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잣거리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시경은 며칠째 마음이 어지러웠다. 팔 안에 안겨 있던 그 짧은 순간의 감촉이 눈만 감으면 떠올랐고, 그때마다 처음 느끼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올랐다. 밥상머리에서 호정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공연히 시선을 피하게 되었고, 그런 스스로가 낯설어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
"자네, 요즘 통 넋이 나가 있구먼. 도대체 어느 댁 여식 때문에 이러는가? 아니면 어디 숨겨 둔 여인네라도 있는 것인가?"
도윤이 사랑채에 찾아와 대뜸 던진 말에, 시경은 헛기침으로 얼버무렸다.
"쓸데없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누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정신이 반쯤 나가서는.. 이럴 땐 술 한잔하며 집 나간 정신 챙겨 오는게 상책이니 일어나게, 연화루에 가서 거하게 한잔 하세."
시경은 잠시 망설였다. 대감의 엄명으로 발길을 끊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곳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가자."
청운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말리지는 못하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대문을 나서는 시경의 뒤에서 청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화루에 들어서자 기생들이 반색하며 몰려들었다.
"도련님, 어찌 이리 오랫만이셔요!"
가야금 뜯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인 방 안,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드리운 그림자들도 함께 일렁였다. 시경은 늘 앉던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화루에서 별채를 쓰는 몇 안되는 손님이 오랜만에 왔다는 소식에 연화루의 주인이 직접 인사를 하러 방으로 들어왔다.
"나으리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셨으니 오늘 밤은 저에게 맡겨 주시어요."
"그리하시게, 독한 술로 내오게. 오늘은 좀 취해봐야겠으니."
풍채 좋은 여자는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
한편 별채 안쪽 방에서는 기생 몇이 모여 은밀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좁은 방 안, 분내가 가득한 그곳에서 그녀들은 머리를 맞대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김시경 도련님이 오셨다지?"
"그렇다네. 아직도 곁을 내주는 이가 없다더니, 오늘은 어떨는지."
"난 진작에 포기했네. 그 도련님 입술 한번 훔쳐보는게 소원인데, 어디 곁을 줘야 말이지."
기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은근한 내기가 돌고 있었다. 그 이름도 자자한 한량 김시경과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는 이가 나오느냐 마느냐 하는 내기였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 삼아 시작된 것이었으나, 몇 번이고 유혹해 본 이들이 하나같이 실패로 돌아갔던 터라 이제는 반쯤 오기로 이어지는 판이었다.
"이번엔 내가 되어야지. 노리개 값 내기, 잊지들 말게."
"흥, 그리 말한 이가 한둘이더냐. 매번 술만 축내고 물러났으면서."
기생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웃음을 흘리는 사이, 월향은 그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말없이 술잔을 매만지고 있었다. 화려한 노리개와 짙은 분단장을 한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에는, 다른 기생들과는 다른 야망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그녀의 속내는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단순한 내기의 승부가 아니라, 김정 대감댁 도련님과 하룻밤 정사를 치러 첩실 자리라도 얻어 보겠다는 속셈이 있었다. 기적에 이름을 올린 지 벌써 여러 해, 화무십일홍이라 하였던가. 젊음도 언젠가는 스러질 것이고, 그전에 발을 디딜 곳을 마련해야 했다.
'두고 봐 오늘 밤은 이 월향이의 치마속에서 못 나올 것이야!'
월향은 소매 속에 숨겨 둔 작은 종이 봉지를 슬며시 만져 보았다. 저잣거리 한약방에서 은밀히 구해 온 것으로, 술에 타면 사람을 쉬이 취하게 만들고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춘약이었다. 평소라면 감히 손댈 생각도 못 했을 일이었으나,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조급했다.
며칠 전, 도윤을 시중들다 얼핏 들으니 요즘 시경 도련님이 어느 댁 규수에게 마음이 있는 듯하다는 소문이 있다 했고 혼담도 오간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월향의 조바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고 한편으로는 본처보다 먼저 첩으로 들어가 시경을 제 치마 폭에 넣고 흔들어 보겠다는 심산도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월향은 여느 때처럼 웃는 낯으로 시경의 곁에 앉았다. 화려한 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도련님, 어찌 그리 무심하셔요. 월향이가 보고 싶지도 않으셨나요?"
시경의 품에 파고 들 듯 안기며 곧 숨 넘어 갈 듯 우는 소리를 냈다.
시경이 얼른 몸을 옆으로 피하자 민망해진 월향은 얼른 술병을 들었다.
"도련님 오랜만에 오셨으니 특별히 좋은 술로 한잔 올릴께요~"
"...그리하거라."
시경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잔을 내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태도에서 이상한 낌새를 챌 리 없었다. 월향은 술병을 기울이며,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재빨리 소매 속 종이봉지를 열어 술잔에 흘려 넣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으나, 그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도련님! 아 하시어요~."
"됐다!."
시경은 잔을 월향의 손에서 빼앗듯 받아 단숨에 비웠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술맛이라 여겼는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낯선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취기가 빨리 도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내 평소의 취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순식간에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고 사지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기이한 느낌이 온몸을 덮쳐 왔다. 시경은 미간을 좁히며 이마를 짚었다.
"...오늘따라 유독 취기가 빠르게 오르는구나, 이게 무슨 술이지?"
"이 사람, 괜찮은가?"
도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시경은 대답 대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눈앞이 흐려지고 방 안의 등불이 두세 개로 겹쳐 보였다. 귓가에서 풍악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단순한 취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몸으로 먼저 알아챘다.
'...이것은 술기운이 아니다.'
의식 한구석은 또렷하게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몸은 그와 반대로 점점 무너져 내렸다. 손끝이 저릿하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뛰고, 온몸의 감각이 낯설게 곤두서는 것이 마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했다. 시경은 상 모서리를 붙잡으며 겨우 자세를 유지했다.
"도련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으시옵니다."
월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앉았다. 그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은근한 만족감을 약에 취한 시경이 알아챌 리가 없었다.
"바람이라도 쐬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아니면 쇤네가 조용한 방으로 모실께요."
"...괜찮다."
"고집부리지 마시고, 잠시 누워 쉬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월향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의 팔을 슬며시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켰다. 도윤은 방 안 다른 기생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그쪽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월향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틀거리는 시경을 부축한 채 조용히 옆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방문이 닫히자 풍악 소리가 한결 멀어졌다. 작은 방 안에는 작은 등불 하나만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 월향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보였다. 그녀는 시경을 보료 위에 앉히고는, 그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그의 옷깃을 매만지듯 손을 뻗었다.
"도련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끝이 그의 뺨을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 시경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물러설 수조차 없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어지럼증 속에서, 그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흐릿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건드리지 말거라."
간신히 내뱉은 그 한마디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힘없이 흩어졌다.
"아이 도련님~ 오늘 밤 소녀의 치마 속이 궁금하지 않으시어요?."
월향의 손이 그의 가슴 속살이 드러나도록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그러고는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 얇은 비단으로 가린 젖가슴이 봉긋하게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시경의 가까이에 다가가 흐릿하고 몽롱한 숨결을 그의 귀에 불어넣으며 젖가슴을 그에게 밀착 시켰다. 등불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하나로 겹쳐졌다. 시경의 의식은 점점 더 짙은 안개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저잣거리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시경은 며칠째 마음이 어지러웠다. 팔 안에 안겨 있던 그 짧은 순간의 감촉이 눈만 감으면 떠올랐고, 그때마다 처음 느끼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올랐다. 밥상머리에서 호정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공연히 시선을 피하게 되었고, 그런 스스로가 낯설어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자네, 요즘 통 넋이 나가 있구먼. 도대체 어느 댁 여식 때문에 이러는가? 아니면 어디 숨겨 둔 여인네라도 있는 것인가?"도윤이 사랑채에 찾아와 대뜸 던진 말에, 시경은 헛기침으로 얼버무렸다."쓸데없는 소리.""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누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정신이 반쯤 나가서는.. 이럴 땐 술 한잔하며 집 나간 정신 챙겨 오는게 상책이니 일어나게, 연화루에 가서 거하게 한잔 하세."시경은 잠시 망설였다. 대감의 엄명으로 발길을 끊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곳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가자."청운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말리지는 못하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대문을 나서는 시경의 뒤에서 청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연화루에 들어서자 기생들이 반색하며 몰려들었다."도련님, 어찌 이리 오랫만이셔요!"가야금 뜯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인 방 안,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드리운 그림자들도 함께 일렁였다. 시경은 늘 앉던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연화루에서 별채를 쓰는 몇 안되는 손님이 오랜만에 왔다는 소식에 연화루의 주인이 직접 인사를 하러 방으로 들어왔다."나으리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셨으니 오늘 밤은 저에게 맡겨 주시어요.""그리하시게, 독한 술로 내오게. 오늘은 좀 취해봐야겠으니."풍채 좋은 여자는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한편 별채 안쪽 방에서는 기생 몇이 모여 은밀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좁은 방 안, 분내가 가득한 그곳에서 그녀들은 머리를 맞대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오늘 김시경 도련님이 오셨다지?""그렇다네. 아직도
한가위가 지나고 며칠 뒤,호정은 한양의 장터가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함도 잊고자 청아만을 데리고 저잣거리 구경에 나섰다. 어머니께는 필요한 노리개와 빗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명절 내내 집안 어른들 사이에 치이고 숙부와도 신경전을 벌인 탓에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던 것이었다."아씨, 오랜만에 나오시니 걸음이 다 가벼워 보이십니다."청아가 앞장서며 웃었다. 호정도 모처럼의 나들이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표정이었다.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포목전, 지전, 방물전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호정은 처음으로 보는 한양의 점포들이 낯설고 신기했다."이 노리개는 어떻습니까, 아씨."청아는 작은 백옥에 연분홍 매듭이 곱게 지어진 노리게를 호정에게 보여주었다."아주 곱구나. 그것으로 하자."값을 치르고 물건을 받아 든 호정은 다음 가게로 발길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맞은편 거리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생 서넛이 한 사내를 둘러싸고 교태를 부리며 걸어오고 있었다."도련님, 이쪽 가게에 좋은 노리개가 있다던데 소녀 노리개하나 사주시면 안되겠습니까?.""어머, 저는 저쪽 방물전에 새로 들어온 연지가 갖고 싶슴니당~."기생들이 저마다 사내의 팔짱을 끼려 애쓰며 재잘거렸다. 호정은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얼굴이 굳었다. 그 한가운데, 나른한 걸음으로 기생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시경이었다."...숙부님?"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정의 목소리에, 시경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호정은 예를 갖추어 짧게 고개를 숙였다."숙부님을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그러나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기방 출입을 금하겠다던 할아버지의 엄명이 있었건만, 대낮 저잣거리에서 기생들을 줄줄이 이끌고 다니는 꼴이라니. 호정은 순간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어머, 저 아가씨는 뉘신지요? 도련님의 조카분이십니까?.""조카가 도련님을
축문이 낭독되고, 절이 이어졌다. 향 연기가 사당 안에 자욱하게 퍼지는 가운데, 호정은 어머니 곁에 서서 조상님께 절을 올리는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 시경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평소의 나른하고 심드렁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중한 얼굴로 절을 올리고 있었다. 호정은 그 낯선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이 이어졌다. 온 집안이 마당에 상을 펴고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였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은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이번 한가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먼 친척들도 여럿 자리를 함께하였다. 평안도, 충청도 등지에서 온 일가붙이들 중에는 호정을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려서 보았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런 만큼 그녀를 향한 시선과 궁금증이 유독 뜨거웠다. "저 아이가 그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 이 댁 손녀딸인가?“ "그렇다네. 여덟 살에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다지.“ "어쩐지, 낯빛이며 몸가짐이 여느 규수들과는 사뭇 다르구먼.“ 호정이 인사를 올리러 다가가는 자리마다 어른들은 그녀를 붙잡고 이것저것을 물었다. "심양에서는 어찌 지냈느냐. 그곳 음식은 입에 맞더냐.“ "조선말은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었느냐.“ "듣던 대로 참으로 곱게 생겼구나. 어느 댁에서 며느리로 데려가려 눈독을 들이겠어."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호정은 웃는 낯으로 하나하나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사촌 언니들이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해 슬쩍 끼어들었다. "할머님들, 그만 놓아주셔요. 호정이도 좀 쉬어야지요.“ "허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런다. 어여 가서 쉬거라." 간신히 자리를 벗어난 호정은 사촌들 무리에 섞여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호정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보아라." 사촌 언니가 부르는 소리에 자리를 옮기며 호정도 오랜만에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추석이 다가오자 김정 대감댁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번 한가위는 예년과 달랐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 시헌의 가족들이 처음으로 함께 지내는 명절이었던 까닭에, 대감은 조상님께 그 소식을 알리는 뜻에서 예년보다 더 성대하게 제청을 차리라 일렀다. "이번 제사에는 집안 가솔들이 모두 모여야 한다. 아무도 빠짐없이 참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먼 곳에서 오시는 친지들도 계시니 그 분들 또한 최선을 다해 맞이해야 할 것이야." 대감의 엄명에 사랑채도 안채도 며칠 전부터 집안일을 하는 노비들의 손이 바빴다.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며 집안 대청소까지 빈틈없이 모든 일이 차근차근 이루어 졌다. 호정은 어머니의 처소에서 일가친척들에 관해 하나하나 교육을 받아야 했다. 행여 멀리 청나라에서 지내다 왔다 하며 작은 흠이라도 잡힐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호정에게 제사의 전반적인 것들에 관해 알려주었다. 앞으로 호정이 역시도 어느 댁 며느리가 되어야 할 터, 양반집인 만큼 실제 손이 가는 일은 모두 노비들의 몫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안주인 될 이로서 제청이 어떻게 차려지고 절차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알아 두어야 했다. "제상은 이리 놓이고, 지방은 저리 모시는 것이다. 이리 크게 제사를 모시는 것이 낯설겠지만, 명색이 이 집안의 손녀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예, 어머니. 잘 새겨듣겠습니다." 호정은 어머니가 짚어 주는 제상의 위치, 축문을 읽는 순서, 절하는 예법 하나하나를 열심히 익혔다. 조선의 예법은 누누이 어머니의 교육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제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짚어 가며 배우는 것은 또 달랐다. "명절 음식 또한 집안의 어멈들이 담당하겠지만 앞으로 네가 시집을 가게 되면 알아야 부릴수도 있는 것이니 잘 익혀두어야 한다..“ "예. 어머님!" 호정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어머니는 이번 명절에 외지에 사는 친척들도 여럿 다녀갈 것이라며, 그들 앞에서 흠 잡힐 일이 없도록 각별히
한양의 남촌 뒷골목, 홍등이 화려하게 걸려있는 '연화루'의 별채에서는 밤이 깊어 갈수록 풍악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가야금 줄이 튕겨지는 소리, 장구 장단, 그 사이사이로 사내들과 술따르는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섞여 담장 너머까지 흘러나왔다."자, 한 잔 더 받으시지요, 도련님.“기생 월향이 나긋한 손길로 술병을 기울였다.상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시경은 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며 흐드러지듯 풀어진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미 상 위에는 빈 술병이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시경이 자네,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구먼."맞은편에 앉은 한도윤이 술잔을 든 채 킬킬 웃었다. 병조참판 댁 아들로, 시경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벗이었다. 그 옆에서 서진이 거들었다."말이 없는 게 아니라 원래 술자리에서는 말을 아끼는 놈이지.""시끄럽다, 이것들아."시경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탁 내려놓았다. 월향이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웠다.한양의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이름난 한량 김시경의 술버릇쯤은 이 집 기생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법이 없고, 아무리 절세가인을 앉혀도 술을 따르게 하는 그 이상은 결코 곁을 주지 않았다."도련님, 오늘은 소녀가 밤새 곁을 지켜도 되겠사옵니까."월향이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시경의 귀에 가까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시경의 옷섭이 살짝 벌어진 틈으로 자신의 손을 살며시 밀어넣었다.시경은 그 손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그녀의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옮겨 놓았다."술이나 따르거라. 거기까지다.""어머, 도련님~ 제가 어여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만리장성을 쌓아도 수백 번은 쌓았겠구만."월향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물러서서 다시 술병을 들었다. 이런 거절이 처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경이 무례하게 구는 것도 아니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참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야.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한 한량이라면서 기생 하나 건드리지 않으니. 자네가 정말 방
연회가 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김정 대감댁 안팎은 호직과 보암의 혼담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정작 시경은 그런 화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심드렁한 얼굴로 사랑채에 틀어박혀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호정은 여전히 그를 피해 다니는 방법들을 연구해 시경과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아침 문안도, 저녁 밥상머리도, 되도록 시경과 마주치지 않을 시각을 골라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시경 쪽에서 먼저 트집을 잡으러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조카는 요즘 어찌 그리 코빼기도 안 비치느냐."별당 앞을 지나던 호정의 앞을 시경이 가로막아 섰다. 호정은 한숨을 삼키며 예를 갖추었다."딱히 숙부님을 뵐 일이 없어서요.""뵐 일이 없다니. 한 집안에 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숙부님께서 저를 보실 때마다 좋은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니온데, 굳이 마주칠 이유가 있사옵니까."호정의 대꾸에 시경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흥, 어른을 그리 피해 다니는 것부터가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다.""숙부님께서 예법을 논하실 처지는 아니신 듯한데요.""뭐라?""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고 다니시는 분이 조카에게 예법을 가르치려 드시니 하는 말씀이옵니다."호정의 말에 시경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그건 그렇고, 네 오라비 혼담이 그리 잘 풀리는 것을 보니 배가 아프지도 않느냐.""어찌 오라버니의 경사에 배가 아프겠사옵니까.""내 말은, 너도 슬슬 혼처를 알아보아야 할 나이가 아니냐는 것이다."뜻밖의 화제에 호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시경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아직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사옵니다.""생각이야 안 해 봤어도, 나이가 차면 어른들이 알아서 정해 줄 것이다."시경의 말투는 여전히 심드렁했지만, 어딘가 그답지 않게 그 화제를 오래 붙들고 있는 듯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