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어제 밤새 내리던 쏟아지던 거센 폭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시골 민박집의 아침 하늘은 거짓말처럼 유난히 청명하고 푸르게 개어 있었다.아침 일찍 민박집 할머니가 마당을 가로질러 오시더니,툇마루 앞 평상 위에 노란색 양은 주전자와 투명한 유리잔 두 개를 툭 내려놓았다."아이고, 젊은 남녀가 비를 쫄딱 맞고 고생이 많았어요. 어제 밤새 천둥이 치고 난리도 아니었지? 아침에 속 좀 풀라고 이 할미가 직접 타 둔 밀크커피요. 국산 황금 비율로 기가 막히게 타 낸 거니까 얼른 마셔봐요."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향해,지우와 리안은 나란히 꾸벅 인사를 건넸다.비록 어젯밤 허름하고 낡은 시골 방에서 단둘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긴 했지만,다행히 지우는 리안에게 선을 넘는 과한 척을 하지 않고아주 신사적이고 듬직한 매너를 보여주었다.덕분에 리안 역시 곤두서 있던 경계심을 조금은 풀고,아침의 맑은 공기를 들이켜며 평상 끝에 나란히 걸터앉았다.평상 위에는 다방 커피 스타일의 달달하고 구수한 믹스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자, 어제 그 탕비실 황금 믹스커피 부럽지 않은 시골 할머니표 특제 밀크커피 나갑니다. 속 좀 따뜻하게 데워요, 변호사님."지우는 투명한 유리잔을 하나 집어 리안에게 건네주며 피식 웃었다.리안은 퉁명스럽게 콧방귀를 뀌면서도,컵을 받아 들고 호호 불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었다.달달하고 부드러운 목넘김이 어제 밤새 쌓였던 피로와 긴장감을사르르 녹아내리게 만드는 기분이었다."음…… 맛은 있네요. 이 동네 할머니 솜씨가 아주 프로급이십니다.""그쵸? 역시 믹스커피는 삶의 진리라니까요. 전무님도 이제 믹스커피의 중독에서 못 벗어나실 것 같네요."지우는 싱긋 웃으며 리안의 옆모습을 슥 바라보았다.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리안의 매끈한 뺨과,어제 잠을 설친 탓에 살짝 부은 듯 만 듯한 눈망울,그리고 멍하니 커피를 마시는 동글동글한 뒤통수까지그저 마냥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방 공장 현장 실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서울로 향하던 길목.시골 국도를 달리던 지우의 차가운 수입 세단이갑자기 툭 하고 이상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하늘은 언제 화가 난건지 순식간에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이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고 굵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우르릉쾅쾅,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퍼부었다."이 날씨에 비가 이렇게 쏟아지다니……."리안이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살피던 그 순간이었다.푸스스슥— 쿵!차체가 한쪽으로 크게 덤벙이며 가라앉았다.타이어가 터진 탓이었다.지우는 신속하게 핸들을 붙잡고 차량을 갓길 쪽으로 안전하게 세웠다.비상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차에서 내려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왔지만,상황은 심각했다.타이어 옆구리가 완전히 찢어져 있었고,폭우가 너무 거세서 이 산골 길까지 견인차가 도착하려면최소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는 답이 돌아왔다.그것조차 확실하지 않다던 서비스센터 직원의 말에 지우는 매우 난감해 졌다.전화 통화마저 지형 때문에 간당간당 끊기는 야속한 상황 속에서,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비를 쫄딱 맞은 채 겨우겨우 발품을 팔아국도 변에 홀로 자리 잡은 허름하고 오래된 시골 민박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마을 이장님이 운영하는 듯한 그 민박집의 문을 두드리자,할아버지는 곤란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아이쿠, 손님들. 이를 어째... 방이 딱 하나 남았어. 방학 맞아 가끔 시골 내려오는 손님들 쓰라고 둔 방인데, 그마저도 장판 불을 막 넣어둔 터라 하나밖에 안 남았다고."방은 단 하나.남녀 둘이서 그 좁은 방을 공유해야 한다는 현실에 리안의 얼굴이 사정없이 굳어졌다."전무님, 저 방은 절대 안 됩니다. 다른 데 알아봅시…….""이 비바람에 어디를 또 돌아다녀요. 변호사님 이대로 가다가는 감기 걸려 쓰러지게 생겼는데. 어르신, 그 방 당장 쓰겠습니다. 방 열쇠 주시죠."지우는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숙
태산 그룹 본사 지하 주차장.지방에 위치한 인수 대상 기업의 핵심 제조 공장으로 향하는 현장 실사 날이었다.대규모 실무진 인원은 선발대로 먼저 내려보낸 터라,그룹 총괄인 서지우 전무와 로펌의 핵심 파트너 변호사인 문리안은어쩌다 보니 단둘이 지우의 개인 차량으로 이동하게 되었다.이른 아침, 주차장에서 지우를 기다리던 리안은차 문을 열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늘 딱 떨어지는 고급 수트에 넥타이를 완벽하게 조이고 있던평소의 완숙한 대기업 전무의 모습은 어디 가고,오늘은 검은색 무지 맨투맨 티셔츠에 편안한 데님 팬츠 차림이었다.어깨 라인이 넓게 드러나는 캐주얼한 차림새 덕분에그의 훤칠한 피지컬과 훈훈한 이목구비가 더욱 부각되어,마치 대학 캠퍼스를 거니는 잘생긴 선배 같은 묘한 설렘을 풍기고 있었다.어딘가 소년미와 성숙한 어른 남자의 매력이 동시에 묻어나는 반전 스타일이었다."왜요? 그렇게 스캔하듯 훑어보늘 걸 보니,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지우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리안은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헛기침을 켁 하고는,일부러 쌀쌀맞게 굴며 차에 올라탔다."아닙니다. 전무님 사복 차림이 워낙 특이해서 구경 좀 했습니다. 비즈니스 출장길에 복장이 그게 뭡니까? 대학 MT 라도 가는 것 마냥…….""이래봬도 나름 생각하고 입은 복장인데... 오늘 현장 공장 바닥 구르고 먼지 마시려면 수트보다 이게 백 배 편해요. 자, 출발합니다. 벨트나 매시죠, 변호사님."지우가 부드럽게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서울을 벗어나 탁 트인 고속도로로 진입하자,차 안에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며칠 동안 밤샘 야근과 팽팽한 기싸움으로 지쳐 있던 리안은,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꺼풀이 무거워졌다.얼마나 달렸을까.잠에서 깨어난 리안이 부스스 눈을 뜨자,차량은 고속도로의 한 유명 대형 휴게소 주차장에 부드럽게
늦은 밤, 태산 그룹 본가의 아늑하고 조용한 거실.은은한 간접 조명 아래, 서지우는 품에 안고 있던 조카를아이 방 침대에 아주 조심스럽고 평화롭게 눕히고는 문을 살짝 닫고 나왔다.하루 종일 로펌의 빡빡한 업무 스케줄과 현장 실사 준비,그리고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던 문리안의 잔상들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터라,지우의 얼굴에는 미세한 피로가 묻어났다.거실 쇼파 쪽으로 걸어 나오자,형수인 강수아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
태산 로펌 집무실 안쪽의 소형 회의실.방금 전까지 터져 나오던 숨소리마저 뚝 멎은 것처럼 무거운 정적 속에서,서지우와 문리안은 서로의 눈동자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었다.서지우의 묵직하고도 진솔한 직진 고백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리안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 겨우 입술을 달싹이며 쥐어짜듯 한마디를 뱉어냈다."갑자기…… 반말을 하고 그러십니까……?"진지한 분위기를 와르르 무너뜨리는 리안의 엉뚱한 반말 타령에,서지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아, 이 아가씨는 진짜 긴장감 속에서도 어떻게든 방어막을 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까지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싶었다.서지우가 낮게 웃으며 더 바짝 다가서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복도 너머로 구두 소리와 함께 로펌 직원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며 가까워져 왔다."전무님 보고서는 이쪽 회의실 안쪽에 두면 될까요?""아, 네. 안쪽에 검토 중이실 겁니다."회의실 문이 열리기까지는 채 몇 초도 남지 않은 다급한 상황이었다.화들짝 놀란 리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도망치려 했지만,서지우의 판단력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서지우는 곧바로 리안의 가느다란 손목을 덥석 쥐고는,"조용히해"라는 눈빛과 함께 회의실 바로 옆에 딸려 있던좁고 어두운 탕비실 안으로 스윽 밀고 들어갔다.딸깍-하고 탕비실 문이 닫히고,곧이어 회의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멀어졌다.위기는 모면했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빛이 거의 들지 않는 좁고 아늑한 탕비실 안.정수기와 싱크대 사이에 마련된 아주 협소한 공간 속에서,서지우는 리안을 벽면 쪽으로 살짝 밀어세우며 그 완벽한 품 안에 그녀를 가두었다.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어,서로의 옷자락과 뜨거운 숨소리가 고스란히 귓가를 간지럽혔다.어둠 속에서 서지우의 짙고 깊은 눈동자가 오롯이 리안을 향해 빛났다."후…… 하우스키핑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서지우가 리안의 귓가에 낮고 쉰 목소리를 흘렸다.너무 가깝게 밀착된 탓에 리안은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
태산 로펌 집무실 안쪽의 소형 회의실.단 5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아찔한 거리 속에서,서지우와 문리안의 눈빛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혔다.회의실 안은 방금 전까지 터져 나오던 숨소리마차 뚝 멎은 것처럼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두 사람의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서로의 귓가를 울릴 만큼텐션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리안은 제 몸에 덮여 있던 지우의 수트 자켓 자락을 꽉 움켜쥔 채,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지우는 리안이 제 자켓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꽉 쥐고 있는 모습을 시선으로 슥 훑었다.그리고는 입꼬리를 나지막하게 말아 올리며,얕은 숨결과 함께 낮고 짙은 목소리를 흘렸다."기억 안 난다더니…….""……네?""그때 그 비 오는 날, 산후조리원 앞에서 툭 걸쳐줬던 이 자켓 말이야. 입어본 적 없다면서, 이 자켓 감촉이랑 그날 밤 코끝을 스치던 향기는 확실히 기억하나 보네? 손가락에 힘 들어간 거 봐라."지우의 장난기 섞인 지적에 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달아올랐다.아차 싶었다.3년 전 그날 밤, 온몸이 젖은 채 벌벌 떨던 자신에게무심하게 자켓을 벗어주던 그의 온기와 낯선 코지우드 향은머리가 아니라 온몸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었다.잠결에 무의식적으로 그 자켓을 움켜쥐었다는 사실을 들켜버리자,리안은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렸다."누, 누가 기억한다는 겁니까! 그냥 잠결에 추워서……!"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자켓을 밀어내고 손을 빼내려던 리안이었지만,그보다 지우의 반응이 한 박자 더 빨랐다.지우는 자켓을 쥐고 있던 리안의 손등 위로 자신의 커다란 손을 묵직하게 덮어쥐었다.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정하는 그 손길은부드러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지배력을 띠고 있었다."거짓말했지, 리안.""손…… 이거 안 놓습니까, 전무님?""싫은데. 또 도망치려고 하잖아."지우는 리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진지한 눈빛으로 가라앉았다.그저 짓궂은 농담을 던지던 평소의
“은수아 학생. 출석 안 합니까?” 강의실을 채운 백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뒷덜미에 꽂혔다. 하지만 수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귓가에서 거대한 이명이 일었다. 단상 위에 서 있는 남자. 은테 안경 너머로 지독하려치만 냉정하게 빛나는 저 눈동자. 맞춤 수트를 자로 잰 듯 차려입은 한국대 식물생명공학과 교수, 서지완. ‘말도 안 돼.’ 수아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웅덩이치며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 목소리를 안다. 저 단단한 어깨를, 제 살결을 파고들던 그 뜨거운 체
술을 마신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지완은 몸 안쪽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이상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단순한 취기가 아니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뜨거운 불길이 뇌를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거친 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눈앞이 흐려지고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서지우. 술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지완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우의 덜미를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형, 미안. 근데 형을 위해서야.
“엄마, 대박 사건이라니까? 형이 여자한테 눈이 돌아갔어. 그것도 아주 제대로.” 서울 성북동의 거대한 저택, 서지우는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에게 흥분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지방의 한 한적한 카페 구석, 지우의 손에는 채원의 신상명세서와 조사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강수아, 스물둘. 지방 국립대 농업생명과학과 과수석. 부모 없이 홀로 키워준 이모의 교통사고 수술비를 대기 위해 잠시 밤거리로 흘러든 불쌍하고 올곧은 여자. 평생 얼음 조각 같던 형 서지욱이 매일 밤 노래방 구석에서 그 미련한 짓을 하
서지완의 인생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자식을 학문의 도구로 여기는 엄격한 집안에서, 그는 늘 자를 잰 듯 완벽한 장남이어야 했다. 감정은 사치였고 이성은 법이었다. 서른넷이 되도록 그 어떤 여자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건 대단한 절제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흥미가 없었다. 심장이 뛰지 않으니 동요할 일도 없었다. 친구들의 등쌀에 밀려 이 유흥가 지하의 퀴퀴한 노래방에 앉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지완은 제 인생이 통째로 뒤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 새로 온 애냐?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