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밤은 깊었지만, 태산 그룹을 둘러싼 위기의 공기는 오히려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이번 NDA(비밀유지조약) 위반 고소 건의 상대측 로펌 변호사로 선임된 이는다름 아닌 문리안의 대학 선배이자, 친 오누이 처럼 친하게 지냈던 한준우 변호사였다.사건의 흐름을 단단히 쥐고 있는 상대측 핵심 대리인과직접 대면할 필요가 있던 리안은 결국오피스텔 앞 작은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서 한준우와 마주 앉게 되었다.늦은 시간, 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두 사람은나란히 캔커피를 손에 쥐고 있었다."리안아. 우리가 이렇게 적으로—아니,상대측 변호사와 대리인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한준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캔커피의 뚜껑을 만지작거렸다.평소의 여유롭고 부드럽던 모습과는 달리,그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과 우려가 가득 서려 있었다.리안은 캔커피의 서늘한 온기를 느끼며 차분하게 시선을 맞추었다."그러게요. 세상 일 참 뜻대로 안 되죠.&
로펌 의 대회의실.전날 밤 터진 NDA 위반 고소 건의 방어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태산의 핵심 변호사들과 각 파트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공기 속에서,마침내 문리안 변호사가 차분하고 명쾌한 목소리로 밤새 분석해 낸핵심 증거와 조작된 서류의 허점을 짚어내며 브리핑을 이어갔다."상대측이 제출한 고소장의 허위 정황과 우리가 확보한 1차 방어선을 정리했습니다."리안의 브리핑이 깔끔하게 끝나자마자,회의실 구석에서 차가운 눈빛을 빛내던 윤채린 변호사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그녀는 평소 어린 나이에 태산의 핵심 사건을 맡으며승승장구하는 리안을 질투의 시선으로 눈엣가시처럼 여겨오던 참이었다."문 변호사, 브리핑 잘 들었습니다. 아주 열정적이네요."윤채린은 은근한 가시를 품은 미소를 지으며 이사회 임원들을 슥 둘러보았다."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사건은 파장이 너무 커서 기업 이미지 자체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어요. 문 변호사가 아직 어리고 경력이 짧은데다 연차가 낮다 보니, 솔직히 이런 대형 스캔들의 리스크를 온전히 방어하기엔 벅찬 감이 없지 않아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경험 많은 저희 선배들이 이 사건을 넘겨받아 수습하는 게 안전하다고 봅니다. 선배들의 해결 과정을 보는 것도 문 변호사에겐 좋은 공부가 될 테고요."말은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웠지만,본질은 명백한 후려치기이자 밥그릇 빼앗기였다.회의실 안의 몇몇 임원들도 윤채린의 말에 동조하듯미간을 찌푸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문리안은 당황하기는커녕, 특유의 차가운 눈매를 가늘게 뜨며 고스란히 받아쳤다."윤 변호사님,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한데요. 제가 브리핑한 데이터와 방어 논리에 법적인 허점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인 조항을 짚어 가며 반박해 주시죠. 막연히 '나이가 어리다', '경험이 부족하다' 같은 주관적인 잣대로 업무 능력을 재단하는 건 같은 변호사로서 하실 말씀이 아니라고 보는데요."목소리 하나 떨리지 않고
전날 밤 터진 기습적인 NDA 위반 고소 건과최강민 전무의 서늘한 도발 때문에 태산 그룹 법무팀은아침부터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밤새 서류와 씨름하던 문리안 변호사는마침내 상대측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 조항과데이터 불일치 단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하… 이거였어! 이 자식들이 증거를 조작하려고 일부러 원문 조항을 비틀어 놨던 거야!"머릿속이 온통 그 결정적 단서와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리안은이 흥분과 벅찬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혹은 폭발할 것 같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평소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이자당 충전소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믹스커피였다.고급 원두커피나 에스프레소 같은 것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오직 달달구리한 노란 봉지 믹스커피만 고집하는 그녀였기에,이 긴박한 순간에 노란 봉다리의 마력이 절실했다.리안은 진지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형 텀블러 컵을 집어 들고는,탕비실로 향했다.어쩔 수 없이 신이난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고즐거운 손은 믹스커피 스틱 세 개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신나게 확 잡아 뜯어내려던 찰나.문제는 방금 찾아낸 결정적인 단서에 대한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손끝에 평소보다 훨씬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는 점이다."이번 기사 루트랑 조작된 서류 정황을 조합하면… 당장 상대측 대표 멱살이라도 잡을 수 있어!"혼자 중얼거리며 스틱을 확 뜯어낸 그 순간,상상치도 못한 대참사가 일어났다.하나도 아니고 무려 세 봉지의 믹스커피 스틱을 동시에 너무 세게 뜯어버린 바람에,안에 가득 들어 있던 달콤하고 고운 갈색 가루 폭탄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푸스스스- 팟!"앗……?!"마침 복도를 지나치다 신이 나서 탕비실로 향하는 문리안 변호사의 뒤를 쫓아 서지우 전무가 탕비실로 걸어 들어오던 참이었던 것.마주 향한 지우의 입이 채 다물어지기도 전에,리안의 손에서 튀어나온 달콤한 커피 가
설렘과 긴장감이 뒤섞인 밤샘 작업 끝에,문리안 변호사는 이번 NDA(비밀유지조약) 위반 고소 건이단순한 상대 측의 억지 발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외부로 유출될 리 없는 극비 데이터가정확하게 상대 로펌의 손에 들어간 정황.그것은 명백히 그룹 내부의 누군가가 핵심 정보를 통째로 빼돌려정밀하게 판을 짠 치밀한 공작이었다. 서지우 전무를 치기 위해 기획된 이 거대한 음모의 배후.그 꼬리를 잡기 위해 리안이 밤새 검토한 서류의 자간마다날카로운 분석이 스며들었다.내부 첩자라면 사내 사정에 밝고 핵심 자산에 접근할 권한이 있는 자여야 했다.단순한 평사원의 단독 범행일 가능성은 희박했다.오히려 서지우와 사사건건 부딪히며 경영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는가장 가까운 인물이거나 최측근,즉 사내 권력의 핵심부에 닿아 있는 자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문리안은 핏발 선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며내부 첩자의 윤곽을 서서히 좁혀나갔다. 한편, 리안의 곁에서 함께 밤을 새우며 서류를 검토하던 서지우 역시비서실장으로부터 전달받은 보안 메일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지우의 눈빛 역시 첩자의 존재와 그 배후에 도사린검은 그림자의 윤곽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렇게 아쉬움과 긴장 속에서 밤이 밝아오고,오피스텔에서의 짧고도 아찔했던 밤샘 작업의 시간도 지나갔다. 사건의 여파로 본사는 아침부터 살얼음판을 걸었다. 서지우의 집무실.블라인드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지만,방 안의 공기는 영하의 냉동고처럼 싸늘했다.모니터 화면에 박힌 수많은 기사와 고소장 사본을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지우의 앞 책상 앞으로, 불쑥 불청객이 밀고 들어왔다. 서지우의 사촌 형이자, 태산 그룹 내에서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노리는경영 라이벌, 최강민 전무였다. 그는 노크도 없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무실 안을 활보하더니,이른 아침부터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지우의 책상 앞에 툭 멈춰 섰다.하지만 서지우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차갑게 빛나는
문리안의 전화기에서 다급하게 소리치는 로펌 대표의 목소리는 곁에 있던 서지우 전무의 귀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느라 정신없는리안을 서지우가 어깨를 감싸안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아, 죄송해요. 잠시 생각하느라...""일단 집으로 가서 젖은 옷이나 갈아입고 생각하자고. 이 못말리는 일벌레 독사 변호사님아. 감기 걸려버리면 대책 강구고 뭐로 암 생각도 못 하게 되어 버리니까."리안의 오피스텔에서 다정한 티타임을 기대했던 묘한 썸의 기운은 사라져 버렸지만.지우는 리안과 같이 사건 자료 검토와 정리를 하기 위해리안의 오피스텔에 머물게 되었다.리안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지우의 셔츠가 눈에 거슬렸고평소 잠옷으로 입고 자는 크고 헐렁한 맨투맨 티셔츠를 지우에게 무심하게 건넸다."밤 새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은 좀 갈아입고 일하시죠.. 화장실은 저쪽이예요. "지우가 쭈뼛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나오자주방 아일랜드 식탁위에서 막 내려지고 있는 커피 향이 향긋하게 거실에 퍼졌다.서지우는 향에 이끌리어 저절로 그곳으로 갔다. 믹스커피만 먹는다더니... 이런 원두커피는 어디서 났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리안이 방에서 나왔다.서지우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으로.화장을 지운 맨 얼굴에 편안한 그레이 계열 추리닝 차림...사실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여자 혼자 있는 여자의 집을 들어온 건 지우도 처음이었다.깊은 관게를 원하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흐트러진 여자들의 모습을 보고싶지 않기도 했었던 서지우.하지만, 네추럴한 모습의 문리안을 본 서지우는 그간의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비 때문인지 촉촉하고 생기있는 맨 얼굴이 더 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26살의 풋풋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청순한 매력에 지우가 넋을 잃고 한동안 리안을 바라보았다.시선을 느낀 문리안
오피스텔 앞에서의 핑크빛 기류와 설레던 온기는단 1초 만에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서 전무님, 지금 당장 법무팀 긴급 회의 소집하셔야겠습니다."문리안은 방금 전까지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던 얼굴을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지워내고,완벽하게 차가운 ‘문 독사’ 변호사 모드로 돌변했다.눈빛 하나, 목소리 톤 하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프로의 모습이었다.서지우는 순식간에 살얼음판 같은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한 리안의 모습에당황하면서도, 속으로 '이 독사 같은 아가씨가... 요것 봐라?' 하며감탄하며 사뭇 흐뭇한 웃음을 삼켰다.위기 앞에서 오히려 눈빛이 더 매섭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이 짜릿할 지경이었다."좋습니다. 바로 이동하죠."태산 그룹 본사 법무팀 회의실.새벽을 가르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대형 회의실 안은이미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자리에 앉은 리안은 초고속으로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상대측이 주장하는 NDA(비밀유지조약) 위반 기사의 실상을 낱낱이 분석하기 시작했다."상대측 M&A 파트너 로펌에서 흘린 기사입니다. 핵심은 우리가 실사 과정에서 취득한 기술 핵심 데이터를 외부 경쟁사에 유출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에요. 명백한 허위 사실이자, 우리 태산과 서 전무님 개인의 명예를 동시에 짓밟겠다는 의도적인 모함입니다."법무팀 소속 변호사들이 웅성거리며 대책을 강구하는 사이,회의실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야심한 시각에 본사 불이 환하게 켜져 있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우리 완벽하신 서 전무님이 또 큰 사고를 치셨나 보네? 한동안 조용한 것 같더니..."능글맞은 미소를 얼굴에 척 바른 채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바로 서지우의 외가쪽 사촌 형이자, 태산 그룹 내에서 끊임없이 지우를 견제해 온최강민 전무였다.그의 뒤를 이어 측근 임원들까지 우르르 몰려들자회의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서지우의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이 시간에 사적인 구역도 아닌 본사 법무팀 회의실에 형님이
“엄마, 대박 사건이라니까? 형이 여자한테 눈이 돌아갔어. 그것도 아주 제대로.” 서울 성북동의 거대한 저택, 서지우는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에게 흥분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지방의 한 한적한 카페 구석, 지우의 손에는 채원의 신상명세서와 조사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강수아, 스물둘. 지방 국립대 농업생명과학과 과수석. 부모 없이 홀로 키워준 이모의 교통사고 수술비를 대기 위해 잠시 밤거리로 흘러든 불쌍하고 올곧은 여자. 평생 얼음 조각 같던 형 서지욱이 매일 밤 노래방 구석에서 그 미련한 짓을 하
서지우는 제 친형인 서지완을 한 번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형은 가문의 완벽한 피조물이자 오차 없는 기계였다. 부모님조차 형을 자식이 아닌 가문의 간판으로 대했고, 지우 역시 늘 대단한 형의 그늘에 가려져 방탕한 둘째 도련님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가문에는 철저히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형 지완은 아주 어릴 적 앓았던 큰 병의 후유증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이성에게 반응하지 못하는 데다가 그 병으로 인해 아이를 갖기 힘든 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집안 어른들이 기를 쓰고 명문가 딸인 윤서희와 형을
서지완의 인생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자식을 학문의 도구로 여기는 엄격한 집안에서, 그는 늘 자를 잰 듯 완벽한 장남이어야 했다. 감정은 사치였고 이성은 법이었다. 서른넷이 되도록 그 어떤 여자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건 대단한 절제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흥미가 없었다. 심장이 뛰지 않으니 동요할 일도 없었다. 친구들의 등쌀에 밀려 이 유흥가 지하의 퀴퀴한 노래방에 앉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지완은 제 인생이 통째로 뒤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 새로 온 애냐? 얼굴
“은수아 학생. 출석 안 합니까?” 강의실을 채운 백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뒷덜미에 꽂혔다. 하지만 수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귓가에서 거대한 이명이 일었다. 단상 위에 서 있는 남자. 은테 안경 너머로 지독하려치만 냉정하게 빛나는 저 눈동자. 맞춤 수트를 자로 잰 듯 차려입은 한국대 식물생명공학과 교수, 서지완. ‘말도 안 돼.’ 수아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웅덩이치며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 목소리를 안다. 저 단단한 어깨를, 제 살결을 파고들던 그 뜨거운 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