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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1 11:21:44
본일은 태블릿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다. 비서가 가져다 놓은 커피에서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요 며칠 머릿속 한편을 맴돌던 얼굴이 예고도 없이 떠올랐다.

<유건>

본일은 딱히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적어도 어린 유건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반가울 이유가 없는 아이였다. 달갑지 않은 남자의 아이, 물론 자신 좋아했던 여자의 아이이기도 했지만 그때의 본일에게는 전자의 사실이 조금 더 컸다.

그래서 처음 유건을 만났을 때도 별다른 감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혜원의 곁에 서 있는 조그만 아이를 내려다봤을 때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을 잠시 바라보다 본일은 자기도 모르게,

“건아.”

라고 부르고는 흠칫했다.

한 번도 그렇게 부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 뒤로 이상하게도 입에 붙었다.

“건아”

어릴 적 유건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본일뿐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본일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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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8화

    “갑자기 왜요?”서하가 새로 채워진 와인잔을 들었다. 잔 너머로 재혁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일그러져 보였다.“갑자기 아닌데.”재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럼 평생 이렇게 연애만 하려고 했어?”그제야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두 손을 맞잡아 테이블 위에 올린 재혁이 서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눈빛만큼은 아니었다. 평온한 표정 아래 감춰진 날카로운 무언가가 서하를 가만히 겨누고 있었다.“진짜로 나랑 결혼할 생각이에요?”“응.”망설임이 없었다. 서하는 잠시 재혁을 바라보다 기어코 실소를 터뜨렸다.“웃겨.”재혁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이유를 물어봐도 돼요?”“내 거니까.”이번에는 서하가 웃지 않았다. 재혁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게 더 기가 막혔다.“박재혁 씨.”서하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이혼한 지 1년도 안 됐어요.”“마음 떠난 건 훨씬 오래됐어.”“그거 되게 진부한 말인 거 알죠?”“알아.”“전처한테도 그렇게 말했어요?”잠깐의 침묵이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아니.”“그럼 다행이고.”서하는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는 듯 의자를 조금 뒤로 뺐다.“싫어?”“뭐가요.”“나랑 결혼하는 거.”싫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제주도에서 재혁에게 전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묘하게 차오르던 소유욕이 아직 남아있긴 하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긴 세월. 다른 여자와 살고, 아이를 낳고, 가족이었던 시간. 그 시간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위를 자기와의 기억으로 전부 덮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재혁이 무언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했다.그런데 결혼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좋아하는 것과 함께 사는 것, 갖고 싶은 것과 서로의 인생을 묶는 것. 그건 아무래도 같은 말이 아니었다.“……모르겠어요.”재혁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사라졌다.“모른다고?”“네.”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7화

    본일은 태블릿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다. 비서가 가져다 놓은 커피에서는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요 며칠 머릿속 한편을 맴돌던 얼굴이 예고도 없이 떠올랐다. 본일은 딱히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적어도 어린 유건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반가울 이유가 없는 아이였다. 달갑지 않은 남자의 아이, 물론 자신 좋아했던 여자의 아이이기도 했지만 그때의 본일에게는 전자의 사실이 조금 더 컸다. 그래서 처음 유건을 만났을 때도 별다른 감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혜원의 곁에 서 있는 조그만 아이를 내려다봤을 때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을 잠시 바라보다 본일은 자기도 모르게, “건아.” 라고 부르고는 흠칫했다. 한 번도 그렇게 부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 뒤로 이상하게도 입에 붙었다. “건아” 어릴 적 유건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본일뿐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본일은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내 아이가 생기면 어떤 기분일까. 나를 닮은 아이가 자신을 올려다보면, 지금보다 더 깊은 감정이 들까. 하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유건은 어느새 스무 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날 식당에서 마주 앉은 유건을 보며 본일은 몇 번이나 묘한 기분을 느꼈다. 훌쩍 자란 얼굴 위로 스무 살 무렵 자신의 모습이 얼핏얼핏 겹쳤다. 웃을 때보다 무표정할 때 더 그랬다.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 버릇, 상대의 말을 들을 때 고개를 조금 기울이는 모습. —-우연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닮는 데 꼭 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하필 그날 마주친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 자네를 꼭 빼닮았네.’ 그 자리에서는 웃어넘겼다. 회장님의 눈이 많이 안 좋아지신 모양이라고 농담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았다. “하…….” 본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커피를 다시 들이켰다.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6화

    서하는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유건은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어느새 카페는 마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직원이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하나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집으로 돌아와 별 의미도 없는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았다. 화면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데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자꾸 휴대전화로 시선이 갔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슬픈 건 슬픈 거였다. 돌이켜보면 서하에게는 언제나 끝이 아닌 듯 끝난 관계만 있었다. 연락이 뜸해지고, 만나는 횟수가 줄고, 어느 순간 서로 찾지 않게 되고.그렇게 흐려지다가 사라지는 관계들. 매듭을 지은 적은 없었다.어쩌면 서하는 그게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지금 만나지 않는 것과, 이제부터 우리는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니까.겨우 잠이 들었지만 새벽 무렵,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웠다. 서하는 한동안 누운 채 빗소리를 들었다.그러다 이유도 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유건]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전화했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속초에 갔던 밤처럼, 충동으로 시작했던 두 사람의 관계처럼.신호가 길어졌다. 역시 안 받나 보다.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통화가 연결됐다.“여보세요?”대답이 없었다. 대신 빗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목소리인지 안내방송인지 모를 소리도 뒤섞여 있었다.“유건?”서하가 몸을 일으켰다.“여보세요?”한참 뒤 무언가를 억지로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그리고—“누……나.”서하의 표정이 굳었다. 평소의 유건 목소리가 아니었다.“응. 나야.”다시 긴 침묵.“어떡해…….”그 한마디에 서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어디야?”대답을 들으며 옷을 걸쳤다.차 키를 집어 들고 집을 빠져나왔을 때도 아직 바깥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비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움직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5화

    정신없이 뛰어간 병원에서는 수술이 진행 중이었다. 중환자실 앞 의자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영원히 멈춘 것 같기도, 영겁인거 같기도 했다. — 무슨 일이냐고, 도대체 왜.유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만 내려다봤다. 얼마 지났을까. 복도 끝에서 한 중년 여자가 거의 뛰다시피 들어왔다.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여자는 경찰을 붙잡고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우리 애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누가 그런 거냐고.경찰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했다.— 학교 건물, 3층, 남학생의 폭행, 반항, 추락 떨어져 나온 단어들이 파편이 되어 유건의 가슴에 박혔다. - - -병원을 나왔을때는 어스름히 해가 뜨려고 했다. 아직은 밤같은 새벽이다. 몸이 이끄는대로 지하철로 내려간다. 첫차를 탄다. 채원에게 전화를 건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받을거 같다. “왜, 유건!” 하고 밝게 얘기 해줄거 같다. 신호음조차 가지 않는 전화에서는 만이 반복됐다. 몇번이고 건다. [일어났어?]항상 칼답하던 톡의 1이 없어지지 않는다. 유건은 숨이 콱 막힌다. 어디에도 출구가 없는 미로에 떨어진 거 같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유건은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인다. 그때 태클로 다리를 부러뜨렸어야 했다. 다시는 걷지 못하게 하반신 불구를 만들었어야 했다. 아니 그냥 죽여 버릴 걸. 유건이 주먹으로 자기 허벅지를 세게 내리친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흠칫하며 유건을 바라봤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몇 칸 떨어진 곳으로 옮겨 앉았다.“……나랑 사귈래?” 달빛에 비추던 채원의 얼굴, 조심스레 말하던 입술. 그 때 그러자고 했어야 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었을까. — 그래, 그러자.아니면, — 나도 너 좋아해.그 한마디면 됐었는데. 그랬다면, “안 사귀는 거지?” 그 새끼가 물었을 때 내 여친이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4화

    그냥 평범한 하루였다. 나중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날씨도, 사람들도, 거리의 풍경도 특별할 게 없었다. 살면서 천 번쯤 반복됐을 법한 하루였다.유건은 오전에 동아리 축구 연습을 갔다. 비슷한 패스를 하고, 비슷한 킥을 찼다. 공을 빼앗기면 욕을 했고, 골이 들어가면 웃었다. 쉬는 시간에는 잔디에 드러누워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기도 했다.딱 하나 옥에 티가 있었다면 그 자식의 도발뿐이었다. 연습 중간, 유건은 벤치에 앉아 이온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올리는데 누군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그 자식이었다. 유건은 모른 척 병을 기울였다. 잠시 후 놈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너 채원이랑 사귀냐?”유건이 병에서 입을 뗐다.“뭐?”“아니. 애들이 너랑 걔랑 사귀는 것 같대서.”“뭔 소리야. 아니.”대답하고 나니 괜히 기분이 더러웠다. 사귀어도 너 같은 놈한테 보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놈이 다시 물었다.“그래?”유건이 옆을 봤다.“뭐가.”“안 사귀는 거지?”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건은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야.”뒤에서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필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평범한 하루에 끼어든, 잠깐의 불쾌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연습이 끝난 뒤에는 잠깐 집에 들렀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오랜만에 휴가를 나온 친구를 만났다. 몇 명이 더 합류해서 볼링을 치고, 스크린 야구를 하고, 술을 마셨다. 시끄럽게 웃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고, 별것 아닌 일로 욕을 했다.그 사이 채원에게서 전화가 한 번 왔다.[부재중 전화]유건은 화면을 확인하고도 바로 전화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 해야지.그러고는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야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다.신호는 오래 갔다. 채원은 받지 않았다.‘자나.’그게 전부였다.다음 날 유건은

  • 그냥 지루했을 뿐이야   93화

    서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격렬한 시간의 잔상이 아직 아래쪽에 뻐근하게 남아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콘돔과 딜도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유건도 그랬었는데. 그 애와 함께 있을 때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첫 만남부터 알몸으로 시작했었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씻고 나온 재혁이 침대로 다가와 서하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마사지해줄까?”서하가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잘해요?”“그럼.”재혁아 오일을 가져왔다. 손바닥에 덜어 비빈 뒤 서하의 등에 골고루 펴 발랐다. 생각보다 손힘이 좋았다.“아…… 시원해.”“그렇지?”뭉친 어깨에서 등으로, 다시 허리까지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서하가 간지러운 듯 몸을 움찔했다.“가만있어.”“간지러워요.”“흡수되게 잠깐만 더 누워 있어. 나 메일만 확인하고 올게.”“맨날 바빠.”“금방.”“다녀와요. 나 잠들지도 몰라.”재혁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그럼 깨우면 되지.”“안 일어날 건데.”“방법은 많아.”“웃겨.”서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잠시 후 서재 쪽에서 희미한 키보드 소리가 들려왔다. 서하는 눈을 감고 듣다가 침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메시지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건이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뒤로 온 연락은 딱 하나였다.[누나 언제 시간 돼. 할 말 있어.]서하는 아직 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였을까. 여자친구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이었다. 미래의 내연관계니 뭐니, 웃으면서 시작한 사이. 하지만 서로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관계를 오래 끌 수 없다는 것쯤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만약 또래였다면? 어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귀자고 했을거다. 그런 것치고는 꽤 오래 만났다. 젊고 싱싱한 몸,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수했던 마음.서하는 화면 속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이제 끝낼 때가 왔나 보다.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주말에 시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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