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장현진이 보낸 단체대화방 링크는 접속 전에 확인할 것이 많았다.
계약서의 임대인 성명과 주소, 중개사무소 상호가 나오는 부분을 찍어 운영자에게 보내야 했다. 주민등록번호와 서명, 계좌번호는 가린 뒤에야 접속 승인이 됐다.
단체방 이름은 `김상식·새길 피해확인방`이었다. 인원은 서아와 도현이 들어가자 열한 명이 됐다.
채팅방은 조용했다. 피해자 대표를 맡은 최은정이 고정해 놓은 공지에는 경찰 접수 번호, 법률상담 예약 방법, 등기 발급 순서가 적혀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 금지`, `집주인을 찾아가 직접 충돌하지 말 것`도 눈에 띄었다.
최은정은 온라인에 올린 자료가 수사 증거를 대신하지 않으니 각자 원본과 전자파일을 따로 보존하라고 거듭 알렸다. 서아는 개인 클라우드와 외장메모리에 같은 폴더를 복사했다. 종이 원본은 방수 파일에 넣었다.
서아는 채팅방을 맨 위까지 올려 처음부터 읽었다.
응암동 원룸 보증금 8천만 원. 역촌동 빌라 1억 1천만 원. 녹번동 201호 9천5백만 원. 건물과 호실은 달랐지만 예금주와 중개사 이름은 같았다.
“여기 201호도 있어요.”
서아가 휴대폰을 도현에게 내밀었다. 도현은 자신의 폰으로 이미 같은 내용을 읽고 있었다.
“201호는 중복 계약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근저당 접수 시점이 비슷합니다.”
“그럼 우리만 한 집에 두 명이네요.”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알아요.”
서아는 단체방에 302호 계약이 두 건이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도현을 봤다.
“어디까지 써도 돼요?”
“우리가 함께 확인한 사실만 쓰죠. 보증금은 서로 동의하면 공개하고요.”
서아는 도현의 동의를 받아 두 계약의 계약일과 잔금 시간, 입주 시간을 올렸다. 개인정보를 가린 계약서 사진도 함께였다.
대화방은 오 분 만에 울리기 시작했다.
`302호도 저 건물주에게 돈 보낸 게 맞네요.`
`중개사도 같습니다.`
`당한 사람끼리는 자료 숨기지 말고 맞춰 봅시다. 단, 수사기관에 제출할 건 따로 보관하세요.`
서아는 인용 표시가 붙은 자기 글을 한참 보다가 화면을 껐다.
열한 명의 보증금을 합치면 수억 원이었다. 계산기를 열었다가 숫자를 입력하지 않고 닫았다. 자기 돈이 그중 일부로 보이는 게 싫었다.
201호 계약자의 부모가 문을 두드린 건 저녁 일곱 시쯤이었다. 노인은 수첩처럼 쓰는 낡은 가계부와 등기 사본을 들고 있었다.
“여기도 김상식 씨한테 계약한 거 맞죠?”
부부는 단체방에 올라온 새 글을 보고 찾아왔다고 했다. 201호에 사는 딸이 시간이 없어 대신 올라온 것이었다.
“우리 딸 돈도 수천만 원이 들어갔어요. 금액은 다르지만 여기 근저당권이 접수된 날이 똑같더라고.”
도현은 노부부의 서류를 직접 받지 않았다. 식탁 위에 놓아 달라고 한 뒤 휴대폰으로 필요한 부분만 촬영했다. 연락처를 적은 종이도 따로 받았다.
“저희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아는 게 없습니다. 상담받고 확인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노부부가 내려간 후 서아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가져왔다. 휴대폰은 식탁에 두고 갔다.
화면이 밝아지며 은행 문자가 떴다.
`26일 전세자금대출 이자 286,740원 출금 예정입니다.`
도현은 식탁 앞에 서 그 화면을 봤다. 폰을 손대지는 않았다.
서아가 물병을 들고 돌아왔다.
“남의 폰을 왜 보세요?”
“화면에 떠서 본 겁니다. 미안합니다.”
서아는 폰을 뒤집어 놓았다.
“피할 수 있는 이자도 아닌데 뭐. 제 계약서에 대출 7천2백 적혀 있었잖아요.”
도현이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금액을 제대로 봤습니다. 이자는 생각 못 했고요.”
“어른이 이자 내는 게 신기해요?”
“신기한 게 아닙니다. 이 집 전세대출 이자를 내면서 다른 집을 구하기가 어렵겠군요.”
서아는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생수병 뚜껑만 열었다 닫았다.
도현이 싱크대 위에 놓인 종이 봉투를 가리켰다.
“아까 편의점에 간편식 사 왔습니다. 제 몫으로 한 거라 계산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언제 먹을 거 사 달랬어요?”
“제가 먹으려고 산 겁니다. 남으면 냉장고 서아 씨 쪽에 넣겠습니다.”
도현은 봉투에서 삼각김밥을 두 개 꺼냈다. 하나는 참치, 하나는 전주비빔밥이었다.
서아는 비빔밥을 집어 들었다.
“이건 안 먹으면 버릴 것 같아서 먹는 거예요.”
“합의서에 간편식 조항도 넣어야겠습니다.”
“절대 싫어요.”
폰이 한 번 더 울렸다. 최은정이 다음 주 공동 법률상담에 둘의 자리도 예약해 놨다는 문자였다. 서아는 도현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같이 갈 거죠?”
“네. 같은 자료를 듣는 게 나을 겁니다.”
“등기부 다시 확인하셨죠?”서아가 묻자 중개사가 웃었다.“오늘 아침에 떼서 보여드렸잖아요.”“계약 직전에 한 번 더 볼게요.”“그러세요. 당연히 확인하셔야죠.”도현은 말없이 휴대전화로 등기사항을 다시 열었다. 소유자 이름, 근저당 설정 여부, 주소와 동·호수. 서아는 임대인의 신분증과 계좌 예금주를 한 번 더 맞췄다.긴장한 사람은 오히려 임대인이었다.“제가 뭐, 문제 있는 집을 내놓은 건 아닙니다.”“문제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서아가 말했다.“저희가 전에 크게 당해서요.”예전에는 전세 사기라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얼굴부터 뜨거워졌다. 이번에는 먼저 말하고 중개사와 임대인의 반응을 기다렸다.지난 집 배당금은 예상보다 조금 많았지만 보증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입금액은 각자 대출 원금에 넣었고, 임대인과 중개사를 상대로 한 절차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도현이 특약을 읽었다.“잔금과 전입신고를 마친 다음 날까지 현재 권리관계를 유지하고, 소유권 이전이나 새 담보권 설정을 하지 않는 조건 맞죠?”“예, 적어놨습니다.”“보증 가입이 거절되면 계약을 해제하고 이미 지급한 돈을 전액 반환하는 조건도요.”“여기 있습니다.”서아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임차인 칸에는 이름이 두 개 들어가 있었다.특약에는 두 사람이 부담한 보증금 액수와 반환계좌, 한 사람이 먼저 나갈 때의 정산 방식도 적혀 있었다.윤서아. 강도현.계약서는 한 장이었다.두 사람은 각자 도장을 찍었다. 도현이 도장에 묻은 인주를 닦는 사이 서아는 제 이름 옆을 손가락으로 눌렀다.손은 떨리지 않았다.계약서를 첨부해 주택 임대차 신고를 마쳤고 확정일자 번호도 확인했다.일주일 뒤 잔금을 보내기 직전, 둘은 새 등기부와 진행 중인 등기신청 유무를 다시 확인했다. 서아는 임대인의 납세증명서와 전입세대확인서, 건축물대장을 차례로 확인했다.이삿짐차 두 대가 다시 한 골목에 섰다.이번 기사들도 주소를 확인했다.“두 분 짐이 같은 집으로 가는 거 맞죠?”서아
다시 연애를 시작한 뒤에도 두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금요일 밤은 주로 서아의 집에서 보냈다. 도현의 원룸은 회사와 가까웠지만 창문을 열면 옆 건물 벽만 보였다. 서아의 집은 꼭대기라 계단을 다섯 층이나 올라야 했지만, 창문 한쪽으로 북한산 자락이 조금 보였다.“칫솔 놓고 가도 돼?”도현이 물었다.“한 개만.”“면도기는?”“안 돼.”“왜.”“세면대 좁아.”“네 화장품 반만 치우면 되잖아.”“그럼 오지 마.”“칫솔만 둘게.”일요일 저녁이면 도현은 제 칫솔을 남겨 두고 돌아갔다. 서아는 문이 닫히고 나서도 굳이 컵에서 빼지 않았다.여섯 달 동안 둘은 세 번 크게 싸웠다.첫 번째는 도현이 며칠 입을 옷을 가져와 옷장 한 칸을 차지했을 때였다. 두 번째는 서아가 데이트 비용을 매번 십 원 단위까지 정산해 보냈을 때였다. 세 번째는 도현이 부동산 매물 링크를 보냈을 때였다.`신축 투룸, 역 도보 7분, 보증금 5천/월 95.`그전에도 둘은 매물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데이트를 하다 부동산 유리창 앞에서 멈춰 가격만 읽고 지나갔다. “이건 반지하인데 왜 구십이야”, “관리비 십오만 원에 뭐가 들어가는데” 같은 말만 했다. 함께 살자는 말은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서아는 링크만 읽고 답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도현이 집에 왔다.“링크 봤어?”“봤어.”“주말에 볼래?”“왜?”“계약 끝나면 같이 살 집.”서아가 썰던 대파를 내려놨다.“누가 같이 산대?”“싫어?”“그 얘기를 왜 링크부터 보내.”도현이 현관 앞에 서서 신발도 벗지 못했다.“먼저 물어보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그러니까 또 네가 다 정하고 보여준 거네.”“정한 게 아니라 찾아본 거야.”“보증금 오천은 누가 내는데.”“내가 삼천, 네가 이천.”“봐. 정했잖아.”도현이 입을 다물었다.서아는 칼을 씻어 건조대에 놓았다. 예전 같으면 화부터 냈을 것이다. 이번에는 식탁을 가리켰다.“앉아.”“밥부터 먹고 얘기하면 안 돼?”“대파 다시 썰
서아는 인터폰 화면을 세 번 확인했다.도현이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봤다.“안 열어?”스피커에서 조금 찌그러진 목소리가 나왔다.서아가 현관문을 열었다.“여긴 어떻게 알았어?”“이사한 날 네가 보내 줬잖아.”“그걸 아직 기억해?”“응.”“무섭네.”“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잖아.”도현의 머리는 전보다 짧아졌고 얼굴과 목은 현장 햇빛에 타 있었다.서아는 화분을 내려다봤다.“그건 왜 네가 갖고 있어?”“네 트럭에 실으려다가 내 상자에 들어갔어.”“반년 동안?”“키웠어.”“물을 너무 줬네. 잎이 물렀잖아.”“죽지는 않았어.”서아가 화분을 받아 들었다. 문 앞에서 계속 이야기할 수는 없어 몸을 비켰다.“들어와.”도현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방을 둘러봤다. 침대 하나와 작은 식탁, 옷장으로 꽉 찬 원룸이었다.“생각보다 괜찮네.”“생각보다가 뭐야.”“고시원 갈 줄 알았으니까.”“돈 없지 눈 없냐.”서아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마실 만한 컵이 하나뿐이라 제 머그에 물을 따라 건넸다.도현이 두 손으로 컵을 받았다.“연락 왜 안 했어?”“내가 묻고 싶은데.”“네가 정리되면 한다며.”“그걸 진짜 기다렸어?”“응.”“시키는 건 더럽게 안 들으면서.”“그건 들으라고 한 말 같았으니까.”서아는 식탁 반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스투키 화분을 놓았다. 잎 하나가 옆으로 축 처져 있었다.“정리됐어?”도현이 물었다.“아니. 돈도 다 못 받고, 소송도 남았고. 아마 몇 년 걸릴 수도 있대.”“왜 연락 안 했어?”“하려고 했어.”“언제.”“네가 벨 누르기 직전.”서아가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관리비 삼천칠백 원 때문에.”“그건 라면값이라고 했고.”“라면을 얼마나 처먹었으면 삼천칠백 원이나 돼.”도현이 웃었다. 웃음이 끝난 뒤에도 둘 다 바로 말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옆집 문 닫는 소리가 났다.“나 서울에 집 구했어.”도현이 먼저 말했다.“어디?”“회사 근처. 보증금
혼자 사는 집에서는 아무것도 제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냉장고에 넣어 둔 즉석밥은 그대로 있었고, 검은 양말이 빨래에 섞이는 일도 없었다. 샤워를 삼십 분 해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다.서아는 처음 한 달 동안 그 자유를 악착같이 누렸다.보일러를 스물여섯 도로 올렸다.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었다. 설거지는 아침까지 미뤘다. 새벽 두 시에 드라이어도 돌렸다.그러다 옆집에서 벽을 세 번 두드렸다.“죄송합니다.”서아는 드라이어를 끄고 혼자 웃었다.웃고 나니 조용했다. 예전 집에서는 이 시간이면 도현이 벽을 두 번 두드렸다. 시끄럽다는 뜻 한 번, 이제 자겠다는 뜻 한 번. 둘이 정한 적도 없는데 어느 날부터 그렇게 됐다.서아는 벽에 손등을 댔다가 내렸다. 옆집 사람까지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다.이사 일주일 뒤 마지막 전기료가 빠져나갔다. 도현은 생활비 모임통장 잔액을 십 원 단위까지 나눠 보낸 뒤 `정산 끝`이라고 썼고, 서아는 `응`이라고 답했다. 둘이 함께 보던 계좌는 그날 닫혔다.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경매 절차는 사람들이 처음 말한 것보다 오래 걸렸다.서아는 임차권등기 완료 서류와 배당요구 접수증, 대출 연장 서류를 챙겨 다녔다. 배당요구는 종기 전에 끝냈지만 보정과 확인 연락은 계속 왔다. 피해자 결정 통지서를 받은 날에도 회사에서는 순두부찌개 신제품 관능평가가 있었다.결정서를 받았다고 돈이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바뀐 것은 지원대출 상담 창구와 안내 절차 정도였다. 서아는 결정서를 새 투명 파일에 넣고 겉면에 제 이름과 사건번호를 적었다.“대리님, 이거 끝맛이 너무 텁텁하지 않아요?”신입사원이 물었다.서아는 세 번째 컵의 국물을 삼켰다.“전분 줄이고 고춧가루 입자 바꿔봐요. 매운맛만 세게 하면 싸구려 같아.”“네.”그래도 서아는 매일 출근했고 기획안 마감도 맞췄다. 월급날이면 대출 이자와 월세가 같이 빠져나갔다. 통장 잔액은 여전히 보기 싫었지만 화장실에 숨어 확인하지는 않았다.엄마에게도 한 달에 한 번 진행 상
이삿짐차 두 대가 같은 골목에 들어왔다.기사들이 차에서 내려 주소를 확인하다가 서로를 봤다.“302호가 두 집이에요?”서아와 도현이 동시에 대답했다.“네.”처음 이사 오던 날과 똑같았다. 그날은 트럭 두 대가 집 안으로 짐을 밀어 넣었고, 오늘은 반대였다.서아의 짐부터 빠졌다. 책상, 작은 서랍장, 날짜가 붙은 반찬통. 냉장고 문에서 마지막 자석을 떼자 오래 가려져 있던 자리가 네모나게 희었다.도현이 현관 앞에서 상자를 받아 기사에게 넘겼다.“이건 깨지는 거야.”“써 있는데.”“아저씨가 방금 밑에 깔려고 했어.”“내가 말할게. 너도 네 짐 봐.”둘은 계속 서로에게 할 일을 시켰다. 멈추면 다른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작은 화분 하나가 남았다. 서아가 입주 첫날 사 온 스투키였다. 햇빛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죽지 않고 버텼다.처음에는 서아 방 창틀에 있었고 비가 새던 날부터 도현 방으로 옮겨졌다. 누가 물을 줬는지는 늘 서로 모른 척했다. 화분 받침 밑에는 관리비를 나누려고 끄적인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그건 네 거지?”도현이 물었다.“같이 물 줬잖아.”“네가 사 왔어.”“네 방에 더 오래 있었고.”“화분도 재산분할 해야 돼?”“우리가 결혼했냐?”서아가 화분을 안았다.“내가 가져갈게.”서아는 화분을 현관 옆에 잠깐 내려놓았다.짐이 빠진 작은방은 생각보다 좁았다. 침대가 있던 자리만 먼지 테두리가 잡혔고, 벽지 아래쪽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서아는 물티슈를 들고 쪼그려 앉았다.도현이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청소비 냈어.”“그래도 이건 닦고…….”“가.”“왜 쫓아내.”“네 차 기다리잖아.”밖에서 기사가 경적을 짧게 울렸다.서아는 빈방을 한 번 더 봤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이 집 때문에 이미 너무 많이 울었다. 그런데 자꾸 코가 매웠다.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도현이 무릎을 굽혔다.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 주려는 줄 알고 서아가 발을 뺐다.“뭐 해.”“이거.”그가 신발장 아래에서 검은
이삿짐 상자가 거실 벽을 따라 쌓였다.서아 것에는 `주방`, `옷`, `회사 샘플`이 적혔고, 도현 것에는 숫자만 쓰여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붙어 있던 `서재`, `주방`, `도면` 메모 대신 번호가 남았다.“십이 번은 뭐야?”“책.”“십일 번은?”“책.”“왜 굳이 번호를 써.”“목록 따로 있어.”“피곤하게 산다.”“냉장고 달걀에도 날짜 쓰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둘은 나흘 만에 제대로 대화했다. 대전 이야기가 나온 뒤 필요한 말만 주고받았다. 종량제 봉투 더 사지 마. 가스 해지했어. 이삿짐차는 열 시에 와.내일이면 그 말도 끝이었다.서아가 싱크대 아래에서 처음 쓴 생활계약서를 찾았다. 물이 튀어 종이 가장자리가 울어 있었다.`1. 각자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는다.``4. 냉장고 왼쪽은 서아, 오른쪽은 도현이 쓴다.``7. 계약 종료 즉시 각자 퇴거한다.`둘은 이사 관련 확인서와 배당요구 접수증을 각자 서류 상자 맨 위에 넣었다.도현이 어깨 너머로 종이를 읽었다.“칠 번은 잘 지키겠네.”“그러게.”서아는 종이를 버리려다 접어서 가방 옆주머니에 넣었다.“대전 언제 가?”“모레.”“숙소는?”“현장 근처 오피스텔.”“좋겠다. 사기당한 집보다는 낫겠네.”도현이 테이프를 끊다 말고 서아를 봤다.“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뭘.”“네 두고 도망가는 사람처럼.”“내가 언제 그랬어.”“계속 그러고 있잖아.”서아는 빈 서랍을 닫았다. 잘 맞지 않는 레일이 덜컹거렸다.“그럼 아니야?”“나도 집 구해야 돼. 돈 벌어야 하고.”“알아.”“모르는 얼굴인데.”그가 며칠 전 서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서아가 바닥에 앉았다. 상자에 가려진 창으로 해 질 무렵 빛이 들어왔다.“네가 또 없어질까 봐 그래.”도현의 손에서 테이프가 길게 풀렸다.“아빠도 돈 문제 생기고 지방 간다고 했어. 일 잡히면 부른다고. 그게 마지막이었어.”“나 네 아버지 아니라고 했잖아.”“알아. 머리로는.”도현이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