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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Author: 서홍
출궁을 앞두고, 소무경은 장신궁을 찾았다.

마당에서 볕을 쬐고 있던 서하연은 그의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법을 갖추었다.

“짐은 서산에 사흘간 머물 것이다. 너는... 몸을 잘 추스르고 있거라.”

서하연의 여전히 붉게 부어오른 뺨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던 소무경은 끝내 입술을 다물며 말을 삼켰다.

“신첩, 폐하를 배웅하옵니다.”

소무경은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더니 소매 안에서 자그마한 백자 병 하나를 꺼내 놓았다.

“어혈을 가라앉히는 고약이다. 바르거라.”

서하연은 그것을 받아들었으나, 끝끝내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소무경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서하연은 손에 쥔 백자 병을 가만히 응시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가마 행렬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어 침묵만이 남았을 때, 그녀는 마침내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때, 바닥에 부딪힌 백자 병이 처참하게 깨어지며 걸쭉한 약고가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마마!”

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치우거라.”

서하연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사흘 뒤.

궁내에 은밀한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숙비가 입궁하기 전, 마음 깊이 연모하던 정인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시를 주고받으며 가약을 약속했던 수려한 공자가 있었다고. 얄궂은 간택령만 아니었다면 필시 대륙이 칭송할 가약이 되었을 것이라는 살이 붙었다. 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숙비가 궁에서 한 폭의 초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그림 속 준수하고 풋풋한 소년은 단연코 폐하가 아니었다는 구체적인 목격담까지 돌았다.

그렇게 추문은 마른 벌판의 들불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육궁을 집어삼켰다.

그날 오후, 황후는 궁의 기강을 바로잡고 해괴한 유언비어를 척결하겠다는 구실로 서하연을 장신궁에서 자신의 처소인 봉의궁으로 압송하듯 불러들였다.

“감히 황후를 더럽히고 궁을 모독하다니. 서하연, 네 년이 정녕 미친 것이냐.”

유해원의 음성은 낮았으나 문장마다 서슬 퍼런 독기가 묻어났다.

“폐하께서 궁을 비우신 지 단 하루다. 그런데 이토록 추잡하고 천박한 소문이 온 궁을 뒤덮다니. 네 년이 음욕을 참지 못해 날뛴 것이냐, 아니면 본래 너희 서가의 뼈대가 그토록 비루하고 상스러운 것이냐?”

얼음장처럼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은 서하연은 척추를 대나무처럼 곧게 세우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일 뿐입니다. 황후마마, 마마의 혜안으로 헤아려 주시옵소서.”

“터무니가 없어?”

유해원이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손톱끝이 서하연의 코앞에서 파르르 떨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그동안 떨던 그 고고하고 청렴한 태도는 모조리 폐하를 기만하기 위한 수작이었던 게지! 속으로는 딴 사내를 품고 겉으로만 정조를 연기한 요물 같으니. 폐하께서 환궁하시는 즉시 상소하여, 너희 서가 여식들의 피를 한 방울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짜내어 조사할 것이다...”

“폐하께서는 저를 처벌하지 못하십니다.”

서하연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황후의 말을 끊었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기이할 만큼 또렷하고 단단했다.

유해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이내 극도로 달아오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 지금 무어라 지껄였느냐?”

“폐하께서는...”

서하연은 황후의 경악과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한 자, 한 자 조용히 읊조렸다.

“신첩에게 그리 무정하지 않으십니다.”

전각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유해원은 제 귀를 의심케 하는 오만한 발언에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와 서하연의 머리맡에 내려선 황후의 음성은 질투와 악의로 짓개겨져 있었다.

“서하연, 네 년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본궁은 폐하의 조강지처이니라! 소년 시절부터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평생 단 한 사람만을 곁에 두겠노라 내게 맹세하셨다! 너를 궁에 들인 것은 고작 후사를 잇기 위함이다. 너희 서가의 세력을 달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단 말이다! 폐하의 눈에 너는 그저 숨 쉬는 장식품, 아이를 배는 씨받이일 뿐인데 어찌 감히 정을 논한단 말이냐!”

유해원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갈기갈기 후벼팠다.

삼 년 동안 쌓인 질투의 화염이 한꺼번에 폭발한 순간이었다.

한편, 서하연은 그 표독스러운 일갈을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묵묵히 받아내었다. 이윽고 귓가를 찌르던 날카로운 잔음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그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와 폐하의 금슬은 신첩이 감히 범접할 수 없지요. 다만, 얼마 전 사서를 읽다 보니 전조의 폭군과 황후 허씨 역시 환난을 함께한 정 깊은 부부였다 하더군요. 허나 그가 옥좌에 오른 이후 양녀 소씨의 아양에 눈이 멀어 황후를 멀리했고, 끝내 모함에 속아 조강지처를 죽이고 제 핏줄을 멸하려 했다고 하옵니다. 만약 허씨가 낳은 적장자가 변방의 군권을 쥐고 제때 도성으로 진격하지 않았다면, 황후는 억울한 원혼이 되어 저승을 떠돌았겠지요.”

괴이할 정도로 평온하고 서늘한 어조였다.

유해원의 안색이 순식간에 핏기를 잃고 백지장처럼 변해갔다.

서하연은 황후의 무너져 내리는 안색을 싸늘하게 응시하며 감정이 거세된 어조로 칼을 꽂아 넣었다.

“역사의 기록은 철과 같아 아주 무겁나이다. 제후와 황후가 갈라서고, 베개를 나란히 하던 부부가 등을 돌리는 것은 허황된 설화가 아닙니다. 바다와 같은 정염도 결국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기 마련이며, 새로운 가인의 미소 앞에 바래기 마련이고, 때로는 끈끈한 혈육의 무게보다 가벼워지는 법이지요.”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시선을 아주 슬쩍, 유해원의 얄팍하고 평평한 아랫배로 던졌다가 이내 내리깔았다.

“하물며, 지금 궁의 황자와 공주는 오직 신첩의 몸에서만 태어났사옵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의 골육을 염려하시어 가끔 장신궁을 찾으시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지요.”

“그 입 닥치지 못할까!”

마지막 조롱은 독을 바른 바늘이 되어 유해원이 품은 가장 추악하고 거대한 공포를 정확히 관통했다.

'아이! 또 그놈의 아이!'

저 비천한 년이 감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 황후를 비웃으며 제 배로 낳은 핏줄을 무기 삼아 황제의 시선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스치듯 지나간 역사 속 황후의 비참한 말로는 유해원의 온몸을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공포가 이성을 집어삼켰고, 그 공포는 이내 광포한 살의로 치달았다.

“천한 년이 감히 본궁을 저주하고 능멸해? 감히 황제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어!”

유해원의 거친 숨이 전각을 울렸다.

그녀는 서슬 퍼런 손가락으로 서하연을 가리키며 나인들과 상궁들을 향해 핏대를 세웠다.

“당장 저 년을 뜰아래로 끌어내려라! 감히 궁을 어지럽히고 본궁을 모독한 죄를 물어 곤장 이십 대를... 아니, 삼십 대를 쳐라! 뼈가 부러질 때까지 사정없이 내리쳐서 육궁에게 이 요망한 년의 최후가 어찌 되는지 똑똑히 각인시켜 주거라!”

서하연은 봉의궁의 차가운 청석 마당으로 무자비하게 끌려 나갔다.

바닥에 사정없이 처박힌 그녀의 등 위로 묵직한 곤장이 가차 없이 내리꽂혔다.

둔탁하고 처참한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하지만 서하연은 입술을 짓씹으며 단 한 마디의 신음도, 구걸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깊숙이 묻은 채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번지는 극심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낼 뿐이었다.

이마에서 흐른 식은땀이 바닥을 적셨고 겹겹이 껴입은 옷가지 위로 붉은 선혈이 빠르게 배어 나와 사방을 물들였다.

멀리서 이를 목격한 궁내 궁인들은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해 사라졌다.

삼십 대의 가혹한 형벌이 끝나고, 마당에 남은 것은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서하연의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뿐이었다.

유해원은 화려한 계단 위에서 가소롭다는 듯 그녀를 굽어보았다.

“장신궁의 음산한 구석방에 처박고 빗장을 걸어라. 본궁의 친필 수결이 담긴 수칙 없이는 물 한 모금도 들여보내선 안 된다! 폐하께서 환궁하시면 그때 정식으로 거열을 하든 사약을 내리든 할 것이다!”

태감 둘이 걸어 나와 늘어진 서하연의 양팔을 거칠게 붙들어 멨다.

회색빛 청석 길 위로, 그녀의 등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길고 잔인한 궤적을 그리며 번져갔다.

어둡고 스산한 장신궁의 편전 안.

청아는 자지러지게 울며 서하연의 해진 옷을 가위로 잘라내고 상처를 소독했다.

“마마, 어찌하여... 어찌하여 황후마마를 도발하셨나이까...”

단단하고 차가운 목상에 엎드린 서하연은 호흡이 끊어질 듯 가쁘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냉소적인 목소리를 냈다.

“자극하지 않았다면... 그 오만한 여인이 이토록 서둘러 나를 완전히 없애버릴 궁리를 하겠느냐?”

청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넓은 바다로 나가 물고기처럼 뛰놀고,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가 되자고?”

서하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지독하게 참담하면서도 비통한 자조섞인 미소였다.

“그것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나약한 자들이 스스로를 위안하는 허상일 뿐이다. 가해진 훼손은 돌이킬 수 없고, 살점의 흉터는 영원히 남는 법이지. 새로 시작하겠다는 말 따위는 패배자의 변명에 불과해.”

서하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짙은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도, 온기도 없었다. 오직 심연보다 깊은 살의만이 고여있을 뿐이었다.

“이 궁이 내게 가르쳐 준 진리는 오직 하나다.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면, 내게 베풀어진 은혜는 대체 무엇으로 갚겠느냐? 오직... 피는 피로, 이는 이로 돌려주는 것뿐이다.”

이윽고 찾아온 깊은 밤.

장신궁은 거대한 무덤처럼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그 야밤에, 장신궁 편전에서 의문의 불길이 치솟았다.

바람에 몸을 실은 불길은 순식간에 거대한 화마가 되어 주전까지 집어삼켰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비명과 급박한 타종 소리가 뒤섞여 궁내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밤, 화려한 궁의 전각 한 채를 재로 만든 불길이 그 안에서 불타 죽었어야 할 숙비의 존재마저 소리 소문 없이 지워버렸다는 것을.

-

서쪽 산에 위치한 정예 주둔지.

소무경은 탁상 앞에 앉아 은은한 등불 아래서 백옥 팔찌 한 쌍을 소중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낮에 지방의 수령이 상공한 진상품으로, 질감이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고 조각 솜씨 또한 여간 섬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옥을 보자마자 서하연의 가냘픈 손목을 떠올렸다.

살결이 백설처럼 고운 아이니, 이것을 채워두면 필시 제 주인을 만난 듯 빛이 날 터였다. 그리 생각하고 보니 여태껏 서하연에게 제대로 된 정표나 장신구 하나 쥐여준 기억이 없는 듯했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아려왔다.

그때, 군막의 천이 거칠게 걷히고 부장군이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엎어졌다.

“폐하! 궁에서 긴급한 파발이 당도하였사옵니다! 장신궁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하여, 숙비마마께서... 화마를 피하지 못하시고 훙서하셨나이다!”

순간, 황제의 손가락이 굳어졌다.

그가 쥐고 있던 고결한 백옥 팔찌가 바닥으로 떨어져 수천 개의 파편으로 처참하게 바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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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이 별원에 당도했을 때 서하연은 뜰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그때, 청아가 밀서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안으로 들이닥쳤다. 얼굴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이 어려 있었다.“마마! 궁에서 전갈이 왔사옵니다. 폐하께서 드디어 황후를 폐위하셨나이다! 유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냉궁으로 처형되었다 하옵니다!” 서하연은 손에 든 책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그저 잔잔한 시선만을 툭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그래.” 청아는 순간 멍해졌다.“마마... 기쁘지 않으십니까?” “기쁘다.”서하연이 담담히 읊조렸다. “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그러나 덤덤하게 가라앉은 안색 어디에도 승자의 기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청아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늘어놓았다.“마마, 이제 다 해결되었사옵니다. 황자 전하와 공주 전하께서도 마침내 당당하게 마마를 친모로 모실 수 있게 되었질 않습니까. 요란한 풍문이 가라앉고 안정이 찾아오면, 어쩌면 다시...”“다시 무엇을 한단 말이냐.” 서하연이 청아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환궁하여, 다시금 그의 피조물 같은 후궁으로 머물라?” 청아는 입을 다물었다.서하연은 들고 있던 책을 소리 없이 덮고는, 먼발치 마른 나뭇가지 위에 서글프게 내려앉은 잔설을 응시했다.“청아야. 네 눈에는 진정 내가 이 싸움에서 승리한 것으로 보이느냐?” “당연하지요!”청아가 격앙된 어조로 답했다.“황후는 몰락했고 폐하께서는 마마를 황후로 추봉하셨나이다. 게다가 황자 전하와 공주 전하도 이제는 당당하게 마마를 어머니라 부를 수 있게 되지 않았사옵니까.”서기백이 조정을 거쳐 별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주변이 어스름하게 저문 후였다. 은은한 등불이 밝혀진 서재 안에서, 서하연은 들어온 밀지를 훑고 있었다.궁에 심어둔 서가의 세작이 보내온 밀보였다. 황후의 폐위 조서가 전격 하달된 이후, 조정과 내명부가 어떤 격랑에 휩싸였는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아버님께 무슨 말을 하던가요?”서하연은 고개도 들지 않

  • 그대 맑은 눈에 사무친 원망을   제16장

    사흘이 지난 후에야 서기백은 비로소 병세가 나았다는 명목으로 입궁했다.소무경은 건청궁에서 그를 맞이했다.고작 보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건만, 서기백의 관자놀이에는 서리가 내린 듯 백발이 성성했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무척 수척해진 모습이었다.그 초췌한 몰골을 마주한 순간, 소무경의 가슴 깊은 곳에서 거대한 죄책감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태사, 부디 상심을 거두십시오.”그는 황제의 권위를 내려놓고 친히 찻잔을 채워 서기백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서기백은 은혜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끝내 그 찻잔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폐하께서 이 늙은 신료를 급히 입궁하라 명하신 연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소무경은 전해오는 시린 침묵을 견디다 간신히 입술을 뗐다.“짐이 하연이를 황후로 추봉하고, 황릉의 터를 닦아 이장하라 명을 내렸소. 태사도... 그 소식은 들었겠지?”“들었나이다.” 서기백의 음성은 소름 끼칠 만큼 고요했다. “소신이 제 여식을 대신하여 폐하의 해와 같은 융은에 고개 숙여 감사드리나이다.” “짐은...” 소무경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짐은 그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을 뿐이오. 입궁하기 전... 본가의 처소에 머물던 시절의 하연이는 어떠한 여인이었소?” 서기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감정이 어린 눈동자가 소무경을 정면으로 응시했다.“폐하께서는 소신의 입을 통해 무엇을 듣고자 하십니까.” “무엇이든 상관없소.” 소무경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듯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연모했던 것이 무엇인지, 기피했던 것은 또 무엇인지, 평소에는 어떤 생각을 하며 소일을 보냈는지... 짐은 그것이 사무치게 알고 싶다.” 서기백은 그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 마침내 목소리를 돋우었다. “하연이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세 살에 시를 깨쳤고, 다섯 살에 대구를 지었으며, 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장성한 유학자 부럽지 않은 문장을 지어내던 아이였습니다. 하오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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