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
확실히, 본가에서도 하이석이 가르쳐 주는 것을 연우주와 달리 금방 따라 하고는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손재주도 있어 보였고 뭐든 금방 배우는 타입으로 보이긴 했다. 설이현과 다른 결로 천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눈에 보이는 광경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대뜸 손을 이끌고 간 곳은 집 근처 작은 마트였고, 대충 이것저것 집어넣더니 익숙하게 음식을 뚝딱 만들어 낸 것에 놀라 입을 떡 벌리자, 빨리 먹으라며 툴툴거리면서도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자신이 아는 설태하가 분명히 맞는데, 괜히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어 심장을 꾹꾹 눌렀다.
"완전 맛있어!"
그 말에 만족한 듯 표정이 한결 밝아지는 것에 더욱.
"그보다 오늘, 같이 저녁 먹으려고 부른 건 아니었는데."
"뭐? 그럼?"
"할 이야기가 있
유달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분노에 가득 찬 채로 서류를 작성 중이니 당연할 것이다. 뭔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트집 잡아 시간마다 잔소리를 30분 넘게 해 대는 권 주임에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느껴질 지경이었다.게다가 평소 이 시간쯤이라면 창가 너머 설태하의 붉은 머리가 슬슬 보였을 텐데, 본가에 간다는 연락 한 통 남겨 놓고 이틀 동안 잠잠했다. 여전히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괜히 휴대폰 화면을 툭툭 건드려봐도 연락이 없는 것에 조금 짜증도 나고 걱정도 됐지만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이참에 거리감을 먼저….""거리감?""악!!!"귓가에서 쑥 들어오는 여기 있을 리 없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간질간질한 귀를 부여잡고 고개를 홱 돌리자,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서 있는 설이현이 하이담과 똑같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직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깔끔하고 비싼 정장에 그 특유의 향수 냄새를 뿜으며 양팔을 꼬아 여전히 왕자님 같은 포스로 서 있지만 이곳은 외부인 출입 금지이다. 그런데 왜 아무도 그 사실을 설이현에게 알려주지 않은 건지 당당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머리가 어질했다."이현아? 여기 외부인 출입 금지인데?""보내주던데."당당한 말에 숨을 들이 삼켰다."따지고 보면, 내 것이기도 하고."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꾸하기에 '이게 무슨 상황?' 혹은 '말단 계약직이 어떻게?'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어 그 팔을 잡고 질질 끌고 복도로 나오자, 그 상황이 뭐가 그리 우스운 건지 픽 웃더니 하이담
"아직, 아무것도 보고 된 건 없어.""확실해?""확실해. 영감이 얼마나 유별난지 알잖아."확답하는 말을 듣고도 안심되지 않았다. 어젯밤 이미 취한 상태로 맥주를 마시던 하이담은 해롱해롱한 상태로 온갖 말을 했다. 그 와중에 왜 늑대라고 정정하지 않았는지 따위의 말을 하다, 설이현은 왜 사자냐는 물음에 알딸딸하게 올라오던 술기운이 모조리 달아났다.설이현에게 지금 상황을 알렸단 소리다.그런데 그 설이현은 아직 본가에 알리지 않았다는 소리인데, 도무지 그 꿍꿍이를 예측할 수 없어 속이 탔다."누님의 태도는 변했어?"초조함이 잔뜩 드러나는 표정에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슬쩍 묻자, 초조함은 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했다. 지금 설태하는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설민재의 눈에는 이 설태하, 그 하이담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는… 아니, 어쩌면 애정까지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과거, 설태하가 좋다고 늘 설태하의 편에 서겠다고 한 그 여자는 설이현을 만난 이후, 기억을 잃고 설이현을 좋아하게 됐다고 설태하에게 설렘을 가득 안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때 설태하의 표정과 달리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아, 또 깜빡할 뻔.""뭐.""돌아왔어.""뭐가.""뭐겠냐?"또 말을 빙빙 돌려 하는 설민재를 보고 강하게 혀를 찼다."…… 만났어.""뭐?! 벌써? 빠른데!?""누굴 말하는 건데?""엥? 당연히….""작은아버지 말이야."설민재의 말
"이담아, 표정이 왜 그래?""머리가 복잡해서…?""권 주임 말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차근차근 준비 중이니까.""엉…? 무, 뭘 준비한다는 건데?""비밀이야."싱긋 웃는 얼굴에 가시가 잔뜩 오른 것처럼 보여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설이현을 만났다는 것… 그 설이현을 만난 이후 돌아온 집 앞에서 설태하를 만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에 설태하가 있었다. 그 사이의 일이 기억나지 않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차라리 벌거벗어 있었더라면 변신한 상태로 잠들었었다고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도 평온한 사람의 모습이었다.하이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커피를 마시던 연하늘의 표정에는 걱정이 드리웠다."… 정말로 무슨 일 있어?"휴가를 다녀온 이후, 그렇다고 할 거리는 없었는 것 같은데… 연하늘이 결국 테이블에 머리를 파묻은 하이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그 부드러운 손길과 걱정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목소리를 뱉었다."…… 설태하랑 거리감이 너무…….""응?"그리고 나온 말은 뜻밖이었지만, 이해는 됐다. 당황한 하이담의 표정과 달리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연하늘의 모습에 되레 당황했다."그걸 이제 느낀 거야?""… 이제?""난 둘이 처음 봤을 때부터 엄청 가까워 보이던데~? 질투 날만큼.""진짜?""응, 그래서 철이 오빠랑 석이 오빠도 계속 주시했잖아.""그랬…나…?"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퍽 골치가 아파 보이는 모습이 오히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보네.'입가를 가리며 소리 내 웃는 설이현은 한참 더 웃더니, 심플하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이 집에 어울리는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을 하고는 턱을 괴고 하이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음…?"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하이담이 먼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설이현이 자리에 일어서 뚜벅뚜벅 걸어 하이담의 앞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설이현의 행동에 이제야 당황한 듯한 표정을 하는 하이담의 표정은 흥미로웠다.어쩌면 지루한 자신의 일생을 재밌게 해줄 장난감이 하나 더 늘어난 순간이 아닌가? 싶었다."이현아?"하이담의 앞으로 온 설이현은 비릿하게 미소를 흘리더니 그가 입고 있던 값비싼 옷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고 어느새 조명으로 인한 건지 붉은빛을 띠는 갈기를 내보이며 고고하게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보니 떠오르는 게 있네."* *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설이현을 만나러 간다던 하이담은 여태 연락도 되지 않고 어디에서 만나는지 알지도 못해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쌍둥이에게 연락하기도 뭐한 입장이라 괜히 초조하게 손톱을 뜯으며 하이담의 오피스텔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기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어쩌면 오늘 이후, 하이담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설이현의 사람이 되어 나타날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웃어주지 않고 자신을 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바보 같은 얼굴이 보고 싶어 몇 시간 동안 이렇게 죽치고 기다리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발을 굴렀다.
설이현의 눈빛은 마치 맹수가 바라보는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틀린 말은 아니야. 나는 그 녀석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 몰라. 알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만… 그 행동으로 내게 재미를 준다면 사양할 것 없지.""태하도 태하지만, 너도 꽤 뒤틀려 있잖아?""그렇게 느껴지나?"지금 동생을 '장난감'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실언한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말을 해놓고 본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저 얼굴은 가식일지 진심일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너희 부모님은 형제가 그렇게 싸우는데, 뭐라 안 해? 그런 집이면 엄격하지 않아?"그 말에 반쯤 불구인 체 숨만 쉬고 있는 아버지와 그렇기에 더욱 자신에게 집착하는 어머니를 떠올리고는 픽 웃었다."그런가, 두 분 다 허물뿐이라.""엥?""게다가 반쪽짜리에 굳이 시간 낭비할 이유도 없고.""반쪽짜리?""아아, 말하지 않았나? 그 녀석은 아버지와 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야. 반쪽만 같은 피가 흐른다고 할까.""그런 거 신경 쓰는 타입이야?"악의 없는 물음에 잠시 고민하듯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평소에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의문이었다."반쪽짜리가 순혈처럼 행세하면… 그래, 거슬리기는 하겠네."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하는 설이현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웠다. 하이담이 아는 설태하는 그것은 으스대는 것이 아닌, 인정받고 싶은 발버둥일 텐데, 그걸 그 형인 설이현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집안의 모든 사람도 별반 차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진짜 바보냐고. 나를 그냥 개새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어느새 자신을 끌어안고 놓지 않은 채 잠든 하이담을 보며 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이불을 덮어주는 순간에도 자신을 놓지 않았고, 그것은 오묘했다. 바로 곁에서 바라보는 하이담은 이렇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가 싶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무언가 다른 감정이 생기는 이상하다고 느껴져 고개를 휘휘 저었다.그럼에도 자신은 어째서 이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지, 이 손을 대체 왜 뿌리칠 수 없는지."분명 설이현의 약점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는데."그랬는데, 막상 설이현을 만난다고 하니 그것이 왜 이렇게 싫고 불안한지."짜증 나."이런 모습이 아니더라도 안아줄 수 있는데.* * *"으아아아~"하이담이 눈을 뜨자, 설태하는 이미 돌아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집 안 정리도 대충 하고 나간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으며 따뜻한 물을 틀어 샤워했다."이 정도면 우렁각시 수준인데."그리고는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드라이도 화장도 더 꼼꼼하게 하며 나갈 옷을 몇 번이고 갈아입고는 거울을 보고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올려보았다.'살아 돌아 올 수는 있겠지?'설태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불안했다.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최고의 힐링도 했고, 의기투합도 했으니… 괜히 설이현에게 말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