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성에서 변백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초롱초롱한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검은색 책상이 놓여 있었다. 노지혜는 스트랩리스 드레스만 입고 곧고 하얀 다리를 드러낸 채 부드러운 발을 그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아이고. 변 선생님, 삐뚤게 발랐어요.”그녀는 발가락을 움직이며 투덜거렸다.변백호는 노지혜를 한번 쳐다보았고 얼굴은 예전처럼 도도했다.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매니큐어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바르는 게 맘에 안 들면 네가 직접 발라.”노지혜는 햇살처럼 빛나는 금발을 하고 있었고 웃을 때 눈은 마법처럼 반짝였다.변백호의 성격에 익숙해진 노지혜는 책상에서 뛰어내려 그의 다리 위에 앉아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나쁜 사람이네요. 변여름 씨가 괜찮은데도 혁수 오빠를 놀리다니요.”변백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왜 혁수가 너에게 오빠가 되는 거야?”노지혜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오빠 아니에요?”“내려가.”‘절대 안 내려갈 거야.’그녀는 아예 허리를 흔들며 더 아래로 내려갔다.변백호는 그녀 때문에 배가 긴장되어 인상을 찌푸렸고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 아래를 세게 쳤다.“얌전히 있어.”그 말이 떨어지자 그의 몸에 달라붙은 노지혜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두 다리를 꽉 조이고 그를 보며 웃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몸에 갖다 대고 스스로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변백호는 침묵했다.“...”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노지혜는 큰 눈을 뜨고 입술을 깨물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2초 동안 멈칫하다가 마주 보는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혼쭐을 내줘야겠어.’...변백호 쪽은 봄처럼 행복했지만 양혁수 쪽은 3일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잤다.변여름은 그날 밤 바로 괜찮아졌다. 의사는 약물 부작용이 심했을 뿐이고 다행히 알레르기는 아니라고 했다.양혁수는 안도하며
“할 말은 네 오빠가 이미 다 했어.”양혁수는 여지를 남기지 않고 계속 말했다.“몸이 나았으니 멕하든으로 돌아가. 내가 준비해 줄게.”변여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나직이 말했다.“오빠 집을 나와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어요.”“지도 교수와 팀은 내가 다 준비해서 함께 보내줄게. 집에서도 공부할 수 있어.”변여름은 침묵했다.그는 이미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고 대비책도 마련해 두었다. 마치 그녀를 쫓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녀는 손을 들어 살며시 피로한 눈을 비볐다.“...알았어요.”변여름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자세히 들으면 흐느끼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양혁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쨌든 변여름은 그가 지켜보며 자란 아이였고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덜 장난스러웠다면 아무리 말썽꾸러기라도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감싸주었을 것이다.하지만 변여름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양혁수의 금기를 어겼다.“내일 갈 수 있겠어?”그가 다시 물었다.변여름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축 처졌다. 사실 그녀는 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고 적어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는 전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그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목이 메어 어렵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갈 수 있어요.”양혁수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그녀가 먼저 속삭였다.“혼자 갈 수 있어요. 오빠가 나를 위해 따로 준비해 줄 필요 없어요.”‘오히려 잘 된 거야.’“비행기 타기 전에 알려줘.”변여름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하는 것을 알아챘다. 목이 불편한 상태로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날 정말 감기 걸린 거였어요?”양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가 그런 사소한 일을 떠올릴 줄은 몰랐다.“아니.”그저 기침이 나서 그녀를 속이려고 조금 과장했을 뿐이었다.반대편에서 잠시 침묵하더니 변여름이 말했다.“다행이네요.”양혁수는 입안이 씁쓸해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지만 변여름은 끝내 그에게 손목시계를 선물로 남겼다.그녀가 변씨 가문의 군수 공장을 떠나기 전에 직접 만든 시계였다. 정교한 내부 구조를 갖추었으며 변씨 가문의 안전망과 연결되어 있어 자기방어는 물론 위급 시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시계와 봉투를 받아들었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채 서재 서랍에 넣고 잠갔다.사실 봉투 안에는 다른 것이 없었고 오직 시계 사용 설명서만 들어 있었다.변여름은 언제나 양혁수가 쉽게 속고 더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떠났지만 변여름은 그가 평안하길 바랐다.이 뜻밖의 재앙은 갑자기 찾아왔다가 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양혁수는 두 달 동안 무료 점심을 얻어먹었지만 대가는 포장이 조금만 단순해도 불편함을 느끼고 입맛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그는 10일 넘게 집에서 식사를 거르며 끝없는 술자리 속에서 양식을 지겨워서 토할 것 같을 때까지 먹었다.제대로 먹지 못하니 잠도 오지 않았고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그렇게 양씨 도련님은 서른네 살의 나이에 다시 어린아이처럼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보름을 버티던 그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회사도 가지 않으며 집에서 있었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집사는 조용히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양지원은 정확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변여름이 갑자기 떠났다는 이야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양혁수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곧장 변백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형제끼리 숨기고 싶은 창피한 일일 텐데 과연 변백호가 솔직히 털어놓을까 싶었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양지원은 10분 동안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속으로 연애는 역시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그것으로 생각하며 변여름에게 손뼉을 쳤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쁜 양석진을 뒤로하고 사랑의 상처에 빠진 불쌍한 양혁수를 만나러 한강시로 향했다.한낮이었지만 양혁수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양지원은 모르는 척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양혁수는 콧방귀를 뀌었다.“...쳇.”양지원은 어이없었다.“...”‘이 녀석.’그녀는 혀를 차더니 휴지를 던져 그의 어깨를 툭 쳤다.‘누구한테 감히 쳇이야?’양혁수는 차갑게 말했다.“변백호, 그 입이 가벼운 놈이 또 다 말했죠?”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꽤 영리하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구경이라도 하듯 미소를 지었다.“왜? 변여름한테 당해서 마음 아파 집에 틀어박힌 거야?”양혁수는 인정하지 않았다.“대표는 연차 써서 그냥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예요.”‘아무 이유도 없어.’양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변여름과는 무관해?”“꼬맹이 하나 때문에 내가 진지할 이유 없어요.”“그래.”양지원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의 얼굴 옆에 툭 내려놓았다.양혁수는 흘끗 보았다.“뭐예요?”“변씨 가문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야. 한 번 가봐.”양혁수의 머릿속을 변여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거절했다.“안 갈 거예요.”“왜?”“귀찮아요.”“우리 두 집안이 가까운 사이인데 네가 안 가면 보기 좋지 않아.”양지원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문득 말투를 바꿨다.“아니면 변여름을 마주칠까 봐 가기 싫은 거야?”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양지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지. 꼬맹이가 장난을 친 것뿐이야. 너는 어른이잖아. 그렇게 옹졸하게 굴지 마. 한번 가서 축하도 해주고 그 아이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안심시켜.”“말이 쉽죠.”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양지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양혁수는 잠시 멈칫하며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양지원은 그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어? 별일 아니잖아.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비웃는 듯한 말
양혁수는 결국 변씨 가문에 가기로 결심했다. 양지원의 역지사지 전략 때문도 아니었고 변여름 때문도 아니었으며 변백호 때문이었다.그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변백호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10년 넘게 쌓아온 우정이 변여름의 장난 때문에 틀어질 이유는 없었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지 않으면 아마 변여름을 만날 일도 없을 것이고 단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뿐이었다. 11월이 되자 날씨가 적당해졌다.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변백호가 직접 그를 마중 나왔다.변백호를 만나자마자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양혁수는 짐 가방을 변백호에게 던지고 마치 대장처럼 앞장서서 걸어갔다.변백호는 이미 익숙했다. 예전에도 그의 건방진 태도를 참아냈고 이번에는 여동생이 사고를 쳐서 약간 찔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짐을 들어주는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공항을 나서자 양혁수는 뒷좌석으로 향했다.그때 두 명의 인형 같은 아이들이 나타났다.“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로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양혁수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쾅 소리와 함께 차 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향하며 차에 탄 변백호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변백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꼭 따라와야 한다고 해서 달래도 소용없었어.”양혁수는 말이 없었다.노지혜가 낳은 이 두 아이는 마치 악마의 화신 같았다.지금은 여섯 살이지만 몇 년 전에 아주 어렸을 때 알록달록한 큰 거미를 들고 변백호의 베개 밑에 숨겨 놓았다. 한밤중에 변백호 거의 기절할 뻔했다.양혁수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내내 졸면서도 신경은 예민했다.이상하게도 이 두 아이는 내내 조용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변백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두 아이는 각자 카메라를 들고 양혁수를 계속 찍고 있었다.“너희 뭐 하는 거야?”작은 여자아이 하니가 먼저 대답했다. 목소리는 달콤하고 순수하며 설탕을 입힌 사과 같았다.“마크가 영상을 찍으면 고모랑 뭐든 바꿔줄 수 있다고 했어요.”작은 남자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혁수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그의
변여름은 정말 집에 없었고 양혁수는 도착한 지 하루가 다 지나도록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변씨 가문에는 가족 인수가 많아 평소에는 모이기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온 가족이 모두 모였다.양혁수는 예전에 해외에 있을 때 변씨 가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성격이 잘 맞아 변백호의 어머니는 그를 아들처럼 여겼고 양혁수는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고 변씨 가문에 오면 자유롭게 행동했다.이번에는 달랐다. 변여름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양혁수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가장 한적한 방을 요구했고 결혼식 전까지는 운동하고 식사하는 것 외에는 혼자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변씨 가문 사람들을 최대한 피했다.결혼식 전날 저녁 양혁수는 야외 수영을 마친 뒤 식당을 지나가다가 가까운 가정부에게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오는 길에 마침 변여름과 마주쳤다.그는 흰색 긴 잠옷을 입고 간단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축축하게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변여름은 긴팔 옷과 긴 바지를 입고 책가방을 메고 있었으며 품에 책을 안고 있었다.두 사람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했다.양혁수는 변백호의 말을 듣지 말고 호텔에 머물러야 했다고 후회했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어른다운 품위를 지키려 애쓰며 먼저 말을 걸려고 했다.그런데 변여름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한 후 빠르게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양혁수는 그 자리에 서서 앞으로 떨어지는 두 장의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어이없다는 생각이 최고조에 달했다.‘칙.’불쾌한 표정을 짓고 그는 병뚜껑을 열어 물을 반 컵 마시며 얼굴을 찌푸린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변백호가 그를 술자리에 초대했다.양혁수는 짜증이 났지만 두 잔 정도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변씨 가문의 와인 저장고는 엄청나게 컸다. 안팎으로 세 겹으로 되어 있었고 마치 도서관 같았다.두 사람은 직접 내려가 와인을 고른 뒤 양혁수는 가장 비싼 와인만 골랐다.와인을 들고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
변백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옆에 꼭 잡아 두고 계속 타자를 했다.[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리가 없지.]“...”변백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 핸드폰을 빼앗아 들더니 토독토독 타자를 했다.[대단한 실력자이신 네가 그럼 우리 가문 유전자 개량에 힘 좀 써보지 그래?][그러니까 내 매부가 되어줘.]그리고 서늘한 미소를 짓는 이모티콘까지 덧붙였다.양혁수는 코웃음을 치며 휴대폰을 되찾아왔고 아래층에서 여전히 소녀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난 엄마가 하도 눈치를 줘서 도운 것뿐이에요.”“엄마가 그러는데 오빠가 지혜 씨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나더러 오빠가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주라고 했단 말이에요.”양혁수는 옆에 앉아 있는 변백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눈빛엔 장난기가 스쳤다.변백호는 무표정하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지혜는 집요하게 변여름을 부추겼다.“바로 그거야! 어쩌면 혁수 씨도 그런 구실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 말 대로 먼저 혁수 씨 마음을 잡고 다시 내 방법대로 해.”“거절할게요.”“왜?”“내가 오빠를 많이 좋아하니까요.”소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며 그냥 사실을 말하는 듯했지만, 그 안엔 단단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난 오빠가 정말 좋아요.”변여름이 한 번 더 강조하자 노지혜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재미없어.”“좋아하면 그냥 덮쳐야지.”“싫어요. 혁수 오빠가 싫어할 거예요.”“너 진짜 재미없다.”노지혜의 한숨 섞인 투정과 함께 순간 침묵이 흘렀다.조금 전까지 변백호를 놀리던 양혁수는, 예상치 못한 변여름의 고백에 바짝 굳어버려 변백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변백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양혁수를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이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는 듯한 얼굴이었다.그리고 휴대폰을 꺼내는 것도 귀찮았는지 변백호는 다시 양혁수의 폰을 빼앗았으며 잠금 해제를 하고 재
와이너리.노지혜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층을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두 사람 떠났어.”변여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영상을 앞으로 당겨 양혁수와 변백호가 투덕거리는 장면을 되돌아봤다.노지혜도 관심을 보이더니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백호 오빠가 이겼네.”변여름은 노지혜를 힐끗 쳐다보았고 노지혜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변여름은 안 보여줄 거라는 듯이 아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아, 근데 말이야. 네가 고백했을 때 혁수 씨 반응 어땠어?”변여름은 턱을 괴고 다시 영상의 타임라인을 조정했다. 이번엔 양혁수가 카메라를 쳐다보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우리한테 들킨 거 알고 있었네.”“어쩐지 네가 심하게 오글거리더라.”변여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그러게 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낸 거야.’‘난 그냥 고백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 하게 하고. 흥’노지혜가 다시 다가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근데 이제 두 사람 모두 자리 비웠는데 약 정말 줘?”“음... 일단 지혜 씨가 갖고 있어요.”노지혜는 단번에 눈치챘고 변여름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귀에 대고 더 위험한 계획을 속삭였다.변여름은 순진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질질 끌지 않고 고백 같은 건 아예 못 하게 단칼에 잘라, 최대한 빨리 집에 돌려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꼭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애써 모른 척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계획을 세웠고 앞으로 엮일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밤에 혼자 있으면 자꾸 변여름 생각이 났다.‘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몇 년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봤고... 그때는 완전 어린애였는데?’어린아이의 짝사랑이니 그렇지 상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