년 동안, 그 사람은 송규리 세 끼를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어요. 엄마, 그 마음속에 나도 있긴 하겠지만, 송규리도 있는 거예요.”엄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5년 전, 나는 병원에서 한지성을 처음 만났다.그때 한지성은 이미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흉부외과 의사였다.그리고 나는 한지성의 환자였다.매일 아침 8시가 되면 의료진을 이끌고 회진을 왔지만, 한지성의 시선은 좀처럼 내게 머물지 않았다.그런데도 회진이 끝날 때면 늘 내게 사탕 하나를 남겨주곤 했다.“약이 좀 쓰죠? 사탕 하나 먹으면 덜 쓰게 느껴질 거예요.”퇴원하던 날, 한지성이 혼자 회진을 왔다.“이제 검사 결과는 다 괜찮으니까, 앞으로 병원 안 와도 됩니다.내 눈에 실망이 어렸다.그런데 바로 다음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이제 강유진 씨는 제 환자가 아니잖아요. 그럼 제가 강유진 씨를 좋아해도 될까요?”그때 병원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한지성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입원해 있던 한 달 동안, 한지성은 바꿀 수 있는 근무는 모조리 바꿔가며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했다.어떤 날에는 야간 근무가 끝나자마자 다시 낮 근무를 서기도 했다.그렇게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내게 와서 꼭 한마디를 물었다.“몸은 괜찮아요?”딩-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과거에서 빠져나왔다.집으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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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내가 먼저 한지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전화가 연결됐다.“우리 이미 이혼...”[죄송한데요, 저 지성 오빠가 아니에요.]송규리였다.“그럼 누구세요?”[지성 오빠랑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에요.]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이신데요? 오빠가 어젯밤에 짐 정리하느라 밤새워서 잠도 못 잤거든요.][저한테 말씀하세요.]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한지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마 오빠 아내인 것 같은데?]한지성이 전화를 넘겨받았다.[무슨 일 있어?]“그 사람, 누구야?”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그냥 아는 동생이야.]“정말 아는 동생?”[진짜 아는 동생이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둘이 같이 오는 거야?”[응. 걔 몸이 안 좋아. 내가 의사니까 옆에서 조금이라도 더 챙겨줄 수 있잖아.]수화기 너머로 공항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아, 맞다. 너 꽃 좋아하잖아.][너 주려고 작은 꽃모종도 가져왔어.]그 말을 남긴 채 한지성은 전화를 끊었다.나는 베란다로 걸어갔다.화분들이 꽃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하지만 화분 속 흙은 이미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다.바람이 불자 흙먼지가 흩날렸다.이제 꽃을 심기에도 늦어버린 화분이었다.그때 휴대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한지성에게서 온 메시지였다.[탑승, 방해 금지.]한지성이 이런 메시지를 보낸 건 356번이었다.나를 대충 얼버무려야 할 때마다 늘 이 메시지를 보냈다.송규리 수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나는 작게 중얼거렸다.“이제는 안 그럴 거야.”...그날 오전 10시, 한지성이 집으로 돌아왔다.머리는 더 짧아졌고, 눈 밑엔 옅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그런데 사람은 더 부드러워 보였다.나는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한지성이 가볍게 웃으며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3년 만에 보니까 내 얼굴 못 알아보겠어?”“응.”한지성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정말 못됐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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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초인종이 울렸다.한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송규리가 서 있었다.하얀 원피스를 입은 송규리는 한지성의 휴대폰을 손에 든 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어떻게 온 거야?”“휴대폰 갖다주려고 왔지. 할머니가 전화까지 하셔서 특별히 부탁하셨어.”한지성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웠다.입꼬리가 올라간 각도가 송규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불과 3년 만에, 두 사람은 영락없는 부부처럼 보였다.하지만 한지성의 아내는 나였다.한지성의 시선이 송규리의 드러난 어깨에 닿았다.한지성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잠깐만 기다려.”말을 마친 한지성은 나를 지나쳐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갔다.다시 나왔을 때 손에는 숄이 들려 있었다.“나 먼저 규리 데려다주고 올게. 너 먼저 자.”이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오늘 돌아올 거야?”“당연하지.”한지성은 숄을 펼쳐 능숙하게 송규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따뜻한 노란빛 숄에는 조그만 꽃무늬가 가득했다.송규리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다.“지성 오빠가 사준 거예요. 오빠는 보는 눈이 정말 좋거든요. 언니도 다음에 쇼핑할 때는 꼭 오빠 데리고 가세요.”“네가 입은 흰 원피스도 지성이가 골라준 거야?”“네, 예쁘죠?”“예쁘네.”혼인신고 일주일 전, 나는 흰 원피스를 사고 싶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하지만 한지성은 몇 번이나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내가 계속 조르자 한지성이 결국 말했다.“남자가 무슨 쇼핑을 해?”하지만 알고 보니, 함께 쇼핑할 상대가 달랐을 뿐이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한지성은 송규리를 데리고 떠났다.이 집엔 또 나 혼자만 남았다.한참 후 나는 한지성에게 문자를 보냈다.[일찍 들어와, 할 말이 있어.][무슨 말? 규리가 어두운 곳을 무서워해서 좀 늦을 수도 있어. 지금 말해.][너 송규리한테 마음이 생긴 거야?][무슨 소리야? 규리는 그냥 친한 동생이야.][넌 송규리랑 쇼핑도 하고 할머니 댁에도 같이 가잖아. 하지만 나랑은 한 번도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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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음식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담백하게 볶은 채소와 데친 새우, 닭배숙, 새콤달콤한 탕수육까지.상은 제법 푸짐했다.한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의 그릇에 국을 떠 드렸다.“닭 다리 하나 드세요. 할머니 좋아하시잖아요.”그리고 송규리에게 탕수육 한 점을 집어주며 말했다.“너무 많이 먹지는 마. 의사 선생님이 고기는 적게 먹으랬잖아.”내 차례가 되자 한지성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채소만 조금 집어주었다.송규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언니는 채소 좋아해?”“내가 말했잖아, 얘는 안 가려서 다 잘 먹는다고.”하지만 나는 채소를 좋아하지 않는다.할머니는 한지성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그리고 탕수육 한 점을 한지성의 그릇에 올려주었다.“그만 챙기고 너도 얼른 같이 먹어라.”“오빠는 방금 요리해서 고기는 못 먹어요. 먹으면 느끼하대요.”“그럼 어떡하니?”“잠깐 그런 거예요. 국물 한 모금 마시면 괜찮아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맑은 국 한 그릇이 한지성 앞에 놓였다.3년 동안 한지성은 송규리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송규리도 마찬가지였다.나는 마치 이 집에 끼어든 이방인 같았다.나는 한지성이 요리할 줄 아는지도 몰랐다.더군다나 요리 후에 맑은 국부터 마시는 습관도 전혀 몰랐다.한지성은 분명 집에 돌아왔는데, 나는 한지성이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식사가 끝나고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했다.송규리도 그릇을 정리해 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그 공고 봤어요.”“그래서?”“그냥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지성 오빠가...”“무슨 소리지?”“어쨌든 우리는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어떤 사이?”“그냥 친한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에요.”“그럼 한지성의 친한 동생이라면서, 왜 그 사실은 말하지 않은 거야?”송규리가 잠시 멈칫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제가 아팠고, 오빠가 필요했어요.”“네 브이로그 봤어. 묻고 싶은데, 만약 네가 나라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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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토요일 오전, 나는 베란다에서 꽃을 심고 있었다.그때 한지성이 다가왔다.“뭐 하고 있어?”바닥에는 흙이 한가득 널려 있었고, 빈 화분도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일어났어? 같이 꽃 좀 심자.”“그래. 꽃모종을 며칠이나 내버려두더니, 갑자기 웬 꽃이야?”“그냥 갑자기 심고 싶어졌어. 같이 해줄 거야?”“당연하지!”한지성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내 손에서 모종삽을 받아 쥐었다.나는 꽃모종을 받쳐 들고 진지하게 한지성을 바라봤다.“왜 그렇게 봐?”“그냥, 오랜만에 봤잖아.”“앞으로 우린 함께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어.”“3년 전에 나한테 프러포즈할 때 무슨 말 했는지 기억나?”“기억하지, 어떻게 잊겠어.”“오늘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어?”한지성은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그래.”“나는 너에게 청혼하는 수많은 장면을 상상해 봤지만, 그 어떤 순간도 이토록 진심으로 너를 간절히 원했던 적은 없었어. 매일 눈을 뜨면 바로 네가 보이고, 눈을 감을 때도 네가 있었으면 했어.”“강유진, 사랑해. 나랑 결혼해 줄래?”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한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러 갔다.그런데 거실로 나가던 한지성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네 대답을 아직 기다리고 있어.”한지성이 문을 열었다.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송규리였다.송규리는 아무 말도 없이, 진료 기록을 한지성의 손에 쥐여주기만 했다.한지성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미안, 오늘은 같이 있어 줄 수 없을 것 같아.”“왜?”“규리 혼자 진료를 받으러 가게 둘 순 없어.”“왜 혼자 못 가?”“너는 몰라. 규리 병은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꼭 필요해.”한지성은 손에 묻은 흙을 대충 씻어내고, 차 키를 집어 들고는 곧장 돌아서려 했다.나는 한지성을 불러 세웠다.“대답, 안 듣고 갈 거야?”“우린 이미 결혼했잖아. 이제 대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그럼 꽃은? 계속 심을 거야?”“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줄래?”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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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한지성이었다.“정말 떠날 거야?”한지성이 차 앞을 막아서며 내뱉은 첫 마디였다.그리고 두 번째로 내뱉은 말은 단 한 글자였다.“왜?”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두 눈은 겁에 질려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나는 차에서 내렸다.“내가 브레이크를 못 밟았으면 당신 죽었어.”“왜?”“당신이 왜 여기 있어?”“장모님께서 네가 떠난다고 연락 주셨어.”“알았으면 비켜!”“왜? 우리 분명 잘 지내고 있었잖아.”나는 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전에는 왜 떠났어?”“어머니가 아파서...”“2021년 5월 28일, 당신 어머니 기일이잖아. 아직도 물어?”“혹시 전부 알고 있었던 거야?”“응.”한지성의 목소리가 금세 잠겼다.“나랑 규리는 그냥 친한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야. 그리고 나 이제 돌아왔잖아. 이제 두 번 다시 떠날 일 없어.”돌아왔다고?그러니까 나는 지난 3년을 전부 없는 일로 깨끗이 지워야만 하는 걸까?한지성이 외도한 적은 없다고, 내가 너무 유난을 떨고 있는 거라고.한지성이 이제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니, 나는 그동안의 서러움까지 전부 삼켜야 하는 걸까?게다가 방금 전에도 한지성은 송규리를 따라 나갔었다.나와 함께 꽃을 심겠다고, 내 대답을 기다리겠다고 했다.하지만 한지성이 했던 말들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었다.“우리 이미 이혼했어.”“말도 안 돼!”한지성이 단호하게 부정했다.“나는 어떤 이혼 서류에도 사인한 적 없어.”“우린 3년이나 별거했어. 이혼 사유도 충분해.”한지성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달싹일 뿐 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나는 한지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회색빛 캐주얼 재킷, 올해 나온 최신 제품이었다.내가 사준 옷이 아니었다.검은색 운동화는 작년에 유행했던 디자인이다.역시 내가 사준 게 아니었다.한지성이 입은 옷부터 걸친 것, 사용하는 물건까지 모두 송규리의 흔적이었다.나는 몸을 돌렸다.그러자 한지성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나한테 대답해 주겠다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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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첫 번째 여행지는 Y시이었다.사람들은 5월과 6월이 Y시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했다.나는 청운산과 해월호를 둘러봤고, 설백산에 올랐으며, 해 질 무렵 산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장관도 감상했다.그리고 마지막에는 해월호에 머물렀다.민박에 입실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내가 진실게임 질문을 뽑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민박집 주인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한지성 씨가 강유진 씨의 남편이에요?”나는 잠시 멈칫했다.“전남편이에요.”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 사람을 알아요?”그중 한 여자가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한지성 씨가 올린 사과 영상을 봤거든요.”“혼자 여행을 떠난 아내를 걱정하면서,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이 대신 잘 챙겨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또, 자기가 아내가 집에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래요.”나는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그래서요? 저한테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설득하려는 거예요?”여자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단지 강유진 씨의 기분 좀 나아지시라고요. 그 사람이 아내가 없이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강유진 씨가 없으니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고마워요.”“한지성 씨... 다시 출근했대요.”“네.”“그리고 강유진 씨가 그때 병원에서 받았던 수술 기록을 뒤늦게 찾아봤대요.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울 것 같더라고요.”술잔을 기울이던 손이 멈칫했다.“그때 앓았던 병, 많이 심각했어요?”“심각하진 않았어요. 급성 맹장염이었어요. 작은 수술이었죠.”“영상에서 말했는데, 한지성 씨가 그때 강유진 씨를 담당했던 수간호사에게 물어봤대요. 그제야 자기 아내가 혼자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혼자 입원 수속 밟고, 혼자 퇴원했던 사실을 전부 알게 됐다고. 자기만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네, 그 사람은 몰랐어요.”“사과 영상 마지막에는 울면서 계속 ‘미안해’ 라고, 그리고 ‘만약’이라고 되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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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한 달 후,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언니, 저예요.]송규리였다.“무슨 일이야?”[지성 오빠는 저를 살리려고 그런 것뿐이에요. 언니가 어떻게 오빠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나랑 이혼했으니까 이제 그 사람도 아무 걱정 없어 너를 돌볼 수 있잖아.”[그건 달라요.]“뭐가 다른데?”[오빠한테는 아직 돌봐야 할 할머니가 계시잖아요.]“그럼 당연히 돌봐야 하는 거 아니야?”[하지만 그건 원래 언니의 책임이었잖아요.]나는 헛웃음이 나왔다.“그건 한지성의 할머니지, 내 할머니가 아니야.”[이러면 안 돼요. 다 잘못됐어요. 오빠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오빠가 앞으로는 제가 병원에 갈 때도 같이 안 가겠대요. 그리고 저한테도 이제 자기는 할 만큼 했다고 하더라고요.]이게 바로 송규리가 이 전화를 건 진짜 이유였다.결국 나를 따지러 온 거였다.하지만 예전의 송규리에게도 이런 자격은 없었다.그리고 지금의 송규리에게는 더더욱 없었다.“그런 얘기를 하려고 전화한 거라면, 더 이야기할 필요 없을 것 같아.”그러자 송규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애처롭게 변했다.[끊지 마세요!][그냥 부탁 하나만 하려고요. 오빠한테 제가 병원에 갈 때 같이 가달라고 말 좀 해주세요.][지난번에 의사 선생님께서 제 상태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이식받은 장기가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대요. 혼자 병원에 가는 게 너무 무서워요.]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어이없어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나랑 그 사람은 이미 이혼했어. 그 사람한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하지만 오빠는 두 분이 이혼한 걸 전부... 제 탓으로 돌리고 있단 말이에요.]“네 탓이 아니야?”[약간의 영향이 있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 오빠가 저한테 느끼는 건 정 때문이지, 사랑이 아니에요.]“정이라고?”내가 되묻자 송규리가 침묵했다.[오빠가 집으로 돌아갔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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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3년간 타지에서 지내던 나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밤, 한지성이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아래에 나타났다.나는 위층에 서서 한지성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한지성은 많이 야위었고, 수염은 덥수룩했으며, 입고 있는 옷도 마치 3년 전 그대로인 듯했다.머리카락마저 하얗게 세어 있었다.엄마가 내 곁으로 다가와, 감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없는 동안에도 지성이 가끔씩 나를 보러 왔어.”“어떤 날은 네 어릴 적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고, 어떤 날은 네 사진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지.”“그리고 대부분은 네 방 안에서 너희 결혼사진을 손에 꼭 쥔 채,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있었어.”엄마는 집 안에 하나둘 늘어난 물건들을 가리키며 복잡한 얼굴을 했다.“재작년에 내가 허리 아프다고 했더니 저 안마의자도 사다 줬어.”“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의사가 면역력이 약하다고 하니까, 냉장고가 가득 찰 만큼 몸에 좋다는 것들을 사다 놓더라.”“이것도 다 지성이가 가져온 거야.”엄마는 나를 옷장 앞으로 데려갔다.그리고 문을 열어보라는 듯 손짓했다.문을 열자 옷장 안에는 새 옷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옷들이었다.하얀 원피스는 작은 사이즈부터 중간 사이즈, 큰 사이즈까지 전부 갖춰져 있었다.그 옷마다 어울리는 가방까지 함께 걸려 있었다.색상도 가지각색이었다.내가 하나하나 꼼꼼히 세어 보니, 계절마다 한지성이 나를 위해 다섯 벌씩 사다 놓은 것이었다.3년이면 무려 60벌이나 샀던 것이다.“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더니, 메뉴를 바꿔가며 요리를 해줬어.”“내가 다 먹고 나면 꼭 물었어. 네가 좋아할 거냐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엄마가 한숨을 쉬었다.그리고는 서랍 속에서 손으로 직접 쓴 요리 레시피 노트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나는 책장을 넘겨 보았다.전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뿐이었다.하지만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한다.6년이 지나고 나니 음식은 이미 식었고, 사람도 이제 각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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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한지성은 우리 집을 떠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대신 N시로 향했다.그곳에는 아직 송규리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러고 나서 3년 동안 멈춰 있던 송규리의 브이로그가 다시 업데이트되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지성은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반년이 지났을 무렵, 엄마가 내게 소개팅을 주선했다.장소는 한 카페였다.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소개팅 상대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우재현입니다.”“저는...”“강유진 씨.”“엄마가 제 이름을 알려줬나요?”우재현이 고개를 저었다.“오해하지 마세요. 어머님께 들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얼굴을 보고 알아봤습니다.”“혹시 그 영상 때문인가요?”“네. 사실 소개팅 자체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상대가 유진 씨라는 걸 알고 나니까... 오늘 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고마워요.”“한지성 씨는 유진 씨를 놓친 걸 진작부터 후회하고 있었어요.”“네?”“모르셨어요?”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뭘요?”우재현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두 번 눌렀다.이건 우재현이 내가 자리에 앉은 후로 처음으로 휴대폰을 만진 순간이었다.우재현은 손을 돌려 휴대폰을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송규리의 계정이었다.최신 영상 속 송규리는 예전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송규리예요?”“많이 놀라셨죠?”“네, 왜 이렇게 된 거예요?”“반년 전쯤, 의사 말로는 송규리 씨 병이 재발했대요. 장기 거부 반응도 아주 심하다고 했어요.”“한지성은요?”우재현은 휴대폰 쪽으로 턱짓을 했다.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휴대폰을 응시했다.영상 속 한지성은 훨씬 초췌해졌고, 입꼬리는 축 처져 있었다.[약 먹어.][안 먹어.]한지성이 심호흡을 깊게 했다.[10분 후에 CT 촬영하러 가야 해. 지금 달랠 시간 없어.]송규리가 한지성의 손을 쳐서 약을 떨어뜨렸다.약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한지성은 그런 송규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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