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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이거 하나씩들 먹고 시작하자구."
은영은 집에서 직접 싸 온 샌드위치를 팀 동료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삶은 달걀을 마요네즈, 후추와 함께 으깨어 넣고 토마토와 아보카도 슬라이스도 넣은 든든한 샌드위치였다. 팀원 여덟 명에게 하나씩 돌리고 은영도 하나 들어 한 입 베어먹었다.
"어머, 배 주임님. 매번 안 이러셔도 되는데 황송해서 어쩌죠?"
"아이 등교시키고 남편 출근시키느라 바쁘실 텐데 어찌 아침마다 이러세요?"
"혼자 사는 저도 겨우 일어나 시간 맞춰 출근하는 게 큰 업적인데 주임님 정말 대단하세요."
"맞아 맞아. 진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역시 이 정도 부지런함이 겸비되어야 결혼이란 걸 하는 건가 봐."
"주임님 남편분 부럽네. 진짜 상향혼 하신 분이야. 인정 인정."
"상향혼? 상향혼이 뭐야?"
"자기 자신보다 훨씬 나은 상대랑 결혼해서 팔자가 펴는 게 상향혼이야. 그 반대는 하향혼이고. 완전 나은 상대랑 결혼해서 완전히 팔자를 고치게 되면 초상향혼이지."
"어머, 무슨 그런 말이 있어? 근데 말은 된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말 잘 지어냈네."
"요새 인플루언서들 중에는 상향혼 강좌하는 사람도 있다더라. 돈 내고 강좌 듣는 사람도 많다더라. 돈 많은 남자 만나려면 어디에 가야 하는지부터, 옷차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화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가의 선물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은지, 연애에서 그치지 않고 결혼까지 가려면 어떤 포인트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 아주 세세하게 가르쳐 준다던데."
"세상에! 진짜야? 완전 요지경 세상이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상향혼, 하향혼 기준은 뭐야?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면 상향혼 한 거야? 결혼은 둘이 사랑해서 하는 거고 둘이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한 사람끼리 하는 거야."
"아이고, 지현 씨 또 교과서에 나오는 말하네. 현실은 그게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지현 씨같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더라. 호호."
"알고 보면 지현 씨 장래 희망이 상향혼 정복자 아니야? 하하. 상향혼 하고서 직장 그만두고 상향혼 하는 방법으로 인플루언서 되는 건 아닌가 몰라."
"메디프 해라, 메디프. 상향혼 종결자가 메디프 아니냐?"
"메디프는 또 뭐야?"
"뭐일 것 같아?"
"글쎄? 메.. 메... 메디컬? 아~ 의사 와이프?"
"딩동댕! 역시 센스가 있다니까?"
"에휴... 나도 메디프나 돼서 직장 딱 사표 쓰고 스파나 다니면서 살고 싶다."
"나도 나도."
"하하, 나도."
"이 놈의 회사는 언제 시원하게 때려 치우나.. 에휴."
"주희 씨, 아이 참 왜 그래 아침부터? 오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파이팅하자구."
은영이 주희에게 핀잔을 줬다.
"아, 네 주임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제 팔자에 뭐 직장을 어찌 그만두겠어요? 그저 감사히 생각하며 소처럼 일해야지요."
주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팀원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꺄르르 대며 전날 저녁에 본 드라마 이야기, 어제 한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존잘남 봤다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어느덧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승희 씨는 오늘도 늦네."
작은 입술에 벽돌색 립스틱을 발라 펭귄같이 보이는 진경이 앞머리에 말려 있던 구루프를 풀며 한 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승희 씨는 지각이 잦다. 지각에 민감한 윤 과장이 금방이라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려와 아침 순찰을 돌까 은영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계약직으로 시작해 천신만고 끝에 평사원이 된 후 몇 년을 버티다 겨우 주임을 단 지 10개월차인 은영은 잘하고 싶었다. 팀워크를 좋게 하기 위해 안 떠지는 눈을 힘겹고 뜨고 새벽배송 받은 신선한 재료로 매일 아침 김밥이며 샌드위치를 쌌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팀원들이 각자 조금씩 더 열심히 해주면 팀 전체 실적도 올라갈 것이고 그러면 주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과장으로도 진급할 수 있겠지 생각했다.
다정한 남편과 결혼했지만 난임을 겪으면서 경력 단절이 되었고 무수하고도 다양한 시도 끝에 끝끝내 아들 하나를 품에 안아 세상 부러울 게 없어졌었다. 아이가 너무나 소중해 기관에 최대한 늦게 보내고 싶었고 끼고 있고 싶었다. 가정보육을 하며 아이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하나하나 쌓았었지만 그와 함께 이대로 전업주부로 일평생 나앉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으로 밤을 지샌 나날들도 많았다.
사십 대에 진입하면서 남편도 회사에서 이리저리 압박을 받는 눈치였다. 윗선은 안 나가고 자리 보전하고 있는데 밑으로는 창창하고 빠릿빠릿한 해외 대학 출신들이 즐비하게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도 자라며 태권도다 영어다 줄넘기다 수영이다 미술이다 피아노다 시키고 싶은 게 생겨났다. 남들 보낸다는 브랜드 영어 학원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은영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혼을 결심할 즈음 친정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결혼 자금으로 차곡차곡 모아놨던 돈을 친정집에 많이 내놓고 결혼을 했던 것이다. 남편은 혼수나 결혼할 때 가져온 돈의 규모에 대해 여태 살면서 단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지만 은영은 스스로 움츠러들었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도 상처가 되었다.
"너네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런 말을 들을 때조차도 은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돈 없는 나와 결혼해 줬으니까 좋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전업맘인 나를 그래도 끼고 살고 있으니 좋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이렇게 혼자 곡해해서 듣고 속상해 했던 것이다.
개중에는 좀 더 직설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너는 결혼할 때 얼마 들었어?"
"이 집 사는 데 얼마 보탰어?"
상향혼이니 메디프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은영은 자신도 좀더 저돌적이거나 좀더 비위가 강해서 그저 돈만 보고 결혼했으면 더 행복했을까를 잠깐 생각했다. 그럼 저렇게 대놓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쏘아 보며 비웃듯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어머, 내 돈을 왜 보태니? 남녀평등이니 뭐니 하면서 정의로운 척, 쿨한 척 좀 그만 할래? 그래 봤자 손가락 까딱 안 하고 일하는 사람 쓰며 평일 낮에 백화점이나 다니는 여자들 팔자 부러워하는 거 다 알아."
물론, 누구에게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생은 요정도 선이라 생각했다. 그저 평범한 삶. 큰 돈은 못 벌어도 아이 학원비는 꼬박꼬박 버는 삶. 그래도 다시 취업을 해서 워킹맘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꿈에 불태우지도, 미칠 듯한 정열에 불태우지도, 뻔뻔한 세속에 불태우지도, 그렇다고 꺼지지 않는 에로스에 불태우지도 못한 삶이지만.
은영은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기라도 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사남매 중의 장녀로 빠듯하게 자라서 그랬던 것일까.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동생들 탓에, 특히 딸 셋 끝에 태어난 막내 남동생 탓에 양보해 와서 그랬던 것일까. 고등학생 시절, 유난히 동경했던 해외 유학의 꿈이 좌절되어서 그랬던 것일까. 부모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훗날 스스로 벌어서 결국엔 일 년의 해외 유학을 해냈지만 자라면서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집에서 안 받쳐주네.' 라고 생각해 왔던 건 결국엔 결핍으로 자리 잡았다. 마음껏 펼치지 못한 자신의 가능성이 뭉개지고 줄곧 스스로를 증명하면서 살아야 했던 삶의 방식은 결혼을 하고 둥지를 새로이 만들고 새 생명을 잉태해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부자도 아니고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업적도 없으니 좋은 사람이기라도 되고 싶었다.
사람은 어쩌면 어린 시절, 십대 시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같은 상황이라도 결핍으로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은영은 결핍이 큰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을지라도.
가끔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바라볼 때면
'그래도 나 정도면 아직은 괜찮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더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젊음이 바스러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결혼과 함께 파생된 그 모든 낯선 인간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고 자녀가 자라면서 처음으로 배우는 것들, 겪는 것들, 그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켜보고 다독이고 격려하고 속상함과 걱정과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로 명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의리 같기도 했고, 동지애 같기도 했고, 연민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육체가 반응하는 말초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직 남편과의 사이에 남아 있는가?
은영이 온갖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저 쪽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의 꽃이라 불리는 승희였다.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자 거리는 색다른 생동감으로 가득 찼다. 늦은 오후의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새로이 씻고 꾸미고 나온 사람들이 일제히 재잘대며 어디론가 바쁘게 걷는 모습이었다. 신 과장은 성큼성큼 걸어 어느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자 안이 컴컴한 바가 있었다. '아일랜드'라는 간판을 단 바였다. 이제 막 영업을 시작했는지 안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앳된 남자가 은영과 신 과장을 맞았다. 은영과 신 과장은 창 밖이 보이는 창가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신 과장은 올드 패션드를 주문했다. 은영이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자 신 과장이 말했다."같은 걸로 드실래요?"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웨이터는 말없이 공손하게 그들의 주문을 받고 물러났다."그 날 제가 추천해 드린 향수 사셨어요?"은영은 불현듯 신 과장을 백화점에서 마주쳤던 날을 떠올리며 물었다."아, 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추천 감사했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더군요."은영은 신 과장이 '와이프'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말하는 것이 왠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저도 같은 향수를 샀어요. 오늘도 뿌렸는데... 땀 냄새에 섞여서 이젠 향이 안 나겠지만.""아... 어쩐지 어디서 익숙한 향이 난다 했어요."신 과장은 웃으면서 얘기했다.올드 패션드는 쌉싸름한 위스키에 오렌지 제스트 향이 상큼하게 나는 칵테일이었다. 맛이 깔끔하면서 묵직했고 낮에 마신 소주나 맥주, 막걸리보다는 입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이 술 맛있네요."은영이 말했다. "마음에 드세요? 다행이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입니다."신 과장은 웨이터에게 눈짓으로 같은 걸 두 잔 더 주문했다."아내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사무실 책상 위에 두신 사진을 보니 미인이시던데요."신 과장은 잠시 침묵했다."아? 제가 너무 개인적인 걸 물었나요? 그렇다면 실례했습니다."은영이 신 과장의 표정을 살피고 재빨리 사과했다."아, 아니에요. 미인이죠. 어떤 사람이냐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 안에 앉아 있는 그 상황에서 승희와 신 과장 사이에 흐르는 긴장된 분위기를 감지한 은영은 혼자 속이 탔다.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됐다. 다행히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이 자리가 파했다. 모두 거나하게 취해 그 식당을 나왔다. 그 식당은 산자락 아래에 있었는데 미니 버스 서비스가 있었다. 사장님이 손님들을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태워 줬다. 등산에 거의 모든 직원이 참여했기 때문에 미니 버스에 모든 인원이 다같이 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센터장을 위시한 윗선들이 먼저 내려갔고, 대리나 평사원급들은 식당 마당 평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장님이 돌아오면 두 번째 라운드에 타서 지하철역까지 가기로 했다. 택시를 부르기도 애매한 위치였고 지하철역까지 내려 가기에는 모두가 술에도 취하고 피곤한 상태였다.신 과장은 첫 번째 라운드 미니 버스에 탈 수도 있었는데 한사코 양보해서 남았다. 승희랑 신 과장은 문자로 싸우고 있는지 승희는 식당 마당의 오른편 끝에, 신 과장은 식당 마당의 왼편 끝에 서서 폭풍 문자짓을 하고 있는 것이 은영의 눈에 보였다.식당 사장이 와서 나머지 인원들을 미니 버스에 태웠다. 신 과장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고 승희는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았다. 은영은 그 날이 어떻게 끝날까를 상상하며 그 둘을 남몰래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미니 버스 안은 왁자했다. 초저녁밖에 안 된 시각이었기 때문에 다른 약속이 없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2차 갈 계획들을 세우고 있었다."주임님, 저희랑 한 잔 더 하고 가시죠? 아직 시간이 이른데.""그래요 주임님. 남편분한테는 아직 회식 중이라 빠질 수가 없다고 하면 되지 않아요?""모처럼 토요일에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맥주나 한 잔 더 하고 가요.""말은 고마운데 난 그냥 일찍 가서 쉴까 봐. 등산하며 땀을 많이 흘렸는지 몸도 너무 찝찝하고 해서.""에이, 같이 가시지! 저희도 다 땀 많이 흘렸어요.""나한테도 같이 가자 해 줘서 고마워. 근데 오늘은 자기들끼리
"주말인데 같이 못 보내서 미안해.""아니야, 회사 행사인데 빠지면 안 되지. 좋은 시간 보내다 와. 승재는 걱정 말고.""에휴... 좋은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등산이래.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토요일에 등산이 웬 말이야?""건강에도 좋고 단합도 하고 좋지 뭐.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녀 와. 올라가다 힘들면 다 올라가지 않아도 되잖아.""자기는 어쩜 그렇게 도덕 선생님같이 말해? 우리 센터장님이 찾고 있는 인재네. 하하""하하, 그런가? 기왕 가는 거 좋은 마음으로 가면 좋지 뭐.""오늘 승재랑 뭐 할 거야?""어? 그건 비밀인데? 오늘은 보이즈 데이라구! 엄마한텐 비밀이야. 그치, 승재야?""네, 맞아요. 비밀이에요.""그래? 엄마 서운한데?""에이, 서운해 하시지 마세요. 사나이끼리는 비밀을 지켜야 된다고 아빠가 그랬어요.""그래? 호호호.""승재는 걱정 말고 회식하면 회식도 갔다가 와.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밥 굶고 있지는 않을 테니.""알았어. 그럼 둘이 재미있는 하루 보내. 저녁에 봐."은영은 등산화를 신고 집에서 나왔다.토요일이었고,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직원 단합대회 날이었다. 도시의 북쪽 끝에 자리한 산을 함께 오를 계획이었다. 회사에서 집합하여 대절 버스를 같이 타고 산 아래까지 같이 가서 등산한 뒤 내려와서 회식을 하고 파하는 일정이었다. 어떤 직원들은 주말에 회사 체육대회, 등산 등을 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은영의 회사 분위기는 보수적인 편이라 그런지 그런 것들도 업무의 연장선상이라는 인식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거의 모두가 참여했다. 기혼 직원들은 오히려 기다리기도 했다. 가족들을 돌보느라 주말에는 더 바쁘기 마련인데, 그런 가운데 회사 행사는 좋은 핑곗거리였던 것이다. 직원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그런 날들엔 오후 일찍부터 술자리가 벌어졌다."주임님, 오셨어요? 옷이 너무 화사하네요! 편한 복장 하시니까 대학생 같아요."진경이 싹싹하게 한 마디 했다."어머, 고마워 진경 씨. 립서비스인 줄은 알지만
은영은 집에 가는 길에 속옷과 향수와 와인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승재의 학원비가 생각나서 잠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언제까지고 아이만 생각하며 자신의 행복을 담보 잡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아이가 소중한 거는 소중한 거고, 나는 늙어간다.하루하루.내 행복을 찾는다고 해서 아이를 내팽개치는 건 아니다.결연한 마음을 먹고 빨간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백화점에 가는데 너무 추레하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 1층 화장품 코너에서 혼자서만 겉돌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 직원들은 자기들도 서비스 업종 종사자의 저임금을 받으면서 자기들과 비슷한 임금을 받을 법한 소박한 외양의 고객들을 무시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열과 성을 다해 세일즈를 해도 공짜 기프트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대다수일 확률이 높으니까. 외모와 차림새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득 없는 일에 세일즈와 고객 서비스의 에너지를 다 쏟고 싶지 않다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이다. 많이 당했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지 않아도 진이 빠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가방이나 구두, 시계나 코트 같은 걸 슬쩍슬쩍 보고 누구한테 아양을 떨고 누구한테는 그저 미소만 띄울지 판단한다. 어찌 보면 직업적 노련함이다. 그 판단이 항상 딱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은영은 향수 코너에서 이것저것 시향해 봤다. 아무래도 달콤한 향이 좋을 것 같았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시향지를 흔들며 향을 느껴보고 있는데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뜻밖에도 신 과장이 있었다. "과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어, 배 주임님. 배 주임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아, 그냥 향수 구경하고 있었어요. 과장님 향수 사시는 거예요?""네, 제 건 아니고 아내 하나 사 줄까 해서요.""아, 네. 아내분이 좋아하시겠네요. 향수 사는 남자 새롭네요, 호호."은영은 신 과장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 1층의 환하디 환한 조명 아래 신 과장의 얼굴이 모공 하나하나까지 적나라하게 보
"어머, 주임님! 머리 하셨네요? 너무 잘 어울려요.""주희 씨가 역시 눈썰미가 있네. 살짝만 다듬은 건데 알아보겠어?""알아보다 마다요. 완전 상큼한데요? 꽤 자르신 거 같은데요?""고마워.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네.""어려 보여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하하, 그런 건 없고 그냥 기분 전환차."은영은 어려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냥 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월요일의 사무실은 활기가 넘쳤다."다들 주말 잘 보냈어? 주말에 뭐 했어?"젊은 여자가 많은 사무실이라 화제는 자연스레 주말에 한 데이트 이야기, 클럽에 가서 부킹한 이야기, 소개팅한 이야기로 모아졌다. 마흔 초반이었을 뿐이지만 은영은 어느 정도 소외감을 느꼈다. 물론, 기혼 직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혼 직원들은 기혼 직원들끼리 모여 주말에 시댁에 호출되어 간 이야기, 시어머니가 냉장고 속 간섭한 이야기, 자녀들의 친구 부모들과의 트러블,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공동 복도에 내어 놓은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은영은 문득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젊은 미혼 직원들의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도 못 했고, 그렇다고 나이가 좀 있는 기혼 직원들간의 대화에도 썩 공감이 안 됐다. 아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이 든 기혼 직원들간의 대화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 험담이거나 체념이거나 울분이거나 박탈감이거나 후회로 수렴되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저 재미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진심이 아니면서도. 사실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한 사람과 결혼까지 가서 자녀를 낳고 사회에서 말하는 완벽하게 제도권 안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데에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가끔 사람들은 거짓으로 불행을 지어낸다. 이유는 다양하다. 그렇게 해야 집단 생활 내에서 미움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불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눈은 웃고 있다. 은영은 속 없는 사람처
"승재 이제 아빠랑 자러 갈까?"저녁 식사 후 아이와 한참 퍼즐을 같이 해 주던 은영의 남편 태형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이거 조금만 더 하고 싶어요.""우리 승재 눈에 잠이 그렁그렁한데?""아니에요! 잠 없어요. 눈에 잠 없단 말이에요."승재는 돌연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태형은 승재가 귀여워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내일 일어나서 축구 교실 가려면 이제 자러 가야 돼. 일찍 자야 우리 승재 아빠만큼 키 큰다. 일찍 자야 키 요정이 승재한테 오는 거야. 자, 우리 이거 정리할까?"태형은 '장난감을 정리하자'라는 문장을 마음대로 음을 넣어 노래를 부르며 나서서 치우기 시작했다. 태형의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노래에 승재는 웃음을 터트렸다. 승재도 이내 태형을 따라 고사리손으로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퍼즐 조각과 듀플로 더미들, 장난감 자동차들을 하나 하나 주워 각각 알맞은 상자에 넣기 시작했다. 은영은 둘의 말소리, 노랫소리를 건너 들으며 행복한 마음이 됐다.이윽고 태형은 승재를 들어 올려 품에 안고는 승재의 방으로 향했다. 승재 방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은은한 빛의 램프를 켜고 승재를 침대에 내려 눕혔다. 태형은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동화책을 펼쳐 승재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은영은 태형의 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다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화장실에 갔었기 때문에 다시 아래를 깨끗이 씻고 싶었던 것이다. 은영은 꼼꼼하게 세정제를 발라 따뜻한 물로 씻고 보송한 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았다. 몸에 바디로션을 바르고 향수도 뿌렸다. 야한 팬티를 입고 슬립 드레스 란제리를 입은 뒤 램프의 조도를 낮췄다.은영은 티브이를 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볼 만한 프로그램을 찾았다.태형의 잠자리 동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은영은 조바심이 났다.티브이의 볼륨을 줄여 승재 방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형은 사자도 되었다가 선생님도 되었다가 코알라도 되었다가 개구쟁이 소년이 되기도 하면서 열성적으로 동화 구연을 해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