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사람을 만질 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7살 때, 한민준이 우리 옆집으로 이사 온 그날부터 마음속엔 오직 나뿐이었다. 18살, 한민준이 내 손을 잡던 순간에도 나였다. 22살, 한민준이 내게 청혼할 때도 나였다. 신혼 첫날밤, 한민준이 내게 입 맞추던 그 순간까지도 분명 나였다. 결혼 3주년 되던 날 아침, 나는 한민준의 넥타이를 매만져 주고 있었다. 손끝이 한민준의 목젖에 스치는 순간, 나는 습관처럼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하나는 내 얼굴이었고, 다른 하나는 낯선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날 밤, 한민준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오늘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요.] 21년, 그리고 수만 번의 손길.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어긋나 버렸다.
View More전시회 마지막 날 저녁, 나는 전시장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첫 만남’이라 불리는 그 목걸이가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작품 소개 플레이트에 나는 이렇게 한 줄을 적어 두었다.[내가 7살에 만난 그 사람에게 바칩니다. 그 사람은 내 마음속에 아주 오래도록 살고 있었죠. 그 사람이 이사를 간 뒤로, 이 집에는 이제 제가 살고 있습니다.]잠시 서 있다가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가로등이 막 켜지고 있었다.주차장에 들어서자 멀리 출구 쪽에 세워진 차 한 대가 보였다.한민준의 차였다.한민준은 차 옆에 서서 오랫동안 기다린 듯 보였다.회색 코트는 여전히 그때 그 코트였다.나는 천천히 한민준에게 다가갔다.“효림아.”“응.”“전시회 봤어. 정말 좋더라. 그 목걸이도 한참 봤어.”“고마워.”잠시 침묵이 흘렀고, 한민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난 1년... 잘 지냈어?”“응. 너는?”“그럭저럭.”나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한민준은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광대뼈가 두드러지고, 눈에는 더 이상 빛이 없었다.하지만 한민준은 이제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를 입을 줄 알았다.옷깃은 반듯했고, 커프스 단추도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내가 예전부터 기억해 주길 바랐던 것들을, 한민준은 내가 떠난 뒤에야 기억하고 있었다.“그럼 나 갈게.”“그래.”한민준이 몸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갔다.나는 한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코트 자락이 바람에 살짝 들렸다.“한민준.”한민준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나는 다시 걸어가 한민준의 앞에 섰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손잡아 볼게.”한민준이 잠시 얼어붙었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내 손끝이 한민준의 손바닥에 닿았다.나는 눈을 감았다. 손끝 아래로 한민준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한민준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정우연이 그 자리를 차지해서가 아니었다.내가
1년 후, 나의 첫 개인 디자인 전시회가 열렸다.전시의 이름은 ‘7살’,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들이었다.큐레이터는 부드럽지만 힘이 있다고 평했다.잡지사에서 인터뷰를 하러 왔다.기자는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손을 잡는 이미지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누군가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죠. 하지만 잡지 못한다면, 그냥 혼자 걸어가면 되는 거예요.”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서민정이 내게 말했다.“한민준이 그 잡지를 사서 침대 머리맡에 두었대.”내가 예전에 자던 자리였다.옷장은 반쪽이 비어 있고, 옷은 전부 다른 쪽에 몰아넣은 채 내가 쓰던 쪽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고 했다.한민준의 비서는 한민준이 요즘 사무실에서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그 화면에 떠 있는 건 우리 결혼사진이었다.나는 서민정에게 물었다.“너는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아?”“현욱이가 말해 줬지. 친구들이 안달이 났대. 1년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그건 그 사람 일이야.”...11월, 나는 N시로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러 갔다.플라타너스 대로에는 낙엽이 온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걷다 보니 저쪽 나무 밑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회색 코트, 내가 5년 전에 한민준에게 사 줬던 그 코트였다.소맷단은 닳아서 올이 풀리고 실밥이 다 튀어나왔는데도, 한민준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입고 있었다.한민준도 나를 보았다.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더니, 이쪽으로 두 걸음 정도 다가왔다.입이 열리며 나를 부르려는 것 같았다.나는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한참을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한민준은 아직도 그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앞으로 걸었다.전시회 첫째 날, 직원이 내게 말했다.“폐관하고 나서
서민정이 말했다.“내 전 직장 동료가 직접 봤대.”한민준은 정우연을 사무실로 불렀다.문은 열려 있었고, 회사 사람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했다.“정 비서, 오늘부로 해고야. 퇴직 절차는 오늘 안에 마무리해.”정우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말했다.“왜요?”“본인이 더 잘 알겠지.”정우연은 곧 울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어느새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그럼 그 바닷가는요? 그 플라타너스 나무는 또 뭐였어요? 그리고 식당은 대체 무슨 의미였어요? 분명 나를 부모님께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요?”하지만 한민준은 정우연의 말을 잘랐다.“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서민정은 이야기를 마친 뒤 나를 바라봤다.“진짜 해고했대. 현욱 말로는 그날 회사 전체가 뒤집혔대.”“그래서?”“너 아무렇지도 않아?”“그 사람이 정우연을 해고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은 내 직원이 아니잖아. 그 사람 직원이잖아.”다음 날 한민준이 작업실로 찾아왔다.한민준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서류 한 장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해고 통지서였다.위에는 정우연의 서명이 있었고, 회사의 직인도 찍혀 있었다.한민준이 내 앞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마치 좋은 일을 해놓고 칭찬받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눈빛이 간절했다.“나 정우연 해고했어. 이제 그 사람은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나는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한민준을 보았다.“그래서?”한민준이 준비해 온 말들이 전부 입안에서 막혀 버렸다.“네가 기뻐할 줄 알았어.”“문제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아니었어.”“알아. 문제는 나였어. 내가 잘못한 것도 알아. 고칠게. 네가 어떻게 하라고 하든 다 할게. 휴대폰도 다 보여 줄게. 내 모든 SNS 계정 비밀번호도 다 알려 줄게.”“내가 언제부터 당신 마음속에서 사라졌는지 알아? 당신이 처음 거짓말을 했을 때가 아니었어. 당신이 그 사람 커피엔 시럽을 반만 넣어야 한다는 걸 기억하고, 내가 아예
한민준은 결국 이혼합의서에 서명했다.대신 조건이 하나 붙었다.한민준이 내게 10억 원을 보내겠다며, 21년 동안의 보상이라고 했다.나는 받지 않았다.그러자 한민준은 또 하나의 부탁을 해왔다.이혼 절차를 석 달만 미뤄 달라는 것이었다.그동안 다시 나를 쫓아볼 기회를 달라고.서민정이 그 말을 전해줄 때 목소리가 묘하게 복잡했다.“자기가 너한테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 준 게 마음에 걸린대. 7살부터 28살까지 네가 그 사람을 쫓아다녔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자기가 널 쫓아가겠대.”“마음대로 하라고 해.”...다음 날, 꽃이 도착했다.붉은 장미였다.카드에는 ‘첫째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나는 프런트 직원에게 당장 돌려보내라고 했다.사흘째에도 또 꽃이 왔다.프런트 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돌려보냈는데도 다시 보내왔어요. 어떻게 할까요?”“옆 꽃집에 줘.”다음 날 프런트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옆 꽃집 사장님이 전해 달래요. 한민준 씨 덕분에 요즘 장사가 아주 잘된다고.”그 뒤로 한민준은 다른 선물을 보내기 시작했다.가방은 그대로 반송했다.목걸이는 상자에 ‘뒤늦은 결혼 3주년 기념’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나는 보지도 않고 택배로 돌려보냈다.한민준이 메시지를 보내 물었다.[한 번만 열어 보면 안 될까?]나는 답하지 않았다.그러자 한민준은 직접 찾아오기 시작했다.마침 내가 브랜드 패키지 디자인을 논의하느라 고객을 만나고 있던 때였다.비서가 들어와 리셉션 구역에 한민준이라는 남자분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렸다.“기다리라고 해.”고객과의 미팅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이어졌고, 한민준은 리셉션 구역에 꼬박 3시간을 앉아 있었다.그 사이 비서가 세 번이나 물을 권했지만, 한민준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그저 내 작업실 디자인 북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넘겨 보고 있었을 뿐이다.고객을 배웅하고 회의실에서 나오자, 한민준이 일어섰다.손에는 여전히 그 디자인 북을 쥐고 있었다.“이 책자에 있는 것들, 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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