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는 거야?”“너 기다리고 있지.”부승희는 등 뒤로 손을 모으고 불어오는 밤바람을 느꼈다.“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같이 전주로 돌아가려고.”부승희는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아까 말했잖아. 안 갈 거라고.”“가자.”이승우가 한 발 더 다가갔고 두 손을 모은 채로 간절하게 비는 시늉을 했다.“나 너무 집에 돌아가고 싶어.”‘풉.’부승희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괜스레 모르는 척 먼저 앞장을 서서 걸었다.부승희는 저녁 연회에 기장이 짧은 까만 드레스를 입었고 뒤로 긴 나비매듭이 있었다. 동준은 이 긴 나비매듭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이승우가 빠른 걸음으로 부승희의 뒤를 따랐다.“우리 지금 돌아가면 내일 아침밥도 같이 먹을 수 있어.”“누가 먹고 싶대?”“우리 동네 경비원 아저씨 손자가 태어났다고 선물도 준대.”“선물 못 받아봤어?”“그래도 좋은 의미가 담긴 선물이잖아.”“좀 저리 떨어져.”“같이 가자.”“싫어. 싫어.”“승희야...”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홀에서 사라졌다.창밖은 아주 조용하고 운치 좋은 밤경치가 보였다.부승희가 이승우와 함께 전주로 돌아간 지 얼마되지 않아 반우희가 갑자기 나타났다.신혼 생활 한 달 차인 반우희는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그런데 정장 차림의 반우희는 왠지 어색해하며 부승희와 이승우에게 말을 걸었다.“저기... 그게 제가 사법 고시 통과했는데 혹시 여기 법률 자문 필요하지 않아요?”“...”부승희는 반우희를 의아하다는 표정을 살피다가 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왜 옆에 끼고 있지 않는 거야?”부승원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아직 많이 서툴러 실수도 자주 하는데 내가 옆에서 혼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부승희는 표정이 차게 식었다.“그래서 우리한테 사고 치라고 보낸 거야?”“너희 쪽엔 크게 문제도 없고 팀도 있는데 무슨 일 있겠어?”부승희는 길게 심호흡했다.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는데 부승원은 벌써 통화를 종
승가 농목도 벌써 4년 차가 되었고 부승희의 사업은 승승장구를 해 최고점을 찍었다.그리고 부승희가 서른둘, 이승우가 서른넷이던 해에 배여진이 청첩장을 보내왔다.배여진의 재혼 결심에 부승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줬다.2년 동안 배여진은 공부도 하고 자기 계발도 했으며 선기현을 떠나며 모든 액운을 털어버린 건지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했다.재혼 상대는 한독 혼혈이었고 가정 배경과 성격 모두 배여진에게 걸맞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배여진보다 세 살이나 어렸다.결혼식은 해외에서 진행되었고 부승희는 초대장을 들고 직접 그곳으로 향했다.결혼식에서 배여진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배여진은 자주 부승희에게 손 편지와 이메일을 보냈고 편지와 이메일에 담긴 사진과 정성에 부승희는 배여진의 소식을 늘 기다려졌다.그리고 늦여름의 어느 날, 창가 자리에서 배여진의 편지를 읽고 있었는데 그 편지엔 선기현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었다.배여진이 재혼 준비를 할 때, 선기현은 배여진을 붙잡았었다고 한다. 그 개자식은 과거처럼 또 한 번 배여진을 결혼식에서 도망치게 하려고 했고 마치 배여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했다.배여진은 선기현을 몰래 바셀라로 불렀고 어둡고 추운 날 밤, 사람을 시켜 된통 때리게 했다고 전했다.[개자식, 뻔뻔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참 나 급에 맞아야 놀아주지.][젠장. 과거의 난 정말 눈이 어떻게 됐나 봐!]부승희는 그 문장을 읽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진 문장은 부승희와 이승우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내용이었다.부승희는 고개를 돌려 목장을 슬쩍 둘러봤고 이승우는 도망친 어린 소를 잡으려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는 마음대로 흩날리고 있었고 급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빨리 잡아!”“...”이젠 부승희가 답장을 쓸 차례였다. 일단 선기현에 대한 욕부터 늘여놓고 차차 본인의 사업에 대한 근황을 적었다.이메일을 보낸 지 얼마되지 않아 배여진이 짤막하게 답장을 보내왔
부예지의 돌잔치 날, 부승희는 이승우에게 팔짱을 낀 채로 식장에 나타나 아이의 선물을 건넸다. 꼭 붙어 등장한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드디어 좋은 소식이 들려오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두 사람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몇 해 동안 이승우와 부승희는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전주 목장에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으며 그곳에 뿌리를 박을 생각처럼 보였다.부승희는 집으로 돌아가 슬쩍 소식을 흘렸고 채애정은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한편, 이승우네 집은 너무 좋아 잔치를 벌일 지경이었다.부승원의 결혼은 온 세상이 떠들썩했던 것과는 달리, 늘 화려한 것을 쫓던 두 사람의 결혼 준비는 되려 차분하고 검소했다.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결혼 의사를 밝히고 상견례를 했으며 예식장까지 예약을 마치고 모든 절차를 두 사람이 스스로 해나갔다. 이건 부승희의 제안이었는데 결혼 준비도 여행처럼 두 사람이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 맞는지 최종으로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이기 때문이었다.이승우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돼지 농사도 기꺼이 하는데 직접 결혼 준비를 하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두 사람은 경인과 전주를 바삐 돌아다녔고 가끔 해외로 출장도 다녀왔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 모두 여유가 생기면 사무실에 모여 차근차근 결혼 준비를 했다.대부분 상황에서 부승희는 펜 끝을 질근질근 물며 준비해야 할 리스트를 체크했고, 이승우는 다리를 꼰 채로 여유롭게 태블릿에 식장 설계를 했다.그러다가 배가 고파진 부승희는 간식장에서 소시지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입에 물고 하나는 이승우에게 휙 던졌다.“이거만 먹으면 아쉽잖아.”“음료수라도 시킬까?”이승우는 핸드폰을 꺼내고 익숙하게 부승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소시지를 질근질근 씹으며 배달 앱을 같이 확인했다.두 사람은 천천히, 또 차근차근 준비했고 드디어 늦가을에 청첩장을 완성해 지인들에게 보냈다.결혼식장은 현재 개발 중인 경인 목장
이승우는 오랜만에 과음했다. 부승희가 보내온 부예지의 사진을 보며 창가 자리에서 바람을 쐬며 술기운을 가셨다.그런데 사진을 보면 볼수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학창 시절, 나무처럼 딱딱하던 부승원이 평생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 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결혼도, 아이도 부승원은 척척 해냈다.가끔 누군가 이승우에게 왜 경인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전주에 무슨 꿀이라도 발라놓았는지 물어봤었다.이승우는 전주가 왜 좋은지 진심으로 생각해 봤다.여긴 이승우와 부승희가 다시 시작한 장소였고, 두 사람이 함께 땀을 흘리며 일궈온 사업이 있었으며 함께 나아갈 미래가 있는 곳이었다.다시 술기운이 올라온 이승우는 부승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어디야? 보고 싶어.]부승희는 바로 전화를 걸어왔고 이승우는 1초 만에 연락을 받았다.“여보세요?”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에 부승희는 바로 눈치를 챘다.“술 마신 거야?”“응, 아주 조금.”“조금은 무슨. 아주 뻗을 정도로 마셨나 보네!”이승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사과했다.“미안. 다음부턴 자제할게.”“다음?”부승희는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축하 파티를 또 할 일이 있다는 거야?”“다음번 파티는 태어날 우리 아기를 위한 파티일 거야.”부승희는 부예지를 품에 안고 달래주다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승희야.”이승우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고 부승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왜?”“이따가 우리 집에서 볼까? 오늘 네 얼굴 못 봤잖아.”부승희 품 안의 부예지는 또 슬슬 보채기 시작했다. 부승희가 너무 꽉 안은 탓에 불편하다고 옹알거리는 것이었다.어쩔 수 없이 부승희는 아이를 아주머니에게 넘겨주고 구석 자리로 옮겨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손을 배배 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일 아침 같이 먹으면 되지.”“난 네가 너무 보고 싶은걸?”“보고 싶긴 무슨.”부승희는 투덜거리긴 해도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얌전하게 집으로 돌아가. 아주머니한테 해장국 미리 부탁해
이승우는 부승희의 얼굴에 진하게 뽀뽀했다.뜨거운 이승우의 온도를 느끼며 한 소리 하려는데 턱을 움켜쥔 이승우는 바로 키스를 쏟아부었다.옅은 알코올 향과 달콤한 과일 향이 섞여 있었다.이승우 취향대로 과일 담금주를 마신 모양이었다.이승우는 부승희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몸을 돌리게 하여 정면으로 마주한 채로 키스를 이어갔다.급하게 몰아붙이는 이승우에 부승희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고 부승희가 뒷걸음을 치면 이승우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어쩔 수 없이 부승희는 자꾸 뒤로 물러섰다.이승우는 계획대로 부승희를 소파 부근까지 데려갔고 자연스레 부승희를 소파에 눕히고 본인은 그 위를 올라탔다.사방은 온통 깜깜하고 주변에는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부승희는 침을 꿀꺽 삼켰고 온몸에서 전해지는 자극을 느꼈다. 이승우는 부승희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다시 입을 맞춰왔다.서로의 호흡이 엉켜지고 조용한 별장 안에는 두 사람의 거친 호흡 소리만 들려왔으며 부승희는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오므렸다.그러다가 입술이 쓰라려진 부승희가 살짝 이승우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승우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떨어졌고 이번엔 코를 비벼댔다. 그리고 낮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가 올 거라고 확신했어.”어둠 속에 적응한 부승희는 이승우의 반짝이는 눈과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안 오면? 오빠가 신혼집에 구토라도 했으면 나 정말 못 참아!”이승우는 씩 웃더니 부승희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체향을 느꼈다.“왜 그렇게 무섭게 말해. 자꾸 뭘 못 참는다고 그래?”부승희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무서워? 무서우면 우리 결혼하지 말까?”“그건 안돼.”이승우는 부승희를 꼭 껴안으며 두 눈을 감았다.“네가 날 집어삼킨다고 해도 난 결혼 꼭 할 거야.”“풉. 내가 왜 오빠를 집어삼켜?”“난 집어삼키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잖아.”그 말의 은유적인 의미를 알아차린 부승희는 손을 뻗어 이승우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큼지막해서 소파로 사용해도 거뜬한 곰 인형,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음성 로봇, 특별 제작된 체육복, 색이 바랜 가방 고리, 그리고 여러 브랜드 사 한정템까지...방안을 가득 장식한 ‘쓰레기’에 다른 사람이라면 질겁하며 치우라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서랍을 열어 과거 마라톤 번호까지 남아 있는 걸 본 부승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이게 벌써 몇 년 전이냐...’이승우는 부승희를 자신의 옆자리에 끌어 앉히며 어릴 적 같이 두었던 체스를 꺼냈다.“자. 오랜만에 해야지.”“하긴 뭘 한다고.”“퀸도 없는데.”“어? 너도 기억하고 있네?”부승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오빠가 자꾸 반칙하니까 괘씸해서 내가 버린 거잖아!”“내가 반칙했다고? 승희야, 말은 바른대로 해야지.”“오빠!”“너 거짓말하지 마! 그날 내가 홍하나랑 붙어 다닌다고 질투해서 버린 거잖아.”“말이 되는 소리를 해!”이승우는 농담 섞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야, 너 그때 몇 살이었냐? 어린 녀석이 벌써 짝사랑이나 하고.”부승희는 옷을 걷어붙이며 한번 크게 붙을 기세로 달려들었다.방안에는 많은 물건이 자리 잡았지만 모든 게 새것처럼 깨끗했고 누군가 정성스레 닦고 이 방에 두었다는 게 느껴졌다.과거와 거의 일치한 물건 배치에 부승희는 설마 이승우가 직접 짐을 옮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두 사람은 테이블에서 투덕대다가 결국 카펫으로 자리를 옮겼다.한편에 놓인 수정 구슬에 로봇이 비쳤다.이승우는 책장에 몸을 기댄 채로 그 수정 구슬을 바라보며 과거에 대해 입을 열었다.부승희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이승우를 바라보며 추억에 잠시 잠겼다.그런데 갑자기 이승우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왜, 왜 그래?”부승희는 깜짝 놀라버렸고 이승우는 훌쩍이다가 눈가를 꾹꾹 찍어 닦았다.‘젠장.’부승희는 서둘러 티슈를 꺼내 이승우에게 건넸다.“고생은 내가 했는데 울긴 왜 오빠가 울어?”이승우는 더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우리 더 빨리 행복해질 수
이승우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그해 홀로 귀국하던 이승우는 영혼을 그곳에 두고 온 사람처럼 방황했었다.정말 이번 생은 이대로 끝이구나 싶은 생각도 했다고 한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뜬금없어 웃음만 나왔다.“눈물 좀 닦자.”“응.”“근데 언제 날 찾아온 거야?”부승희의 질문에 이승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몸을 바로 세우더니 고개는 또 떨군 채로 서러웠던 마음을 토로했다.‘내가 못 살아 정말.’“아니야. 됐어. 얘기하지 마.”“그때!”이승우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가가 빨간 채로 말을 이었다.“네가 모연준한테 팔짱을 끼고 내 앞을 지나쳤단 말이야.”부승희는 고개를 저었다.“기억 안 나는데? 매일 팔짱 끼고 다녔는데 어느 날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그 말에 이승우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또 훌쩍이기 시작했다.이런 이승우가 너무 귀여운 마음에 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뭐 연준 씨랑 결혼했어? 아이를 낳았어?”“...”이승우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고개를 들어 부승희를 바라봤다.“너 정말 화병으로 돌아가는 사람 눈앞에서 보고 싶어?”“화병으로 사람이 정말 죽는지 궁금했었는데.”부승희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승우는 그동안 두 사람이 어렵게 다시 만난 기억을 떠올리며 감수성이 폭발했는데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부승희에 되려 안심이 되었다.미소 짓는 부승희를 보면 과거와 다른 게 없는 것 같았다.그래서 두 눈을 감고 부승희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화병 나서 돌아가기 직전인데 뽀뽀 한 번이면 다시 살 것 같긴 해.”부승희는 이승우의 귀를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그래서 뽀뽀 안 해줄 거야?”“...”부승희는 멈칫하다가 결국 표정을 살짝 찡그린 채로 이승우의 입술에 도장을 꾹 찍었다.뽀뽀하고 부승희는 이승우의 두 볼을 잡은 채로 말했다.“자, 다시 부활!”이승우는 눈을 감은 채로 부스스 웃음을 터뜨렸고 부승희를 꼭 안았다.“승희야, 네가
“결혼 전에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다가 결혼 후에 문제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6개월 전, 부승희가 배여진에게 이승우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전했을 때 배여진이 이런 말을 했었다.그러나 이승우의 과거 연애사를 떠올리면 이쪽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배여진의 의견은 달랐다.“그건 확신하지 못해. 네 옆에서 오랜 시간 본능 억제하고 지내다가 감퇴했을 수도 있잖아.”“...”부승희는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고 그래도 테스트를 해보는 게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 들었다. 결혼 후에는 반품이 힘드니 말이다.그런데 테스트 한 번에 부승희는 정말 죽을 고비를 넘겼다.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면 부승희는 지금도 심장이 콩닥거렸다.그래서 이승우를 슬쩍 밀어내며 시선을 피했다.“더 테스트할 게 뭐가 있어?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거든.”“뭐가 충분해?”이승우는 부승희의 허리에 머리를 비비며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실험할 때도 확률 문제로 여러 번 시도한다는데 넌 왜 이렇게 안일해?”부승희는 오리발을 내밀었다.“오빠는 내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 그만 까불어. 내가 정말 결혼 전에 다 뒤집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땐 눈물 펑펑 흘려도 안 봐줘.”이승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울어? 그날엔 누가 울었더라?”부승희는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고 의미심장한 이승우의 표정을 보다가 발길질했다.이승우는 자연스레 부승희의 다리를 잡고 빠르게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 귓가에 뜨거운 숨을 떨어뜨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누가 눈물을 펑펑 흘렸던지 기억이 나?”“꺼져!”부승희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그러나 이승우는 더 자극된 건지 부승희의 허리를 잡고 조금 더 다가왔다.이승우의 숨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숨이 얼굴과 목 언저리에 떨어졌을 때, 부승희는 녹아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처음 관계를 가진 이튿날엔 이승우가 급한 일로 출장을 가야 했다.그래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