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쾅!
현관문이 크게 흔들렸다. 세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손에 들고 있던 약초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것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무거운 군화가 눈을 밟는 소리. 갑옷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말들이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 그리고 낮고 차가운 군사의 목소리. “문을 열어라.” 세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가슴 안쪽에서 심장이 지나치게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혹시 문밖의 군사들에게 들릴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세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 안쪽. 어둠 속에 진안이 서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창밖을 바라보던 눈빛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자신을 찾아온 군사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세린은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불안했다. ‘진안은…… 괜찮은 걸까?’ 괜찮을 리 없었다. 적군이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마다 들어가 사람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안은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통행증도 없었다. 무엇보다 세린은 아직 진안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왜 이곳에 쓰러져 있었는지. 왜 혼자였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다친 몸으로 눈밭에 있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몰라도 걱정이 됐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 걱정되는 것 같았다. “진안.” 세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진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침착하시오.”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술이 떨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저…… 침착하려고 하는데.” 세린이 작게 숨을 삼켰다. “잘 안 돼요.” 진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린은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괜찮소.” 역시 그 대답이었다. 세린은 순간 답답해졌다. “또 괜찮다고 하네요.” 진안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무엇이 문제요.” “당신이요.” 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게 문제예요.” 진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세린은 말을 이어갔다. “지금 적군이 바로 밖에 있는데…….”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진안이 잡혀가면 어떡해요?” 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세린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걱정할 필요 없소.” “저는 걱정돼요.” 세린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진안이 잡혀가는 건 싫어요.” 말하고 나서 세린은 스스로 놀랐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도와주고 싶었다. 눈밭에 쓰러진 사람을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진안이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가 다시 혼자 눈밭에 버려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세린은 그것이 단순한 동정인지, 책임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진안이 다시 상처 입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세린의 생각이 끊겼다. 차가운 바람이 집 안으로 밀려들었다. 횃불의 붉은빛이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다. “통행증.” 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습니다.” 삼촌이 통행증을 건넸다. 군사는 한동안 그것을 살폈다. 세린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였다. 제발. 그냥 확인하고 지나가기를. 그런데 군사가 물었다. “이 집에 몇 명이 살지?” “저와 아내, 그리고 조카 하나입니다.” “셋?” “예.” “다른 사람은?” 삼촌이 잠시 멈췄다. 그 짧은 침묵이 세린에게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없습니다.” 군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철컥. 군화가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세린은 손을 꼭 맞잡았다. 군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진안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괜히 진안을 바라봤다가 군사의 시선까지 그쪽으로 향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런데도 자꾸만 진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괜찮을까?’ ‘혹시 들키면…….’ 그 다음 생각은 차마 이어갈 수 없었다. 군사에게 발견되는 순간 진안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세린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군사가 현관 주변을 살폈다. 벽에 걸린 옷을 하나씩 확인했다. 장롱을 열었다. 서랍을 열었다. 세린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다 군사의 발걸음이 안쪽으로 향했다. 진안이 있는 방이었다. 세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 돼.’ 머릿속에서 그 말만 떠올랐다. ‘제발 그쪽으로 가지 마.’ 하지만 군사는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횃불의 빛이 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세린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진안은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세린은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혹시 겁이 나도 참는 것이라면? 혹시 자신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세린은 처음 진안을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눈 위에 쓰러져 있던 모습. 차갑게 식어 있던 손. 자신이 그를 흔들었을 때 겨우 움직이던 눈동자. 그때 세린은 정말 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자신이 진안을 잃을까 봐 무서웠다. 군사가 침상으로 다가갔다. 이불을 들춰봤다. 침상 아래까지 살폈다. 세린은 손톱이 손바닥에 닿을 정도로 손을 움켜쥐었다. “없습니다.” 다른 군사가 말했다. 하지만 군사는 나가지 않았다. 책상으로 향했다. 서랍을 열었다. 덜컥. 약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약을 쓰는 사람이 있나?” 세린은 순간 몸을 굳혔다. “제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 번 숨을 삼킨 뒤 다시 말했다. “제가 써요.” 군사가 그녀를 바라봤다. “어디가 아프지?” 세린은 잠시 망설였다.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요.” 군사는 의심스러운 듯 세린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세린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혹시 들킨 걸까. 혹시 자신이 이상하게 행동한 걸까. 그녀는 애써 표정을 숨겼다. 군사가 약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 시선이 바닥에 놓인 옷가지에 닿았다. 세린의 심장이 철렁했다. 진안의 옷이었다. 군사가 천천히 다가갔다. 세린은 순간 앞으로 나갈 뻔했다. 하지만 멈췄다. 지금 자신이 움직이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군사가 옷을 들어 올렸다. 뒤집었다. 안쪽을 살폈다. 세린은 속으로 계속 빌었다. ‘제발.’ ‘그냥 내려놔.’ ‘제발 진안을 찾지 마.’ 군사는 한동안 옷을 바라보다가 내려놓았다. “이건 누구 옷이지?” 세린의 목이 잠겼다. 그때 이모가 말했다. “조카가 입으려고 했던 옷입니다.” 군사가 세린을 바라봤다. 세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히 군사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창문 쪽으로 향했다. 세린의 심장이 다시 내려앉았다. 진안이 있는 방향이었다. 군사의 손이 창문에 닿았다. 세린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창문은…….” 군사가 돌아봤다. “왜?” 세린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추워서요.” 겨우 한마디가 나왔다. “열면 집 안이 너무 추워져요.” 군사는 세린을 한참 바라봤다. 세린은 그 시선을 견뎠다. 손끝은 떨리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계속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제발 믿어줘.’ ‘제발 그냥 돌아가.’ ‘진안을 찾지 마.’ 마침내 군사가 손을 거뒀다. “됐어.” 세린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군사는 방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안쪽을 돌아봤다. 세린은 그 순간 진안과 눈이 마주쳤다. 진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세린의 가슴이 이상하게 먹먹해졌다. 아마 진안은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지켜줄게요.’ 군사가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다른 군사들의 목소리가 곧이어 들려왔다. “다음 집 확인해!” 발소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세린은 안심할 수 없었다. 아직 마을 전체를 수색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세린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진안을 바라봤다. “……진안.” “왜 그러오.” “정말 괜찮아요?” “괜찮소.” 세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말.” 그녀는 잠시 진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안 괜찮아요.” 진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서웠어요.” 세린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아직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당신이 들킬까 봐…….” 말이 잠시 멈췄다. 세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진안이 잡혀가는 걸 상상하니까…… 정말 무서웠어요.” 그녀는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걱정하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알고 있었다. 진안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다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잠시 망설인 뒤 말했다. “오늘 밤은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마요.” 진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알겠소.” 그 한마디에 세린의 마음이 아주 조금 놓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군사들의 발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 수색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린은 알고 있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까지는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조용히 진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만큼은. 진안을 혼자 두지 않겠다고.청하를 떠난 세린은 두 마리의 말과 함께 익숙한 길을 따라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한 마리는 세린이 직접 올라탄 말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곁에서 나란히 걸으며 고삐를 잡아 이끌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청하의 마구간에서 치료를 받던 말은 이제 제법 편안한 걸음을 되찾았고, 세린이 청하로 올 때 타고 왔던 말 역시 충분히 쉬어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따라왔다.세린은 두 말의 상태를 번갈아 살폈다.“조금만 더 가면 쉬게 해줄게.”말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세린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작게 웃었다.청하에서 보낸 며칠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처음에는 다친 말의 상태만 확인하고 곧장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둘러본 청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골목마다 작은 가게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가득했다.낡은 기와지붕 위에는 겨울 햇빛이 내려앉아 있었고, 시장에서는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작은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차가운 빛을 머금은 채 조용히 흘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처마 끝에 매달린 작은 풍경이 맑은 소리를 냈다.세린은 그 모습을 떠올리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돌아가면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청하가 얼마나 넓었는지.시장에 어떤 가게가 있었는지.마구간에서 오랜만에 만난 말이 자신을 알아본 듯 고개를 내밀었던 일도.그리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았던 작은 다리와 겨울빛으로 물든 골목의 모습도.세린은 무심코 앞을 바라보았다.“진안도 그런 곳을 좋아하려나…….”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뒤 세린은 조금 멋쩍은 듯 입을 다물었다.왜 하필 진안이 먼저 떠올랐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그저 집에 돌아가면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세린은 고삐를 살짝 움직였다.말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타박. 타박.말발굽이 겨울의 마른 길을 밟을 때마다 낮고 규칙적인 소리가 울렸다.주변은 한낮보다 조용해져 있었다.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고, 나뭇가지에 남아 있던 희미한 눈가루가 바
청하의 아침은 느리게 밝아오고 있었다.겨울의 해는 늦게 떠올랐고, 아직 골목 곳곳에는 새벽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기와지붕 위에 내려앉은 서리는 희미한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고,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차가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맑은 소리를 흘려보냈다.세린은 숙소의 문을 나서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오늘은 돌아가는 날이었다.청하에 온 목적은 마구간에 맡겨 두었던 말을 데려오는 것이었다.처음 청하에 올 때 타고 왔던 말도 며칠 동안 마구간에서 쉬게 해 두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이곳에 맡겨 두었던 말은 다리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조금 더 오래 쉬게 했다.이제 두 말 모두 데려갈 때가 되었다.세린은 옷깃을 여미고 마구간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아침의 청하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어제는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수레가 지나가는 소리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하나둘 문을 여는 가게들 사이로 조용한 기척만이 흐르고 있었다. 한 상인이 가게 앞의 눈을 쓸어내고 있었고, 길모퉁이에서는 따뜻한 죽을 파는 노점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세린은 그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어제 하루 종일 걸었던 거리였다.어쩐지 벌써 익숙해진 것 같았다.하지만 오늘은 다시 떠나야 했다.마구간에 가까워질수록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히이잉.ㅈ세린은 그 소리에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마구간 문을 열자 따뜻한 건초 냄새와 함께 여러 마리 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어서 오시오.”마구간 주인이 세린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오늘 말을 데려가려는 게요?”“네. 이제 돌아가려고요.”“그럼 두 마리 모두 준비해 두겠소.세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청하까지 타고 왔던 말이었다.며칠 동안 제대로 쉬었기 때문인지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편안한 모습이었다. 세린이 다가가자 말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있었어?”세린이 목을 쓰다듬자 말이
청하의 오후는 햇빛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아침부터 차갑게 내려앉아 있던 공기는 여전히 겨울의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하늘 높이 떠오른 햇살이 지붕과 돌길을 비추면서 거리는 한결 따뜻해 보였다.세린은 천천히 시장을 벗어나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어제와 오늘 사이에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오갔고, 가게 앞에는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수레를 끌고 지나갔고, 누군가는 품에 장을 본 물건을 안은 채 집으로 향했다.그 평범한 모습이 세린에게는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한동안 주변에 신경 쓸 일이 많았던 탓인지, 이렇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조금은 낯설면서도 좋았다.세린은 골목 끝에 있는 작은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나무로 만든 작은 장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새 모양의 장식도 있었고, 꽃잎을 닮은 조각도 있었다. 솜씨 좋은 사람이 하나하나 깎아 만든 듯한 것들이었다.세린은 그중 작은 나무 토끼를 집어 들었다.“귀엽네.”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생각보다 정교했다.귀 끝에는 작은 무늬까지 새겨져 있었다.가게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마음에 드나?”“네. 잘 만드셨어요.”“직접 만든 거라네.”세린은 다시 토끼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다음에 하나 사야겠어요.”“다음에 오면 남아 있을지 모르겠구먼.”세린은 웃으며 가게를 나왔다.그렇게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많은 길에서 조금 물어나 있었다.건물 사이로 작은 물길이 보였다.청하를 가로지르는 물길이었다.겨울이라 물의 흐름은 여름보다 느려 보였지만, 햇빛을 받은 물결은 반짝이며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세린은 다리 위에 올라섰다.난간에 손을 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물 위에는 작은 나뭇잎 하나가 떠 있었다.바람이 불 때마다 천천히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다시 물살을 따라 흘러갔다. 세린은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참 조용하네.”혼잣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집에 있을 때는 조용함이 익
청하의 아침은 느리게 시작되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빠르게 활기를 띠었다.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아직 골목 사이에 머물고 있었지만, 해가 지붕 위로 올라오자 거리는 하나둘 사람들의 목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가게마다 닫혀 있던 나무문이 열리고, 상인들은 밖으로 물건을 꺼내 놓았다.따뜻한 국물이 담긴 그릇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고, 갓 구운 빵 냄새와 말린 약재의 향이 차가운 공기 사이로 섞여 흘러갔다.세린은 천천히 길을 걸었다.마구간에 맡겨둔 말은 잘 쉬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탓에 걱정했지만, 마구간 주인이 말이 안정되었다고 알려주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당장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그래서 세린은 오랜만에 청하의 거리를 조금 둘러보기로 했다.그녀는 시장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사람들이 오가는 사이를 지나며 이곳저곳을 살폈다.옷감을 파는 가게 앞에는 겨울에 입을 두꺼운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장신구를 파는 노점이 있었다. 햇빛을 받은 금속 장식들이 반짝일 때마다 세린의 시선도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이것도 꽤 예쁘네.”세린이 작은 머리 장식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하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약재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세린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말린 풀과 뿌리, 나무껍질이 종류별로 나뉘어 놓여 있었다.익숙한 약초도 있었고, 평소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세린은 하나씩 살펴보다가 필요한 약재 몇 가지를 골랐다.“이건 얼마예요?”“그건 세 냥이야.”“조금만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상인이 웃었다.“세린 아가씨는 여전하구먼.”“제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기억하세요?”“말을 잘 다루는 아가씨가 흔한 줄 아나?”세린도 작게 웃었다.“그럼 조금만 싸게 해주세요.”결국 상인은 조금 값을 내려주었다.세린은 약재를 받아 품에 넣고 다시 길을 나섰다.청하는 넓었다.같은
넓은 마을, 청하.세린은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잡은 채 천천히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길게 이어진 기와지붕이었다.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듯 기와에는 옅은 빛이 내려앉아 있었고, 처마 끝에는 작은 풍경이 매달려 있었다. 겨울바람이 스칠 때마다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랑.그 소리가 마을의 소란스러운 기척 사이로 조용히 흘러갔다.청하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큰길 하나를 중심으로 여러 골목이 갈라져 있었고, 골목마다 크고 작은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단을 파는 가게도 있었고, 약재를 내놓은 가게도 있었다. 나무로 만든 상자 안에는 말린 과일과 곡식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고, 겨울에 입는 두꺼운 옷과 털가죽도 가게 앞에 걸려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돌로 다져진 길을 지나갈 때마다 바퀴가 덜컹거렸고, 상인들은 손님을 부르며 목소리를 높였다.“이쪽으로 와 보시오! 먼 곳에서 가져온 비단이오!”“따뜻한 만두가 막 나왔습니다!”곳곳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따뜻한 음식 냄새도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낯선 곳이었다.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청하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가 가득했다.아이들이 어른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고, 나이 든 노인은 가게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상인은 수레에 쌓인 물건을 하나씩 내려놓았고, 어느 집 앞에서는 여인이 빨래를 걷으며 옆집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평범한 하루였다.그러나 세린에게는 그 평범한 모습 하나하나가 새롭게 느껴졌다. “여기는 여전히 북적거리네.”세린이 작게 중얼거렸다.그때 길가에서 장작을 옮기던 노인이 세린을 알아보았다. “어머, 세린 아니니?”세린이 고개를 돌렸다.“아, 안녕하세요.”노인은 반갑게 웃었다.“오랜만이구나.”“네. 잘 지내셨어요?”“그럼. 너는 잘 지냈고?”“저도 잘 지냈어요.”짧은 인사였다.노인
숲에는 아직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가볍게 흔들렸고, 바닥에 내려앉은 낙엽은 발끝에 닿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조금 전까지 팽팽하게 조여 있던 공기는 어느새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세린의 심장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손끝에 남은 긴장감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세린은 말 옆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 역시 거친 숨을 내쉬며 가만히 서 있었다.세린은 곧 말의 목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괜찮아……?” 말이 귀를 살짝 움직였다.세린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조금 전까지 자신을 태우고 숲을 달렸던 말이었다.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세린은 천천히 말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살폈다. 발굽 주변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고,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는지도 꼼꼼하게 살폈다.손끝이 갈기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말은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세린은 말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정말 잘해줬어.”말이 낮게 울었다.그 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세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조금 전까지 눈앞을 스쳐 지나가던 위험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울리던 소리.급하게 방향을 틀던 말.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졌던 긴장.그 모든 것이 아직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숲은 다시 조용했다.세린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해가 기울고 있었다.이곳에서 더 머무를 수는 없었다.세린은 고삐를 손에 쥐었다. “가자.”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세린은 안장에 올라탔다.말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가볍게 움직인 뒤, 조심스럽게 고삐를 잡았다.“천천히 가자.”말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또각. 또각.말발굽이 흙길을 밟는 소리가 숲에 잔잔하게 울렸다. 세린은 한동안 뒤를 돌아보았다.자신이 지나온 길이 나무 사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