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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Author: 서린화

제1화

Author: 서린화
한겨울이었다.

굵은 함박눈이 쏟아지며 작산행궁(鹊山行宫: 황제가 사냥에 나갔을 때 머무는 별궁) 전체를 집어삼키듯 덮고 있었다.

금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벼랑을 휘몰아치는 찬 바람과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마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단번에 그녀를 덮쳐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기는 점점 더 거세져, 이내 정신마저 삼켜버릴 정도였다.

그녀의 손에는 금비녀 하나가 꽉 쥐어져 있었는데, 이미 날카로운 날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통증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마지막 이성을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뒤쪽 눈 덮인 숲속에서 남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한 약을 먹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사람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다니. 찾아내면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자신이 다시 살아나다니, 그것도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절벽에 몸을 던지기 직전으로 돌아오다니, 금영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원래 그녀는 영안후부(永安侯府)의 유일한 적녀(嫡女: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였다.

흠천감(钦天监: 봉명과 길흉을 점치는 관청)은 오래전 예언한 바 있었다. 영안후부에서 태자비의 운명을 지닌 여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예언과 똑같이 마침 태자가 태어나던 해에 그녀도 태어났고, 자연스레 모두가 그녀를 미래의 태자비로 여겼다.

금영의 조부 역시 확신을 가지고 황제에게 혼인 교지를 받아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삼년 전, 조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금영은 아버지를 대신해 직접 조부의 유해를 모시고 고향인 회양(淮阳)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치렀다.

상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오던 길, 그녀는 작산행궁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때 마침 황제도 신하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모와 오라비, 게다가 정혼자까지 모두 이곳에 있다는 말에 금영은 곧바로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산행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정혼자이자 태자인 그의 초대를 받아, 함께 근처 설림에서 눈을 감상하기로 한 날이었다.

금영은 어릴 적부터 몸가짐을 조심해 사사로이 외간 남자를 만나는 일을 삼가왔다. 그러나 정혼자인 태자와의 약속이었고, 혼례도 머지않은 상황이었기에 기꺼이 응했다.

하지만 태자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웬 산적 두 명 뿐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오기 전, 황후가 하사한 강주(姜酒: 생강 술) 한 잔을 마셨는데, 뒤늦게 그 안에 미약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금영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즉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채, 얼어 죽기 직전의 상태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킨 순결이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믿었던 가족들조차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라고 등 떠밀었다.

“산적에게 붙잡힌지 하룻밤이나 지났는데, 누가 그 결백을 믿겠느냐.”

“금영아, 너만 생각하면 안 된다.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지.”

“널 아끼는 건 사실이나… 이 일은 황실의 체면이 걸린 일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결국 그녀는 황후가 내린, 태자비의 상징이었던 봉황이 새겨진 비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비녀에 영혼이 묶인 채 삼년을 떠돌았다.

금영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태자는 그녀의 여동생 배명월을 배필로 맞아들였다.

붉은 비단이 영안후부와 태자부(太子府)에 깔렸고, 배명월은 금영이 자결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봉황 비녀를 꽂고 태자비가 되었다.

부모는 물론 오라비까지 모두 배명월을 아끼며 살뜰히 챙겼다. 마치 금영이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가끔 그녀를 떠올리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녀가 천벌을 받은 것이라며, 지난 열여덟 해 동안 배명월의 운명을 대신 살아온 죄값을 치른 것이라고 헛소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금영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었던 바로 이 날로 돌아왔다.

다만 이미 그녀의 운명을 뒤틀어버린 독주를 마신 뒤였다.

금영은 다시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느꼈고, 강제로 회상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도망쳐!”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우리한테 몸을 바쳐!”

“여긴 아무도 없는 설림이다! 널 구하러 올 사람은 없어!”

차가운 바람을 타고 산적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설림…?’

그 말이 번개처럼 금영의 머리를 때렸다.

‘아니야, 있어.’

회귀 전,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옴짝달싹 못하던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근처를 순찰하던 호위들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급히 산꼭대기에 있는 폐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실의 군사가 움직일 정도라면, 그 존재는 분명 몹시 귀한 인물일 터였다.

지금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지금 상태로 찾아간다면 순결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과거, 목숨까지 바쳐 순결을 지킨들 가족들의 손에 떠밀려 죽음을 맞이하는 길뿐이었다.

차라리 이 몸을 담보로 더 큰 권력에 기대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런 터무니없는 명분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결심이 서자 금영은 비녀를 머리에 꽂고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산 정상을 향해,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작산행궁 직설전(织雪殿)은 눈 절경을 위해 지어진 전각이었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폐궁이 된 곳이었다.

그녀가 직설전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 이미 그녀의 몸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금영은 거의 뛰어들다시피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고, 곧 맑고도 서늘한 소나무 향이 그녀를 감쌌다.

안에 있던 사람은 당황한 듯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약에 취해 이성을 잃은 금영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매달렸다.

“놔라.”

아무리 밀쳐내도 다시 들러붙는 금영의 끈기에, 상대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금영은 끝내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그를 끌어안으며 흐트러진 몸을 밀착시킬 뿐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이성을 잃은 눈빛, 위태로운 요염함이 흘러나왔다.

“부탁이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와 따뜻한 숨결에, 남자의 몸이 굳었다.

잠깐 스친 욕망에, 그는 분노를 눌러 담았다.

“방자하구나.”

낮고 냉엄한 음성이 귀 옆에서 울렸다. 그러나 금영은 물러설 수 없었다.

몸속을 갉아먹는 열기가 그녀를 미치게 하고 있었고, 남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차가운 기운만이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 세게 매달렸고, 급기야 그의 옷깃을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억눌린 분노가 서린 목소리였다.

금영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깊은 심연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산하를 담은 듯 고요하고, 위엄이 서린 눈.

서른을 갓 넘긴 듯한 나이, 검은 옷차림, 범상치 않은 기운…

그제야 금영은 깨달았다.

“폐하…?!”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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