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 미친년이.”
옥련의 욕이 골목을 갈랐다.
연화는 문고리에 붉은 실을 건 채 손을 떼지 않았다.
난실도, 옥련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이겸만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밤 오고 싶으면 와 보시오.”
옥련이 헛웃음을 쳤다.
“남의 방에서 나온 사내를 밤새 훔쳐 듣더니 이제는 문까지 여네?”“닥치시오.”
“왜? 맞는 말이라 배가 아프오?”
연화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내 문을 내가 여는데 그대 허락까지 받아야 하오?”옥련이 이겸을 턱짓했다.
“내 허락은 필요 없지. 저 사내가 들어가 줄지는 모르겠지만.”모두의 시선이 이겸에게 쏠렸다.
그가 연화 앞으로 걸어왔다.
붉은 실이 걸린 문고리 앞에서 멈췄다.“왜 걸었소?”
“오라 했잖소.”
“나를 원해서 걸었소, 저 여자들에게 지기 싫어서 걸었소?”
연화의 입술이 굳었다.
“무슨 차이요?”
“내게는 크오.”
“사내 하나가 참 유세도 떠네.”
“그럼 걷으시오.”
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옥련이 웃음을 터뜨렸다.
난실은 웃지 않았다.연화가 낮게 물었다.
“내 문을 거절하는 것이오?”“그대가 나를 부른 게 아니니까.”
“내 입으로 오라고 했소.”
“질투가 대신 말했지.”
짝.
연화의 손이 먼저 나갔다.
골목이 얼어붙었다.
이겸의 뺨이 한쪽으로 돌아갔다.이겸은 천천히 고개를 바로 했다.
“이제 좀 그대답네.”
“미친놈.”
연화가 붉은 실을 잡아 뜯었다.
“꺼지시오.”실이 끊어져 진흙 위로 떨어졌다.
그날 밤, 어느 집 문에도 그를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해가 기울자 난실이 대장간 문고리에 붉은 댕기를 걸었다.
옥련은 주막 창문을 열었다. 연화는 대문 안에서 낫 손잡이에 새 끈을 감았지만 매듭은 자꾸 풀렸다.
그때 이겸의 발소리가 골목을 지나갔다.
연화의 손이 멎었다.
발소리는 그녀의 집 앞을 지나 대장간 앞에서 멎었다.
“빌어먹을.”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창호에 비친 그림자만으로도 상황이 보였다.
난실이 문 안쪽에서 말했다.
“어젯밤에는 내게 오라 했는데 안 왔소.”
“댕기를 걸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걸었소.”
“마음도 같소?”
난실이 웃었다.
“그걸 확인하러 온 것 아니오?”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대장간 문이 열렸다.
연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낫이 방바닥에 떨어졌다.쾅.
대장간 쪽에서도 소리가 멎었다.
이겸의 목소리가 골목을 건너왔다.
“무슨 소리요?”난실이 대답했다.
“남의 집 사정이 궁금한 과부가 또 뭘 떨어뜨렸나 보지.”연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미친년이.”그때 난실이 말했다.
“들어오시오.”
문이 닫혔다.
탁.
연화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빗장을 걸었다.
“상관없어.”
한 번.
“내 알 바 아니야.”
두 번.
“저 둘이 뭘 하든.”
세 번째에는 목소리가 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간 쪽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쿵.
잠시 뒤 난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화는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남았다.
더 화가 나는 건 이겸의 낮은 목소리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연화는 결국 일어났다.
“미쳤어.”
자기에게 욕하면서도 빗장을 풀었다.
대장간 문은 닫혀 있었다.
붉은 댕기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세 걸음만 가려 했다.
그런데 다섯 걸음이 됐다.
열 걸음이 됐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장간 문 앞이었다.
안에서 인기척이 멎었다.
돌아가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난실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 한쪽이 풀려 있었고 얼굴은 붉었다. 그 뒤에 이겸이 있었다.난실이 연화를 훑었다.
“뭘 찾으러 왔소?”
“지나가던 길이오.”
“밤중에 내 대장간 문 앞을?”
연화가 입을 다물었다.
난실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지나가시오.”문이 닫히려 했다.
연화의 손이 문짝을 잡았다.
난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겸도 연화를 바라봤다.“잠깐.”
“왜.”
연화의 시선이 난실을 지나 이겸에게 박혔다.
“저 사내에게 물을 게 있소.”
난실이 헛웃음을 쳤다.
“내 문 안에 들어온 사내에게?”
“그렇소.”
“지금?”
“지금.”
난실이 문을 더 열었다.
“좋아. 들어와서 물어.”
연화의 얼굴이 굳었다.
“왜. 남의 문 앞까지는 올 수 있는데 문턱은 못 넘겠소?”
그 순간 주막 창문이 벌컥 열렸다.
옥련이었다.
“넘어.”
옥련이 차갑게 웃었다.
“어디까지 미칠 수 있나 나도 좀 보게.”
난실이 이겸의 팔을 잡았다.
“선택하시오.”
“무슨 선택?”
“내 방에 남을지.”
난실의 눈이 연화에게 박혔다.
“저 여자 따라 나갈지.”
이겸이 연화에게 물었다.
“나가면 그대 문은 열리오?”
연화의 입술이 떨렸다.
“내 문은 안 열어.”
난실이 웃었다.
연화가 한마디를 더 붙였다.
“대신 오늘 밤은 그 문에서도 나오시오.”
난실의 웃음이 사라졌다.
옥련이 주막에서 박수를 한 번 쳤다.
“이제야 재밌어졌네.”난실이 이겸의 팔을 놓고 연화에게 다가섰다.
“내 문에서 사내를 빼내겠다는 말이오?”
연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빼내는 게 아니오.”
붉은 댕기가 바람에 흔들렸다.
“어디로 가는지 보겠다는 거요.”
난실이 낮게 웃었다.
“그럼 끝까지 보시오.”그리고 이겸의 손을 잡아 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문이 닫히기 직전 이겸이 연화를 봤다.
연화의 입에서 결국 한마디가 터졌다.
“가지 마.”
난실의 손이 멎었다.
옥련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연화 자신이 가장 먼저 얼어붙었다.
“이제 나 알아보겠어?”연화의 입술이 떨렸다.문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봉인된 장면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비 오는 밤.피 묻은 셔츠.자신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연화야, 절대 날 믿지 마.’“……당신.”남자가 한 걸음 들어왔다.“그래.”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진짜 당신이야?”“늦게 와서 미안해.”연화는 그대로 달려가려 했다.하지만 멈췄다.지금까지 믿었던 것 중 진짜였던 것이 거의 없었다.“다가오지 마.”남자가 멈췄다.연화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당신 이름.”“강민석.”그 이름을 듣는 순간 한재문이 굳었다.윤재혁 역시 표정이 변했다.서린만 고개를 숙였다.연화가 그들을 바라봤다.“다 알고 있었네.”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내 남편이 살아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어?”강민석이 대신 대답했다.“나도 네가 살아 있는 줄 몰랐어.”“무슨 소리야?”“십 년 전 그날 이후 네가 사라졌어.”강민석의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연화는 숨을 삼켰다.“그럼 내가 기억하는 장례식은?”“내 장례식이 아니야.”“뭐?”강민석이 씁쓸하게 웃었다.“네가 장례를 치른 건 나와 얼굴이 비슷했던 다른 남자였어.”연화가 얼어붙었다.“또 가짜야?”“그래.”“대체 몇 명이 나를 속인 거야?”연화가 소리쳤다.“왜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데!”강민석이 고개를 숙였다.“네가 알게 되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누가 나를 죽여?”그 순간 서린이 말했다.“나.”연화가 돌아봤다.서린은 울고 있었다.“내가 네 남편을 죽이려고 했어.”강민석이 서린을 노려봤다.“그만해.”“아니.”서린이 고개를 저었다.“이제는 다 말해야 해.”연화가 서린 앞에 섰다.“왜?”“네가 민석 씨를 사랑했으니까.”“그게 이유야?”“아니.”서린이 입술을 깨물었다.“내가 임신했을 때 민석 씨가 네게 돌아가겠다고 했어.”연화의 눈빛이
“처음부터 네 남편이 아니었어.”윤재혁의 말이 떨어지자 연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재문이 고개를 숙였다.연화는 그를 바라봤다.“그럼 넌 대체 누구야?”한재문은 대답하지 않았다.“이륜도 아니고, 내 남편도 아니고.”연화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그런데 십 년 동안 내 옆에 붙어서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어?”“연화야.”“닥쳐!”연화가 소리쳤다.“이제 내 이름 부르지 마.”한재문의 얼굴이 무너졌다.“나는 널 속이려고 한 게 아니야.”“그럼 뭔데?”“처음에는 네가 살기만 하면 됐어.”“처음에는?”연화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그럼 나중에는?”한재문은 입을 다물었다.연화가 한 걸음 다가갔다.“나중에는 정말 나를 사랑했어?”한재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그래.”“거짓말.”“그건 진짜야.”“그럼 왜 내 남편 행세를 했어?”한재문은 고개를 들었다.“네 남편이 죽은 뒤 네가 무너졌으니까.”“누가 죽였는데?”그 질문에 한재문의 표정이 굳었다.연화는 그의 눈을 놓치지 않았다.“내 남편을 누가 죽였냐고.”윤재혁이 낮게 말했다.“한재문.”연화가 천천히 돌아봤다.“뭐?”“네 남편을 죽인 사람은 저놈이야.”한재문이 소리쳤다.“거짓말하지 마!”윤재혁이 웃었다.“네가 직접 했잖아.”“그건 사고였어!”연화가 얼어붙었다.“사고?”한재문은 입을 다물었다.윤재혁이 말했다.“십 년 전 네 남편은 나한테 하린을 맡기려고 했어.”“그런데?”“한재문이 막았지.”한재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 새끼가 하린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어.”“그래서 죽였어?”“죽일 생각은 없었어.”연화가 차갑게 물었다.“그럼?”“밀쳤어.”한재문의 목소리가 떨렸다.“한 번 밀쳤을 뿐이야.”“그리고 죽었어?”“그래.”연화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조용히 물었다.“그런데 왜 내가 죽였다고 기억하게 만들었어?”한재문이 고개를 들었다.“네가 그 장면을 봤으니까.”“…….”“네 남편이 죽는
현관문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연화는 하린을 뒤로 숨겼다.“누구야?”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한재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안 돼.”연화가 그를 돌아봤다.“뭐가 안 돼?”“저 사람을 만나면 안 돼.”“왜?”“네가 아직 준비가 안 됐어.”연화가 차갑게 웃었다.“내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들이 다 똑같은 말을 하네.”문이 열렸다.한 남자가 들어왔다.연화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었다.숨이 나오지 않았다.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사진 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남자.자신이 죽였다고 믿었던 남자.“……이륜?”남자가 걸음을 멈췄다.“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연화의 눈이 흔들렸다.“그럼 누구야?”남자가 연화를 똑바로 바라봤다.“윤재혁.”한재문의 얼굴이 굳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윤재혁이 비웃었다.“십 년 동안 숨어 있었는데, 이제 와서 왜냐고?”연화가 두 사람 사이를 바라봤다.“둘이 아는 사이야?”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해!”윤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놈은 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든 사람이야.”한재문이 이를 악물었다.“네가 죽은 척한 거잖아.”“누구 때문에?”“네가 하린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으니까.”연화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하린?”윤재혁의 시선이 아이에게 향했다.순간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하린…”아이가 몸을 떨었다.“아빠.”연화의 얼굴이 굳었다.“아빠?”윤재혁이 하린에게 다가가려 하자 연화가 막아섰다.“가까이 오지 마.”윤재혁이 멈췄다.“왜?”“내 딸한테 무슨 짓을 했어?”윤재혁이 씁쓸하게 웃었다.“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구나.”“뭘?”“네가 나한테 했던 말.”연화가 눈을 찌푸렸다.“무슨 말?”윤재혁이 천천히 말했다.“하린을 낳은 날, 네가 나한테 부탁했어.”“뭘?”“하린을 데리고 도망쳐 달라고.”연화의 얼굴이 굳었다.“내가?”“그래.”“왜?”윤재혁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네가 하린을 죽일까 봐.”연화가 숨을 삼켰다
“이륜이… 하린을 훔쳤다고?”연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한재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대답처럼 느껴졌다.“대답해.”연화가 한재문에게 다가갔다.“내가 낳은 아이를 엄마가 데려갔고, 이륜이 다시 빼앗았다는 거야?”“정확히는…”“정확히 말해!”한재문이 눈을 감았다.“하린은 한 번도 정상적으로 자란 적이 없어.”연화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뜻이야?”“태어난 직후 네 어머니가 하린을 데려갔어. 그런데 몇 달 뒤 이륜이 하린을 찾아냈지.”“그래서 데려갔고?”“그래.”“왜?”한재문은 잠시 망설였다.“네가 하린을 찾으러 갈까 봐.”연화가 헛웃음을 흘렸다.“내 딸인데 내가 찾으러 가는 게 무서웠다고?”“그때 너는 기억을 잃은 상태였어.”“아니.”연화가 고개를 저었다.“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어.”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누군가 내 기억을 없앤 거야.”한재문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때 하린이 조심스럽게 연화의 손을 잡았다.“엄마.”연화가 내려다봤다.“응.”“아빠도 있었어.”연화의 눈빛이 흔들렸다.“아빠?”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어릴 때 아빠가 나한테 사진을 보여줬어.”“누구였어?”“엄마랑 같이 찍은 사람이었어.”“이륜?”하린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연화의 심장이 내려앉았다.“그럼 누구야?”하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빠가 그러는데…”아이의 입술이 떨렸다.“엄마가 그 사람을 죽였대.”연화의 얼굴이 굳었다.“뭐?”“그래서 아빠가 엄마를 미워한다고 했어.”한재문이 급히 하린의 입을 막으려 했다.“하린아, 그만해.”연화가 한재문의 손목을 잡았다.“놔.”“연화야.”“아이 입을 막는 순간 네가 거짓말하는 거라는 확신이 들어.”한재문이 손을 내렸다.연화는 하린에게 물었다.“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나?”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기억나.”“누구야?”“이륜 아저씨가 아니야.”하린이 말했다.“아빠가 보여준 사진 속 사람은…”아이의 시선이
“엄마, 나 알아보겠어?”연화는 아이를 바라본 채 움직이지 못했다.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긴 머리카락.작은 얼굴.그리고 눈매까지.너무 닮아 있었다.연화 자신과.“……누구야?”아이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나 몰라?”“미안해.”연화의 목소리가 떨렸다.“정말 기억이 안 나.”아이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엄마가 나 버렸잖아.”“뭐?”연화가 한 걸음 다가갔다.“누가 그런 말을 했어?”“아저씨가.”아이가 뒤를 돌아봤다.복도 끝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한재문의 얼굴이 굳었다.“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강우가 낮게 물었다.한재문은 대답하지 않았다.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오랜만이네, 연화.”연화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당신.”알 수 없는 장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어두운 방.울고 있는 아이.그리고 자신의 손을 붙잡은 남자.‘절대 아이를 데리고 나가지 마.’연화가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으윽…”“연화야!”한재문이 달려왔다.하지만 연화가 손을 뿌리쳤다.“건드리지 마!”“괜찮아?”“너 때문에 더 기억이 안 나.”한재문이 멈췄다.연화는 아이를 바라봤다.“네 이름이 뭐야?”“하린.”그 이름을 듣는 순간 연화의 표정이 굳었다.하린.익숙했다.너무 익숙했다.“하린…”연화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되뇌었다.그러자 아이가 울면서 물었다.“엄마가 지어준 이름이잖아.”“내가?”“응.”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가 나한테 말했어. 내가 태어나던 날 엄마가 나를 꼭 살리겠다고 했대.”연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그때 한재문이 끼어들었다.“그 아이 말 믿지 마.”연화가 그를 돌아봤다.“왜?”“하린은 네 딸이 아니야.”아이가 고개를 숙였다.연화가 한재문에게 다가갔다.“그럼 누구 딸인데?”한재문은 입을 다물었다.“대답해.”“……서린.”연화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서린의 딸이라고?”“그래.”그 순간 하린이 소리쳤다.“거짓말
“네가 죽인 사람의 동생이야.”이륜의 말이 끝나자 연화의 얼굴이 굳었다.“거짓말.”“연화야.”“또 거짓말이잖아.”연화가 뒷걸음질 쳤다.“넌 이륜이잖아.”“맞아.”“그런데 왜 네가 이륜의 동생이야?”“이름은 이륜이 아니야.”연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럼 네 이름은?”이륜이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강우가 대신 입을 열었다.“한재문.”연화의 몸이 굳었다.“뭐?”“저 남자의 본명은 한재문이야.”연화는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돼.”“네가 알고 있던 이륜은 십 년 전에 죽었어.”강우가 사진을 가리켰다.“그리고 한재문이 그 자리를 대신했어.”연화는 사진을 다시 집어 들었다.피투성이가 된 남자.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이륜.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칼.손끝이 미친 듯이 떨렸다.“내가 죽였어?”“네가 죽인 건 맞아.”강우의 대답은 너무 차가웠다.연화가 그를 노려봤다.“왜?”“그 사람이 네 아이를 죽이려고 했으니까.”“……뭐?”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무슨 아이?”강우가 대답하려는 순간 한재문이 소리쳤다.“그만해!”연화가 그를 바라봤다.한재문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그 얘기는 하면 안 돼.”“왜?”“네가 기억하면…”그가 입술을 깨물었다.“네가 또 무너져.”“이미 무너졌어.”연화가 웃었다.“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죽었다고 하고, 네가 그 사람인 척 내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내가 멀쩡해 보여?”한재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화가 다가갔다.“왜 나한테 이륜인 척했어?”“널 살리려고.”“그 말 지겨워.”“진짜야.”“그럼 왜 내 아이를 숨겼어?”한재문의 표정이 굳었다.연화가 숨을 멈췄다.“……내가 아이가 있었어?”한재문이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한 명이 아니야.”연화의 눈이 커졌다.“몇 명인데?”“세 명.”연화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세 명?”“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가 세 명 있어.”“어디 있어?”한재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