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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서린화

제1화

서린화
한겨울이었다.

굵은 함박눈이 쏟아지며 작산행궁(鹊山行宫: 황제가 사냥에 나갔을 때 머무는 별궁) 전체를 집어삼키듯 덮고 있었다.

금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벼랑을 휘몰아치는 찬 바람과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마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단번에 그녀를 덮쳐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열기는 점점 더 거세져, 이내 정신마저 삼켜버릴 정도였다.

그녀의 손에는 금비녀 하나가 꽉 쥐어져 있었는데, 이미 날카로운 날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통증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마지막 이성을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뒤쪽 눈 덮인 숲속에서 남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한 약을 먹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사람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다니. 찾아내면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자신이 다시 살아나다니, 그것도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절벽에 몸을 던지기 직전으로 돌아오다니, 금영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원래 그녀는 영안후부(永安侯府)의 유일한 적녀(嫡女: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였다.

흠천감(钦天监: 봉명과 길흉을 점치는 관청)은 오래전 예언한 바 있었다. 영안후부에서 태자비의 운명을 지닌 여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예언과 똑같이 마침 태자가 태어나던 해에 그녀도 태어났고, 자연스레 모두가 그녀를 미래의 태자비로 여겼다.

금영의 조부 역시 확신을 가지고 황제에게 혼인 교지를 받아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삼년 전, 조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금영은 아버지를 대신해 직접 조부의 유해를 모시고 고향인 회양(淮阳)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치렀다.

상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오던 길, 그녀는 작산행궁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때 마침 황제도 신하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모와 오라비, 게다가 정혼자까지 모두 이곳에 있다는 말에 금영은 곧바로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산행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정혼자이자 태자인 그의 초대를 받아, 함께 근처 설림에서 눈을 감상하기로 한 날이었다.

금영은 어릴 적부터 몸가짐을 조심해 사사로이 외간 남자를 만나는 일을 삼가왔다. 그러나 정혼자인 태자와의 약속이었고, 혼례도 머지않은 상황이었기에 기꺼이 응했다.

하지만 태자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웬 산적 두 명 뿐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오기 전, 황후가 하사한 강주(姜酒: 생강 술) 한 잔을 마셨는데, 뒤늦게 그 안에 미약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금영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즉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채, 얼어 죽기 직전의 상태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킨 순결이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믿었던 가족들조차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라고 등 떠밀었다.

“산적에게 붙잡힌지 하룻밤이나 지났는데, 누가 그 결백을 믿겠느냐.”

“금영아, 너만 생각하면 안 된다.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지.”

“널 아끼는 건 사실이나… 이 일은 황실의 체면이 걸린 일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결국 그녀는 황후가 내린, 태자비의 상징이었던 봉황이 새겨진 비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비녀에 영혼이 묶인 채 삼년을 떠돌았다.

금영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태자는 그녀의 여동생 배명월을 배필로 맞아들였다.

붉은 비단이 영안후부와 태자부(太子府)에 깔렸고, 배명월은 금영이 자결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봉황 비녀를 꽂고 태자비가 되었다.

부모는 물론 오라비까지 모두 배명월을 아끼며 살뜰히 챙겼다. 마치 금영이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가끔 그녀를 떠올리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녀가 천벌을 받은 것이라며, 지난 열여덟 해 동안 배명월의 운명을 대신 살아온 죄값을 치른 것이라고 헛소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금영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었던 바로 이 날로 돌아왔다.

다만 이미 그녀의 운명을 뒤틀어버린 독주를 마신 뒤였다.

금영은 다시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느꼈고, 강제로 회상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도망쳐!”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우리한테 몸을 바쳐!”

“여긴 아무도 없는 설림이다! 널 구하러 올 사람은 없어!”

차가운 바람을 타고 산적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설림…?’

그 말이 번개처럼 금영의 머리를 때렸다.

‘아니야, 있어.’

회귀 전,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옴짝달싹 못하던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근처를 순찰하던 호위들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급히 산꼭대기에 있는 폐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실의 군사가 움직일 정도라면, 그 존재는 분명 몹시 귀한 인물일 터였다.

지금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지금 상태로 찾아간다면 순결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과거, 목숨까지 바쳐 순결을 지킨들 가족들의 손에 떠밀려 죽음을 맞이하는 길뿐이었다.

차라리 이 몸을 담보로 더 큰 권력에 기대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런 터무니없는 명분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결심이 서자 금영은 비녀를 머리에 꽂고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산 정상을 향해,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작산행궁 직설전(织雪殿)은 눈 절경을 위해 지어진 전각이었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폐궁이 된 곳이었다.

그녀가 직설전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 이미 그녀의 몸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금영은 거의 뛰어들다시피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고, 곧 맑고도 서늘한 소나무 향이 그녀를 감쌌다.

안에 있던 사람은 당황한 듯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약에 취해 이성을 잃은 금영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매달렸다.

“놔라.”

아무리 밀쳐내도 다시 들러붙는 금영의 끈기에, 상대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금영은 끝내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그를 끌어안으며 흐트러진 몸을 밀착시킬 뿐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이성을 잃은 눈빛, 위태로운 요염함이 흘러나왔다.

“부탁이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와 따뜻한 숨결에, 남자의 몸이 굳었다.

잠깐 스친 욕망에, 그는 분노를 눌러 담았다.

“방자하구나.”

낮고 냉엄한 음성이 귀 옆에서 울렸다. 그러나 금영은 물러설 수 없었다.

몸속을 갉아먹는 열기가 그녀를 미치게 하고 있었고, 남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차가운 기운만이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 세게 매달렸고, 급기야 그의 옷깃을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억눌린 분노가 서린 목소리였다.

금영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깊은 심연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산하를 담은 듯 고요하고, 위엄이 서린 눈.

서른을 갓 넘긴 듯한 나이, 검은 옷차림, 범상치 않은 기운…

그제야 금영은 깨달았다.

“폐하…?!”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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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42화

    유진설은 계속해서 말했다.“부친과 모친께서 제 혼담을 논하려 하신답니다. 그래서 저를 집에 가둬 두고 예법을 배우게 하셨사옵니다! 오늘 황실 연회가 아니었다면 저는 밖에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옵니다!”이 이야기가 나오자 유진설은 평소의 생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금영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전생에서 자신이 죽은 뒤, 유진설은 태자와 배명월의 혼례를 크게 어지럽혔다.그리고 장평군주에 의해 변방으로 보내졌다.금영이 귀신으로 떠돌던 삼 년 동안, 유진설은 물론이고 그 누구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유진설은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하지만 훗날 금영은 진서 장군 휘하에 목진이라는 젊은 장수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그것도 진서 장군이 목진을 위해 책봉을 청하는 서신을 올렸을 때에야 알게 된 일이었다.그때 금영은 어렴풋이 느꼈다.그 목진이라는 사람이 유진설과 분명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하지만 금영이 그 일을 알아내기도 전에.그녀는 긴 꿈을 꾼 듯 다시 눈을 떴고, 곧 회귀한 삶이 시작되었다.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죽지 않았고, 유진설 역시 자신 때문에 태자와 서 황후에게 미움을 살 일도 없었다.그러니 지금은 장평군주에게 보내질 일도 없이, 오히려 혼담을 논하게 된 것이었다.금영은 유진설을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둔 사람이 있느냐? 만약 있다면 본궁에게 말하거라. 본궁이 폐하께 아뢰어 너를 위해 하사 혼인을 청해 주겠다.”유진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말했다.“마마, 아직도 저를 벗으로 여기신다면 부디 그 말씀만은 하지 마시옵소서!”장평군주는 유진설이 금영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천천히 다가왔다.그녀는 먼저 금영에게 예를 올렸다.그리고 곧 유진설을 꾸짖었다.“진설아, 어찌 마마께 무례하게 굴 수 있느냐! 집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 잊었느냐? 입궁한 뒤에는 자신을 신녀라 해야 한다!”“그리고 마마께서 네 혼사를 걱정해 주시는 것은 너에게 복된 일이거늘!”금영이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41화

    하지만 하필이면 금영은 배명월이 체면을 구기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그녀 역시 마음이 좋지 않은 참이었다.“명월.”배경천이 배명월을 불렀다.배경천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배명월에게 건넸다.“명월, 네가 또 한 살을 더 먹었구나. 이것은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새해 선물이다.”배경천의 손에 들린 물건은 비단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그는 말을 하며 손에 든 보자기를 펼쳤다.그 안에는 정교하게 만든 봉황이 새겨진 비녀 하나가 들어 있었다.배경천은 손을 들어 배명월 앞에 조금 내밀었다.하지만 배명월은 배경천의 손을 단번에 뿌리쳤다.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오라버니의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까?”봉황이 새겨진 비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배명월은 앞으로 걸어가며 그 비녀를 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배명월이 떠난 뒤에도 배경천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다 천천히 손을 뻗어 망가진 비녀를 주워 들었다.그 순간 배경천의 얼굴은 더없이 어두워졌다.*그사이 금영은 이미 심연희와 함께 전각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가는 길에 심연희가 조용히 불평했다.“마마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요즘 태자비마마께서는 며칠에 한 번씩 영안후부에 오시옵니다. 이것저것 보내시기도 하고, 또 다른 물건을 보내시기도 하옵니다.”“마치 저희와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말이옵니다.”심연희의 목소리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금영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영안후부의 두 아씨 사이에 있었던 일은 심연희가 시집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금영은 조용히 심연희의 손을 두드리며 웃었다.“셋째 오라버니와 셋째 새언니도 참 곤란하겠구나.”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정면에서 서왕 세자 소성원과 마주쳤다.마주친 순간, 그는 똑바로 금영을 바라보았다.금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이 망할 놈이!어찌하여 황실 연회에 온 것이란 말인가?소성원이 태자에게 다리가 부러진 뒤로 금영은 오랫동안 그를 본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40화

    배경원과 심연희는 모두 체면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게다가 궁중 연회 자리에서 영안후부의 체면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만약 그 자리에서 보기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은 영안후부의 가풍이 바르지 않다고 여길 것이고, 그 일은 금영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터였다.그렇기에 배명월에게는 오히려 파고들 틈이 생겼다.한쪽 구석에 서 있던 배경천은 이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앞으로 두 걸음 걸어 나갔다.“명월.”배경천이 그녀를 불렀다.배명월이 고개를 돌려 배경천을 바라보았다.그 틈을 타 배경원은 심연희를 데리고 조용히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배명월은 담담하게 물었다.“둘째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방금 전까지 보였던 살갑고 애교 어린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차가운 거리감만이 가득했다.배경천은 그런 배명월을 바라보며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잠시 침묵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나는……”그때 배명월은 배경원이 떠난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배경천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곧장 걸음을 옮겼다.“셋째 오라버니! 셋째 새언니!”배명월이 뒤쫓아오자 배경천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를 따라갔다.배경원과 심연희는 마침 금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마마, 이것은 지아비가 특별히 마마를 위해 준비한 세찬이옵니다.”심연희는 궁비의 손에서 물건을 받아 금영에게 두 손으로 올렸다.금영은 손을 뻗어 심연희가 건넨 대나무 쟁반을 받아 들었다.그 위에는 정교하게 만든 두면(頭面: 머리에 쓰는 장신구와 장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 하나와 아이가 착용할 목걸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마마께서는 궁 안에서 부족한 것이 없으시다는 것을 알기에, 혹여 마음에 들지 않으실까 염려되옵니다.”심연희가 웃으며 말했다.금영도 미소를 지었다.“어찌 싫어하겠느냐? 본궁은 아주 마음에 든다.”사실 예전에도 매년 새해가 되면 선물이 있었다.금영이 회양에 머물던 시절에도 배경천은 세뱃돈으로 쓸 물건을 따로 준비해 사람을 보내 전해 주곤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39화

    말을 하면 할수록 서 황후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지난번에는 한 번의 계책으로 이황자와 배금영 뱃속의 그 천한 것까지 함께 없애 버릴 수 있었다.하지만 한 수가 모자랐다.결국 어느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서 황후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가슴속이 몹시 답답해졌다.초조함도 갈수록 심해졌다.어떻게든 지금의 곤경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했다.설마 이대로 손을 놓고 당하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총애를 잃은 데 이어 권세마저 잃는다면……*며칠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어느덧 설이 코앞이었다.해수가 진홍빛 고급 비단으로 지은 궁복을 받쳐 들고 와 물었다.“마마, 황실 연회에는 이 옷을 입으시는 것이 어떠시옵니까?”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해수가 얼굴에 진주로 화전을 장식해 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단장이 모두 끝나자 해수는 눈앞의 금영을 바라보며 감탄했다.“노비가 보기에는 마마께서 예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지신 듯하옵니다!”금영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런가?”거울 속 금영에게서는 예전의 앳되고 풋풋한 기색이 한결 옅어져 있었다.눈길이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빛이 감돌았고, 눈매에는 어느새 여인의 은근한 정취마저 어려 있었다.몸은 여전히 가녀렸지만, 예전보다 선이 한층 곱고 아름답게 살아났다.진홍빛 궁복은 금영의 빼어난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도 고귀한 기품을 잃지 않게 했다.금영이 입을 열었다.“손탁, 복령. 두 사람은 남아서 아기 황자를 지키게.”이어 단단히 당부했다.“잘 기억해 두게. 본궁과 폐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아기 황자에게 가까이하게 해서는 안 되네.”금영은 이미 아기 황자가 너무 어려 찬바람이라도 맞을까 염려된다며 황제에게 아뢰어, 이번 황실 연회에는 데려가지 않기로 허락을 받아 둔 상태였다.지난 만월연에서 있었던 일은 황제에게도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그 때문에 황제는 소녕전의 경비를 한층 더 강화했다.특히 암위 네 명을 따로 붙여 두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38화

    복령은 해수의 말을 듣자 얼굴에도 경계심이 떠올랐다.“마마, 설마 이 비단 안에 사람을 해칠 만한 것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겠사옵니까?”금영이 말했다.“비단 한 필일 뿐이다. 설령 정말 좋지 않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물에 씻어야 하지 않겠느냐.”“게다가 현비의 수단이라면, 정말 본궁에게 손을 쓰고 싶었다면 굳이 경춘궁에서 보낸 물건에 독을 넣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서 황후가 보낸 물건에 독을 쓰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그렇다면 대체 무슨 뜻일까요? 노비가 보기에는 이게 바로 여우가 닭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온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좋은 뜻이 있을 리 없사옵니다.”해수는 협방전에서 여비가 자신의 마마를 오해했던 일을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마마, 부디 조심하시옵소서. 작은 은혜와 호의에 마음이 약해지셔서는 아니 되옵니다.”“노비가 보기에는 이 후궁 안에 쉬운 여인은 하나도 없사옵니다. 지금 당장은 마마께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해도, 훗날 무슨 일을 꾸밀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옵니다.”해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금영은 웃으며 말했다.“본궁이 이 물건에 해칠 뜻이 없다고 말한 것은, 현비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금영이 이어 말했다.“그녀가 이렇게 한 것은 본궁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본궁을 통해 폐하의 환심을 얻으려는 것이다.”보아라.황제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다른 궁에 하사품을 내리지 않으셨던가.그런데 지금 현비가 자신의 처소에 쇄성단을 보내자, 황제께서는 곧바로 경춘궁에 하사품을 내리려 하신다.다른 사람들은 황제께서 왜 현비에게 상을 내리시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더욱이 황제께서 그 안에 담긴 뜻이 서로 주고받는 것과 같은 것임도 알 수 없을 것이다.사람들이 알게 될 것은 단 하나였다.현비가 다시 황제의 총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비록 이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물 위에 비친 달처럼 허상에 가까워 보일지라도.하지만……그것만으로도 현비가 이 기세를 빌려 다시 일어서는 데에는 충분했다.

  •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제837화

    현비는 춘로를 흘끗 바라보았지만 부정하지 않았다.오늘 있었던 일을 누군가 직접 보았다면, 그 이야기가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그리고 황제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더욱 품행이 바르고 어진 사람이라 여기실 터였다.“하지만 마마, 정말 그 쇄성단을 소녕전에 보내실 생각이시옵니까? 그건 특별히 사람을 시켜 마마를 위해 짜낸 비단이옵니다. 마마께서 그 쇄성단으로 만든 옷을 입으신다면 황실 연회에서 누구보다 눈부시실 것이옵니다.”“그때가 되면 폐하께서 분명 마마를 찾으실 것이옵니다.”춘로가 아첨하듯 말했다.현비는 그 말을 듣자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부친께서는 그리도 본궁이 폐하의 총애를 받기를 바라시는 것이냐?”그 말을 한 현비는 차갑게 덧붙였다.“그 물건들은 모두 원비에게 보내거라.”*황제는 아직 소녕전에 있었다.이때 황제는 금영과 함께 아기 황자를 둘러싸고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 있었다.작디작은 아기는 이따금씩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에 황제의 얼굴에는 줄곧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폐하! 마마! 경춘궁의 춘로가 뵙기를 청하옵니다.”손탁의 전갈이 들려왔다.금영이 말했다.“들여보내거라.”춘로가 들어오자 황제가 흘끗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방금 돌아간 것이 아니더냐? 어찌 또 왔느냐?”“폐하께 아뢰옵니다. 저희 마마께서 노비에게 원비마마께 쇄성단을 전해 드리라 하셨사옵니다.”춘로는 그렇게 말하며 뒤에 있던 궁비에게서 쟁반을 받아 직접 금영 앞까지 가져갔다.“마마, 이 쇄성단은 운군에서 나는 것으로, 일 년 동안 만들어지는 양이 얼마 되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몸매가 가녀리시니, 옷 한 벌을 짓기에는 충분할 것이옵니다.”춘로가 이어 말했다.금영이 바라보았다.그것은 마치 은하수처럼 빛나는 한 필의 비단이었다.전각 안에서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그 위에는 부서진 별빛처럼 반짝임이 일었다.과연 보기 드물 만큼 아름답고 귀한 물건이었다.황제가 웃으며 말했다.“그대의 마마께서 평소 그 쇄성단을 그리 아끼시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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