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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남편에게는 없는 것

Author: 노에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18:48:20

“다 왔어.”

윤태하가 차를 멈췄다.

서윤은 창밖을 바라봤다. 익숙한 아파트 입구였다. 결혼 전부터 살던 집과는 달랐지만, 석 달이나 지내다 보니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곳이었다.

“고마워. 조심히 가.”

안전벨트를 풀던 서윤이 말했다. 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왜?”

“그냥.”

“할 말 있으면 해.”

“오늘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서윤의 손이 멈췄다.

태하는 웃고 있었다. 늘 그렇듯 장난스럽고 다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서윤은 알았다. 저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진심을 농담처럼 포장하고 있다는 걸.

“내일 보잖아.”

“내일도 보고 모레도 보지.”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서윤은 작게 웃었다.

“윤태하. 너 이럴땐 진짜 애 같아.”

“너한테만 그래.”

너무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서윤은 더는 웃지 못했다. 태하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거창한 말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한마디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깨닫게 만들면서도, 그 사랑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함께 떠올리게 했다.

“태하야.”

“응.”

“나 때문에 너무 기다리지는 마.”

태하의 미소가 아주 조금 옅어졌다.

“그 말은 하지 말랬잖아.”

“…….”

“내가 기다리는 건 내 선택이야.”

그는 서윤의 손을 잡았다.

“네가 나한테 기다려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억지로 붙잡아 둔 적도 없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그래도.”

“서윤아.”

태하가 그녀를 불렀다.

“나 너 좋아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누구랑 결혼했든, 오늘 누구랑 밥을 먹었든, 내일 누구랑 시간을 보내든. 그건 변하지 않아.”

태하는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나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서윤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이 남자는 정말 바보 같았다. 이렇게까지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묻는 대신 괜찮다고 했고, 자신을 선택하라고 말하는 대신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런 태하가 좋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다정함이 두려웠다.

서윤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내일 전화할게.”

“응.”

“꼭 받을 거야.”

“당연하지.”

태하가 웃었다.

“네 전화인데.”

서윤은 그제야 차에서 내렸다.

현관으로 향하기 전,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태하는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서윤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출발하지 못했다.

그녀가 결혼한 남자의 성은 강씨였다. 자신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태하는 오늘도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혹시라도 그녀가 돌아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더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강도윤이었다.

그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오던 중 입구 앞에 멈춰 선 차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여자가 한서윤이라는 걸 알아본 순간,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 서윤이 웃으며 손을 흔들던 남자. 도윤은 그 얼굴을 기억해 냈다. 며칠 전 호텔 앞에서 서윤과 함께 있던 남자였다.

그때도 그랬다. 서윤은 그 남자 앞에서 웃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도윤은 차창 너머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남자가 서윤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서윤은 그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을 가볍게 맞잡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남자가 웃었고, 서윤도 따라 웃었다.

도윤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웃기고 있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왜 이런 장면을 보고 있어야 하는지부터가 우스웠다.

계약서에 분명히 적혀 있었다. 서로의 연애에 관여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를 만나든 간섭하지 않는다. 그 조항을 먼저 제안한 사람이 한서윤이었고, 동의한 사람이 강도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찾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도윤은 시선을 거두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뒤에서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익숙한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일찍 왔네요?”

서윤의 목소리였다. 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서윤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내 평소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일찍 끝났어요?”

“그쪽은 늦었네요.”

“약속이 있었으니까요.”

“그래 보이더군요.”

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

“봤어요?”

“뭘요?”

“방금 그 사람.”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연히.”

“그럼 됐네요.”

서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도윤은 그녀의 옆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평소라면 서윤은 아무 말 없이 휴대전화를 확인했을 것이다. 도윤 역시 굳이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침묵이 거슬렸다.

“두분, 자주 만나나 봅니다.”

도윤이 말했다.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요?”

“그 남자.”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우리 계약서에 상대방 연애 상대의 신상 보고 조항도 있었어요?”

“없었죠.”

“그런데요?”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항에 없으면, 만들지 마세요.”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뒤따라 탔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남았다.

“한서윤 씨.”

“네.”

“내가 뭐라고 한 건 아닙니다.”

“저도 뭐라고 한 거 아닌데요.”

“말투가 꼭 싸우자는 것 같아서.”

서윤이 피식 웃었다.

“대표님이 먼저 시비를 거셨잖아요.”

“시비가 아니라 대화였는데.”

“아, 그러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부터는 대화 주제를 잘 고르세요.”

도윤은 서윤을 바라봤다.

정말이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실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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