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찬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설아는 이미 멀리 가버려 따라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눈앞의 문제부터 정리해야 했다.“그때 유학 간 건 전적으로 내 결정이었어. 말도 없이 훌쩍 떠난 건 나였고 우리 사이는 서로 마음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어떤 약속도 한 적 없잖아. 설아가 날 기다려야 할 이유도, 나만 바라봐야 할 의무도 없었어.”“내가 아팠든 속상했든 그건 내 감정일 뿐이지 설아 책임은 아니잖아.”서진영은 연애에 눈이 먼 사람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처음이었다.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는 말처럼, 연애에 빠진 사람은 그 누구도 못 말린다.결국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형 사생활은 나랑 상관없어요. 내가 설아 씨 싫어하는 것도 내 일이고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부탁하고 싶어요. 회사만큼은 진지하게 진짜로 책임감 있게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형도 알잖아요.”하지만 강연찬은 물러서지 않았다.“그건 그거고 난 네가 사과하길 바란다.”서진영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결국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겠어요. 다음에 만나면 사과할게요.”하지만 그 ‘다음’이 올 일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점심시간이 끝나고 남설아는 정확한 시간에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이 팀에서 자신은 별 존재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꼭 이런 사람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남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 말이다.서유라가 능청스럽게 조그만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싱글벙글 웃었다.“아침에 서준이가 나한테 사줬는데 혼자 다 못 먹겠더라고. 설아 씨도 단 거 좋아한다길래, 하나 줄까?”“난 단 거 안 먹어.”남설아는 케이크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잘라냈다.그러고는 살짝 눈썹을 올려 서유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그 시간에 서준 씨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더 나을걸? 내가 제안한 조건 빨리 수락하게 만들어야, 유라 씨
서유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자신이 준비한 한 수가 이렇게까지 아무 효과도 없을 줄은.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서유라를 보며 남설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함께 지내다 보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세 파악된다.서유라의 수법이 대단한 게 아니라 배서준의 사랑이 대단했던 거다.사랑하기에 그 연극에 기꺼이 눈감아준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무대 선택을 잘못했다.이곳은 회사였다. 일하는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이나 뒷말은 아무리 크다 해도 ‘밥줄’만큼은 못하다.다들 외면하는 가운데 서유라는 더할 나위 없이 민망해졌고 이를 악물고 억지로 자신이 퇴장할 명분을 만들어냈다.“설아 씨가 지금 바쁘다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제가 모두를 위해 커피를 좀 샀는데 금방 도착할 거예요. 다들 고생 많으십니다.”체면 있게 퇴장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어설픈 광대였다는 걸.‘요즘 세상이 참 많이 변했네. 내연녀가 저렇게 당당하게 사무실 돌아다니는 시대라니... 도덕도 다 무너진 느낌이야.’직원들은 속으로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회의실.“여러분은 이 소프트웨어 어떻게 보십니까?”배서준은 대형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을 가리키며 특채로 데려온 기술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는 검은 뿔테 안경에 전형적인 공대생 복장이었고 안경을 끌어 올리며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조금 미숙하긴 한데 구조가 안정적입니다. 보기 드문 괜찮은 재목이에요. 실전에서 몇 번만 다듬으면 확실히 더 큰 성장이 있을 겁니다. 인상 깊네요. 다만 이 코드 구성 방식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요.”“혹시 이거 예전에 대학생 기술 경진대회에서 1등한 그 작품 아니에요? 여자 졸업생 작품으로 기억하는데...”다른 한 사람이 곧장 떠올리듯 말했다.“맞네, 기억났어요. 그때 그 학생 이름이... 남설아! 맞아, 남설아였어요!”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회의실은 금세 웃음과 고개 끄덕임으로 가득 찼다.“그
천기준은 지금 어떤 말도 다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 없이 남설아의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를 배서준 앞에 내밀었다.“대표님,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사무적인 어조였다. 그런 천기준의 태도에 배서준은 괜히 마음이 상했다. 그는 자료를 들여다보자 본능적으로 거부감부터 들었다.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떻게 저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여자가 능력까지 있다는 거지?’“그 정도로 유능하면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날 꼭 잡으려고 했던 거야!”“할아버지한테까지 그렇게 열심히 공들여서 결국 그 많은 걸 다 받아냈잖아!”배서준은 서류 위로 주먹을 세게 내려치며 계속해서 혼잣말처럼 불평을 쏟아냈다.요즘 들어 그가 받은 충격은 말 그대로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좌절을 겪어본 적 없는 그였기에 버티기가 힘들 정도였다.그런 배서준의 모습을 보며 천기준은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걸 직감했다.그래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방을 나섰다.이제 넓은 사무실에는 배서준 혼자만 남았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것을 들었다.서류 안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바닥이 되어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 같았다.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대가 없이 얻으려는 여자’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눈에 띄는 존재였던 것이다.자료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배서준은 남설아와 자신 사이에 뭔가 커다란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그는 곧장 천기준을 다시 불러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대체 어떻게 해서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생긴 건지, 왜 그렇게 정신없이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까지 생기게 된 건지 알고 싶었다.천기준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이 와중에 과거 일은 왜 또 들쑤시는 건데?’“대표님, 서유라 씨가 계속 울고 계십니다. 혹시 가서 보시는
남설아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엔 결재를 받아야 할 서류가 들려 있었고 서로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마음속으로는 우스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녀는 손에 든 서류를 살짝 흔들었다.“대표님, 사인하시죠.”지극히 공적인 말투와 차가운 태도는 결국 배서준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다.“남설아, 이 못된 것아! 유라 피 흘리는 거 안 보여?”배서준은 이를 악물며 남설아를 노려봤다.“너만 아니었으면 유라 우울증 다시 도질 일도 없었어! 일부러 괴롭히고 밀어붙인 거잖아! 결국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설아는 배서준 품에 파묻혀 덜덜 떨고 있는 서유라를 보며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자신은 단 한 번도 배서준에게서 저런 눈빛을 받은 적이 없었다.다정함도, 걱정도, 오직 돌아온 건 늘 차가운 비난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수년을 사랑했던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었다.예전 같았으면 배서준의 이런 비난에 말없이 참았겠지만 지금의 남설아는 손찌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 많이 참은 셈이었다.그녀는 팔짱을 낀 채 위아래로 서유라를 훑어봤다. 손목에 상처가 조금 있긴 했지만 연기는 너무 서툴렀다.“서준 씨, 얼른 애인 안고 병원이나 가요. 이러다가 상처 아물겠어요.”“사내 규정집 다 읽어봤어요. 정신질환 병력이 있는 사람은 배건 그룹에 근무할 수 없어요. 대표란 사람이 앞장서서 규정 위반이라니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에요?”남설아는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죽고 싶으면 조용히 멀리 가서 죽어. 괜히 여기서 죽어 건물에 흉한 기운 돌게 하지 말고. 피해 주지 말자고, 응?”그렇게 말한 뒤 남설아는 두 사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하이힐을 또각이며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서준아, 놓아줘. 그냥 죽게 해줘...”“설아 씨는 진짜 나를 싫어해.”서유라는 두 손으로 배서준의 셔츠를 꼭 붙잡고 있었다.맞춤 제작된 고급 셔츠는 그녀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가 물든 그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아
병원.응급처치 끝에 서유라는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 주치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환자 상태가 이전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이대로 가면 자살 시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배서준은 짧게 대답한 뒤, 안타까운 마음으로 서유라의 손을 꼭 잡았다.최근 남설아가 계속 일을 벌인 탓에 자신이 그녀를 너무 등한시했다는 걸 그는 인정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유라가 천천히 눈을 떴고 말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서준아, 미안해.”그녀가 먼저 사과하는 모습을 본 배서준은 더욱 미안해졌다.하여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살며시 감싸 쥐며 부드럽게 말했다.“바보야, 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미안해할 일도 아니야.”“아니야. 전부 내 잘못이야. 설아 씨가 날 싫어하는 것도 당연해. 내가 설아 씨의 것을 빼앗았으니까.”서유라의 눈물은 더욱 거세졌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흐느꼈다.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배서준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널 좋아하고, 널 사랑한 건 나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울지 마. 내가 사과하게 할게, 알겠지?”배서준은 옆에 놓인 티슈를 집어 들고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눈빛에는 한없이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그러나 그렇게 다정한 태도 속에서도 서유라는 느낄 수 있었다.이 사람의 마음이 조금씩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서유라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나직하게 물었다.“서준아, 너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게 날 아껴줄 수 있어?”“그래. 난 언제까지나 너한테 잘해줄 거야. 영원히.”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약속했다.그 말에 서유라는 조금 안심한 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서준아, 나한테 도현이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야.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 내 동생 좀 살려줘. 응?”“그래.”이미 결심은 서 있었다. 어
그때까지는 몰랐다. 배나은의 죽음이 배서준과 관련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배건 그룹의 모든 것도 그녀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단 한 푼도 양보할 수 없었다.“헛된 망상하지 마.”배서준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남설아의 어깨를 밀쳐 소파에 내동댕이쳤다.그 뒤를 잇는 건, 그녀 얼굴을 향해 내던져진 한 장의 서류였다.“서명해. 네가 그렇게 원하는 프로젝트 팀장 자리야.”날카로운 종이 끝이 남설아의 뺨을 살짝 그었다. 깊진 않았지만 피가 맺혔다.남설아는 ‘쓰읍’ 소리를 내며 잠시 숨을 삼켰고 이내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내용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펜을 꺼내 이름을 꾹 눌러 썼다.그러고는 서랍을 열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용서 각서를 꺼내 배서준에게 내밀었다.“현금과 물건, 서로 주고받았으니 끝났어요.”말은 짧았지만 모든 의미가 담긴 거래였다.배서준은 그 종이를 받아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볼 때 이것은 너무 철저히 계산된 태도였다.“넌 진짜 내가 이렇게까지 해줄 거라고 확신한 거야?”“그만 좀 그런 찌질하고 역겨운 얼굴로 말해요. 내가 당신 위해서 그랬다는 표정 짓지 말라고요. 연기하려면 당신 팬들 앞에서나 해요. 난 서준 씨한테 박수 쳐줄 생각 없으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그고 나가요.”남설아는 이렇게 말하며 용서 각서를 배서준 얼굴에 던졌다.마치 방금 그가 했던 것처럼 얼굴을 향해 힘껏.그녀는 배서준을 지나쳐 단호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남설아! 너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두고 보자고! 네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배서준은 바닥에 떨어진 용서 각서를 주워들고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계속 이렇게 분풀이만 할 거면 서준 씨는 그냥 무능하고 한심한 인간일 뿐이에요.”남설아는 돌아서서 싸늘하게 받아쳤다.배서준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이 당돌하고 차가운 여자가, 예전의 그 말 잘 듣던 여자가 맞다는 사실이.‘정말 여자는 아이를 잃고 나면 다
배서준은 남설아에게 밀려 연달아 뒷걸음질 쳤지만 그의 눈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저 광기 어린 남설아를 무표정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문밖으로 밀려난 뒤, 배서준은 냉소를 머금은 채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진짜 미쳤구나.”한때는 매일같이 이런 배서준의 비웃음과 조롱, 정신적인 폭력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나날이 있었다.남설아는 그 모든 것을 참아냈고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다.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 시절의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남설아는 바닥에 벗어놓은 하이힐을 움켜쥐고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배서준의 얼굴을 향해 힘껏 던졌다.이제는 말로 감정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이렇게 물리적인 방식으로 내던지는 게 오히려 속에 쌓인 분노와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방법이었다.배서준은 그제야 얼굴을 찌푸리며 더는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고 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가던 길에도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남설아, 너 진짜 미친년이야! 지금 그냥 히스테리 부리는 거라고!”“꺼져, 이 개자식아!”남설아는 있는 힘껏 하이힐을 그의 등에 던졌다. 그러고는 쾅 소리 나게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듯 미끄러져 내려갔다.이내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녀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소리 내지 않아도 그 분노와 억울함은 온몸으로 뿜어져 나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숙자는 가슴이 미어져 급히 남설아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들고 와 그녀를 부축했다.“설아 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남설아는 이 집에 따로 나와 살게 된 뒤부터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거부했다.모두가 자신을 ‘설아 씨’라고 부르길 바랐다.남설아는 눈물을 대충 훔치더니 갑자기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아주머니, 저 속상하지 않아요. 나 봤죠? 방금 그 얼굴에 하이힐 제대로 한 방 먹였잖아요. 지금 속이 다 시원해요.”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소파에 앉아 케이크를 한
배서준을 한 대 후려친 후, 남설아는 온몸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케이크까지 먹고 나서는 바로 노트북을 꺼내 프로젝트 자료를 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배서준이 조건을 받아들였으니 이제부터는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해내야 할 차례였다.위화 그룹의 기본 정보는 사실 강연찬이 이미 예전에 건네준 적이 있었기에 남설아는 지금 위화 그룹이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목표가 분명해지면 그에 맞게 방향을 잡는 건 훨씬 수월해지는 법이다.조금만 생각을 정리하곤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두 손은 쉴 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내일은 기술팀 사람들과 첫 대면이 있는 날이었다. 이런 개발자 쪽 사람들은 대체로 단순한 편이고 실력으로 승부 보는 분위기라서 누가 실력이 있느냐에 따라 말발도 달라지는 세계였다.그러니 첫 만남부터 실력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남설아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밤새 프로그램을 붙잡은 끝에 대략적인 모델이 완성됐다.남설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집에서 전업주부 생활을 하며 먹고 자고만 반복할 땐 늘 무기력했는데 일하느라 밤을 새운 지금이 훨씬 정신이 맑았다.확실히 배서준은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드는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다 그 인간 탓이야.’남설아는 블랙커피를 가득 따라 마신 뒤, 잠이 확 깨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차에 올라 회사로 향했다.배건 그룹은 아직 전환기 초입에 있었지만 기술팀의 구성은 상당히 고급이었다. 그만큼 배건 그룹이 이번 전환에 얼마나 절박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그리고 동시에 배서준이 지난번에 계약을 빼앗겼을 때 얼마나 분통 터졌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 분노에 자기도 한몫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사무실 문을 열고 남설아는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오늘부로 기술팀의 새로운 팀장을 맡게 된 남설아입니다.”이름이 나오자마자 한원준이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남설아? 혹시.. 제일대 남설아 선배님?”“왜요? 나 알아요?
“유라 씨였군요.”차혜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서준 씨도 같이 왔네요.”“사모님, 안녕하세요.”배서준도 서유라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유라 씨,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나요?”차혜미는 의례적인 말투로 물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서유라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이번 기회에 차혜미 앞에서 이미지를 조금 회복해보려는 속셈이었다.그녀는 차혜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보며 곧장 칭찬을 시작했다.“사모님, 정말 안목이 좋으세요. 저 가방은 이번 시즌 신상인데 저도 얼마 전에 소개 영상 봤거든요.”서유라는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 가방에 관심이 있다는 듯 말하며 호감을 얻어보려 했다.하지만 차혜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 씨, 이 가방은 설아 씨가 추천해준 거잖아요. 어때요, 괜찮죠?”“네, 사모님께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남설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렇죠, 나도 마음에 들어요.”차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이걸로 하죠.”그녀는 점원에게 말했다. “이 가방 포장해주세요.”“네, 사모님.”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서유라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를 무시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사람들이 많은 매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욕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끓어올랐다.서유라는 남설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지금이라도 당장 남설아를 물어뜯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배서준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남설아를 편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자신들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서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혜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유라 씨, 아직 몸도 다 회복 안 됐을 텐데 무리하지 마세요.
식탁 위에서 남설아는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식사 예절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서둘러 먹는 모습이었다.마치 무언가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있는 듯했다.강연찬은 그녀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설아야, 좀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그는 말하며 조심스럽게 물 한 잔을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오빠, 괜찮아.”남설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서강 그룹 사모님이랑 쇼핑 약속이 있어서 빨리 먹고 가야 해.”“쇼핑?”강연찬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눈치였다.“너랑 사모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회사 일 때문이지.”남설아는 밥을 삼킨 뒤 설명했다.“서강 그룹이 우리 쪽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 이런 기회는 꼭 붙잡아야 하잖아.”“그렇구나.”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덧붙였다.“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안전도 챙기고.”“응, 알겠어.”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음식을 다 삼킨 후 그녀는 먼저 제안했다.“쇼핑 끝나면 오빠가 데리러 와줄래?”“응, 당연하지.”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강연찬은 기분이 좋아졌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빠는 천천히 먹어. 과일 좀 준비해올게.”남설아는 차혜미와 시내 중심에 있는 대형 쇼핑몰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쇼핑몰 입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차혜미가 차에서 내렸다.“사모님, 오셨어요.”남설아는 서둘러 다가가며 밝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설아 씨, 오래 기다리셨죠?”차혜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남설아가 대답했다.“그럼 들어가 볼까요?”“네.”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차혜미는 비록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전혀 거들먹거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남설아는 기쁨에 겨워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 좋은 소식을 곧바로 강연찬에게 알렸다.“오빠, 서강 그룹이 우리랑 협력하기로 했어!”남설아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해냈어!”“정말이야?”강연찬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잘 됐다. 난 처음부터 네가 잘 해낼 거라 믿었어.”“이건 다 오빠 덕분이야.”남설아는 진심으로 말했다.“오빠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거야.”“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둘이 함께 이뤄낸 성과잖아.”“응!”남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서강 그룹이라는 큰 파트너를 얻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축하해야겠어.”“좋아.”강연찬이 말했다.“어떻게 축하하고 싶어?”“오빠가 정해줘.”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난 오빠를 믿어.”“그럼 내가 준비할게.”강연찬이 말했다.“분명 마음에 들 거야.”“응, 기다릴게.”남설아가 환하게 웃었다.그날 저녁, 강연찬은 직접 요리를 해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또한, ‘협력 성사 축하’라는 문구가 적힌 케이크도 샀다.“와 너무 푸짐하다.”남설아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오빠, 진짜 대단해.”“맛있게만 먹어주면 돼.”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얼른 먹어봐.”“응.”남설아는 젓가락을 들고 한입 먹어보았다.“맛있어. 오빠, 요리 실력 엄청나게 늘었네.”“맛있다니 다행이다.”강연찬이 말했다.“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는 매일 맛있는 거 먹겠네.”두 사람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는 무척 따뜻하고 편안했다.“이번 일도 오빠가 곁에서 도와준 덕분이야.”남설아는 기쁜 얼굴로 잔을 들며 말했다.“오빠가 함께해줘서 나도 버틸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오빠.”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오빠가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설아야, 넌 원래부터 훌륭한 사람이야. 난 단지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이야
서유라는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렀고 그 며칠 동안 배서준은 거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다.그 모습에 서유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이 계략은 언제 써도 효과 만점이다.하지만 그녀도 단순히 아픈 척만 해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배서준이 완전히 자기에게 빠지도록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이날도 배서준은 평소처럼 병상 옆에 앉아 사과를 정성스레 깎고 있었다.서유라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나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 회사 일은 괜찮아?”“괜찮아, 신경 쓰지 마.”배서준은 깎은 사과를 서유라에게 건네며 말했다.“회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몸이나 잘 추슬러.”“하지만...”서유라는 말을 맺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왜? 무슨 일 있어?”배서준은 다정하게 물었다.“그냥 내가 이렇게 아프기만 해서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서유라는 눈을 내리깔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널 짐처럼 느낄 리가 있겠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회사 상황이 안 좋다는 말도 들리고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그런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회사의 일은 나 혼자 감당 못 해서 그런 거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날 위로하려는 거라면 그런 말 안 해도 돼.”서유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알아.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유라야, 그건 진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회사 일은 내가 잘 정리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응.”서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했다.역시나 배서준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가장 약했다.불쌍한 척, 약한 척,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뭐든 들어줄 것이다.“난 처리할 일
“설아는 잘못한 게 없어요. 배 대표님이 뭔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죠?”강연찬이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나랑 남설아 사이의 일이에요. 강 대표님이 끼어들 일은 아닙니다.”배서준은 냉랭하게 응수했다.“지금 설아는 내 파트너이자 내 친구입니다.”강연찬의 말투는 확고했다.“배 대표님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설아를 몰아붙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몰아붙인다고요?”배서준은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남설아를 몰아붙였다는 겁니까?”“아닌가요?”강연찬이 되물었다.“됐어, 오빠. 그만해.”남설아가 나섰다.“나는 괜찮아. 이런 사람들과는 굳이 말 섞을 필요 없어.”남설아의 말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그래도 나 지켜줘서 고마워, 오빠.”“우리가 그런 말 할 사이야?”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만 괜찮으면 됐어.”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배서준이 아직 남설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 점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배서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그런 그가 남설아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남설아가 아직도 배서준을 좋아한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는 분명 어떻게든 다시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그러면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연회가 끝난 후, 배서준과 서유라는 차로 돌아왔다.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서준아, 나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지?”서유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계속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나 너한테는 짐 같은 존재지?”“바보야, 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이 다정하게 달랬다.“넌 짐이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이야.”“하지만 난 자꾸 널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잖아.”서유라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나 진짜 무능한 사람 같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울지 마, 유라야. 울지 마.”배서준은 그녀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
배서준은 고개를 홱 돌려 남설아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뭐 해? 빨리 의사부터 부르러 가야 할 거 아냐!”남설아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서유라의 연기는 참으로 어설펐다.이렇게 진부한 수법으로 배서준을 속이려 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굳이 그녀를 들춰내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배서준은 이미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믿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알겠어요, 의사 부를게요.”남설아는 담담히 대답하고 돌아섰다.그녀는 한쪽 구석으로 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뒤,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서유라, 이번에는 네가 망가질 차례야. 기다려 봐.’연회장 안은 서유라의 모습으로 인해 술렁이기 시작했다.여러 사람이 몰려와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며 물었다.“유라 씨, 괜찮아요?”“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배 대표님, 유라 씨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겠어요.”사람들이 각자 떠들어대며 현장은 점점 어수선해졌다.배서준은 서유라를 품에 안고 초조함에 휩싸였다.그는 서유라가 왜 갑자기 아픈 건지 몰랐지만 속으로는 분명 남설아가 무슨 말을 해서 그녀를 자극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하자 남설아에 대한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비켜주세요. 다들 좀 비켜줘요.”배서준은 크게 외쳤고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유라가 쉬어야 하니까 제발 좀 그만들 하세요.”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길을 비켜주었다.배서준은 서유라를 안은 채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그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 있었고 운전대를 쥔 손에는 핏줄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조수석에 기댄 서유라는 슬며시 배서준의 표정을 살폈다.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는 의기양양했다.예상대로였다. 자신이 아픈 척
서유라는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기가 죽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배서준의 이미지도 사람들 눈에 한순간에 추락했고 그는 무척이나 난처하고 부끄러웠다.그는 점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때 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연회가 끝난 뒤 배서준과 서유라는 함께 차에 올랐다.“서준아, 미안해.”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내가 괜히 설아 씨한테 차를 우리라고 제안했어. 설아 씨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너 잘못 아니야.”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남설아가 괜히 잘난 척을 한 거지.”그는 서유라가 마음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 모든 잘못을 남설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그래도 난 아직도 미안해.”서유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내가 너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잖아.”“바보야,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서준의 품에 안겼다.하지만 배서준의 마음은 딴 데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과거의 남설아를 떠올리고 있었다.한때 그녀는 단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매일 자신과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녀가 도대체 언제 다도를 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다도 실력이 이 정도라니, 서 회장 부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지금 저 여자가 내가 알던 남설아가 맞는 건가?’그는 마음속 깊이 혼란스러웠다.남설아는 분명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이해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서유라는 배서준의 시선이 자꾸만 허공으로 향하는 걸 느끼고는 그가 또다시 남설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그녀의 마음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그녀는 반드시 이 둘의 접촉을 막아야만 했다.‘남설아, 가만 안 둬. 네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서유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그녀의
“서 회장님, 사모님, 과찬이세요.”남설아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냥 가볍게 내린 것뿐이에요.”“남 대표 너무 겸손하시네.”서기찬이 말했다.“이건 아무렇게나 내려서 나올 맛이 아니야. 확실히 기본기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그러게요, 설아 씨.”차혜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경이에요.”“사모님, 또 농담하시네요.”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이런 사소한 재주가 어찌 사모님의 눈에 찰 수 있겠어요?”“설아 씨가 너무 겸손하신 거예요.”차혜미는 찻잔을 바라보며 더욱 남설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차를 이렇게 잘 내리시는 걸 보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남설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라는 마음속에 질투심이 더욱 불타올랐다.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다도에 능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신이 의도한 모욕은커녕 오히려 남설아는 그 자리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설아 씨의 다도 실력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듣기로 다도도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하던데 설아 씨는 어느 쪽이야?”그녀는 남설아의 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체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암시하고자 했다.“특정 유파를 따로 배우진 않았어.”남설아는 침착하게 말했다.“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내 느낌에 따라 우려내는 것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시 비웃듯 말했다.“그럼 설아 씨만의 파가 생긴 거네? 대단해.”그녀는 남설아만의 파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남설아의 다도가 비전문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유라 씨, 또 농담하네.”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나는 그냥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감히 한 유파라니.”“남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차혜미가 곧장 나섰다. 그녀는 서유라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고
“고마워.”남설아가 말했다.“설아 씨, 예전에 서준이 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늘 꾸미고 다녔어?”서유라가 불쑥 물었다. 말투에는 살짝 떠보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남설아가 한때 배서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남설아의 과거를 상기하려 했다.남설아는 서유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농담이 지나치네. 그때의 나는 그저 서준 씨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소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나는 설아 씨가 차를 따라주고 시중드는 데 능한 줄 알았어. 내조를 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잖아?”그녀는 차를 따라주고 시중든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며 남설아를 모욕하려 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 내조를 하는 데는 정말 정성이 필요해.”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사업을 하는 데 더 능한 편이야.”“그래?”서유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오늘 설아 씨가 잘해야겠네. 여기 모인 분들 다 업계 내로라하는 분들이니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라 씨.”남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빈정거림이 담긴 말투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유라 씨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지.”서유라는 속으로 비웃으며 남설아가 뭘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했다.“설아 씨, 차 따르는 데 능하다니까 오늘 여기서 차 한 번 내려보지?”서유라가 제안했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묻어 있었다.“여기 좋은 차도 있고 멋진 다기 세트도 있어. 설아 씨의 손재주로는 딱 어울릴 것 같네.”그녀는 손재주라는 말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하며 남설아를 하찮은 시중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의도를 바로 눈치챘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도전을 받아들였다.“좋아, 유라 씨가 이렇게 운치 있는 제안을 하니 한 번 해볼게.”남설아는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다만 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