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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Penulis: 서린화

제1화

Penulis: 서린화
한겨울이었다.

굵은 함박눈이 쏟아지며 작산행궁(鹊山行宫: 황제가 사냥에 나갔을 때 머무는 별궁) 전체를 집어삼키듯 덮고 있었다.

금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벼랑을 휘몰아치는 찬 바람과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마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단번에 그녀를 덮쳐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기는 점점 더 거세져, 이내 정신마저 삼켜버릴 정도였다.

그녀의 손에는 금비녀 하나가 꽉 쥐어져 있었는데, 이미 날카로운 날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통증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마지막 이성을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뒤쪽 눈 덮인 숲속에서 남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한 약을 먹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사람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다니. 찾아내면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자신이 다시 살아나다니, 그것도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절벽에 몸을 던지기 직전으로 돌아오다니, 금영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원래 그녀는 영안후부(永安侯府)의 유일한 적녀(嫡女: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였다.

흠천감(钦天监: 봉명과 길흉을 점치는 관청)은 오래전 예언한 바 있었다. 영안후부에서 태자비의 운명을 지닌 여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예언과 똑같이 마침 태자가 태어나던 해에 그녀도 태어났고, 자연스레 모두가 그녀를 미래의 태자비로 여겼다.

금영의 조부 역시 확신을 가지고 황제에게 혼인 교지를 받아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삼년 전, 조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금영은 아버지를 대신해 직접 조부의 유해를 모시고 고향인 회양(淮阳)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치렀다.

상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오던 길, 그녀는 작산행궁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때 마침 황제도 신하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모와 오라비, 게다가 정혼자까지 모두 이곳에 있다는 말에 금영은 곧바로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산행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정혼자이자 태자인 그의 초대를 받아, 함께 근처 설림에서 눈을 감상하기로 한 날이었다.

금영은 어릴 적부터 몸가짐을 조심해 사사로이 외간 남자를 만나는 일을 삼가왔다. 그러나 정혼자인 태자와의 약속이었고, 혼례도 머지않은 상황이었기에 기꺼이 응했다.

하지만 태자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웬 산적 두 명 뿐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오기 전, 황후가 하사한 강주(姜酒: 생강 술) 한 잔을 마셨는데, 뒤늦게 그 안에 미약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금영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즉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채, 얼어 죽기 직전의 상태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킨 순결이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믿었던 가족들조차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라고 등 떠밀었다.

“산적에게 붙잡힌지 하룻밤이나 지났는데, 누가 그 결백을 믿겠느냐.”

“금영아, 너만 생각하면 안 된다.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지.”

“널 아끼는 건 사실이나… 이 일은 황실의 체면이 걸린 일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결국 그녀는 황후가 내린, 태자비의 상징이었던 봉황이 새겨진 비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비녀에 영혼이 묶인 채 삼년을 떠돌았다.

금영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태자는 그녀의 여동생 배명월을 배필로 맞아들였다.

붉은 비단이 영안후부와 태자부(太子府)에 깔렸고, 배명월은 금영이 자결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봉황 비녀를 꽂고 태자비가 되었다.

부모는 물론 오라비까지 모두 배명월을 아끼며 살뜰히 챙겼다. 마치 금영이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가끔 그녀를 떠올리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녀가 천벌을 받은 것이라며, 지난 열여덟 해 동안 배명월의 운명을 대신 살아온 죄값을 치른 것이라고 헛소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금영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었던 바로 이 날로 돌아왔다.

다만 이미 그녀의 운명을 뒤틀어버린 독주를 마신 뒤였다.

금영은 다시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느꼈고, 강제로 회상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도망쳐!”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우리한테 몸을 바쳐!”

“여긴 아무도 없는 설림이다! 널 구하러 올 사람은 없어!”

차가운 바람을 타고 산적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설림…?’

그 말이 번개처럼 금영의 머리를 때렸다.

‘아니야, 있어.’

회귀 전,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옴짝달싹 못하던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근처를 순찰하던 호위들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급히 산꼭대기에 있는 폐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실의 군사가 움직일 정도라면, 그 존재는 분명 몹시 귀한 인물일 터였다.

지금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지금 상태로 찾아간다면 순결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과거, 목숨까지 바쳐 순결을 지킨들 가족들의 손에 떠밀려 죽음을 맞이하는 길뿐이었다.

차라리 이 몸을 담보로 더 큰 권력에 기대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런 터무니없는 명분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결심이 서자 금영은 비녀를 머리에 꽂고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산 정상을 향해,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작산행궁 직설전(织雪殿)은 눈 절경을 위해 지어진 전각이었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폐궁이 된 곳이었다.

그녀가 직설전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 이미 그녀의 몸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금영은 거의 뛰어들다시피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고, 곧 맑고도 서늘한 소나무 향이 그녀를 감쌌다.

안에 있던 사람은 당황한 듯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약에 취해 이성을 잃은 금영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매달렸다.

“놔라.”

아무리 밀쳐내도 다시 들러붙는 금영의 끈기에, 상대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금영은 끝내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그를 끌어안으며 흐트러진 몸을 밀착시킬 뿐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이성을 잃은 눈빛, 위태로운 요염함이 흘러나왔다.

“부탁이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와 따뜻한 숨결에, 남자의 몸이 굳었다.

잠깐 스친 욕망에, 그는 분노를 눌러 담았다.

“방자하구나.”

낮고 냉엄한 음성이 귀 옆에서 울렸다. 그러나 금영은 물러설 수 없었다.

몸속을 갉아먹는 열기가 그녀를 미치게 하고 있었고, 남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차가운 기운만이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 세게 매달렸고, 급기야 그의 옷깃을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억눌린 분노가 서린 목소리였다.

금영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깊은 심연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산하를 담은 듯 고요하고, 위엄이 서린 눈.

서른을 갓 넘긴 듯한 나이, 검은 옷차림, 범상치 않은 기운…

그제야 금영은 깨달았다.

“폐하…?!”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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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30화

    금영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태후가 오늘 자신을 수강궁으로 부른 가장 큰 이유는 결국 황제에게 서 황후의 근신을 풀어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이제 태후가 직접 그 말을 꺼냈으니 금영도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태후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한 손은 계속 머리를 짚은 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손 상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폐하, 요 며칠 태후마마의 두통이 또 심해지셨사옵니다.”태후가 나직이 꾸짖었다.“됐다. 황제께 그런 것까지 말씀드리지 말거라. 정무로도 이미 지치셨는데, 이 늙은 몸 하나 때문에 또 마음 쓰실 게 무엇이냐.”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황후는 황실 연회에 참석해도 좋습니다. 다만 연회가 끝나면 다시 돌아가 근신하며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게 하겠습니다.”이 정도가 황제가 한발 물러서서 내놓은 최선이었다.말을 마친 황제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자에게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 있으니, 먼저 원비를 데리고 물러가겠사옵니다.”금영도 떠나기 전 태후에게 예를 갖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태후마마, 그럼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황제와 금영이 떠나고 나자 손 상궁이 태후를 바라보며 물었다.“마마, 아직도 머리가 많이 아프시옵니까?”태후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아프다. 어디 그리 금세 낫겠느냐? 좀 눌러 다오.”손 상궁은 곧 태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눌러 주기 시작했다.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잠시 후 네가 직접 서봉전에 가서 이 소식을 전하거라. 그리고 황후에게 다시는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라. 또 사고를 치면 그때는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고.”잠시 뒤 태후의 목소리에 못마땅함이 짙게 배었다.“어찌 그리도 어리석은지. 황후로 입궁해 그 자리를 지킨 세월이 얼마인데, 이미 손에 쥔 것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어린 계집 하나를 상대로 질투나 하고 있으니.”서 황후를 이야기하는 태후의 말투에는 답답함과 한심함이 그대로 묻어났다.손 상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황후마마께서도 폐하를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29화

    태후는 그 말을 듣고 흡족한 눈으로 금영을 바라보았다.“역시 선대 영안후가 직접 가르친 사람답구나. 참으로 영민해.”금영이 겸손히 답했다.“과찬이시옵니다, 태후마마.”태후는 손 상궁을 바라보며 분부했다.“내가 원비와 아기 황자에게 주려고 마련해 둔 선물을 가져오너라.”손 상궁은 두 가지 물건을 받쳐 들고 와 웃으며 말했다.“태후마마께서는 진작부터 아기 황자께 드릴 선물을 마련해 두셨사옵니다. 다만 원비마마께서 수강궁에 자주 발걸음하지 않으시다 보니, 노비들도 그만 소녕전으로 보내 드리는 것을 잊고 말았사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금영은 손 상궁이 자신에게 수강궁으로 문안하러 오지 않았던 일을 에둘러 지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금영은 곧바로 대답했다.“신첩은 태후마마께서 몸이 편찮으신 데다 소란스러운 것을 꺼리시어 조용히 요양하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래서 감히 함부로 찾아뵙지 못했사옵니다.”“신첩이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옵니다.”금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태후마마께서 신첩을 시끄럽다 여기지 않으신다면,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고 곁을 지켜 드리겠사옵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내관의 외침이 들려왔다.“황제 폐하 납시오!”금영이 고개를 돌렸다.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성큼성큼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걸음걸이만 보아도 꽤 서둘러 온 것이 분명했다.“어마마마.”황제가 먼저 인사를 올렸다.태후가 황제를 힐끗 바라보았다.“지금은 문안을 올릴 시각도 아닌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황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태후가 웃으며 짓궂게 물었다.“설마 금영을 데리러 오신 겁니까?”“내가 그저 불러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지, 잡아먹기라도 하겠습니까? 무엇이 그리 급하십니까?”황제가 태연하게 답했다.“소자가 어마마마를 뵙고 싶어 찾아온 것이옵니다.”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어마마마께서는 오늘 어찌 원비를 부르실 생각을 하셨사옵니까?”태후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황제께서 황후를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28화

    하지만 금영은 알고 있었다.태후가 오늘날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그만한 수완이 있었을 것이다.선황제의 후궁은 지금 황제의 후궁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복잡했다.지금 후궁이라고 해 봐야 사람도 몇 되지 않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대놓고 칼을 겨누고 뒤로는 계략을 꾸미며 온갖 암투를 벌이지 않는가.하물며 선황제 때의 후궁은 오죽했겠는가.금영은 태후가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를 알 수 없었다.우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태후마마께서 그때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겠사옵니다.”태후가 가볍게 웃었다.“됐다.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 무얼 또 꺼내겠느냐?”이어 금영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당부했다.“너도 이제 막 아이를 낳았지 않느냐. 산후조리가 끝났다 해도 몸은 계속 잘 돌봐야 한다. 찬 기운을 함부로 맞지 말거라. 나처럼 병이 뿌리내리기라도 하면 늙어서 고생한다.”그 말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금영도 얌전히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태후마마.”태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그리고 황제가 너무 제멋대로 굴게 두지도 말거라.”금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 굳었다.입궁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건만 황제와 그토록 무리하게 밤을 보낸 것은 어젯밤이 처음이었다.그런데 그 일 때문에 태후가 직접 이런 말까지 꺼내다니.금영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조금 민망하고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태후마마의 말씀이 옳사옵니다.”“훈계하려는 게 아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태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참, 오늘 너를 부른 데에는 다른 일도 하나 있다.”그러면서 여전히 온화하게 웃었다.금영은 곧바로 경계심을 세웠다.앞의 이야기는 결국 서두였던 모양이었다.이제부터가 본론이겠지.“곧 설이다. 지방에 나가 있는 황실 종친들도 돌아올 것이고, 외지에서 관직을 맡고 있던 관리들도 조정에 들어와 직무를 보고할 때가 되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궁에서도 황실 연회를 열지 않느냐.”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27화

    하지만 태후 역시 서씨였다.서 황후는 태후가 직접 서가에서 골라 들인 조카딸이었다.두 사람은 피로 맺어진 사이일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까지 함께하고 있었다.그러니 금영은 자신이 아무리 온 마음을 다해 태후의 환심을 사려 해도, 태후가 그 마음을 받아 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 해도 태후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금영은 밖으로 나서기 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손탁에게 일렀다.“폐하께 전해 주게. 본궁이 수강궁에서 돌아오면 폐하와 함께 매화원에 가서 매화를 보고 싶다고.”손탁이 공손히 대답했다.“예, 마마.”그제야 금영은 해수와 몇몇 내관을 데리고 수강궁으로 향했다.금영이 수강궁에 도착하자 태후는 뜻밖에도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였다.태후는 푹신한 평상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이마에는 청람색 말액(抹額: 이마에 두르는 좁고 긴 천 장식)을 두르고 있었는데, 안색을 보아하니 몸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태후가 금영을 바라보며 분부했다.“원비에게 의자를 하나 가져다주거라.”사실 금영은 아이를 낳은 뒤로 태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태후는 금영에게도, 그녀가 낳은 아이에게도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했다.여느 집안의 어른들과는 사뭇 달랐다.보통 집안이라면 아무리 아들의 여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손주에게는 어느 정도 마음을 쓰기 마련이었다.더구나 황제는 본래 후사가 귀한 편이었다.그런데 태후는 금영을 싫어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아기 황자에게까지 지나치게 냉담했다.물론 금영으로서는 오히려 그 편이 편했다.태후가 아기 황자를 보고 싶다며 찾아오거나, 아이를 수강궁에 두고 가라고 하기라도 했다면 마음을 놓을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태후가 설마 황제의 아이를 해치기까지 하겠는가.하지만 서 황후라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금영이 태후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태후마마, 혹…… 어디 편찮으신 것이옵니까?”태후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목소리는 자애로웠지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26화

    결국 오해는 풀렸다.다만 그 과정에서 금영이 치른 대가가 조금 컸을 뿐이었다.그날 밤, 금영은 그대로 현청전에서 묵었다.예전에는 황제가 정사를 보는 현청전에 그 어떤 여인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건만, 이제 현청전은 거의 금영의 또 다른 처소나 다름없었다.*서봉전.서 황후는 궁 안 곳곳에 눈과 귀를 심어 두고 있었다.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서 황후의 귀에 들어왔다.이른 아침부터 이전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찾아와 아뢰었다.“마마.”서 황후는 거울 앞에 앉아 단장을 하고 있었다.거울 속 여인은 여전히 화려한 궁의를 입고 있었으나, 더는 젊고 화사하던 시절의 얼굴이 아니었다.환옥은 어떻게든 서 황후를 한층 화사하게 꾸며 보려 애썼지만, 아무리 손을 대도 어딘가 예전 같지 않았다.사실 서 황후가 그리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예전에는 몸가짐과 용모도 무척 잘 관리해 왔다.그 속마음이 진작 검게 썩어 문드러졌든 말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화려하고 기품 넘치는 황후였다.하지만 금영이 입궁한 뒤부터 서 황후에게 금영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밤낮으로 속을 끓이느라 잠조차 편히 이루지 못했다.사람이 늙는다는 게 꼭 하루하루 천천히 오는 것만은 아니었다.어느 순간, 세월이 한꺼번에 얼굴 위로 내려앉기도 했다.그나마 오늘 아침은 드물게 서 황후의 기분이 괜찮았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전에게 말했다.“말해 보거라. 무슨 일이 있느냐?”그러고는 웃으며 덧붙였다.“경춘궁의 그쪽은 아직도 얌전히 있더냐?”어느덧 설이 코앞이었다.그런데 황제는 아직도 모두의 근신을 풀어 주지 않았다.서 황후야 이제 익숙해졌으니 그렇다 쳐도, 경춘궁의 그쪽까지 언제까지고 얌전히 근신하고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하지만 이전이 찾아온 것은 그 일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다른 일이 있었다.이전도 굳이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궁에서 이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 몸이니 어쩔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25화

    황제는 금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얼굴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짐이 어떻다는 것이냐?”금영은 마음을 다잡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남녀의 정이라는 게 꼭 잠자리의 즐거움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폐하께서 정…… 그 일이 어려우시다면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약을 너무 많이 드시면 몸이…… 몸이 상하시옵니다.”잠자리에서의 그런 일보다 금영에게는 황제의 몸이 훨씬 중요했다.사실 황제가 예전에 정말 어디를 다친 적이 있든 없든, 가만 생각해 보면 황제도 이제 철없는 소년은 아니었다.굳이 혈기만 앞서는 젊은이처럼 그런 일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황제가 금영을 바라보며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금영아, 짐이 이 약을 먹는 게…… 그 일을 제대로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냐?”황제는 그제야 깨달았다.사람이 정말 기가 막힐 만큼 화가 나면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금영이 힘들까 봐 그토록 배려했건만, 정작 금영은 자신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금영은 예전에 태자와 마음이 얽힌 적은 있었지만, 당시에도 늘 분수를 지켰다.태자 역시 고귀한 태자의 체통을 세우느라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입에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러니 금영이 사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황제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전부였다.사내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금영이 알 리 없었다.하물며 눈앞의 사내는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였다.금영은 진심 어린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위로했다.“폐하,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저희에게는 이미 아이까지 있지 않사옵니까. 그런 걸 잘하고 못하고가……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옵니다.”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속에 불이 가득 차 있던 참이었다.그런데 금영의 말은 그 불길에 기름을 들이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칠흑 같은 황제의 눈동자 속에 어두운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그는 말없이 금영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금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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