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병원 로비 의자에 앉은 부승희는 정신을 차린 배여진 어머니가 선기현을 향해 질타하는 걸 듣고 있었다. 그러나 눈만 감으면 다시 온통 피범벅이던 그 사고 현장이 눈에 보였었다.배여진은 피를 많이 흘렸다. 사고 현장에는 덩어리로 보이는 무언가도 있었는데 그게 아이일 수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떻게 이럴 수가.’불과 30분 전만 해도, 부승희는 배여진을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가 몸조리를 잘하라는 말을 했었다.그러나 현재...배여진은 여전히 수술실에 있었지만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이승우는 부승희의 옆자리에 앉아 낮은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이에 고개를 든 부승희는 손발이 차게 느껴졌다.“어떻게 됐어? 여진 언니 살 수 있는 거지?”부승희는 무턱대고 질문을 쏟아냈고 이승우는 의사가 아니었으니 경과를 알지 못했다.대신 이승우는 옆자리에 앉아 부승희를 위로했다.“바로 병원 부근에서 생긴 사고라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도 의식이 있었어. 그러니 아무 문제 없을 거야.”부승희는 말없이 이승우를 바라봤다.그리고 한참 뒤에 겨우 입을 열었다.“대체... 왜?”이승우도 어렵게 입을 열었다.“여진이가 우울증이래...”부승희는 두 눈을 질끔 감고 말했다.“기현 오빠도 그것 때문에 당분간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거지?”“아마도 그렇겠지.”부승희는 찬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해 두 사람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선기현의 맹세는 그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으나 이제 칼날이 되어 다시 배여진을 찔렀다.그토록 사랑했던 사이인데 배여진은 어떻게 감정 없는 결혼 생활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배여진이 원했던 건 혼인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기다리는 건 아주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배씨 가문과 선씨 가문은 한시도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으며 부승희와 이승우도 묵묵히 그들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질 무렵, 배여진의 수술이 끝이 났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배여진은 아직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배여진의 어머니는 울다가 지쳐 쓰러지기를
이승우는 주방을 나서고 말없이 부승희를 꼭 껴안았다.“승희야, 참지 말고 울어도 돼. 다 괜찮을 거야.”부승희는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펑하고 터져버렸다.이승우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으나 눈물이 먼저 흘렀고 어쩔 수 없이 이승우의 셔츠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버렸다.“오늘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었는데 내가 먼저... 내가...”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부승희는 뒷말을 완성할 수가 없었다.이승우는 이런 부승희가 너무 마음 아파 말없이 등을 토닥였고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부승희를 위로했다.“여진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렇게 좋은 사람을 하느님이 벌써 데려가실 리가 없잖아.”“하느님은 아무것도 몰라!”부승희는 엉엉 소리 내 울었다.“선기현 그 개자식을 혼내야지. 왜 여진 언니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야!”“정말... 여진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그럴 일 없을 거야.”이승우가 부승희의 말을 잘랐다.“승희야, 우린 그냥 기다리자. 그러면 좋은 소식이 올 거야.”배여진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다는 생각만 하면 부승희는 너무 마음이 아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부승희는 크게 눈물을 흘렸던 적이 없다 보니 큰 소리도 몇 번 내지 못하고 숨죽여 눈물만 흘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우가 부승희를 안아 들고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고 등을 토닥였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부승희가 지쳐 잠이 들자 이승우는 부승희를 안아 들고 방에 눕혔다.부승희는 깊은 잠이 들 수 없었고 새벽에 또 잠에서 깨어났다.어느새 해가 뜨는 새벽이 되었고 사방은 온통 조용했다. 그런데 배여진이 트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장면이 자꾸 떠올라 부승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는데 옅은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그리고 불어온 바람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베란다에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이승우였다.부승희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이승우가 빠르게 담배를 짓눌
부승희는 차 사고로 피를 흘리던 배여진의 끔찍한 모습이 떠올라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이승우는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배여진의 마지막을 되새기며 밤새 뒤척였다.부승희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배여진 역시 그럴 리 없다고 믿었지만 결국 그녀는 선을 넘어버렸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이 조용히 가슴을 조여 왔다.배여진의 행동은 마치 거울처럼 그가 부승희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만약 부승희가 강하지 않았다면 혹시...’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이승우는 더 이상 눈을 감을 수 없었다.“이승우, 제발 좀 가만히 누워. 귀신처럼 앉아 있으니까 나까지 잠을 못 자겠어.”침실에서 부승희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승우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낮게 말했다.“승희야, 자.”“응.”그녀가 조용히 대답하자 이승우는 속삭였다.“내가 네 옆에 있을게. 내일 다시 배여진을 보러 가자.”“알았어.”배여진이 저지른 광기 어린 행동 이후 부승희와 이승우 사이의 평온함은 반년 만에 깨졌고 그들은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배여진의 상태를 지켜보았다.마침내 4일 후 배여진이 깨어났다.목숨은 건졌지만 그녀의 장기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회복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게다가 그중 상당수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다.병상에서 그녀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힘겹게 이혼을 요구했다.마치 감정의 실타래가 끊어진 듯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그녀는 얼어붙은 눈빛으로 선기헌을 바라보았다.부승희는 이혼 절차를 지켜보러 병원에 가지 않았다. 대신 이승우가 다녀왔고 그의 말에 따르면 선기헌은 끝까지 이혼을 거부했다고 했다. 뒤늦게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배여진을 평생 곁에서 지키겠다고 했다.배여진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뗐고 겨우 내뱉은 말은 단 한 마디였다.“필요 없어.”배여진의 부모는 한때 화해를 권유했지만 딸의 이혼 의사가 확고하다는 걸 알게 되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오히려
배여진의 사건은 이승우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죄책감과 두려움의 그림자를 드리웠다.배여진이 떠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부승희 앞에서 조심스러웠고 그녀에게 사과해야 했지만 단 세 글자로는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요즘 그는 오직 일에만 파묻혔다.월말 전에 유럽과의 대형 협력을 성사했고 이제 직접 현지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하는 일만 남았다.출국 전날 그는 부승희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 다 말없이 식사하던 중 부승희가 갑자기 물었다.“혹시 나도 배여진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야?”‘컥.’이승우는 반찬을 먹다 사레가 들려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기침했다.간신히 숨을 고르고 나서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소리 좀 하지 마.”부승희는 태연하게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그럼 나 대신 퉤퉤퉤 해줄래?”이승우는 침묵했다.한참을 참다가 문득 자신도 모르게 속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애써 눌렀다.물을 두 모금 마신 뒤 담담하게 말했다.“다음부터 헛소리 금지.”부승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내일 몇 시 비행기야?”“열 시.”“그럼 오늘 밤에 짐 잘 챙겨.”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당부했다.“내일 김 대표 일행이 오는데 사람 많을 거야. 그냥 사무실 건물 옥상에서 연회 열어. 괜히 밖에서 고생하지 말고.”“알았어.”“나 없다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마.”“응.”“김 대표 프로젝트는 좀 더 상의하고 결정해. 괜히 그 사람한테 말려들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이승우는 마치 잔소리 많은 어머니처럼 한참이나 주의를 주더니 짐을 싸러 집으로 돌아갔다.부승희도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그를 따라갔다.그가 캐리어에 옷을 넣는 걸 보며 방을 둘러보던 부승희는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낡은 지갑을 발견했고 무심코 집어 들며 말했다.“이거 이렇게 낡았는데 아직도 안 버렸어?”그녀가 열어보려 하자 이승우가 재빨리 빼앗았다.“쓰던 게 익숙해서.”부승희는 피식 웃으며 턱을 까딱했다.“완전
부승희는 회사로 돌아와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한 후 저녁에는 옥상에서 김 대표 일행을 접대했다.현장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들어서자마자 마치 회사 창립 기념일 행사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테이블에 놓인 접시에는 ‘승가농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 부승희는 멋있고 고급스러운 이름을 짓고 싶었지만 같은 업계 회사들이 하나같이 ‘신희망’이나 ‘대농합’ 같은 이름을 쓰고 있어 결국 업계의 흐름을 따르자는 팀의 의견을 따랐다.‘승가’라는 이름은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일으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게다가 ‘승가’는 ‘승희’의 이름과 비슷했기에 ‘이승우는 부승희의 농장과 목장을 줄여서 승가농목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녀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 이름으로 결정했다.예상보다 빠르게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업은 탄탄한 기반을 갖추어 가고 있었고, 아직 수익이 많이 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부승희는 확신했다. “부 대표님, 김 대표님 일행이 도착하셨습니다.”직원의 말에 부승희는 정신을 차리고 직접 마중 나갔다.이승우는 먼저 화서시로 간 뒤 유럽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몇 시간 전 비행기 탑승 전에 연락을 받았으니 지금쯤이면 이미 이륙했을 터였다.부승희는 시간을 가늠하며 이승우가 착륙하면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옥상을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애초에 부승희와 이승우가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었다.두 사람 모두 넓은 공간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깝다고 여겼고 그래서 처음부터 설계를 함께 고민했다.지난달 완공된 연회장은 기대 이상으로 멋지게 완성되었다.부승희는 김 대표 일행을 데리고 옥상을 둘러보았다.모두가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다.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은 부승희가 젊고 능력 있다며 칭찬을 늘어놓았고 자연스럽게 이승우에 대한 찬사도 빠지지 않았다. 말이 이어지다 보니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린다는 말까지 나왔다.부승희는 사
부승희는 이승우와의 결말을 여러 번 상상했지만 어떤 결말도 그들이 함께 설계한 연회장에서 손님들을 대접하며 이승우가 황량한 사막에서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에 놓인 그림은 아니었다.화가 나고 이승우를 원망하더라도 부승희는 그에게 재난이 닥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그녀는 비서의 방향을 강하게 응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비서의 말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렸고 부승희의 사지는 점점 더 굳어지고 마비되었다.“이걸 어떻게 부승희 씨에게 설명하죠?”“이 대표님이...”비서의 말은 떨리는 목소리로 끝났고 결국 말문이 막혔다.부승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에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쪽에서는 뭐라고 해요?”비서는 깜짝 놀라며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부승희의 마음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부, 부 대표님...”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승희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그녀는 얼굴과 몸에 이상한 점이 없었고 발걸음도 정상적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평범한 듯했다.하지만 그녀가 연회장 대문을 열었을 때 실내의 금빛 화려함과 술잔을 주고받는 소리 그리고 뒤쪽 복도의 고요한 죽음 같은 소리가 그녀를 압박했다. 온몸이 고통스러웠다.강한 이명 소리가 귀를 찌르며 부승희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발걸음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런데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았고 발을 헛디뎌 그대로 떨어졌다.“부 대표님.”부승희는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쿵’“부승희.”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고요함이 이어졌고 그 후 누군가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부승희는 정신이 흐릿하게 떠올라 눈을 떴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눈앞이 밝아지면서 무엇이든 흐릿하게 보였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직접 그려진 에치젠 료마의 그림이 있었고 창문에 걸린 흰 커튼이 오후의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창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얼굴을 명확히
이틀 전 밤, 이승우는 면도하다가 살짝 긁혔고 부승희는 그 모습을 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것도 재난의 한 조각으로 셀 수 있겠네? 이제 다 채운 거야?”“아직 하나 부족해.”“쳇. 점쟁이가 여덟 번이나 경고했잖아. 아마 다음엔 진짜로 손을 댈지도 몰라. 조심해.”“다음에 또 있으면 우리 둘은 아마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야.”“꿈깨.”...두 사람의 농담은 여전히 귓가에 울리지만 마치 전생의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고 부승희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이승우와의 연락이 끊긴 지 30분이 넘었고 그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얼마나 오래 기절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휴대폰을 열면 아마 나쁜 소식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이승우가 이미 전화를 했을 텐데 그는 하지 않았고 휴대폰에는 그의 메시지가 하나도 없었다.이 생각에 부승희는 온몸이 저려오고 심장이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 오감은 엉망이었고 눈앞은 흑백과 채색이 번갈아가며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았다.사람은 이렇게 극도로 아플 때 기절하는 것 같다. 비록 깨어나더라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고통이 반복되고 몸은 이를 견디지 못해 결국 잠으로 몸을 식히는 방법밖에 없다.부승희는 정신이 흐릿해지고 마치 자신이 비어버린 것처럼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었다.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겁고 숨을 쉴 수 없었으며 뇌 속의 모든 생각은 끝없이 반복되는 기억들로 가득 차 있었다.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걸었던 거리 그가 사준 선물 그녀 앞에서 던졌던 장난스러운 말들 그리고 그가 돼지 농장에서 내기했던 내기를 기억했다.눈을 떠보니 베개가 다 젖어 있었다.그녀는 소리 내어 울 힘조차 없었다. 온몸의 힘은 이승우의 소식을 본 순간 모두 사라져 버렸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몇 번이고 기절했고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며 부승희의 상태를 확인했다.매번 깨어날 때마다 부승희는 그것이 꿈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를 느낀 후에도 부승희는 여전히 그것이 현실임을 믿을 수 없었다.그때 밖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소리쳤다.“이 대표님, 무사히 돌아오셨어요.”마치 누군가 부승희를 인간 세상으로 이끌어 당기듯 온몸에 굳어 있던 혈액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하고 심장의 압박이 사라지며 뇌의 사고 능력도 조금씩 되살아났다.입을 열어 말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이승우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에 대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이승우...”“부승희 나야.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이승우는 계속해서 강조했고 그녀의 눈물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그제야 반우희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꽉 붙잡고 울면서 입술은 갈라지고 눈은 불타는 듯 아팠다.이승우는 부승희가 아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내가 있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부승희는 중간에 그를 놓았고 여전히 눈빛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너 어떻게 돌아온 거야?”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비행기 타고 왔어. 네가 걱정할까 봐.”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급격히 변했고 입을 벌리며 마치 악성의 짓궂은 말을 하듯 대성통곡했다. 한참을 울면서 그의 어깨를 때렸다.“너 감히 또 비행기를 탔어?”‘미쳤어. 비행기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면서 또 다른 비행기를 타다니.’이승우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만큼 부승희가 때려도 마음속에서는 기뻤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화가 왔어. 네가 기절했다길래 너무 걱정돼서 당장 돌아왔지.”부승희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를 잡고 힘없이 때렸다.그녀는 이제까지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차분해지자 온몸의 세포들이 모두 지치고 피곤한 듯 느껴졌고 특히 얼굴은 여기저기 아프게 울렸다.이승우는 작은 스탠드 등을 켜고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