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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Author: 서홍
“이곳에서 무슨 소란이냐?”

공기를 찢는 묵직한 호통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소무경은 어느새 궁문 앞에 서 있었다. 조회를 방금 마친 듯, 조복조차 갈아입지 못한 차림새였다.

그의 시선이 얼음장 같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뺨이 붉게 부어오른 서하연에게 머물렀다. 이어 잔뜩 독기를 품은 유해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무경의 미간이 깊게 비틀렸다.

유해원은 소무경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기다렸다는 듯 억울한 척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폐하, 숙비의 오만방자함을 좀 보시옵소서! 신첩이 그저 약간의 훈계를 더했을 뿐이거늘, 저 아이는 제 아비인 서태사의 권세를 들먹이며 신첩을 핍박하였습니다! 구구절절 말대꾸를 일삼으며 행실을 뉘우칠 기색조차 보이지 않기에 신첩이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그만...”

소무경은 서하연의 얼굴에 남은 상흔을 가만히 응시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위로 선명하게 돋아난 붉은 종창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소무경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눈물을 흘리는 유해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가 끝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황후의 상처.

그 지독한 부채감이 가슴속 통증을 순식간에 짓눌러 버렸다.

그는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황후를 문책하여 그 위엄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소무경은 서하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음성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숙비, 정녕 네 죄를 모르겠느냐? 황후가 육궁을 관장하며 후궁들을 훈육하는 것은 마땅한 본분이거늘, 감히 윗사람을 능멸하고 황후를 진노케 하였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 하느냐?”

서하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바닥에 깔린 잔설보다 차가웠고, 살을 에이는 삭풍보다 날카로워 소무경의 가슴 깊은 곳을 찔러왔다.

원망도, 애원도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황량한 깨달음만이 그 맑은 눈동자에 넘실거렸다.

서하연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얼어붙은 바닥에 이마를 갖다 댔다.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고요했다.

“신첩... 죄를 청하옵니다. 폐하와 황후마마의 처분을... 달게 받겠나이다.”

‘처분’이라는 두 글자가 허공에 가볍게 흩어졌으나, 소무경의 심장에는 흡사 거대한 철퇴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문득 어젯밤 그녀가 뱉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폐하, 간택을 널리 행하시어 현숙한 규수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이소서.”

그 기억이 도화선이 되어 가슴속에서 정체 모를 화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소무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제왕의 냉혹함만이 남아 있었다.

“숙비는 언행이 방자하여 황후를 모독하였으니, 오늘부로 장신궁으로 거처를 옮겨 문을 닫고 자숙하라. 내 전교가 있기 전까지는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장신궁.

서쪽 육궁 중에서도 가장 외진 구석에 자리해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사실상 냉궁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때, 유해원의 두 눈에 잔인한 희열이 스쳤다.

서하연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가냘픈 몸을 내려다보던 소무경은 가슴을 짓누르는 정체 모를 조바심에 휩싸였다.

그는 거칠게 소매를 휘두르며 돌아섰다.

“가마를 대령하라!”

이윽고 황제의 행차 행렬이 멀어져갔다.

서하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어붙었던 무릎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강하게 밀려왔다. 심복 시녀인 청아가 황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청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마, 어서 처소로 가시지요…”

“그래.”

서하연의 목소리는 아주 가냘팠다.

“짐을 챙기거라. 처소를 옮길 것이다.”

장신궁은 아니나 다를까 소문대로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전각 내부에는 거미줄이 뒤엉켜 있었다.

청아가 아랫사람들을 단속해 온종일 먼지를 털어내고서야 겨우 사람이 누울 만한 온기가 돌았다.

깊은 밤, 청아는 서하연의 얼굴에 약을 바르며 한숨을 쉬었다.

구리거울 속에 비친 서하연의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반쪽 뺨은 흉하게 부어올랐고 입술 끝에는 붉은 핏덩이가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러나 거울 속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도 고요했다.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심해처럼 기괴할 정도의 침묵이 감돌았다.

“청아야. 너는 내가 지난 세월 동안 너무 인내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느냐?”

청아가 약을 바르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게 늘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라 하셨고, 대국을 살피라 가르치셨지.”

서하연은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가르침을 받들어 세 해를 참았다. 내 아이가 품에서 빼앗겨 갈 때도 참았고, 눈밭에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았으며, 오늘의 이 뺨을 맞으면서도 참았느니라...”

그녀가 고개를 돌려 청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허나, 내가 인내하여 얻은 것이 무엇이더냐?”

청아는 잠시 멈칫했다. 거울 속에 비친 주인의 낯선 눈빛에 순간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마마… 마마께서는 대감마님을 위해, 그리고 대국을 위해 결단을 내리신 것이옵니다…”

“내 아버지를 위해, 대국을 위해…….”

서하연은 나직하게 읊조리며 차가운 거울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 대가로 나는 언제까지고 도마 위의 고기 신세가 되어 남들의 칼날에 휘둘려야 한단 말이냐? 내 아이 하나 지키지 못하고, 아버지의 명예마저 사람들이 마음대로 짓밟게 내버려 두면서?”

그녀가 손가락을 거두자, 손끝에 차디찬 한기가 서려 있었다.

“인내가 가져온 것은 오직 한계 없는 모욕과 끝없는 박탈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청아를 바라보았다.

서하연의 눈동자 속에서는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더니, 이내 전혀 다른 형상으로 다시 맞춰지고 있었다.

“가서 내 자단나무 상자를 가져오너라.”

그 상자는 혼인할 때 서씨 가문에서 가져온 혼수 중 하나로, 줄곧 창고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던 물건이었다.

청아가 상자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열자,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은 옛 물건들이 드러났다.

서책 몇 권과 시고 한 묶음, 몇 점의 인장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 빛바랜 그림 한 점이 둘둘 말려 있었다.

서하연은 그림을 꺼내 책상 위에 천천히 펼쳤다.

그림 속에는 세 해 전, 개선 행렬 속에서 말을 타고 눈밭을 가르던 소년 장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황제가 되기 전의 소무경이었다.

입궁하기 전날 밤, 그를 연모하는 마음을 담아 밤새 그렸던 화폭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가당치도 않게 가소로울 뿐이었다.

서하연은 책상 앞으로 다가가 묵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러더니 화폭 속 사내의 옷자락 귀퉁이에 아주 작게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세한 글씨였다.

서하연은 먹이 마르도록 부드럽게 숨을 불어넣은 뒤, 그림을 다시 정성스럽게 말아 청아에게 건넸다.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하거라. 단 한 방울의 먼지도 묻지 않게, 절대 훼손되지 않도록 정갈히 다루어야 한다.”

청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잘 간직해 두거라.”

서하연이 창밖의 짙은 어둠을 처연하게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이 그림이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올 테니.”

그 눈빛에 청아는 원인 모를 전율을 느꼈다.

“마마,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아무 생각도 없다.”

서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폐하께서 서산으로 군사 열병을 나가시는 날이 언제더냐?”

“사흘 뒤이옵니다.”

“좋다.”

서하연은 창밖의 마른 가지를 응시하며 차갑게 명했다.

“네가 나를 대신해 일을 하나 처리해 주어야겠다.”

그날 밤, 청아는 장신궁의 담벼락을 넘어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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