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방을 나섰다.양혁수는 자리에 남아 김지철 주임에게 말했다.“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별말씀을요.”양혁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가족들 몰래 찾아온 데다 상사한테 보고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김지철은 바로 눈치를 챘다.“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입 아주 무겁습니다.”양혁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고 안시연을 찾으러 재무팀으로 이동했다.안시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장가희가 말을 걸어왔는데 안시연의 뒤를 확인하고 바로 두 눈을 반짝였다.안시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양혁수는 방금까지 얌전히 지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재무팀으로 돌아오자마자 또 잔머리를 굴렸다.갑자기 전체 부서 직원에게 고가의 커피세트를 쏘더니 또 각종 선물을 돌렸고, 결국 안시연의 옆자리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선배님.”안시연이 몰래 인상을 팍 쓰다가 다시 표정을 풀고 양혁수를 바라봤다.“네, 무슨 일이죠?”양혁수는 핸드폰을 안시연에게 넘겼다.슬쩍 훑어보니 양지원이 양혁수가 가업을 이어받는 걸 허락할 거라는 내용이었다.‘그래서 뭐 어쩌라고?’“난 이제 왕위를 상속받을 사람이야. 상속받기 전 직장인 생활을 한번 체험해 보는 거지.”“...”“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지만.”양혁수는 다리를 쭉 뻗어 바로 안시연의 옆으로 붙더니 작게 속삭였다.안시연은 이어질 말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양혁수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당신이 마음에 들거든.”안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휙 돌렸다.양혁수는 계속해서 안시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연정훈은 내가 여기 있는 걸 몰라.”안시연은 입만 벙긋거리며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했다.“앞으로는 밤엔 연정훈이랑 놀고, 낮엔 나랑 같이 노는 거야. 어때?”“...”안시연은 한참이나 뇌가 정지된 것 같았다. 크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왠지 또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이번에도 느낌표가 담긴 답장을, 연정훈은 한참이나 들여다봤다.연정훈이 인상을 팍 찌푸리자 업무 보고 중이던 비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내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연, 연 대표님?”연정훈이 고개를 들고 비서를 쳐다봤고 비서는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계속하세요.”“네.”연정훈의 시선은 다시 핸드폰으로 향했고, 따로 답장은 하지 않았다. 안시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릴 생각이었다.다른 한편, 데이터 일지를 받아온 안시연은 대화창을 굳이 확인해 보지 않고 업무를 이어갔다.옆자리 양혁수는 어느새 감자칩 한 봉지를 뜯었다.안시연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마음을 굳게 먹고 양혁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려는데 양혁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렇게 퇴근하고 싶어?”“퇴근하기 싫은 사람도 있나요?”양혁수가 혀를 쯧 찼다.“퇴근해서 좋은 게 뭐 있다고. 아마 연정훈이나 만나겠지. 연정훈도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차라리...”양혁수는 뒷말을 길게 늘이자, 안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더 재밌을 텐데.’양혁수가 바로 뒷말을 이어 했다.“차라리 나랑 같이 놀아.”“괜찮습니다.”안시연이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수중의 업무나 완성하시죠.”양혁수가 헛웃음을 지었다.“모범 직원 납셨네.”마지막 감탄사를 남기고 양혁수는 감자칩을 내려놓았다. 옆자리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뜨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양혁수는 안시연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어. 있다가 사람 시켜서 하면 되니까. 그냥 내 옆자리에서 저녁 먹고 면허증 필기시험 준비나 해.”‘필기시험 준비 중인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양혁수를 바라보는 안시연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양혁수 씨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지금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는 거잖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 테고.”양혁수가 입을 삐죽였다.“연정훈에게 야근해야 한다고 가지 마.”“...”솔직히 안시연은 조금 솔깃하긴 했다
진수빈은 빠르게 과학기술사로 향했으나 재무팀은 텅 비어있었다.‘대체...’‘안시연 씨가 연정훈 대표에게 거짓말한 건 아니겠지?’그리고 진수빈은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전해 들은 연정훈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안시연이 감히 이상 행동을 벌이지는 않을거라 생각했다. 안시연의 성격상 화를 내도 몰래 수작을 피우거나 그러지는 않았다.연정훈은 진수빈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했고, 다시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양혁수는 재무팀 건물에서 텅 빈 회의실을 찾아냈고 안시연은 바로 그 회의실에서 진수성찬을 먹고 있었다.사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수신자를 확인한 안시연은 조금 망설이다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양혁수는 이런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여보세요?”“어디야?”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회사요.”“...”연정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진수빈이 회사로 찾아갔는데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더라고.”안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양혁수는 촉이 참 좋았다....“연정훈이 사람을 시켜서 우리를 찾아오면 어떡해?”“선배, 우리 위층으로 움직일까?”...“지금 다른 사무실에 있어요. 이쪽이 더 넓거든요.”안시연은 바로 동영상을 찍어 연정훈에게 보냈다.연정훈은 동영상을 확인하고 조금 의심을 덜었다.“저녁은 먹었어?”“아니요.”안시연이 여전히 입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진수빈을 시켜...”“배달시키면 돼요.”안시연이 빠르게 연정훈의 호의를 거절하자 연정훈은 또 할 말을 잃었다.“그래.”연정훈은 안시연과 다투지도 않고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통화는 안시연 쪽에서 먼저 끊었고, 연정훈은 끊어진 통화를 물끄러미 무표정으로 쳐다봤다.안시연이 적당한 자리로 물러나,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도 하지 않으니 연정훈의 소원대로 된 셈이었다.그런데 연정훈은 기쁘기는커녕 되려
검은색 벤틀리는 안시연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고 상향등을 하향등으로 조절했다.이어 뒷좌석에서 내린 연정훈은 안시연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몰래 뒤를 돌아보았고 다행히 출구에 양혁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듯한 생각에 긴 한숨이 나갔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은 어느새 눈앞까지 걸어왔고 안시연을 침을 꿀꺽 삼켰다.“왜 또 온 거에요?”연정훈의 얼굴은 너무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은 편도 아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차에 타.”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을 지나쳐 차로 향하는데, 어깨에 걸친 가방이 흘러내렸고 연정훈이 자연스레 잡아챘다.안시연이 다시 가방을 고쳐 매려는데 연정훈은 이미 가방을 가져가 버렸다.안시연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연정훈은 덤덤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차에 타.”“네.”안시연은 계속 연정훈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연정훈에게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그래서 뒷좌석에 올라탄 뒤로 창문 쪽에 몸을 딱 붙여 연정훈과 거리를 유지했다.차 문이 닫히고 연정훈은 안시연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둘 사이 침묵이 이어졌다.“운전해.”차는 천천히 빌딩을 벗어났다.안시연은 하루 종일 피곤했던 터라 잠이 솔솔 몰려왔다.연정훈은 차 미러로 그녀를 훔쳐보며 생각했다.‘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피곤해하는 거야?’차는 침묵 속에서 달려 벚꽃동에 도착했다.안시연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안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안시연은 눈을 비비더니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온몸이 나른한 상태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연정훈은 차에 앉아 옆에 놓인 케이크를 가만히 쳐다봤다.‘차 타고 가는 동안 발견하지 못한 건가?’안시연은 너무 졸려 빨리 씻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곧장 욕실로 들어간 안시연은 혹시나 해서 문도 잠갔다.연정훈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욕실에서
연정훈의 버릇은 모두 안시연에 길들여진게 맞았다.안시연은 마음이 약했고 연정훈을 좋아했다.그래서 침대 위 연정훈의 모든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그러니 연속으로 두 번씩이나 거절당한 연정훈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아침이 되고 두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아침은 진수빈이 가져다줬는데 안시연은 입맛에 아주 맞았다. 며칠 동안 천문 전시회 일로 너무 바빠 입맛이 없었는데, 이제 바쁜 고비를 모두 넘겼고 또 운전 연습하러 가야 하니 밥을 더 든든히 먹어야 했다.그녀는 밥 한 그릇에 구운 고등어를 깨끗이 발라 먹었다.집을 떠난 안시연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연정훈은 차에 앉아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안시연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지하철에 오른 안시연은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몸이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연정훈과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그 전날 밤 아플 정도로 무리시킨 연정훈이 미웠다.연정훈은 이제 안시연과 시선을 마주하지도 않았으며, 안시연은 자신이 침대 위의 장난감처럼 느껴졌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떨쳐낼 수 없었으며 연정훈에게서 반항하고 싶은 싹이 자라났다.연정훈은 아직 안시연이 질리지 않아 당분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안시연은 진작 “헤어짐”을 고했을 것이다.그러니 좀 더 버텨볼 생각이었다.안시연은 회사에 도착했지만 양혁수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오후 두 시가 넘어서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양혁수가 보였는데 알콜 향을 물씬 풍기는 모습이 출근이 아니라 휴가온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안시연은 양혁수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찌근거렸다.“선배.”양혁수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안시연은 자신이 마법이라도 부려 단숨에 양혁수를 제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양혁수에게 한 소리하려는데 양혁수가 무언가를 척 내밀었다.다이아몬드 목걸이.연정훈이 선물했던 목걸이였다.알아본 안시연이 잠시 멈칫했다.“선배 목걸이 돌려줄 테니 내 것도
안시연의 말이 끝나고 연정훈은 침묵으로 답했다.안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으나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잠시 눈이 마주치고, 연정훈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그래, 자.”짧은 말을 남겨두고 연정훈은 몸을 돌려 다시 안시연을 쳐다보지 않았다.힘이 풀린 안시연은 화장대에서 내려와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그리고 얼마 뒤, 등 뒤의 이불이 들리고 연정훈이 옆자리에 누웠다.동상이몽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시가니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등 뒤로는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눈을 꼭 감았다.‘그래 빨리 자자!’안시연은 마음이 약한 사람인지라, 연정훈을 거절했다는 죄책감에 날밤을 새웠다.이튿날, 안시연이 아침을 차렸고 계란 프라이는 여전히 하나였다.연정훈은 안시연 앞접시에 놓인 계란 프라이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어제 계란이 마지막 하나였어요.”“오늘 이건?”“이건 구석에서 찾아낸 거예요.”“...”‘그래.’‘아주 좋아.’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배불리 먹은 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연속 세 번의 거절과 혼자여도 잘산다는 뉘앙스의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외출하는 길에 연정훈은 어제 사 온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콱 처박았다.진수빈이 놀라 움찔거렸다.오전 10시.안시연은 시험장에 도착했다.성실하게 준비했으니, 필기시험은 꽤 높은 점수로 통과할 수 있었다. 이어 기능 시험 준비를 했다.건물 밖으로 향하니 강사가 기능 시험 연습장으로 데려갔다. 연정훈이 찾아준 학원은 뭐든지 최고급이었고 뭐든지 술술 잘 풀렸다.연습장을 한번 빙 둘러보고 있는데 양혁수가 전화를 걸어왔다.“시험은 잘 봤어?”“네. 도착한 거예요? 목걸이 돌려줄게요.”“난 옆 서킷 관중석에 있어.”상대는 그 말만 남기고 쿨하게 통화를 종료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직접 그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목걸이에는 양씨 가문을 대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절대
안시연은 멍하니 자리에 굳었다.“뭐라고요?”양혁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내 목걸이가 탐난다고 다른 거랑 바꾼 거 아니야?”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안시연이 다급하게 해명하려고 하자 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렇게 순진해?”?양혁수는 “순진한” 얼굴의 안시연을 보며 목걸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장난이야.”안시연은 어이가 없었으나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물건을 돌려줬으니 이만 가볼게요.”양혁수는 당연히 안시연을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안시연을 잡으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혁수야, 이 알파카 당장 출산할 것 같은데 데려가 키우려고?”양혁수가 고개를 돌리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키우고 싶은 사람 아무나 줘버려.”‘말이 되는 소리를 해.’‘알파카 엄마 아빠가 헤어졌다고 아이를 내가 키운다는 게 말이나 돼?’주변의 여러 도련님 모두 알파카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몇 번 만지다가 바로 가버렸다.알파카는 배가 볼록했고 이 더운 날 두꺼운 털을 뒤집어쓴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안시연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주인이 버린 거예요?”“못 봤어? 두 사람이 헤어지고 알파카만 남기고 떠났어.”양혁수의 대답에 안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너무 무책임했다.“출산이 임박한 것 같은데 동물 병원으로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누가...”양혁수가 찬물을 끼얹으려는데 슬퍼 보이는 안시연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선배가 키울래?”안시연이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난 키울 데가 없어요.”연정훈도 알파카를 받아줄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그럼, 그쪽이 키울래요?”안시연이 양혁수를 힐긋 바라봤다.양혁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싫어. 귀찮아.”“다들 버리면 저 아이는 어떡해요?”“알아서 어떻게든 되겠지.”안시연이 한참 침묵했다.양혁수가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선배가 갖고 싶다면 동물 병원으로 대신 데려다줄 수는 있어.”“아이를 낳
연정훈의 질문에 부승원과 한우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승우도 눈을 반짝였다.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건지, 연정훈이 여자에 관한 질문을 했다.이승우가 연정훈에게 바짝 붙으며 물었다.“안시연?”연정훈은 입을 꾹 다물고 반박하지 않았다.마른기침을 몇 번 하던 이승우는 두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네 말을 들어보면 대충 두 가지 답이 있다고 볼 수 있어.”연정훈은 간만에 이승우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그러자 이승우는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첫 번째, 큰 다툼을 벌이고 여자가 일방적으로 삐진 거야.”연정훈은 침묵했다.최근 안시연과 크게 다퉜다고 할만한 일은 없었다.강남 시티 그 일이 지나고 두 사람은 말다툼 한번 하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이 자신을 이해한 거로 생각했다. 강남 시티에서 한 말이 두 사람의 사이에 문제가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만약 안시연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결혼이라는 비현실적인 일은 다시 꺼내지 않을 것이다.“두 번째는?”이승우가 눈썹을 치켜세웠다.“두 번째 경우라면 상황이 좀 더 심각한 거야.”연정훈이 이승우를 힐긋 노렸다.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향해 물었다.“네 생각은 어때?”부승원은 늘 얼굴을 굳히고 말을 아꼈는데 입을 한번 열면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어릴 때 부승희가 밥때가 돼도 배고프지 않다고 하면, 엄마는 승희가 간식을 훔쳐먹은 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었어.”한우빈이 웃음을 터뜨렸다.“안시연이 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던데?”“왜 아니라고 생각해?”이승우가 반박했다.“그렇게 예쁘고 젊은 여자가 다른 마음 품을 수도 있지.”“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다고 해도,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시를 했겠어.”“그래!”이승우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잘생기고 어린 남자가 주변에 쫙 널렸는데, 집에 돌아오면 서른이 되는 남자가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별로겠어?”“...”연정훈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도움을 구한 자신이 우스워졌다.정말 돈 주고 고생을 사서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