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ício / 사극 로맨스 / 금기 / 4화. 궐 안의 연회

Compartilhar

4화. 궐 안의 연회

Autor: 연월담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9-27 18:23:08

같은 시각, 궐에서는 작은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볼모로 갔던 세자 내외를 비롯하여, 그들과 함께 심양에서 돌아온 김대감댁 둘째 아들과 그 가솔들을 위로하기 위해 중전이 친히 연회를 베풀기로 하였다는 전갈이 각 대감 댁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중전마마께서 친히 연회를 여신다니, 이는 실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구나."

김정 대감은 소식을 전해 듣고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론 실세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있어, 중전의 눈에 드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더구나 이번 연회에는 둘째 아들 시헌의 가솔들, 즉 심양에서 돌아온 손자 손녀들도 함께 참석하게 될 터였다.

"호직아, 호정아. 이번 연회에는 너희도 함께 참석하게 될 것이니, 부디 예를 갖추어 흠 잡힐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할아버지의 당부에 호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고, 호정은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예를 갖추었다. 궐 안의 연회라니, 청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 있는 큰 나들이였다.

연회를 앞두고 집안은 분주해졌다. 호정은 어머니와 함께 새로 지은 당의를 입어 보며 매무새를 다듬었고, 호직은 사랑채에서 아버지와 함께 궐에서 지켜야 할 예법을 다시금 익혔다. 시경은 그런 소란과는 무관하다는 듯 평소처럼 술병을 옆에 끼고 지냈지만, 이번 연회에는 그도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못마땅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굳이 그런 자리에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숙부님도 대감마님의 아들이시니 당연히 함께 가셔야지요."

호직이 대꾸하자 시경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자리에 가 봐야 서로 눈치나 살피고 아부나 떠는 것이 전부일 터인데, 재미도 없는 것을."

"그리 말씀하셔도 결국은 가시게 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호직의 말에 시경은 대답 대신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드디어 연회 날이 밝았다. 궐의 후원, 넓은 마당에 차일이 드리워지고 그 아래로 화려한 잔칫상이 줄지어 놓였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관리들과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초대된 종친과 대신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풍악이 울리고, 궁녀들이 분주히 오가며 술과 음식을 날랐다.

김정 대감의 가솔들도 예를 갖추어 자리에 앉았다. 호정은 어머니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낯선 궐 안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여덟 살 이전, 어렴풋이 기억하던 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중전마마 납시오!"

내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중전이 상궁들의 호위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에 앉은 이들이 일제히 몸을 낮추어 예를 갖추었다. 중전은 온화한 낯빛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았다.

"먼 이국땅에서 고생들 많으셨소. 오늘은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이니, 다들 편히 즐기시오."

중전의 말에 좌중에서 화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풍악이 더욱 흥겹게 울리고 곳곳에서 술잔이 오갔다.

한편, 평안대군의 장녀 이보암은 이날 연회에 참석한 종친 여식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임금의 손녀이자 평안대군의 맏딸로서 궐 안팎에서 명망이 높은 그녀였으나, 정작 본인은 이런 격식 차린 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정이었다. 오늘도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참석한 것이었다.

"언니, 저기 저 사람들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 그 대감 댁 자제들인가 봐요."

옆자리에 앉은 사촌 동생이 소곤거리며 손끝으로 슬쩍 방향을 가리켰다. 보암은 무심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 순간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년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잔뜩 긴장한 기색도 없이, 그렇다고 오만하지도 않은, 여유로우면서도 단정한 태도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따금 옆에 앉은 여동생으로 보이는 이와 나직이 몇 마디를 나누며 짓는 미소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저분은 뉘신지 아느냐."

보암이 나직이 묻자, 사촌 동생은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김정 대감댁 손자라 하더이다. 이름이 김호직이라던가. 청나라에서 어려서 갔다가 이번에 함께 돌아왔다지요."

"...그렇구나."

보암은 짧게 답하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쪽으로 눈길이 향하는 것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했다. 궐 안에서 자라며 수많은 종친과 대신 댁 자제들을 보아 왔지만, 저리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이는 드물었다.

연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 흥을 돋우기 위한 활쏘기 시합이 마련되었다. 궐 후원 한쪽에 과녁이 세워지고, 젊은 종친과 대신 댁 자제들 가운데 원하는 이들이 나서 실력을 겨루는 자리였다. 임금과 중전도 흥미로운 얼굴로 이를 지켜보았다.

"어디 젊은이들 가운데 활 솜씨 좋은 이가 있는가 봅시다."

임금의 말에 몇몇 청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그중에는 김호직도 있었다. 청나라에서 자라며 무예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자못 자신 있는 걸음걸이였다.

시합이 시작되었다. 몇몇 이들이 차례로 활을 쏘았으나 과녁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이윽고 호직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활을 들어 시위를 당기고, 잠시 숨을 고른 뒤 화살을 놓았다. 화살은 정확히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좌중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과연 청나라에서 무예를 익힌 보람이 있구나!"

임금도 흡족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보암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실력을 겨루는 자리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침착한 그 모습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했다.

시합이 끝난 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후원 곳곳으로 흩어졌다. 보암은 답답한 자리를 벗어나고자 시녀들을 물리고 홀로 연못가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먼저 나와 있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김호직이었다.

"...누구신지요."

호직이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며 예를 갖추었다. 보암은 순간 당황하였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답했다.

"평안대군의 여식, 보암이라 하옵니다."

그 이름을 듣자 호직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임금의 손녀이자 종친의 여식이라니,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결례를 범하였사옵니다. 소인, 김정 대감의 손자 김호직이라 하옵니다."

"활 솜씨가 대단하시더이다. 방금 전 시합에서 보았사옵니다."

"과찬이시옵니다."

호직은 담담히 답하며 예를 갖추었다. 보암은 그런 그의 태도에 오히려 흥미가 동했다. 궐 안의 젊은 사내들이란 대개 그녀의 신분을 알면 지나치게 굽신거리거나, 반대로 은근히 접근해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호직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자라셨다지요.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였습니까."

"...낯선 땅이었사오나, 배울 것도 많았사옵니다. 그곳의 활 쏘는 법도 그때 익힌 것이옵니다."

"어쩐지. 조선의 궁술과는 조금 다른 자세이신 듯 했습니다."

보암의 말에 호직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것을 알아보시다니, 궁술에 조예가 있으신가 보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활을 배웠사옵니다. 여인의 몸으로 활을 잡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나, 아버님께서 딱히 막지 않으셨던 까닭에."

그 말에 호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 흔치 않은 일을 스스럼없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낭자께서는 여느 규수들과는 조금 다르신 듯하옵니다."

"그리 말씀하시는 도련님도, 청나라에서 자라 그런지 여느 사내들과는 다른 느낌이시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어색함보다는 묘한 편안함이 감도는 침묵이었다. 연못 위로 스치는 바람에 물결이 잔잔히 일렁였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함께 활을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보암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호직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으로서는 영광이옵니다."

그때, 멀리서 보암을 찾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암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걸음을 돌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 즐거웠사옵니다."

"소인도 그러하옵니다."

호직이 예를 갖추어 배웅하자, 보암은 몇 걸음 걸어가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예."

"...아니옵니다. 다음에 뵙지요."

보암은 끝내 하려던 말을 삼키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호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지었다.

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마 안에서 호정이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아까 연못가에서 어느 낭자와 이야기를 나누시던데, 뉘신지요?"

"...평안대군의 따님이라 하시더구나."

"평안대군의 따님이라면 종친 중에서도 지체가 대단하신 분이 아니옵니까."

"그렇다고 하더구나."

호직의 목소리에 평소와는 다른 여운이 묻어 있었다. 호정은 오라버니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듯하여 슬며시 웃음이 났다.

"오라버니, 혹 마음에 두신 것이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거라."

호직은 짐짓 딴청을 피우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얼굴에 스친 옅은 붉은 기운을, 호정은 놓치지 않았다.

한편, 집으로 돌아간 보암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도 낮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활을 쏘던 그 침착한 모습, 그리고 연못가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 어려서 궐 안에서 자라며 수많은 이들을 만나 보았지만, 그처럼 마음에 오래 남는 이는 처음이었다.

"어머니."

이튿날, 보암은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어제 연회에서 뵌 분이 있사온데, 김정 대감댁 손자라 하더이다."

"김정 대감댁이라면 노론의 중진이 아니더냐. 그 댁 손자라니, 무슨 일로 그러느냐."

보암의 어머니는 의아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 보암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청이 있사옵니다.“

"혹시 긴 대감댁 손자에게 제 사주단자를 보내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 말에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평소 혼인 이야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며 피하던 딸이었기에, 더더욱 뜻밖의 일이었다.

"...네가 먼저 혼처를 청하다니, 참으로 드문 일이로구나. 대체 어떤 사내이기에 네 마음을 그리도 움직였단 말이냐."

"그저... 궐 안의 다른 사내들과는 다르게 느껴졌사옵니다."

보암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번졌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다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 알아보마. 허나 김정 대감댁이라면 이미 여러 곳에서 혼담이 오갈 만한 집안이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구나."

이렇게 하여, 장안에 작은 소문이 하나 퍼지기 시작하였다. 평안대군의 장녀가 먼저 혼처를 청하였다는 이야기가, 은밀히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타고 전해졌다. 그리고 그 소식은 머지않아 김정 대감댁에도 전해지게 될 터였다.

김정 대감댁에서는 이 소식에 온 집안이 술렁였다. 종친, 그것도 임금의 손녀 되는 이가 먼저 혼담을 청하였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어, 이것 참 뜻밖의 경사로구나."

김정 대감은 흡족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노론 가문으로서 종친과 혼맥을 맺는다는 것은, 조정에서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호직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버지 시헌의 물음에 호직은 잠시 답을 망설였다. 뜻밖의 전개에 마음이 복잡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연못가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자꾸만 떠올라 싫지 않은 마음이었다.

"...소자, 아버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호직의 답에 시헌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혼담이 조심스레 오가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호정은 오라버니의 방을 찾아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결국 그 낭자와 인연이 닿으셨나 봅니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그리 말씀하시면서 얼굴에 웃음이 가시질 않으시는데요."

호정의 놀림에 호직은 헛기침을 하며 애써 무심한 척했으나, 동생의 말대로 입가에 걸린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혼담이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았으니, 바로 시경을 둘러싼 또 다른 혼사, 육보정과의 이야기가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얽히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애초에 이보암 역시, 처음에는 시경과 혼담이 오갈 뻔했던 사이였다.

Continue a ler este livro gratuitamente
Escaneie o código para baixar o App

Último capítulo

  • 금기   10화. 유혹

    저잣거리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시경은 며칠째 마음이 어지러웠다. 팔 안에 안겨 있던 그 짧은 순간의 감촉이 눈만 감으면 떠올랐고, 그때마다 처음 느끼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올랐다. 밥상머리에서 호정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공연히 시선을 피하게 되었고, 그런 스스로가 낯설어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자네, 요즘 통 넋이 나가 있구먼. 도대체 어느 댁 여식 때문에 이러는가? 아니면 어디 숨겨 둔 여인네라도 있는 것인가?"도윤이 사랑채에 찾아와 대뜸 던진 말에, 시경은 헛기침으로 얼버무렸다."쓸데없는 소리.""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누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정신이 반쯤 나가서는.. 이럴 땐 술 한잔하며 집 나간 정신 챙겨 오는게 상책이니 일어나게, 연화루에 가서 거하게 한잔 하세."시경은 잠시 망설였다. 대감의 엄명으로 발길을 끊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곳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가자."청운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말리지는 못하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대문을 나서는 시경의 뒤에서 청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연화루에 들어서자 기생들이 반색하며 몰려들었다."도련님, 어찌 이리 오랫만이셔요!"가야금 뜯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인 방 안,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드리운 그림자들도 함께 일렁였다. 시경은 늘 앉던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연화루에서 별채를 쓰는 몇 안되는 손님이 오랜만에 왔다는 소식에 연화루의 주인이 직접 인사를 하러 방으로 들어왔다."나으리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셨으니 오늘 밤은 저에게 맡겨 주시어요.""그리하시게, 독한 술로 내오게. 오늘은 좀 취해봐야겠으니."풍채 좋은 여자는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한편 별채 안쪽 방에서는 기생 몇이 모여 은밀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좁은 방 안, 분내가 가득한 그곳에서 그녀들은 머리를 맞대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오늘 김시경 도련님이 오셨다지?""그렇다네. 아직도

  • 금기   9화 심장이 뛰는 이유

    한가위가 지나고 며칠 뒤,호정은 한양의 장터가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함도 잊고자 청아만을 데리고 저잣거리 구경에 나섰다. 어머니께는 필요한 노리개와 빗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명절 내내 집안 어른들 사이에 치이고 숙부와도 신경전을 벌인 탓에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던 것이었다."아씨, 오랜만에 나오시니 걸음이 다 가벼워 보이십니다."청아가 앞장서며 웃었다. 호정도 모처럼의 나들이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표정이었다.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포목전, 지전, 방물전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호정은 처음으로 보는 한양의 점포들이 낯설고 신기했다."이 노리개는 어떻습니까, 아씨."청아는 작은 백옥에 연분홍 매듭이 곱게 지어진 노리게를 호정에게 보여주었다."아주 곱구나. 그것으로 하자."값을 치르고 물건을 받아 든 호정은 다음 가게로 발길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맞은편 거리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생 서넛이 한 사내를 둘러싸고 교태를 부리며 걸어오고 있었다."도련님, 이쪽 가게에 좋은 노리개가 있다던데 소녀 노리개하나 사주시면 안되겠습니까?.""어머, 저는 저쪽 방물전에 새로 들어온 연지가 갖고 싶슴니당~."기생들이 저마다 사내의 팔짱을 끼려 애쓰며 재잘거렸다. 호정은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얼굴이 굳었다. 그 한가운데, 나른한 걸음으로 기생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시경이었다."...숙부님?"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정의 목소리에, 시경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호정은 예를 갖추어 짧게 고개를 숙였다."숙부님을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그러나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기방 출입을 금하겠다던 할아버지의 엄명이 있었건만, 대낮 저잣거리에서 기생들을 줄줄이 이끌고 다니는 꼴이라니. 호정은 순간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어머, 저 아가씨는 뉘신지요? 도련님의 조카분이십니까?.""조카가 도련님을

  • 금기   8화 그에게도 진중함이..

    축문이 낭독되고, 절이 이어졌다. 향 연기가 사당 안에 자욱하게 퍼지는 가운데, 호정은 어머니 곁에 서서 조상님께 절을 올리는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 시경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평소의 나른하고 심드렁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중한 얼굴로 절을 올리고 있었다. 호정은 그 낯선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이 이어졌다. 온 집안이 마당에 상을 펴고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였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은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이번 한가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먼 친척들도 여럿 자리를 함께하였다. 평안도, 충청도 등지에서 온 일가붙이들 중에는 호정을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려서 보았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런 만큼 그녀를 향한 시선과 궁금증이 유독 뜨거웠다. "저 아이가 그 청나라에서 돌아왔다는 이 댁 손녀딸인가?“ "그렇다네. 여덟 살에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다지.“ "어쩐지, 낯빛이며 몸가짐이 여느 규수들과는 사뭇 다르구먼.“ 호정이 인사를 올리러 다가가는 자리마다 어른들은 그녀를 붙잡고 이것저것을 물었다. "심양에서는 어찌 지냈느냐. 그곳 음식은 입에 맞더냐.“ "조선말은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었느냐.“ "듣던 대로 참으로 곱게 생겼구나. 어느 댁에서 며느리로 데려가려 눈독을 들이겠어."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호정은 웃는 낯으로 하나하나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사촌 언니들이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해 슬쩍 끼어들었다. "할머님들, 그만 놓아주셔요. 호정이도 좀 쉬어야지요.“ "허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런다. 어여 가서 쉬거라." 간신히 자리를 벗어난 호정은 사촌들 무리에 섞여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호정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보아라." 사촌 언니가 부르는 소리에 자리를 옮기며 호정도 오랜만에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 금기   7화. 한가위 

    추석이 다가오자 김정 대감댁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번 한가위는 예년과 달랐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 시헌의 가족들이 처음으로 함께 지내는 명절이었던 까닭에, 대감은 조상님께 그 소식을 알리는 뜻에서 예년보다 더 성대하게 제청을 차리라 일렀다. "이번 제사에는 집안 가솔들이 모두 모여야 한다. 아무도 빠짐없이 참례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먼 곳에서 오시는 친지들도 계시니 그 분들 또한 최선을 다해 맞이해야 할 것이야." 대감의 엄명에 사랑채도 안채도 며칠 전부터 집안일을 하는 노비들의 손이 바빴다.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며 집안 대청소까지 빈틈없이 모든 일이 차근차근 이루어 졌다. 호정은 어머니의 처소에서 일가친척들에 관해 하나하나 교육을 받아야 했다. 행여 멀리 청나라에서 지내다 왔다 하며 작은 흠이라도 잡힐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호정에게 제사의 전반적인 것들에 관해 알려주었다. 앞으로 호정이 역시도 어느 댁 며느리가 되어야 할 터, 양반집인 만큼 실제 손이 가는 일은 모두 노비들의 몫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안주인 될 이로서 제청이 어떻게 차려지고 절차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알아 두어야 했다. "제상은 이리 놓이고, 지방은 저리 모시는 것이다. 이리 크게 제사를 모시는 것이 낯설겠지만, 명색이 이 집안의 손녀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예, 어머니. 잘 새겨듣겠습니다." 호정은 어머니가 짚어 주는 제상의 위치, 축문을 읽는 순서, 절하는 예법 하나하나를 열심히 익혔다. 조선의 예법은 누누이 어머니의 교육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제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짚어 가며 배우는 것은 또 달랐다. "명절 음식 또한 집안의 어멈들이 담당하겠지만 앞으로 네가 시집을 가게 되면 알아야 부릴수도 있는 것이니 잘 익혀두어야 한다..“ "예. 어머님!" 호정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어머니는 이번 명절에 외지에 사는 친척들도 여럿 다녀갈 것이라며, 그들 앞에서 흠 잡힐 일이 없도록 각별히

  • 금기   6화 한량

    한양의 남촌 뒷골목, 홍등이 화려하게 걸려있는 '연화루'의 별채에서는 밤이 깊어 갈수록 풍악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가야금 줄이 튕겨지는 소리, 장구 장단, 그 사이사이로 사내들과 술따르는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섞여 담장 너머까지 흘러나왔다."자, 한 잔 더 받으시지요, 도련님.“기생 월향이 나긋한 손길로 술병을 기울였다.상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시경은 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며 흐드러지듯 풀어진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이미 상 위에는 빈 술병이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시경이 자네,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구먼."맞은편에 앉은 한도윤이 술잔을 든 채 킬킬 웃었다. 병조참판 댁 아들로, 시경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벗이었다. 그 옆에서 서진이 거들었다."말이 없는 게 아니라 원래 술자리에서는 말을 아끼는 놈이지.""시끄럽다, 이것들아."시경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탁 내려놓았다. 월향이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웠다.한양의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이름난 한량 김시경의 술버릇쯤은 이 집 기생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법이 없고, 아무리 절세가인을 앉혀도 술을 따르게 하는 그 이상은 결코 곁을 주지 않았다."도련님, 오늘은 소녀가 밤새 곁을 지켜도 되겠사옵니까."월향이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시경의 귀에 가까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시경의 옷섭이 살짝 벌어진 틈으로 자신의 손을 살며시 밀어넣었다.시경은 그 손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그녀의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옮겨 놓았다."술이나 따르거라. 거기까지다.""어머, 도련님~ 제가 어여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만리장성을 쌓아도 수백 번은 쌓았겠구만."월향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물러서서 다시 술병을 들었다. 이런 거절이 처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경이 무례하게 구는 것도 아니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참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야.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한 한량이라면서 기생 하나 건드리지 않으니. 자네가 정말 방

  • 금기   5화. 낯선 손님

    연회가 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김정 대감댁 안팎은 호직과 보암의 혼담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정작 시경은 그런 화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심드렁한 얼굴로 사랑채에 틀어박혀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호정은 여전히 그를 피해 다니는 방법들을 연구해 시경과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아침 문안도, 저녁 밥상머리도, 되도록 시경과 마주치지 않을 시각을 골라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시경 쪽에서 먼저 트집을 잡으러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조카는 요즘 어찌 그리 코빼기도 안 비치느냐."별당 앞을 지나던 호정의 앞을 시경이 가로막아 섰다. 호정은 한숨을 삼키며 예를 갖추었다."딱히 숙부님을 뵐 일이 없어서요.""뵐 일이 없다니. 한 집안에 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숙부님께서 저를 보실 때마다 좋은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니온데, 굳이 마주칠 이유가 있사옵니까."호정의 대꾸에 시경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흥, 어른을 그리 피해 다니는 것부터가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다.""숙부님께서 예법을 논하실 처지는 아니신 듯한데요.""뭐라?""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고 다니시는 분이 조카에게 예법을 가르치려 드시니 하는 말씀이옵니다."호정의 말에 시경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그건 그렇고, 네 오라비 혼담이 그리 잘 풀리는 것을 보니 배가 아프지도 않느냐.""어찌 오라버니의 경사에 배가 아프겠사옵니까.""내 말은, 너도 슬슬 혼처를 알아보아야 할 나이가 아니냐는 것이다."뜻밖의 화제에 호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시경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아직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사옵니다.""생각이야 안 해 봤어도, 나이가 차면 어른들이 알아서 정해 줄 것이다."시경의 말투는 여전히 심드렁했지만, 어딘가 그답지 않게 그 화제를 오래 붙들고 있는 듯했

Mais capítulos
Explore e leia bons romances gratuitamente
Acesso gratuito a um vasto número de bons romances no app GoodNovel. Baixe os livros que você gosta e leia em qualquer lugar e a qualquer hora.
Leia livros gratuitamente no app
ESCANEIE O CÓDIGO PARA LER NO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