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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날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작가: 노에빌
last update 게시일: 2026-10-14 18:29:52

같은 시각, 강도윤은 한 여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결혼 축하해.”

정세린이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도윤은 제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고마워.”

세린은 오랫동안 도윤을 알고 지낸 여자였다.

명문가 출신으로, 현재는 세린문화재단의 이사이자 미술품 투자 회사의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우아한 태도,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 냉정해질 수 있는 판단력까지 갖춘 여자였다.

그녀와 도윤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했다. 누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 어떤 자리에서 웃어야 하고 어떤 자리에서 침묵해야 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때 연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관계였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고, 함께하는 시간이 편했다. 바쁜 일정 사이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가끔 여행을 가고, 각자의 집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 도윤은 세린에게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었고, 세린 역시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니 도윤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세린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신부는 어때?”

세린이 물었다.

“괜찮아.”

“그게 다야?”

“더 궁금한 게 있어?”

세린이 웃었다.

“글쎄. 네가 결혼까지 했으니 조금은 달라졌을 줄 알았지.”

“뭐가?”

“여자 보는 눈이라든가.”

도윤은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 보는 눈은 원래 나쁘지 않아.”

“자신감은 여전하네.”

세린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지 않는 거야?”

“응.”

“단 한 번도?”

“세린아.”

도윤이 낮게 불렀다.

“그런 걸 확인해야 할 이유가 있어?”

세린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평소처럼 우아하게 웃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 관계는 그대로지?”

“물론.”

“좋아.”

세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 결혼생활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 네가 약속을 지키는 한, 나도 우리 관계를 바꿀 생각 없고.”

도윤은 대답 대신 그녀를 바라봤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서는 길, 세린은 도윤의 팔을 잡았다.

“오늘 우리 집에 갈래?”

도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안 되겠어.”

“왜? 신혼이라서?”

“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

세린은 웃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놓았다. 하지만 도윤은 몰랐다. 세린이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 SNS에서 한서윤의 이름을 검색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진 속 서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는 사실을.

세린은 도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쉽게 가질 수 있었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여자와.

한서윤. 세린은 그 이름을 천천히 되뇌었다.

“재미있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떤 여자일까.”

***

결혼식이 끝난 뒤,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강도윤이 마련한 고급 펜트하우스였다.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집 안에는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침실은 따로 쓰기로 했다. 식사 시간도 각자의 일정에 따라 달랐다.

서윤은 아침 일찍 출근했고, 도윤은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집에서 마주치는 시간은 짧았지만, 두 사람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느 날 밤, 서윤이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자료를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도윤이 들어왔다. 그는 재킷을 벗어 걸며 서윤을 바라봤다.

“아직 안 잤어요?”

“자료 좀 보고 있어요.”

“내일도 출근하잖아요.”

“도윤 씨도요.”

도윤이 짧게 웃었다.

“그러네요.”

그는 주방으로 가 물을 마셨다. 서윤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내일 저녁 약속 있어요?”

“왜요?”

“저도 약속이 있어서요. 혹시 집에서 식사할 생각이면 미리 말씀드리려고요.”

“없습니다.”

“알겠어요.”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도윤은 방으로 들어갔고, 서윤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 서로의 일정도, 만나는 사람도,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 정도의 거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거리를 지키는 데 익숙했다.

문제는 결혼한 지 석 달이 지났을 무렵부터였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태하의 메시지였다. 서윤은 회의 자료를 정리하다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응. 왜?]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보고 싶어서.]

서윤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태하는 늘 그랬다.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했고, 함께 있고 싶으면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

서윤은 그 솔직함이 좋았다. 적어도 태하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어떤 감정을 보여 줘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퇴근하고 봐.]

[좋아. 데리러 갈게.]

서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날 저녁, 태하는 회사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셔츠에 재킷을 걸친 채 차에 기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여유로운 미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까지.

그는 서윤을 발견하자마자 웃었다.

“우리 사모님 오셨네.”

“그 말 하지 마.”

“왜? 틀린 말도 아닌데.”

“너까지 그러면 진짜 결혼한 것 같잖아.”

태하의 미소가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러나 그는 곧 평소처럼 웃으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럼 오늘은 그냥 한서윤 씨라고 부를게.”

서윤은 차에 올라탔다. 태하는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피곤해?”

“조금.”

“그럼 밥 먹고 집에 데려다줄게.”

“너는?”

“나야 뭐.”

태하는 시동을 걸었다.

“네 얼굴 봤으니까 됐지.”

서윤은 웃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던 태하는 잠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웃어 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혼반지를 낀 그녀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그 말이 얼마나 비겁한 자기 위안인지 깨닫곤 했다.

충분할 리가 없었다. 그는 한서윤을 사랑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남았고,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손을 잡았으며, 언젠가 그녀가 자신을 온전히 선택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태하는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

“태하야.”

“응?”

“무슨 생각 해?”

태하는 웃었다.

“네가 오늘 뭐 먹고 싶어 할지.”

“거짓말.”

“들켰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냥 네가 좋아서.”

서윤은 손을 빼지 않았다. 태하는 그 작은 허락에 다시 웃었다.

그날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언젠가 자신이 기다리던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같은 시각. 강도윤은 호텔 라운지에서 한 여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정세린이었다.

“요즘 바빠 보이더라.”

세린이 말했다.

“원래 바빠.”

“결혼하고도?”

“결혼했다고 일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세린은 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렇겠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세린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런데 신혼집에는 자주 들어가?”

도윤의 시선이 올라왔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왜 궁금한데?”

세린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네가 결혼한 뒤에도 나를 만나고 있으니까. 네 아내는 알고 있나 싶어서.”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했어.”

“그런 계약도 했어?”

“응.”

세린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재미있네.”

“뭐가?”

“보통은 결혼하면 적어도 서로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잖아.”

“우린 그런 관계가 아니야.”

도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세린은 그를 바라봤다.

“그래. 그렇겠지.”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럼 오늘은 나랑 조금 더 있다 가.”

도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업은 성장하고 있었고, 결혼생활은 평온했다. 각자 만나는 사람이 있었고,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기로 한 약속도 지키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호텔을 나서던 도윤은 우연히 길 건너편에서 한서윤을 발견했다. 서윤은 한 남자와 함께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고 있었고, 서윤은 그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자신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그녀는 남자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고, 남자는 그런 서윤을 다정하게 바라봤다.

도윤의 시선이 서윤의 왼손으로 향했다. 결혼반지가 보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 순간, 도윤은 자신이 왜 그 장면을 보고도 지나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계약이었다. 그녀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동의했고, 서명까지 했다.

그런데 왜. 왜 저 남자가 저렇게 가까이 서 있는 게 거슬리는 걸까.

“도윤아?”

옆에서 세린이 불렀다. 도윤은 그제야 시선을 거뒀다.

“가자.”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

하지만 그날 밤, 강도윤은 처음으로 자신의 결혼생활이 생각보다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귀찮음의 원인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서윤은 태하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도윤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귀가였다.

“오늘은 일찍 왔네요.”

서윤이 말했다. 도윤은 대답 대신 그녀를 바라봤다.

“재밌었습니까?”

“뭐가요?”

“데이트.”

서윤의 표정이 굳었다.

“…봤어요?”

“우연히.”

도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걱정 마요. 따질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왜 물어요?”

“그냥.”

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웃는 얼굴은 처음 봐서.”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윤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편하게 만나요. 우리 계약이 그렇잖아요.”

“당연하죠.”

서윤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윤 씨도 그러시잖아요.”

“물론이죠.”

“그럼 서로 신경 쓰지 말아요.”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서윤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서윤 씨.”

그녀가 돌아봤다.

“왜요?”

도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결국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내일 아침에 회의 있습니다. 늦지 마시죠.”

서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알겠어요.”

문이 닫혔다. 도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분명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계약을 어기지 않았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도윤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세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돼?]

그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돼.]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그럼 우리 집에서 저녁 먹자.]

도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한서윤도 지금쯤 그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든, 누구를 만나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서로의 목표를 이루면 이혼할 사이였다. 도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날 밤, 그는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다.

자신이 왜 잠들지 못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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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윤은 엘리베이터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섰다.오늘 한 말이 서윤에게 어떻게 닿았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그래도 후회하지 않았다.적어도 이번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았다.그동안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말하지 않은 마음은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아무리 진심이어도, 혼자 간직하기만 한다면 결국 자기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그는 이제 서윤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었다. 본인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도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이번에는 마음을 묻어 두지 않을 것이다. 좋아한다는 말이 늦었다면, 이제라도 그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됐다.그녀가 알 수 있도록. 자신이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이번에는 그 마음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한경라이프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대표님, 정세린 씨가 방문하셨습니다.”보고서를 검토하던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정세린 씨요?”“네. 세린문화재단 이사님이라고 하시는데요. 별도의 미팅 일정은 잡혀 있지 않습니다.”“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보셨나요?”“대표님을 잠깐 뵙고 싶다고만 하셨습니다.”서윤은 보고서를 덮었다.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든 직접 듣고 판단하면 될 일이었다.“안으로 모셔 주세요.”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오랜만이에요, 한 대표님.”세린은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고급스러운 재킷에 자연스럽게 정돈된 머리, 상대를 긴장시키기보다는 먼저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여유로운 태도까지 여전했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방문이네요.”“미리 연락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미안해요.”“괜찮습니다. 앉으세요.”

  • 결혼과 동시에 이혼을 약속했습니다.    69화. 그의 진심

    “이혼한 뒤에야 제 마음을 더 분명하게 알게 됐습니다.”서윤의 표정에서 미세하게 변화가 일었다. 도윤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결혼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제가 뭘 원하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서윤 씨가 제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당연한 게 아니었는데도요.”그는 자신을 탓하는 말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늘어놓으며 동정을 구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제야 깨달은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이혼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이 놓치고 있었는지요.”“...”“집에 돌아가도 당신이 없고, 무슨 일이 생겨도 가장 먼저 당신을 떠올리게 되더군요.”도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그전에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됐다. 이제는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말자고 선을 그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도윤이 이런 말을 하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때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들이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와서 제 마음을 전하는 게 한서윤 씨에게 얼마나 갑작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도윤은 한 걸음도 더 다가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제가 늦었습니다. 그건 변명할 생각 없습니다.”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하지만 이 마음을 계속 묻어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서윤의 손끝이 움찔했다.“...그럼요?”겨우 꺼낸 질문이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왜 이제 와서냐는 뜻이십니까?”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합니다.”그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저도 제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당신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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