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수이가 돌아온 뒤 윤씨 일가의 환하고 넓은 대전 안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밖에서부터 전해졌다.“형님, 좋은 소식입니다!”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둘째 윤창현과 셋째 윤정석이 밖에서 빠르게 달려 들어왔다.두 사람은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지 얼굴이 환했다.대전 안에서 한 손에 고서를 들고 보고 있던 윤신우는 두 형제가 들어온 걸 보고는 천천히 들고 있던 고서를 내려놓았다.“기산 쪽에서 소식이 온 것이냐?”“형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우리 조카는 마씨 일가를 멸문시켰고 심지어 마씨 일가의 세 조상도 우리 조카의 손에 죽었어요!”윤창현은 잔뜩 들뜬 얼굴로 말했다.그 말을 들은 윤신우는 덤덤하게 대꾸할 뿐, 그들이 예상처럼 아주 기뻐하지는 않았다.윤신우가 별로 흥분하지 않자 윤창현은 의아해하며 말했다.“형님, 왜 구주를 위해 기뻐하지 않는 겁니까? 구주는 홀로 천 년의 역사가 있는 세가를 무너뜨리고 마씨 일가의 세 명의 조상까지 죽였습니다. 화진 전체를 아울러봐도 이 정도 실력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겁니다!”윤신우는 덤덤히 웃었다.“모두 내가 예상한 대로거든.”그 말을 들은 윤창현은 중얼거리면서 말했다.“그래도 구주를 위해 기뻐해야죠. 얼마나 대단한 명예입니까?”그러나 윤신우는 그다지 기뻐하지는 않고 그저 덤덤히 말했다.“마씨 일가가 멸문당했는데 다른 제자백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거야?”아버지로서 윤신우는 항상 나중을 걱정했기에 그에게 물었다.“형님, 제가 파견한 스파이들은 아직 다른 제자백가들의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반씨 일가에서 긴급하게 가족회의를 소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씨 가문과 어씨 가문도요! 아직은 다들 크게 움직이지는 않아서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윤창현의 대답을 들은 윤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방심해서는 안 돼. 어찌 됐든 마씨 일가는 제자백가 중 하나야. 우리 아들은 마씨 일가를 멸문시켰고 그로 인해 제자백가에서는 분명 뭔가
윤창현의 말을 들은 윤신우는 손을 저었다.“둘째야, 그건 섣부른 판단이다. 잊지 마. 종문은 3대 서열 중 가장 강해. 심지어 우리 윤씨 일가조차 종문을 얕볼 수 없어.”윤창현은 윤신우의 말을 듣고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뭘 또 그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우리 조카가 곤륜에서 왕이 되었을 때 종문에서는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잖아요.”“아니, 그때랑은 달라.”윤신우가 갑자기 말했다.“6년 전 그때 내 아들은 10국과 싸우면서 전쟁터를 누비며 엄청난 공을 세웠어. 종문에서 그 공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종문의 자격이 없는 거야. 그러나 지금은 달라. 문씨 일가에서 내 아들의 왕위를 대신하고 있는 지금, 종문에서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어.”윤신우는 유유히 말했다.“형님 말씀이 맞아요. 그건 제가 항상 걱정하던 일이에요.”윤정석이 말했다.“형님, 정석아, 난 두 사람이 괜한 생각을 하는 거로 생각해요. 우리 조카가 이렇게 패기 넘치게 돌아왔는데 종문이 나서지 않는다면 잘된 일 아닌가요?”무신경한 윤창현은 호탕하게 말했다.윤신우는 당연히 윤창현의 말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그는 잠깐 고민한 뒤 윤정석을 향해 말했다.“정석아, 지금부터 사람을 시켜 종문을 감시하도록 해. 혹시라도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반드시 바로 나한테 얘기해야 한다.”“네!”윤정석은 명령에 따랐다.윤정석에게 분부한 뒤 윤신우는 윤창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창현아, 구주는 이미 서울로 돌아왔지?”윤창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뇨,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뭐?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어떻게 된 거야?”윤신우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따지고 보면 기산에서 서울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그런데 윤구주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윤신우는 조금 궁금해졌다.“형님, 저희가 심어둔 스파이가 말하길 구주는 지금 기산의 마궁에 있대요. 대체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 궁전에 감히 가
윤신우가 갑자기 황성에 간다고 하자 윤창현과 윤정석은 깜짝 놀랐다.“형님, 어찌하여 갑자기 황성으로 가시는 겁니까?”윤창현은 몹시 궁금해하며 물었다.윤정석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사실, 16년 전 윤신우는 황성의 단골손님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현 국주께서 친히 황성 내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16년 전 그 사건 이후로 윤신우는 다시는 황성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윤신우가 갑자기 황성에 가겠다고 하니 윤창현과 윤정석은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윤신우는 천천히 깊은 눈을 들어 말했다.“어떤 일은 반드시 그분께 직접 여쭤봐야 하기 때문이다!”그분은 의심할 여지 없이 현 국주였다.윤신우의 말에 윤창현이 말했다.“형님, 국주님과는 오랫동안 만나지 않으셨는데 과연 형님을 만나주실까요?”“걱정하지 마라. 만나줄 것이다.”윤신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 말에 윤창현과 윤정석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윤신우가 결정한 일은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울, 황성.위엄 있는 금란 대전 안에서 곤룡포를 두른 위풍당당한 남자가 상소문을 읽고 있었다.그가 바로 화진의 현 국주였다. 그의 곁에는 황성 최고의 내시 한진모가 서 있었다. 황성 제일의 고수로 불리는 이 늙은 내시는 허리를 굽힌 채 시종일관 국주 곁을 공손히 지키고 있었다.“진모야, 이 상소문들은 모두 내각에서 올라온 것이냐?”국주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붉은 관복을 입은 한진모는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전하, 그러하옵니다.”“내각의 늙다리들이 죄다 헛소리만 지껄이는군.”화진 국주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산더미처럼 쌓인 상소문이 대전 안에 와르르 쏟아졌다.“전하, 부디 진정하시옵소서!”국주가 노하는 것을 보고 한진모는 황급히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짐은 노한 것이 아니다! 짐은 단지 내각의 저 아둔한 자들이 왜 하필 이때 구주를 몰아세우려 드는지 이해할 수 없구
“구주가 기산으로 갔으니 마씨 가문은 정리됐겠지?”국주는 나직이 물었다.“예, 전하. 구주왕께서 마씨 가문을 뿌리 뽑으셨습니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말이옵니다!”한진모가 웃으며 아뢰었다.“잘했군!”“그럼 다른 제자백가들은 어떤가? 움직임이 있나?”국주가 다시 물었다.“아직 별다른 동향은 없습니다.”“하하하! 과연 구주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국주는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다만, 짐이 가장 우려하는 건...”국주는 말끝을 흐렸다.오랜 세월 국주를 섬겨온 한진모가 어찌 국주의 걱정을 모르겠는가. 그가 입을 열었다.“혹시 전하께서는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종문 서열을 염려하시는 겁니까?”“그래!”국주는 말을 마치고 건장한 몸을 일으켰다.“너도 알다시피, 화진의 무도 3대 서열 중 종문이 으뜸이요, 세가와 문벌은 그저 말류에 불과하지 않느냐! 우리 화진은 무로써 나라를 세우고 육합을 정벌하였거늘, 이제 문벌과 세가가 들고 일어나니 구주가 홀로 그들을 억누르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짐은 종문에서 누군가 나설까 봐 심히 우려스럽다!”한진모는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전하께서 염려하시는바, 옳은 말씀이옵니다. 허나 노복은 구주왕을 믿사옵니다! 더욱이 그 뒤에 있는 곤륜 구역을 믿사옵니다! 하옵건대, 우리 구주왕께서는 곤륜 구역의...”여기까지 아뢰던 한진모는 말을 멈추었다. 이 비밀은 지금까지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국주는 이 말을 듣고 모처럼 웃음을 보였다.“네 말이 맞다. 그 녀석은 과연 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범하구나... 에휴! 십육 년 전에 저지른 과오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그 녀석과 사이가 멀어지지는 않았을 텐데...”한진모가 아뢰었다.“전하,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노복은 구주왕께서 전하를 결코 원망치 않으시리라 믿사옵니다!”“그러길 바라야지...”국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셨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진모는 금란 대전 바깥에서 엄청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감지하였다.
“윤씨 일가 윤신우, 전하께 배알 드리옵니다!”윤신우는 금란 대전에 이르러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신우야, 어찌 이리 격식을 차리는 게냐! 짐이 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너와 짐은 형제와 같으니 이런 큰 예는 필요 없다. 어서 일어나거라!”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국주는 용상에서 내려와 직접 윤신우를 부축하려 했다.그러나 국주가 윤신우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윤신우는 몸을 뒤로 물러섰다.“국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미천한 백성일 뿐, 국주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냉정한 말투에 국주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차가운 표정의 윤신우를 보며 국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십육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짐을 용서하지 않았구나!”윤신우가 말했다.“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천자이시온데 소인이 어찌 감히 전하를 원망하겠습니까?”윤신우의 말에 국주는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한진모에게 말했다.“잠시 물러가 있거라. 신우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한진모는 놀란 눈으로 윤신우를 흘끗 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하지만 국주는 손을 내저었다.“물러나라.”한진모는 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그럼 노복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말을 마치고 한진모는 금란 대전을 나섰다.넓은 대전 안에는 이제 국주와 윤신우만 남았다. 한진모가 나가자 곤룡포를 입은 국주는 윤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십육 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시간이 참 빠르구나!”감회에 젖은 국주는 금란 대전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리고 윤신우에게 옆자리를 가리켰다.윤신우도 별다른 생각 없이 다가가 국주 옆에 나란히 앉았다.“신우야, 기억하는가? 짐이 아직 태자였을 때 우리는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장난도 치고 천하 대사를 논하기도 했었지...”국주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모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기억하고 있사옵니다.”윤신우가 조용히 대답했다.“어휴, 세월이 쏜살같구나. 어느새
세상 어느 아비가 자식의 행복과 평안을 바라지 않겠는가?윤신우 또한 그랬다.그래서 그는 윤구주가 더 이상 조정의 암투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국주의 손아귀에 칼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이미 윤구주는 문벌과 세가를 억누르고 있었다.만약 앞으로 종문까지 나선다면 윤신우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화진 무도의 정점에 있는 종문이었으니 제자백가나 문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윤신우의 말을 들은 국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신우야,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이 아니냐? 너와 짐은 막역한 사이가 아니더냐. 네 아들은 곧 과인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과인이 어찌 구주를 해칠 수 있겠느냐?”윤신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정말입니까?”이 말에 국주는 순간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짐이 어찌 모르겠느냐. 네가 십육 년 전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은 짐 또한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메인다. 허나 구주를 향한 짐의 마음은 네가 익히 알고 있을 터. 이번 3대 서열의 난에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자는 구주뿐이니라! 그러하매 짐이 구주에게 제왕검을 내린 것이다. 신우야, 짐의 깊은 뜻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그의 말에 윤신우가 말했다.“소인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전하의 뜻은 결국 소자에게 팔방을 정벌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전하를 대신해 화진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국주는 멋쩍게 웃었으나 반박하지는 않았다.윤신우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전하께서 이미 결정하셨다면 소인 또한 전하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자는 화진을 위해, 백성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한 가지, 누구든 감히 소자를 해하려 한다면 소인 윤신우는 이 목숨을 걸고, 윤씨 일가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그 원통함을 풀어줄 것입니다.”차갑게 말을 마친 윤신우는 국주에게 공손히
“신우 삼촌, 오늘 황성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제 기억엔 삼촌은 황성에 오신 지 정말 오래되신 것 같은데!”이홍연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윤신우를 쳐다보며 물었다.윤신우는 이홍연을 친자식처럼 아꼈기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오늘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아, 그러셨군요.”“공주 전하, 소인은 이만 가봐야겠습니다.”윤신우가 말했다.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이홍연이 급히 말했다.“삼촌, 잠시만요!”윤신우는 뒤돌아보며 물었다 “공주 전하,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이홍연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삼촌, 그 사람은...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그 사람이라는 말에 윤신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윤씨 일가의 가주인 그가 화진의 공주가 자기 아들을 묻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구주 말씀이신지요?”이홍연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구주는 먼 길을 떠났는데 아직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어요.”윤신우는 솔직하게 말했다.“어? 어디 갔는데요? 왜 내게 말 안 했어요?”이홍연이 서둘러 물었다.노룡산에서의 싸움 이후, 이홍연은 윤구주를 다시 보지 못했다.마씨 가문과 손잡았던 일은 이미 사과했지만 윤구주가 그 유명 배우 은설아와 껴안고 있던 장면이 자꾸만 눈에 밟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래서 이홍연은 황성에 머물며 윤구주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윤구주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니 윤구주가 서울을 떠난 지 며칠이나 됐다는 말에 이홍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솔직히 공주 전하, 구주는 지금 기산에 있습니다.”기산?이홍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기산엔 왜 갔는데요?”“죄송하지만 공주 전하. 지금은 이유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구주는 곧 돌아올 겁니다.”윤신우가 말했다.윤구주가 기산에 간 이유를 말해주지 않자 이홍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그래요. 그럼 돌아오면 삼촌께서 꼭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윤씨 성을 듣자 주도는 순간 상황을 파악했다. 공주가 이렇게 묻는 건 윤구주 그 괴짜 녀석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영감, 마씨 가문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빨리 말해 봐요.”이홍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세력으로 말하자면 수천 년 이어진 마씨 가문의 기관술은 정말 엄청나게 강합니다. 게다가 최고 고수인 시조들도 세 명이나 있어요.”주도의 말을 들은 이홍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럼 그 녀석 혼자 마씨 가문에 갔으니 위험한 거 아니에요?”“어? 딴 놈이 가면 위험천만하겠지만 구주 그 괴물이라면 공주님께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녀석 실력이 어마무시하잖아요!”노룡산 싸움을 떠올리면 주도는 아직도 등골이 오싹했다.특히 마지막에 윤구주가 펼친 봉왕팔기의 적선술은 너무 놀라웠다.“영감, 정말 그럴까요?”이홍연이 다급하게 물었다.“당연하죠. 노룡산에서 홀로 오십여 명의 세가 절정 고수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자는 종문의 조상들 말고 이 늙은이는 평생 본 적이 없거든요!”주도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이홍연은 웃음을 지었다.“윤 바보만 무사하면 됐어요. 그거면 충분해요!”눈앞의 육공주는 완전히 연애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그녀에게 윤구주만 안전하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한참 기분이 좋아하던 이홍연이 갑자기 걱정스레 물었다.“영감, 그 바보가 지난번 노룡산 일 때문에 나를 멀리하지 않을까요?”주객은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음... 그럴 리야 없겠지요.”“왜요?”“공주님은 미모도 훌륭하시고 게다가 귀한 황족이신데 누가 공주님을 마다하겠습니까?”주도는 솔직하게 말했다.“히히! 그 말은 맘에 드네요. 근데 그 바보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예요. 걔는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둘이 지금처럼 될 수도 없었겠지요.”이홍연은 말을 하다가 슬픔에 잠겼다.“공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그런 점을 좋아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주도가 문득 말했다.이홍연은 감개무량한 듯 말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