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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잊기 전에

그 이름을 잊기 전에

By:  하얀재스민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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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 교수님이 우리에게 간단한 과제를 내주셨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사랑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상대방이 처음 보이는 반응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내 부모님은 7년 전, 델루카 가문을 노린 습격에 휘말려 돌아가셨다. 문자를 보낼 사람이 달리 없었던 나는 뉴욕 암흑가의 최연소 보스이자, 한때 법원이 나의 임시 후견인으로 지정했던 남자, 로만 델루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밤새도록 반복됐다. 그리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그의 답장이 왔다. [마라, 의존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마라. 우리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든, 절대로 그 선을 넘을 수 없어.] 다음 날, 그는 그동안 내게 주었던 모든 특권을 거둬들였다. 우리의 전용 연락망을 끊었고, 자신의 최측근인 루카에게 더는 나에 관한 것은 그 무엇도 보고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내가 로어 맨해튼에 있는 델루카 타워로 찾아갔을 때, 경비들이 회전문 앞에서 나를 막아 세웠다. “보스께서 직접 내린 지시입니다. 오늘 밤 라이벌 조직원들이 들어오는 건 허락할 수 있어도 당신은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로만은 파티나 복도에서 나와 마주칠 때마다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는 그렇게 6개월 동안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로부터 내 뇌 속에 공격적이고 악성도가 높은 신경교종이 자라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종양은 언어와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를 압박하고 있었고, 내게 남은 시간은 어쩌면 단 한 번의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뿐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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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장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봄이 될지도 모를 그때, 나는 로만이 내 짝으로 점찍어 둔 남자 엘리아스 하트를 계속 만나기로 했다.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야 내가 더 이상 그가 바로잡아야 할 '오점'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날 밤, 로만은 몇 주 만에 처음으로 웨스트체스터에 있는 델루카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검은색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서재 벽난로 앞에 서서,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고 있었다.

로만은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온기의 조각조각마저 아껴가며 보낸 지난 6개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그 버릇만큼은 지키고 있었다.

“엘리아스는 어때?”

로만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몇 번이나 만났지?”

“네 번이요.”

“청혼은 했고?”

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엘리아스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곁에 있어주는 친구일 뿐, 구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아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로만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해서, 마치 마침내 성사된 거래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거의 다 됐어요.”

로만의 손가락이 시가를 감싼 채 멈췄다.

나는 몇 달 만에 나눈 이 대화를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예전에 혼자 상상해보곤 했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유리 천장에 겨울 아네모네를 매달고 싶어요. 하얀 다이아몬드는 싫고. 꿀빛이 나는 타원형 보석이 좋겠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는 고급 승용차 행렬 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오래된 파란색 컨버터블 타고 허드슨강을 따라 북쪽으로 쭉 달리는 거죠.”

내가 하나씩 세부적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만.”

로만이 말했다.

“네가 네 스스로의 삶을 시작할 마음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는 마치 다음 말을 억지로 뱉어내기 위해 양손을 모두 비워야 한다는 듯이 시가를 케이스에 다시 집어넣었다.

“네 부모님은 널 내게 맡기셨어, 마라. 나는 네 보호자였고 그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곳엔 언제나 네가 머물 방이 있을 거야.”

나는 문 옆에 포개져 있는 두 개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내 옷과 책, 그리고 부모님이 내게 남겨주신 사진들은 이미 스위스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도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침실에는 오래된 물건 몇 가지만 남겨두었다.

“날 위해 방을 비워둘 필요 없어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다시는 뉴욕에 살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마’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 수술실의 불빛 아래 눕게 되든, 그렇지 않든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취리히의 신경종양 센터에서는 각성 상태에서 진행하는 개두술을 시행하고, 나를 개인 맞춤형 백신 임상시험 대상자로 검사해주기로 했다.

이틀 뒤, 나는 로만이 시에나 카루소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그날 아침에 뉴욕을 떠날 참이었다.

로만이 고개를 들었고, 그의 눈빛에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에나는 어떤 꽃을 좋아해요?”

“버건디색 라넌큘러스.”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슴이 조여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그 사람은 골동품이나 보석을 좋아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로만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선물도 보내지 말고, 귀찮게 하지도 마.”

그는 내가 결혼식을 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6개월 전의 나는, 열이 나는 내 곁에 밤새 앉아있어 줄 수 있으면서 왜 나를 잃는 것이 아플 거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못하냐며, 이 저택에서 그를 쫓아다니며 따져 물었었으니까.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내뱉었던 그 말들을 기억하는조차 버거웠다.

종양은 언어와 시간, 그리고 익숙한 길들을 하나씩 앗아가고 있었다.

어제는 커피 메이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부엌에 10분 동안 서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로만이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꽃, 드레스 사이즈, 항공편 번호, 그리고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말한 소원까지 모두 기억해 두곤 했다.

시에나는 그런 로만을 가졌다. 그녀는 내게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떠나기 전에 델루카 가문에 진 빚을 정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경과 전문의는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고 경고했었다. 측두엽의 자극으로 인해 환각 냄새가 나는 것이며, 대개 발작이 일어나기 몇 초 전에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시야에 번진 검은 점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로만이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

“혈당이 좀 떨어졌어요.”

그가 내 이마를 향해 손을 뻗더니, 내 피부에 닿기 직전 멈추었다.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나를 이끌어 주었던 그 손이 주먹을 쥔 채 그의 옆구리로 툭 떨어졌다.

“가서 좀 자.”

로만이 말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이토록 염려가 묻어나는 투를 듣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말은 차마 하지 않은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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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봄이 될지도 모를 그때, 나는 로만이 내 짝으로 점찍어 둔 남자 엘리아스 하트를 계속 만나기로 했다.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야 내가 더 이상 그가 바로잡아야 할 '오점'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그날 밤, 로만은 몇 주 만에 처음으로 웨스트체스터에 있는 델루카 저택으로 돌아왔다.그는 검은색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서재 벽난로 앞에 서서,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고 있었다.로만은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온기의 조각조각마저 아껴가며 보낸 지난 6개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그 버릇만큼은 지키고 있었다.“엘리아스는 어때?”로만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몇 번이나 만났지?”“네 번이요.”“청혼은 했고?”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엘리아스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곁에 있어주는 친구일 뿐, 구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아본 적조차 없었다.하지만 로만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해서, 마치 마침내 성사된 거래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거의 다 됐어요.”로만의 손가락이 시가를 감싼 채 멈췄다.나는 몇 달 만에 나눈 이 대화를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예전에 혼자 상상해보곤 했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했다.“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유리 천장에 겨울 아네모네를 매달고 싶어요. 하얀 다이아몬드는 싫고. 꿀빛이 나는 타원형 보석이 좋겠어요.”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결혼식이 끝난 뒤에는 고급 승용차 행렬 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오래된 파란색 컨버터블 타고 허드슨강을 따라 북쪽으로 쭉 달리는 거죠.”내가 하나씩 세부적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그만.”로만이 말했다.“네가 네 스스로의 삶을 시작할 마음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그는 마치 다음 말을 억지로 뱉어내기 위해 양손을 모두 비워야 한다는 듯이 시가를 케이스에 다시 집어넣었다.“네 부모님은 널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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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어떻게 침대 옆 융단 위에 누워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휴대전화에는 알람 세 개가 떠 있었다.[레베티라세탐 복용하기][엘리아스 만나기][로만에게 말하지 않기]마지막 알람은 내가 직접 적어둔 것이었지만, 그 문장의 의미가 머릿속에 와닿기까지 거의 1분 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10시가 되자, 조경 작업 인부들이 동쪽 별관 바깥에 있던 하얀 치자나무 온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내 열여덟 번째 생일날, 가족 회의장을 중간에 차고 나온 로만이 해가 뜨기도 전에 뚝딱 지으라고 명령했던 바로 그 온실이었다.이제 인부들은 마지막 화분 나무를 트럭으로 옮겨 실어가자, 그 자리에는 시에나를 위한 버건디 라넌큘러스 상자들이 연회장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섰다.나는 아무것도 파괴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더 이상 내 차지가 아닌 공간을 비우고 있을 뿐이었다.그날 오후, 나는 소호의 한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엘리아스를 만났다.그는 유서 깊은 보스턴 정치가 가문 출신이었고, 로만의 눈에는 완벽한 선택지였다. 깨끗하고 안전하며, 델루카 가문의 세계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나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사람.엘리아스는 나를 보자마자 메뉴판을 내려놓았다.“지난주보다 안색이 더 안 좋아 보이네. 의사는 뭐래?”나는 최신 스캔 사진을 테이블 너머로 밀어놓았다. 흑백 이미지 속에서, 왼쪽 측두엽을 타고 퍼져나가는 그림자는 종이에 번지는 잉크처럼 보였다.“빠르게 커지고 있대요. 바이스 박사님은 수술이 언어 능력과 장기 기억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하셨어요.”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 어쩌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대요.”“로만은 알아?”“아니요.”“마라, 그 사람에게는 알 권리가...”“없어요.”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내가 18살이 되면서 법적 보호자 관계는 끝났어요. 그 사람에게는 내 치료법을 결정할 권리가 없어요.”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게다가 그 사람이 살려내지 못할지도 모를 내 삶을 결혼식 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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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로만은 결혼식 전날 자정이 지나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나는 침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때 또다시 그 매캐한 냄새가 밀려왔다. 약에 손을 뻗기도 전에 오른손이 경련을 일으키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손가락에서 유리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나는 일어나려 애썼지만 다리가 풀리며 침대 모서리에 부딪혔다. 정신을 차리고 방 안이 다시 초점을 되찾았을 때, 로만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마라, 날 봐.”그가 내 목덜미를 받쳐 들었다. 몇 달 동안 내게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인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나는 혀 옆쪽을 깨물고 말았다. 입가에는 따뜻한 피가 번져 있었고, 깨진 유리 조각 사이로 항경련제 알약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처방전 라벨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약병을 뒤집어 확인하기만 하면, 내가 숨겨온 거짓말은 들통나고 말 것이다.나는 그보다 먼저 약병을 낚아채듯 집어 들어 침대 밑 의료용 케이스 안에 쑤셔 넣었다.“편두통 때문에 그래요. 너무 갑자기 일어서서…"로만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그러니까 내 결혼식 전날 밤에 내 앞에서 쓰러지는 걸 택했다, 이거야?”나지막하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더 잔인하게 들렸다.그는 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직접 보았다. 그저 그걸, 내가 자신을 붙잡기 위해 벌이는 또 하나의 필사적인 연기라고 믿는 편을 택했을 뿐이었다.“네.”나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유리잔이 깨져서 석류 주스를 쏟았어요. 카펫을 더럽혀서 죄송해요."거의 텅 빈 방 안을 둘러보는 그의 턱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그러다 내 사진들이 걸려 있던 휑한 벽에 시선이 멈췄다.“물건들은 다 어디 갔어?”“기부했어요.”“왜?”“결혼하잖아요. 이제 이 저택을 관리할 새로운 안주인도 들어올 테고.”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내 침실을 무덤처럼 그대로 남겨두는 건 좀 소름 끼치잖아요.”로만이 벌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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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비행기 문이 닫히면서 휴대전화 화면도 꺼졌다.로만은 그 후에도 17번이나 더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전화가 울릴 때, 승무원이 내 좌석 옆에 멈춰 서서 정중하게 휴대전화를 꺼달라고 당부했다.나는 전원을 껐다.'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결혼을 취소했다면, 떠나는 게 여전히 옳은 일이야.'죄책감은 사랑이 아니었고, 고마움이 평생의 족쇄가 되어서도 안 됐다.10시간 후 비행기는 취리히에 착륙했고, 바이스 박사가 보낸 의료 코디네이터가 출국장 밖에서 나를 맞이했다.차에 올라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투박한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 표시 제한된 뉴욕 지역 번호였다.나는 그냥 울리도록 내버려 두었다.차가 병원의 지하 진입로로 들어서는 순간, 나무가 타는 듯한 환각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지고 일그러져 들렸다내 가방 안에 약이 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다.어둠이 나를 삼키기 직전,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자동문을 박차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로만은 내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나를 붙잡았다.눈을 떴을 때, 머리에는 전극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고 침대 주변은 모니터 장비들로 둘러싸여 있었다로만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턱시도의 재킷은 벗겨져 있었고, 흰 셔츠는 밤을 지새운 듯 쭈글쭈글했으며 한쪽 소매 끝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내 눈이 떠지는 순간 그가 벌떡 일어났지만 더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바이스 박사 말로는 전신 발작이 있었다고 하더군. 수술은 내일 아침으로 앞당겨졌어.”“어떻게 날... 찾았어요?”“병원에서 네가 연락이 닿질 않아서 네 보호 동의서에 적힌 비상 연락처로 전화를 했더라고."“그건 엘리아스잖아요.”“그 사람이 내게 전화기를 넘겨줬어.”나는 눈을 감았다. 살아남는다면 엘리아스와는 아주 긴 대화를 나누어야 할 터였다.로만은 내 발치의 침대 시트 위에 서류 한 장을 올려놓았다. 7번 부두의 소유권 증서는 내가 두고 온 그대로였다.“이건 안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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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바이스 박사가 의료진과 함께 들어와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종양은 언어와 기억을 관장하는 신경 회로를 휘감고 있었다. 가능한 한 많은 기능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은 종양을 제거하는 도중 나를 깨워 그림의 이름을 대게 하고 익숙한 얼굴을 알아보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만약 출혈을 멈추지 못하거나 뇌의 부종이 너무 심해진다면, 나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수술 후 연락 받을 사람을 한 명 지정하셔야 해요.”간호사가 말했다.나는 엘리아스의 이름을 적으려 했지만, 펜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문에 난 좁은 유리창 너머로 로만이 복도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델루카 가문의 보스는 누구를 위해 기다리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그는 내 방으로 걸려 오는 전화 한 통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7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나는 바이스 박사의 이름을 적었다. 로만은 그 서류가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나를 수술실로 옮기기 직전, 그는 내 손바닥에 무언가 낡은 것을 쥐여주었다. 반지나 델루카 가문의 증표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모서리가 매끄럽게 닳아버린 지하철 토큰 하나였다.“네가 18살이었을 때,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혼자 지하철을 탄 적이 있었지. 집에 돌아와선 내 재킷 주머니에 이걸 쑤셔 넣으며 말했어. 내가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법을 좀 배워야겠다고.”나는 그런 짓을 했던 기억이 없었다.“만약 깨어났을 때 날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그가 말했다.“그저 한때 네가 평범한 삶을 원했다는 것만 기억해 줘.”마취제가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수술실 문밖에서 그가 이탈리아어로 기도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수술은 11시간 동안 이어졌다.수술 도중 의료진이 나를 깨웠을 때, 바이스 박사가 사진을 한 장씩 들어 보였다.사과.다리.파란 자전거.처음 두 개의 이름을 댔지만, 3번째 단어는 혀끝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그러다 화면에 로만의 사진이 나타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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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병리과 검사 결과는 그 누구의 예상보다도 심각했다.외과의사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제거했지만, 암세포는 이미 신경 섬유를 따라 퍼져 있었다. 의사들이 내가 여전히 백신 임상 시험 자격을 갖추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6주 동안의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받아야 했다.로만은 뉴욕에서 예정되어 있던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가문의 일상적인 업무를 루카에게 넘겼다.그는 병원 맞은편에 평범한 아파트를 빌렸고, 매일 아침 7시면 아침 식사를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밤 9시가 되면 그는 내 개인 병실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떴다.그가 가져오는 음식은 정말이지 끔찍했다.첫날에는 소금과 설탕을 혼동해서 오트밀을 망쳐 놓았다. 둘째 날에는 닭고기 스프에 썰지 않은 둥근 양파가 통째로 둥둥 떠 있었다. 셋째 날 아침에는 참다못해 간호사에게 아래층에 구내식당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다음 날, 그는 새 요리책 한 권을 들고 나타났다. 표지에는 노란색 쪽지가 붙어 있었다.[보스도 훈련시키면 가능함.]나는 웃음이 터지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치료에는 낭만 따위라곤 조금도 없었다. 머리카락은 한 움큼씩 빠져나갔고, 입안이 헐어 물만 마셔도 고통스러웠다. 평범한 단어들이 예고도 없이 머릿속에서 증발해 버렸다.어느 날 오후에는 병원 정원에서 내 병실로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나는 눈밭에 쪼그리고 앉아 목이 쉴 때까지 흐느껴 울었다.로만이 나를 찾아냈지만, 나를 만지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독이지 않았다.그는 내게서 2미터쯤 떨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우리 사이 땅바닥에 휴대전화를 놓았는데, 화면에는 지도가 환하게 켜져 있었다.“네가 방향을 결정해라. 내가 따라갈게.”나는 세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 그는 단 한 마디 타박도 없이 내가 고른 세 번의 틀린 길을 그대로 따라왔다.네 번째 시도 끝에 입원 병동의 유리문이 시야에 들어왔다.“길을 알고 있었잖아.”내가 말했다.“길을 안다고 해서 억지로 널 그곳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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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종양 위원회에서는 내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표준 치료를 계속 이어가는 것. 부작용은 예상할 수 있지만 재발 확률이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높았다.혹은 초기 단계의 맞춤형 백신 임상 시험에 참여하는 것. 이는 추가 조직 채취가 필요하고 심각한 면역 반응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임상 시험을 받겠어요.” 내가 말했다.로만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었고 끼어들지 않았다.바이스 박사가 그를 바라보았다.“가족으로서, 의견이 있으신가요?”“마라는 제 부속물이 아닙니다.”로만이 말했다.“마라의 의견이 곧 결정입니다. 저는 마라가 모든 위험 요소를 확실히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뿐입니다.”우리가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남을 때까지 그는 기다렸다가 물었다.“무서워?”“네.”“나도 그래.”그 어떤 헛된 약속도,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니 나를 살려내겠다는 식의 보스다운 호언장담도 없었다. 그의 솔직함은 내 마음을 더 차분하게 다독여주었다.치료 3주 차에 루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카루소 가문 내부의 누군가가 취소된 결혼식을 빌미 삼아 반란을 일으켰고, 공모자들은 내 부모님의 습격 사건과 연관된 오래된 장부들을 파헤쳐냈다.로만은 적어도 48시간 동안 뉴욕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통화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내게 통보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내가 여기 있길 원해?”예전의 로만이었다면 모든 세부 사항을 알아서 정리한 뒤 그 결과를 기정사실로 통보했을 터였다.그의 여권과 휴대전화는 이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어떤 자리에 가든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그 남자가, 이번만큼은 나의 대답 때문에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려 하고 있었다.말 한마디로 그를 내 곁에 붙들어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오히려 내놓기가 더 쉬웠다. “다녀와요. 날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가문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필요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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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첫 번째 백신 치료가 끝난 후, 진행된 MRI 검사에서 종양 부위가 안정적인 상태라는 결과가 나왔다.나는 완치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죽음에게서 그저 시간을 빌렸을 뿐이었고, 그 시간을 언제 돌려줘야 하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그리고 병원에서 나와 로만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우리는 각자 다른 침실을 썼고, 그는 밤 9시 이후에는 절대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켰다.매일 아침, 그는 부엌의 화이트보드에 그날의 일정을 적어 두었다.약 복용, 물리 치료, 산책.그리고 암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작고 소소한 일 한 가지.월요일, 호숫가에서 백조들에게 먹이를 주었다.화요일, 대서양 바닷물 같은 맛이 나지 않는 오트밀 만드는 법을 배웠다.수요일, 나를 취리히 트램에 태우고는 일부러 길 안내를 내게 맡겼다.나는 엉뚱한 정류장에서 우리를 내리게 만들었다. 낯선 동네를 정처 없이 헤매다 영어 메뉴판조차 없는 식당을 찾아냈고, 로만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하다가 실수로 디저트를 세 개나 시키고 말았다.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다 먹어 치우는 쪽을 택했다.웨이터는 그가 국제 뉴스에 나오던 인물임을 알아채고는, 눈에 띄지 않는 경호원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려 연신 문가를 두리번거렸다.로만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내가 그의 접시에서 마지막 한 입을 훔쳐 먹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내 24년 인생에서 평범한 하루에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다.그날 저녁, 나는 그의 서재에서 잠긴 금속 상자를 발견했다. 로만은 아무런 설명 없이 내 앞에 열쇠를 내려놓았다.상자 안에는 내 삶에 대한 7년간의 기록들이 들어 있었다.보호자 지정 명령서, 등록금 영수증, 경호 보고서, 내 첫 단독 여행 일정표.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사랑해’ 문자 메시지 출력본까지.그 위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6개월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나는 널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떠나야 해. 하지만 내가 떠나는 일이 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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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3개월 후, 로만과 나는 추적 검사를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델루카 가문의 저택은 달라져 있었다.동쪽 별채에 있던 치자나무 온실은 다시 지어지지 않았고, 그 자리에는 탁 트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내 방은 더 이상 유리 진열대 안에 보존된 어린 소녀의 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벽에 걸려 있던 감시용 단말기는 사라져 있었고, 문에는 나만 아는 비밀번호가 설정된 평범한 전자 도어락이 달려 있었다.노라는 눈물범벅이 된 채 나를 안아주더니, 혹여 나를 아프게 할까 봐 이내 황급히 몸을 뗐다.루카가 7번 부두의 새로운 소유권 서류를 들고 현관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로만은 단순히 내 자산을 돌려준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수년 전에 강제로 포기해야 했던 해상 보험 권리까지 모두 되찾아 둔 것이었다.“보스께서는 이것이 선물이나 배려가 아니라 정당한 반환이라고 하셨습니다.”루카가 내게 말했다.“그 사람은 어디 있죠?”“지하 회의실에 계십니다. 오늘이 습격 사건에 대한 최종 청문회 날입니다.”나는 지하로 내려가지 않았다.예전의 나였다면 로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들이 흘린 자투리 정보로 진실을 끼워 맞추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내 변호사를 직접 만났다.나는 7번 부두의 운영을 독립된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강력 범죄 피해자들의 신경계 재활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했다.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온 로만은 부엌에서 사과를 깎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청문회는 끝났어요?”내가 물었다.“끝났어. 습격을 공모했던 자들은 가문 평의회에서 영구 제명되었다. 관련 증거 자료들도 전부 연방 검찰에 넘겼고."마피아식 정의가 언제나 깨끗할 리는 없지만, 로만은 나를 향한 사랑의 증표로 피비린내 나는 처형을 가져다주지 않았다.그는 과거의 지저분한 사건들을 우리의 침실과 식탁에서 철저히 분리해 두는 쪽을 택한 것이다.“나도 오늘 7번 부두를 정리했어요.”나는 경영 위탁 계약과 재활 재단에 대해 설명했다.그는 단 하나의 질문만 던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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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18개월 후에도 나의 검사 결과는 여전히 안정적이었다.내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에 보았던 영화의 결말을 까먹기도 했고, 머릿속에서 목요일이 갑자기 화요일로 착각하기도 했다하지만 나는 휴대전화 알람에 의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사소한 디테일을 하나 놓칠 때마다 내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증거로 여겨 스스로를 괴롭히지도 않았다.여전히 6주마다 찾아오는 정밀 검사 결과는 우리의 숨통을 쥐고 흔들었다.그럴 때마다 로만과 나는 똑같은 규칙을 따랐다.대기실에서는 그 어떤 예측도 하지 않는 것.우리는 형편없는 TV 프로그램에 대해 티격태격 다투고, 자판기에서 파는 과자들의 순위를 매기고, 마치 결과 따위가 앞으로의 몇 시간에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는 듯 저녁 메뉴를 계획하곤 했다.로만은 먹을 만한 아침 식사 세 가지를 요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무언가를 주도하고 싶은 욕구가 밀려올 때마다 이렇게 묻는 법도 배웠다.“조언을 원해, 아니면 그냥 들어줄까?”시에나는 7번 부두 재단의 법률 자문 변호사가 되었다.엘리아스가 약혼했을 때, 로만은 그에게 25년산 스카치위스키 한 상자를 보냈다. 물론 엘리아스에게 한 번이라도 질투를 느낀 적이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우리는 델루카 가문의 저택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예식은 허드슨강변의 작은 식물원에서 30명도 안 되는 하객들만 초대해 조촐하게 치러졌다.아네모네도, 꿀빛 다이아몬드도, 머리 위를 맴도는 헬리콥터도 없었다.나는 흰색 목련과 로즈메리를 들었고, 내 반지는 안쪽에 네 단어가 새겨진 무광의 투박한 금반지였다.내가 식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노라는 눈물을 터뜨렸다. 루카는 바람이 눈에 들어갔다고 시치미를 뗐다. 시에나는 바이스 박사 옆에 서 있었고, 엘리아스는 신랑이 자신에게 빚지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로만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네가 원한다면, 내일도.]서약을 나누기 앞서, 로만은 하객들 앞에서 내게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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