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수혁은 우선 남은 일처리를 마저 하기로 했다.하지만 서류 처리를 지시하고 서명을 하는 내내, 수혁의 신경은 온통 묵묵부답인 핸드폰에 쏠려 있었다.‘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수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국에 있는 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검은 세단 안에서는 강민재가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은 채 핸들을 잡고 있었다.조수석에는 약기운에 깊게 가라앉은 채, 의식을 잃은 서린이 앉아 있었다.신호에 걸릴 때마다 고개를 돌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그녀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지안아. 넌 잘 때가 제일 예뻐.”그의 얼굴은 오랜 여행을 떠나는 연인처럼 평온하고 들떠 있었다.뒷좌석에는 예식장 주차장에서 빼앗아 배터리를 분리해 버린 서린의 핸드폰이 나뒹굴고 있었다.“진즉에 이랬어야 했는데, 내가 널 너무 봐 준 것 같다.”강민재는 서린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이제 우리 예전으로 돌아가자.”“너는 예전처럼, 내 옆에서 나만 보면 돼.”암호를 걸었다는 것은 USB의 복사본이 있다는 이야기다.그렇다면, 나는 더 강력한 무기를 옆에 두어야 했다.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충남의 어느 해안가 마을로 접어들었다.철썩, 처얼썩—.일정한 간격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그리고 코끝을 맴도는 특유의 낡은 목조 건물 냄새와 바다 짠내.마을을 빙 돌아서 숲에 둘러싸인 한적한 도로를 쭈욱 달렸다.강민재의 검은 세단이 멈춰 선 곳은, 해안가 절벽 위에 지어진 외딴 별장이었다.녹슨 철문이 뒤에서 묵직하게 닫혔다.5년 전. 강민재가 국회의원 보좌관이던 시절, 남들의 눈을 피해 지안과 처음으로 ‘밀월여행’을 왔던 곳.그때도 겨울이었다.둘이 장을 봐 와서 늦은 저녁을 해 먹고, 밤새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함께 잠들었던 곳.지안은 다음 날 아침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서서 한참을 웃었었다.강민재에게 이곳은 5년이라는 시간이 멈춰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그러니 다시 시작하기에는
결혼식을 며칠 앞 둔 어느 날의 아침.강민재는 의원실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일정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때, 책상 위에 엎어둔 개인 핸드폰이 날카롭게 진동했다.[어르신]강민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이른 아침의 호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그는 즉시 비서관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예, 어르신.”— 윤리 위원회가 있는 건 알고 있나?인사도 없이 날아든 어르신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찼다.“... 예?”— 혁신위원장이 윤리위원회 소집령을 내렸다.“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강민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건은 바로 강민재 의원 국회의원직 박탈.“뭐라고요?”강민재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널 당에서 완전히 쳐내겠다는 소리야. 제명 처리하고 검찰에 넘기겠다고, 당내 핵심들이 벌써 합의를 끝냈어. 놈이 뿌린 찌라시가 명분이 됐고, 혁신위원장이 총대를 멨다.휘청-한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눈앞이 아찔해졌다.방탄조끼가 벗겨지는 순간, 끝이다.— 내가 널 언제까지 봐줘야겠나? 정치판에서 오물 묻은 놈은 필요 없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줘야 하나?“어, 어르신!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확실하게 방어하겠습니다!”— 오래전의 그 USB. 가져와.어르신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게 검찰로 넘어가면, 네놈 횡령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한테까지 불똥이 튀어. 그 먼지 한 톨이라도 남기면, 네 배지가 아니라 네 놈 목숨이 날아갈 거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사흘 안으로 그 증거물 회수해.— 그게 네가 살 유일한 길이야.— 아니면, 내 선에서 먼저 처리한다.뚝.전화가 끊어졌다.강민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손에 쥔 핸드폰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아—.”강민재는 핸드폰을 들어서 화면을 보다가,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당에서 나를 제명시키겠다고?’그동안 대한당에서 개처럼 굴러가며 이 자리를
USB.수혁과 함께 국가기관급 암호를 걸어두었던 그 미끼를, 강민재가 이미 열어보려 했다는 뜻이었다.“암호라니.”강민재가 실소를 터뜨렸다.핸들을 쥔 그의 뼈마디가 하얗게 불거져 있었다.분노가 극에 달한 목소리였다.“그러면 내가 그거 풀 동안 니들은 무슨 짓을 하려고.”강민재의 시선이 얼어붙은 서린의 얼굴에 꽂혔다.“날 너무 우습게 봤어.”차가 서서히 지하 주차장의 코너를 돌며 위로 올라갔다.“내가 누구 덕분에.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야.”서린은 입술을 움직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정신을 차려야 했다.강민재가 어디로 자신을 데려가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라도 더 기억해야 했다.하지만 붙잡으려 할수록 의식은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았다.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고, 귓가에 들리는 강민재의 목소리마저 점점 멀어졌다.―사람 많은 곳일수록 더 위험해.수혁이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대표님...죄송해요.안 돼.누가...좀 도와줘.이제 서린의 의식이 뚝 끊어졌다.강민재는 서린이 완전히 잠이 든 것을 보고는 입꼬리를 비틀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검은 세단이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빛이 번지는 도심 속으로, 차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한편, 예식장에서는 본식이 끝나고 사진 촬영을 위해 하객들이 이동하기 시작할 무렵,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호 책임자의 무전기가 날카롭게 울렸다.— 팀장님. 타깃의 위치 확인 불가.— 식장 내부, 대기실, 화장실... 전부 클리어입니다.“뭐라고?”경호 책임자의 눈빛이 굳었다.“CCTV 확인해. 전 구역 다 돌려.”“비상구, 직원 통로 전부 체크해!”그가 빠르게 호텔 통제실을 향해 뛰었다.“주차장 봉쇄해. 지금 당장.”하지만 서린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경호 책임자는 떨리는 손으로 보안 회선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가자마자 연결이 되었다.“……VIP께 직보 올려주십시오. 타깃을, 잃어버렸습니다.”즉시, 경호실장이 공대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타깃을... 놓쳤다고
강민재는 이미 결혼식장에 와 있었다.축하객들로 붐비는 강남의 대형 웨딩홀.화사한 생화 장식과 샹들리에 불빛 아래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강민재는 웨딩홀 입구가 한눈에 보이는 기둥 뒤편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그의 시선은 오직 밖을 향해 있었다.기다리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공서린.아니.공지안.잠시 후, 웨딩홀 입구 앞에 검은 차량 한 대가 멈춰 섰다.강민재의 눈빛이 달라졌다.뒷좌석 문이 열리고 단정한 피치 톤의 원피스를 입은 서린이 내렸다.그리고―그녀는 혼자였다.강민재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서린은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웨딩홀 안으로 들어섰다.식장은 축하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다은 씨, 오늘 정말 예뻐요. 축하해요.”“상무님! 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서린은 신부 대기실에서 김다은 과장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다.턱시도를 빼입은 박동하 실장 역시 입이 귀에 걸린 채 서린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다행이다. 좋은 사람 만나서.’서린은 박동하에게 더욱 진한 미소를 보이며 마음으로 응원했다.두 사람이 함께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자신까지 기분이 좋아졌다.인사를 마친 서린은 예식장 안으로 들어가 뒤쪽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원래대로라면 수혁이 이 자리에 함께 있어야 했다.하지만 오늘 새벽, 베트남에서 터진 일 때문에 수혁은 급히 비행기에 올랐다.‘조심히 다녀오세요. 여긴 걱정 마시고요.’아침에 나눴던 짧은 통화를 떠올리며 서린은 옅게 미소 지었다.예식장 입구와 로비 곳곳에는 윤정희 여사가 보낸 경호원들이 사복 차림으로 대기 중이었다.철통같은 보안 속, 서린은 잠시 긴장을 풀고 예식을 지켜보았다.어느새 식장 안으로 들어온 강민재가 멀찍이서 서린을 지켜보고 있었다.그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혼자인 줄 알았다.그런데 아니었다.서린의 양옆에 앉은 여자들.친구나 동료처럼 보였지만, 강민재의 눈에는 금세 정체가 들어왔다.누가 봐도 경호원
“수고했어.”“이제 이걸 전했으니, 더 이상은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서린이 서늘하게 선을 긋자, 강민재는 피식 웃었다.“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지.”강민재는 승리자가 된 기분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문이 닫히고 강민재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굳게 닫혀 있던 옆 회의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수혁이었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굳어 있는 서린의 손을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잘했어.”그의 따뜻한 체온에 서린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서린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재생 버튼을 누르자, 방금 전 강민재와 나누었던 대화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여기에 한도전자 기술 유출 사건에 대한 실마리가 들어 있다는 거.]— [상관 마. 네가 걱정할 일 아니니까. 그만 넘기지?]“우린 이걸로 그 자식 목줄을 하나 더 쥔 거야.”수혁의 말에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상하게도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강민재와 마주 앉아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이번에는 5년 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기분이었다.수혁이 그런 서린을 가만히 끌어안았다.며칠간의 숨 막히는 강행군이 이어지던 금요일 저녁.퇴근 무렵, 수혁은 서린의 모니터를 덮어버렸다.“대표님?”“오늘은 여기까지. 퇴근합시다.”“대표님. 이거 마저 정리하고요. 조금만 더 하면―”“내일 결혼식에, 이렇게 피곤이 상접한 얼굴로 가면 안 되지.”수혁이 서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얼른 일어나. 맛있는 거 먹자.”결국 서린은 피식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예에, 그래요. 오늘은 이만 가요.”불 꺼진 비서실을 지나,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지하 주차장의 차로 걸어가며 수혁이 말했다.“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그냥 집으로 바로 가면 안 될까요?”“그럴까? 그러자, 집으로 가자.”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나란히 들어와 식탁 의자에 앉았다.“치맥 어때?”수혁이 배달앱을 열고 물었다.“좋아요.”음식이 오는 동안 서린이 먼저 씻기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서린이 레이저 포인터로 베트남 현지 법인 ‘한도 비나(Hando Vina)’를 가리켰다.“5년 전, 차윤호 회장과 강민재는 국가 핵심 반도체 기술을 해외 경쟁사에 넘기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직접 데이터를 전송하면 국정원의 망에 걸리죠. 그래서 베트남 법인을 창구로 썼습니다.”서린이 화면을 짚었다.“‘기술 제휴’라는 명목으로 현지 법인에 데이터 접근 권한을 합법적으로 부여한 뒤, 그곳에서 데이터를 통째로 넘긴 겁니다.”수혁의 시선이 레이저 포인터의 붉은 점을 따라 움직였다.“검찰에 넘기는 순간, 변명의 여지조차 없게 만들어야 해. 횡령, 배임, 그리고 5년 전과 작년의 기술 유출까지 전부.”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 화면을 띄웠다.“자금의 세탁 경로는 90% 이상 증빙을 마쳤어요. 심재호가 움직였던 대포 통장 내역과도 교차 검증이 완료됐고요. 남은 건―”그녀의 시선이 수혁과 민우를 스치며 말을 이었다.“이 돈이 강민재 의원의 희망재단으로 들어갔다는 ‘최종 연결 고리’입니다.”“그 고리만 찾으면 바로 기소 때릴 수 있게 소장 초안은 내가 완벽하게 다듬어 놓을게요.”민우가 든든하게 받쳐주었다.한도전자 대표이사실은 며칠째 하나의 전장이었다.대형 화이트보드는 빈틈없이 채워져 있고, 넓은 회의 테이블 위에는 민우가 가져온 법률 검토 자료와 서린이 추적한 재무 자료들이 뒤엉켜 산처럼 쌓여 있었다.“커피 새로 내렸어. 마시고 해.”수혁이 머그잔 세 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눈 밑에 옅은 그늘이 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맙다. 아오, 눈알이 다 빠질 것 같네.”민우가 기지개를 켜며 커피를 들이켰다.경찰이나 검찰에 섣불리 자료를 넘겼다가는 정보가 새어 나가 꼬리 자르기로 끝날 위험이 컸다.그래서, 세 사람은 외부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들의 머리와 끈기만으로 거대한 카르텔의 숨통을 조일 올가미를 만들고 있었다.수혁이 화이트보드를 잠시 바라봤다.5년 동안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