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집에 도착한 서윤은 현관문을 닫자마자 구두를 벗었다.긴 하루였다. 몸이 피곤한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하루를 떠올리면 업무보다 다른 장면이 먼저 생각났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도윤. 자신이 고개를 들 때마다 마주치던 시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어쩐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던 눈빛.서윤은 가방을 소파 위에 던져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왜 자꾸 생각나는 건데...”그 사람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특히 자신이 입술만 움직여 그만 보라고 했을 때. 도윤은 분명 알아들었다. 그런데 웃었다. 마치 자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마저 알고 있었다는 듯이.“웃기는 사람이네.”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조금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그때였다. 소파 위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서윤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화면이 켜지며 메시지 알림이 떠올랐다. 그녀는 빠르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강도윤인가?’무의식중에 순간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윤태하]“아...”짧은 탄식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서윤은 자신이 왜 조금 전까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예상했는지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미쳤지.”누가 연락하든 이상할 게 없었다. 태하는 평소에도 종종 안부를 물었고, 자신이 임신 사실을 털어놓은 뒤로 더 조심스럽게 연락해 왔다.서윤은 메시지를 열었다.[집에 잘 들어갔어?]잠시 후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오늘 일정 있다고 했잖아. 늦게까지 밖에 있었을 것 같아서.]서윤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소파에 앉았다.태하다웠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왜 연락하지 않느냐고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무사히 집에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짧은 메시지였다.서윤은 천천히 답장을 입력했다.[응. 방금 도착했어. 너는?]곧바로 답장이 왔다.[나도 집이야. 저녁은 먹었어?][응. 먹었어.][다행이다. 요즘 계속 바빠 보이던데 무리하지 마.]서윤은 그 문장을 한참
식사가 중반을 넘겼을 무렵, 음식이 새로 나왔다.서윤은 앞에 놓인 접시를 내려다봤다. 향이 강한 소스가 곁들여진 요리였다.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먹었을 음식인데, 오늘은 냄새가 유난히 진하게 느껴졌다.그녀는 포크를 들었다가 잠시 멈췄다. 속이 미묘하게 울렁거렸다.서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을 마셨다. 잠시 기다리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맞은편의 도윤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서윤이 음식을 먹지 않고 물만 마시는 것.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이는 얼굴. 입술을 꾹 다문 채 잠깐씩 호흡을 고르는 모습.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한 대표님.”서윤이 고개를 들었다.“네?”“괜찮으십니까?”순간 테이블 위의 대화가 잠시 멈췄다.서윤은 당황하지 않은 척 웃었다.“네. 괜찮습니다.”“안색이 조금 좋지 않아 보여서요.”그 말에 서윤의 손끝이 굳었다.그는 왜 이렇게 잘 보는 걸까. 아니, 원래부터 잘 봤던 걸까. 자신이 그의 표정을 살피느라 바빴던 동안, 그는 자신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생각이 그쪽으로 흐르려는 순간 서윤은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오늘 일정이 조금 길어서 그런가 봐요. 괜찮습니다.”“그렇습니까.”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을 들어 서윤의 잔에 물을 채웠다. 서윤은 그 손을 바라봤다.물병을 내려놓은 도윤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천천히 드십시오.”“...감사합니다.”서윤은 작게 대답했다.정말 별것 아닌 행동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맞은편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서윤은 알고 있었다. 도윤이 아직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 시선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싫지만은 않다는 사실까지. 그녀는 그 생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일부러 옆자리 사람에게 질문을 건넸다.“대표님, 아까 말씀하신 해외 유통 건 말인데요.”대화는 다시 이어졌다.서윤은 능숙
[한 대표님. 내일 오전에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강도윤은 메시지를 보낸 뒤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급하게 답을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지난번 호텔에서 서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 뒤,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갖도록 기다리기로 했으니까.하지만 기다리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도윤은 서류를 넘기면서도 간간이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답장이 도착한 건 십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죄송합니다. 당분간 개인적인 만남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짧고 정중한 거절이었다.그는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특별히 차가운 말도, 감정적인 표현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명확했다. 서윤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만날 이유를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도윤은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서윤이 곧바로 마음을 열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 말한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지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막상 거절당하고 나니,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대표님.”노크와 함께 들어온 비서가 다음 일정이 적힌 태블릿을 내밀었다.“오전 열한 시에 투자심의위원회가 있습니다. 오후에는 한경라이프 측과 물류 협력 건 관련해서 실무진 회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오후 회의 자료는 다 올라왔습니까?”“예. 한경라이프에서 수정안을 보내 왔습니다. 한서윤 대표님이 직접 검토하셨다고 합니다.”도윤의 시선이 태블릿으로 향했다.“수정안 가져오세요.”비서가 자료를 건네자 도윤은 곧바로 내용을 살폈다.기존 계획에서 물류 비용을 낮추는 대신, 초기 유통망을 무리하게 확대하지 않고 핵심 지역부터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향이었다. 단기적인 매출 규모는 다소 줄어들겠지만, 재고 부담과 운영 리스크를 동시에 낮출 수 있는 구조였다.불필요한 장식이 없었다. 서윤다운 판단이었다.“이대로 진행하죠.”“일부 임원들이 초기 매출 목표가 낮아지는
세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예상했던 반응과는 조금 달랐다. 울거나, 화를 내거나, 적어도 도윤에게 무슨 말을 들었느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서윤은 너무나 태연했다.“기분 나쁘지 않으세요?”세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제가 기분 나빠할 이유가 있을까요?”“아니, 그게...”“저희는 이미 이혼했어요. 강 대표님이 누구를 만나시든, 어떤 관계를 이어 가시든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죠.”서윤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정 이사님께서 저에게 감사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 결혼은 저와 강 대표님이 합의해서 결정한 일이었고, 이혼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세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서윤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따져 물을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세린은 서윤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그럼 도윤 씨가 한 대표님께 마음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나 보네요?”이번에는 서윤의 표정이 굳었다.“...그걸 어떻게 아셨어요?”세린은 아주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곧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도윤 씨가 요즘 조금 달라졌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했어요.”서윤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자신이 도윤에게 고백받았다는 사실을 세린에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 고백이 진심이었는지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그 부분은 정 이사님과 나눌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그렇겠네요. 제가 또 실례했어요.”세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가 볼게요.”서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했다.“조심히 돌아가세요.”“네. 다음에 또 봬요.”세린은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복도를 걷는 동안 입가의 미소는 서서히 사라졌다.세린은 알고 있었다. 서윤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무심하지는 않다는 것을. 도윤의 고백을
도윤은 엘리베이터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섰다.오늘 한 말이 서윤에게 어떻게 닿았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그래도 후회하지 않았다.적어도 이번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았다.그동안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말하지 않은 마음은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아무리 진심이어도, 혼자 간직하기만 한다면 결국 자기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그는 이제 서윤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었다. 본인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도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이번에는 마음을 묻어 두지 않을 것이다. 좋아한다는 말이 늦었다면, 이제라도 그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됐다.그녀가 알 수 있도록. 자신이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이번에는 그 마음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한경라이프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대표님, 정세린 씨가 방문하셨습니다.”보고서를 검토하던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정세린 씨요?”“네. 세린문화재단 이사님이라고 하시는데요. 별도의 미팅 일정은 잡혀 있지 않습니다.”“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보셨나요?”“대표님을 잠깐 뵙고 싶다고만 하셨습니다.”서윤은 보고서를 덮었다.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든 직접 듣고 판단하면 될 일이었다.“안으로 모셔 주세요.”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오랜만이에요, 한 대표님.”세린은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고급스러운 재킷에 자연스럽게 정돈된 머리, 상대를 긴장시키기보다는 먼저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여유로운 태도까지 여전했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방문이네요.”“미리 연락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미안해요.”“괜찮습니다. 앉으세요.”
“이혼한 뒤에야 제 마음을 더 분명하게 알게 됐습니다.”서윤의 표정에서 미세하게 변화가 일었다. 도윤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결혼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제가 뭘 원하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서윤 씨가 제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당연한 게 아니었는데도요.”그는 자신을 탓하는 말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늘어놓으며 동정을 구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제야 깨달은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이혼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이 놓치고 있었는지요.”“...”“집에 돌아가도 당신이 없고, 무슨 일이 생겨도 가장 먼저 당신을 떠올리게 되더군요.”도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그전에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됐다. 이제는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말자고 선을 그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도윤이 이런 말을 하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때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들이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와서 제 마음을 전하는 게 한서윤 씨에게 얼마나 갑작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도윤은 한 걸음도 더 다가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제가 늦었습니다. 그건 변명할 생각 없습니다.”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하지만 이 마음을 계속 묻어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서윤의 손끝이 움찔했다.“...그럼요?”겨우 꺼낸 질문이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왜 이제 와서냐는 뜻이십니까?”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합니다.”그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저도 제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당신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