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희는 부승원이 거절할 줄 알았지만 그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녀는 멍해졌다.‘뭐지. 이 상황은?’승주는 반우희가 품에 든 가방을 받아 들고 앞장서며 물었다.“누나가 말했던 케이크는 다 가져왔어요?”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아까는 ‘그냥 받은 음식은 안 먹는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승주는 당당하게 대답했다.“그건 질투 나서 그런 것을 못 알아들었어요? 지식인은 원래 질투가 많거든요. 질투할수록 더 교양 있어 보이는 거라고요.”반우희는 어이가 없었다.“...”부승원은 뒤에서 걸으며 미소를 살짝 지었다. 희주와 동준은 양옆에 붙어 얌전히 말을 걸었고 승주뿐만 아니라 이 두 아이도 수다스러운 타입이라 대화의 주제가 끊기지 않았다.내내 조용할 틈이 없었고 위층에서 갑자기 누군가 창문을 열며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승주, 지금 몇 시인데! 좀 조용히 해라!”승주는 고개를 들고 즉시 외쳤다.“알았어요. 귀가 정말 밝으시네요.”부승원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는데 말한 사람은 한 노인인 것을 보고 부승원은 침묵했다.“...”노인은 승주의 태도에 익숙한 듯 창문을 덜컥 닫아버렸다.승주는 부승원에게 약간 미안한 듯 웃으며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노인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걸 암시하듯 눈짓을 보냈고 부승원은 별말 없이 끄덕이며 그의 행동에 동조했다.앞쪽에서 반우희는 이상하게 생각했다.‘부승원 씨가 왜 이렇게 승주에게 친절하지? 승주가 사랑스러운가?’그들은 우르르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반우희는 부승원을 대체 어떤 걸로 대접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테이블 위에는 천 원짜리 레몬 토닉워터가 한 잔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부 삼촌, 편하게 앉으세요.”승주는 부승원을 맞이하며 레몬워터를 들고 탁자 근처로 갔고 승주는 전혀 거리낌 없이 레몬워터를 즉석에서 뜯어 주전자에 전부 부어버렸다.부승원은 침묵했다.“...”그 주전자는 아마 차를 끓이는 주전자였던 것
부승원은 바로 확답하지 않았고 승주와 희주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어색한 기운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결국 부승원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길이 많이 안 겹쳐.”희주가 재빠르게 물었다.“부 삼촌은 어디에 사세요?”부승원이 간략히 주소를 말하자 희주는 곧바로 대꾸했다.“결국 경인에 사시는 거잖아요.”“응.”“그럼 같은 경인인데 같은 방향 맞잖아요!”승주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고 부승원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들에게는 ‘같은 방향’이라는 개념이 참 신선한 해석이었다.그때 짐 정리를 끝낸 반우희가 셋이서 몰래 뭐라고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다가왔고 그녀는 두 꼬마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그만해. 이미 늦었으니 부 변호사님 보내드려야지.”승주는 반우희를 보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누나는 옆에서 놀고 있어요. 우리는 부 삼촌과 이야기 좀 더 나눌 거니까.”부승원은 침묵했다.“...”‘이 집에서 누가 진짜 어른인지 모르겠군.’반우희는 부승원의 난처한 얼굴을 알아차렸고 시간도 너무 늦었기에 직접 승주와 희주를 방으로 돌려보내려 했다.“가서 자. 내일 토요일에 모임 있지 않아?”승주는 매우 초조해하며 반우희가 자신의 계획을 망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하려고 했다. 부승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꼬리만 살짝 움직이며 그저 이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반우희는 그들을 쫓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는 그들의 고집에 부딪혀 결국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먼저 부승원을 보내기로 결심했다.부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차는 멀리 주차되어 있었고 만약 반우희가 배웅한다면 그녀는 다시 이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와야 했다. 그것을 생각하자 부승원은 뒤돌아 반우희를 한 번 보며 말했다.“여기 있어. 난 혼자 갈게.”하지만 반우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따라나설 기세였다. 부승원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도 급히 멈춰 서며 그의 등에 거의 부딪힐 뻔했다.“문 닫고 얼른
연정훈은 양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가끔은 양시연을 든든히 지원하며 그녀가 정인 관리에 빠르게 익숙해지도록 도왔다. 부부는 바쁘지만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겨울이 들어선 뒤 양시연은 바쁜 일정을 보내며 반 달 동안이나 양씨 가문에 들르지 못했다.어느 날 저녁 그녀는 평소처럼 강남시티로 돌아와 남편 연정훈과 저녁을 먹으려 했지만 여 아주머니에게서 양홍두가 집에서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현재 양씨 가문에는 양홍두와 양지원만 함께 살고 있었고 양시연이 기억하기로 양홍두는 양지원에게 심하게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양시연은 급히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고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진 것을 느꼈다.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몇 마디를 속삭였고 그 말을 듣고 양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혼인 신고요?”집사는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쉿'하는 제스처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너무 화가 나셔서 아예 저녁도 안 드셨어요.”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그럼 우리 엄마는요?”집사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보이다가 말했다.“짐작이 가시죠?”“분명 저녁은 드셨겠죠.”집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장님께서 화를 내셔서 안 드시니까 큰아가씨가 음식을 자기 방으로 몽땅 가져가서 영화 보면서 다 드셨답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정말 양지원다운 행동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집사에게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후 양홍두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집사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시연이 돌아온 목적은 화해를 시키기 위함이었다.양시연은 음식을 들고 양홍두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양홍두는 대나무 의자에 반쯤 기대어 누워 있었고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양홍두는 눈을 뜨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왔구나.”양시연은 음식을 내려놓으며 서둘러 양홍두를 부축했다.“여 아주머니가 말하자마자 바로 달려왔어요.”양홍두는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양시연이 양홍두의 서재에서 나올 때 가지고 들어갔던 그릇은 이미 모두 비어 있었고 양지원의 방 앞을 지나자 양지원은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음식 뚜껑을 열어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정말로 음식을 안 먹는 줄 알았는데.’양시연은 양지원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진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양시연은 음식을 가정부에게 맡기고는 양지원과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때 웨딩드레스를 남겨둔 게 다행이에요.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그들은 문을 닫고 이야기하며 분위기가 한층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다.양지원은 숄을 걸치고 소파 옆에 앉아 차를 마시며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었고 양시연은 다가가서 물었다.“아빠가 어떻게 프러포즈 했어요?”양지원은 잠시 말없이 웃고 손을 들어 양시연의 이마를 가볍게 밀어냈다.“프러포즈? 우리가 너희들처럼 어린애들인 줄 알아?”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결혼해 달라는 말이 없었어요?”양지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없었어. 석진 씨가 결혼할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괜찮겠다고 했어.”양시연은 놀라며 대답했다.“정말요? 나는 엄마가 결혼식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아름다운 얼굴에 시간이 쌓아온 평화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어떤 말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양지원은 다소 충동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양석진의 흰머리 한 올이 그녀의 모든 망설임을 씻어버렸고 반생을 자제해온 양지원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당연히 이해할 수 없죠.”그녀는 소파에 기대며 턱을 괴고 말했다.“저는 그런 엄청난 남자에게 몇십 년 동안 사랑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양지원은 양시연을 한 번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연정훈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양시연은 대답했다.“그건 다르죠. 정훈 씨는 아빠처럼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설령 그 자리에 오른
“만약 그분들이 둘째를 낳으면 네가 사랑을 덜 받게 되면 어떡해?”양시연은 어이없어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양시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연정훈의 느슨해진 표정과 눈가에 번지는 웃음을 보고서야 그의 속뜻을 깨달았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참지 못하고 연정훈의 팔을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정훈 씨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곁눈질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너무 예민하구나?”양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그에게 몸을 기울여 말했다.“당신 연기가 너무 좋아서 그렇죠. 당신이 반대한다고 생각해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 아빠의 행동이 정훈 씨에게 방해가 될까 봐 걱정했어요.”연정훈은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 속 좁네.”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뒤 말했다.“알겠어요. 내가 오해했네요. 사과할게요.”연정훈은 콧방귀를 뀌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됐어. 이제 얘기하지 마. 기분이 안 좋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석으로 가서 연정훈의 품에 파고들었다.“삐지지 말고 둘째 얘기를 해볼까요?”연정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둘째 얘기를 왜 해? 첫째도 없잖아.”“아이고.”양시연은 그의 얼굴을 손끝으로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전부 저의 책임은 아니지 않나요?”연정훈은 의자를 조금 눕히며 한 손을 머리 뒤에 놓고 말했다.“내가 책임까지 져야 하는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했어.”“힘쓴다고 다 잘한 거는 아니죠. 밭에서 곡식이 자라지 않으면 씨앗이 잘못된 걸 수도 있잖아요.”양시연은 그를 응수하며 말하자 연정훈은 눈썹을 살짝 들어 양시연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말투가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에 살짝 민망해지며 방금 자신이 한 말이 꽤 세게 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연정훈의 품에 엎드리며 말했다.“어쨌든 밭에는 문제가 없어요.”
양원 그룹 작은 회의실에서 고위층의 작은 회의가 막 끝나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을 때 연정훈은 양시연의 전화를 받았다.“검진을 하자고?”“네.”양시연은 한숨을 쉬며 진지하게 말했다.“우리는 지금 임신 준비 중이잖아요?”그녀는 잠시 멈추고 투덜거렸다.“우리 꽤 오랫동안 피임을 안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연정훈은 이 일에 대해 사실 운에 맡기는 편이었다. 결혼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고 큰 문제는 없었다. 만약 그녀가 임신을 못 하고 있다면 땅과 씨앗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아이에 대해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걸 보니 연정훈은 매우 기뻤다.그녀와 함께 아이를 갖는 것은 상상만 해도 좋은 일이었다.“알았어. 언제 갈 거야?”“모레요. 마침 토요일이에요.”“좋아. 그날로 하자.”검사받는 일에 대해 상의를 마친 후 양시연은 그에게 바쁘지는 않은 지 방금 전에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정훈은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모두 양시연에게 보고했다.서로 감정이 깊어지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도 얘기하고 싶어진다.휴식 시간이 다가오자 양시연은 책상에 몸을 기대고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연정훈에게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부승원 씨는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네가 데려온 사람인데 뒤에서 그렇게 말하면 되겠어?”연정훈은 반박했다.“당신 친구 정말 내 체면을 조금도 안 챙겨줘요. 아니. 당신 체면을 안 챙겨주는 거죠.”연정훈이 말했다.“어제 퇴근할 때 나한테 너를 잘 가르치라고 하던데.”“네? 뭐라고요?”양시연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부승원이 말하길...”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갑자기 질문했다.“너 자꾸 내 생각을 하는 거 아니야? 고의로 부승원에게 들키고 말이야.”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놀라서 대답했다.“아니에요.”“네가 자꾸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만 보고 있다고 하던데?”양시연은 손을 털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작은 일까지 말해요?”‘진짜 초등학교 때 담
“부 변호사께서 원래 우희 씨와 함께 병원에 가려고 했어요?”양시연이 시험 삼아 물었다.반우희는 ‘아이구’하며 한숨을 쉬고 답했다.“승주가 어떻게 부 변호사랑... 아니 부 대표님과 친해는지 모르겠어요. 승주가 꼭 대표님을 자신의 축구 경기 보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경기는 오후에 있고 저는 동준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는데 승주가 부 대표님을 일찍 오시라고 고집을 부려서요.”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승주는 날씨가 추워서 부대표님이 우희 씨랑 동준이를 병원에 데려가 주길 바랐던 거네요?”반우희는 어깨를 축 처뜨리며 한숨을 쉬었고 양시연은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반우희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부 대표님이 응답했어요?”이 말이 나오자 반우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께서 승주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아요.”양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아마 그건 아닐 거야.’“제가 부 대표님한테 말해 볼게요.”반우희는 준비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양시연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왜 그래요?”반우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갑자기 생각났는데 토요일에 일이 생겨서 병원에 갈 수 없겠어요. 우희 씨는 부승원 씨과 같이 가는 게 좋겠어요.”“네?”반우희는 실망한 듯 말했다.“알겠어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다녀와요. 힘내요.”반우희는 팔을 늘어뜨리며 마치 좀비처럼 걸어갔고 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야 큰일 날 뻔했다.’양시연은 자리에 앉아 부승원은 아이에게는 친절한데 반우희에게만 까칠한 성격이 이상하다고 불평했다.‘쳇. 이러고도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다니.’...토요일 오전 연정훈은 갑자기 일이 생겨 병원에 먼저 가기로 했지만 양시연은 그에게 나중에 오라고 말했다.양시연이 선택한 병원은 경인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개인 병원으로 정인의 기업에 속한 곳이었다. 병원에 가기 전에 비서만 예약을 맡기고 원장에게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이미 병원의 서비스가 뛰어나
‘연 사모님?’조이현은 놀란 표정을 짓고 믿기 힘들어했으며 주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양시연은 그들의 반응이 우스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연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고 ‘양 아가씨’나 ‘양 대표님’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누군가의 심리적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서 느껴지는 쾌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양시연은 시계를 확인하며 연정훈이 당장 도착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하고 박사에게 요청했다.“먼저 검사를 시작해 주세요.”“알겠습니다.”여자 박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몸을 살짝 숙이고 양시연에게 길을 안내했고 조이현이 반응하기도 전에 양시연이 일행에 이끌려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양시연의 우아한 뒷모습과 고급스러운 옷차림이 눈에 들어오자 조이현은 순간 정신을 차렸지만 질투와 분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길처럼 타올랐다.조이현은 양시연과 주지혁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 기억은 그녀를 지독한 슬픔과 상실감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녀는 첫 아이를 잃고 깊은 우울함에 빠졌다. 3년간의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양시연을 쫓아가려 했지만 주지혁이 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뭐 하는 거야?!”조이현은 주지혁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 예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내가 뭐 하겠어? 난 오히려 지혁 씨야말로 묻고 싶어. 당신 아직도 양시연 씨를 잊지 못하는 거야? 예전처럼 다시 엮이려는 거야? 꿈 깨. 양시연 씨는 이미 부자집 가문의 사람이야.”조이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고 주지혁은 당황한 듯 낮은 목소리로 조이현을 나무랐다.조이현은 분노에 가득 차 숨을 고르며 주먹을 꽉 쥐었고 주지혁은 한숨을 내쉬며 다독이려 했다.“진정 좀 해. 이런 감정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가 이 아이를 갖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해.”그 말에 조이현은 순간적으로 진정했고 조이현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며
양지원은 양석진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살이 찐 건지 빠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저릿함은 그가 분명히 살이 빠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했다.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양석진과 그의 일행이 어느새 그녀 앞에 다다라 있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순간 말을 잃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용 국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용 국장 역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고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양석진을 마주하면 그는 어딘가 빛을 잃는 듯했다.그가 먼저 운명 같은 우연이라며 말을 꺼냈다. 대운산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이곳에서 회의가 잡혔고 그 책임자가 다름 아닌 양석진이었다.“양 대표님, 우연의 일치네요. 막 완공된 이 대회장의 첫 번째 사용자가 바로 당신 가족입니다.”양지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최대한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대신 직함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더우니까요. 조금 후에 제가 임원분들을 모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게 해드릴게요.”양석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2시에 출발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좋아요.”양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서 앞장섰다.그 일행은 의외로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 마치 더는 움직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은 금세 고요해졌다.양지원은 아래층에 홀로 앉아 차를 마셨지만 입안에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둘러 스쳐 지나갔고 양석진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비록 이제는 서로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가 모든 것을 그녀를 중심으로
[청년기]“내일 돌아오는 거예요?”대운산으로 향하던 길 양지원은 집에 있는 양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감기에 걸린 지 이틀째였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었고 그나마 양혁수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가능하면 돌아가려고 해.”몇몇 선생님들의 불만이 떠오르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에서는 좀 얌전히 지낼 수 없을까? 너 때문에 맨날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못 들겠어.”한창 말썽꾸러기 시절을 지나 양혁수는 이제 누구에게도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몇몇 선생님이 함께 교육을 맡으면 그는 종종 머리를 치켜들고 반항했다.“저 정도면 엄청 얌전한 편 아닌가요? 같이 농구도 하잖아요.”양지원은 눈동자를 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무더운 여름날 예민한 성격의 선생님들이 누가 그런 말썽꾸러기와 농구장에 나가고 싶겠는지 의문스러웠다.“알겠어. 어쨌든 조금만 얌전히 있어 줘.”“알겠어요. 엄마는 밖에서 몸조심하고 집에 오시면 제가 생일 챙겨드릴게요.”양지원은 말끝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작은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통화가 끝나자 차의 속도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비서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양 대표님, 먼저 접대소에서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용 국장 쪽 점검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대운산 관광 프로젝트는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그동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위쪽에서 이 지역을 외교 관련 주요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그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행궁’을 조성하려면 결국 관계자들의 사전 점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양지원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일주일 전 이곳에 도착해 현장을 둘러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최근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있는 곳과 뜨거운 태양 아래를 오가다 보니 체력이 많이 지쳐갔다.비서는 그녀의 얼굴 색
양지원은 화려한 의상에 휩싸인 채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그녀는 오빠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당연히 멋져요.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걸요.”진병수는 이마를 짚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양석진은 길을 걸으며 양지원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그녀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두 세트를 함께 찍기로 했다.예복을 입고 양지원과 함께 거울 앞에 서자 주위에서 감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그는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거리자 양창수의 애매한 미소를 피하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결혼사진을 찍는 자리였지만 양지원에게는 가족사진을 남기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예쁜 옷을 입었으니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고 중간에 진병수에게도 함께 찍자며 부탁했다.“자,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해 주면 좋겠네요.”사진사가 말하자 양석진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이분은 제 오빠예요.”사진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양창수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키스하는 게 뭐 어때? 얼굴에 하는 거면 괜찮아.”진병수도 거들었다.“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안 돼. 그건 너무 이상해.”양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손명우가 조용히 제안했다.“카메라 각도를 조절해서 찍으면 돼.”양지원과 양석진은 동시에 외쳤다.“안돼.”순간 현장은 조용해졌다.“...”양지원은 웃으며 옆에 앉은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우리 둘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의 팔을 감싸며 바르게 자세를 고쳤다.“오빠,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 처음 오빠를 만났을 때도 가족사진 찍느라 소파에 나란히 앉았잖아요.”양석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감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맞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지.”두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찰칵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고정되었다.수많은 사진 중 그 사진은 양지원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
배가 콕콕 쑤시는 걸 제외하면 양지원은 꽤 신나게 놀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소가 가득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양석진이 양창수를 뒤뜰로 불렀고 늦여름이라 뒤뜰에는 매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양창수는 계단에 뚝 멈춰 섰다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뒤뜰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지원이 이제 어리지 않으니 지원이 앞에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지 말았으면 해.”“내가 뭘 또 아무 말이나 했다고 그래요?”양석진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너 자꾸 까불면 바로 입대시켜 버린다?”양창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마음대로 하세요.”양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위층을 슬쩍 보다가 양석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내가 헛소리했다 치죠.”그리고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떠났다.양석진은 뒤뜰에 홀로 남아 사라지는 양창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의미심장한 양창수의 시선은 마치 오래된 전등처럼 깜빡깜빡하며 양석진의 마음을 괴롭혔다.양석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다가 위층에서 양지원이 저를 부르자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석진은 그날 밤 또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양석진에게 있어 흔한 일이 되었다.어느 날부터인지, 양석진은 감히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할 감정이 생겼고 아무리 억눌러도 아무도 없는 새벽이 되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양석진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본인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그저 양지원만 떠오를 뿐이었다.어쩌면 양지원도 나이가 좀 더 들고, 각자 연인이 생기면 이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를 양석진은 늘 기도했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날 뒤로, 양석진은 며칠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양지원의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양석진은 바로 진병수의 연락을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