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Author: 이소문

제1화

Author: 이소문
교통사고가 난 후 강하율의 남자 친구 배윤제는 기억을 잃었다.

좋은 소식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이고, 나쁜 소식은 배윤제가 일부러 기억을 잃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다.

“강하율, 나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 잊었어. 내가 그 일들을 잊었다는 건 그것들이 내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는 걸 의미해. 내 말 알아듣겠어?”

잘생긴 외모의 배윤제는 병상 위에 가만히 앉아서 언짢은 눈빛으로 강하율을 바라보며 짜증을 냈다.

확실히 얘기해 두지 않으면 강하율이 귀찮게 할까 봐서 걱정되는 듯이 말이다.

방 안으로 들어온 바람이 강하율의 창백한 얼굴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래, 알겠어.”

강하율은 의외로 평온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기억을 잃었다는 배윤제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15분 전, 강하율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의사는 그녀에게 배윤제가 심하게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강하율은 아픈 몸을 이끌고 곧장 그의 병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병실 밖에 도착하자마자 심하게 다쳤다던 배윤제가 나른한 자세로 창가에 기대어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강하율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또 선을 볼 거야? 그게 아니었으면 나도 강하율의 존재를 공개하겠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미안하다니까요?”

여자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배윤제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다야?”

“오늘 밤에는 윤제 씨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줄게요...”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야릇해졌다.

강하율은 그 이후 이어진 말들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배윤제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통해 뒷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윤제 씨, 그럼 하율 씨는 어떻게 하려고요? 저는 바람 상대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만약 제가 다른 사람의 남자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어요?”

배윤제는 상관없다는 듯이 담뱃재를 털어낸 뒤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해 보였다.

“걱정하지 마. 이미 의사에게 부탁해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보고서를 만들게 했으니까.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강하율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야.”

여자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건지 잠시 뜸을 들였다.

“만약 하율 씨가 윤제 씨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면요? 제가 하율 씨라면 절대 윤제 씨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강하율에게 나한테 들러붙을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배윤제는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될 거라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강하율은 벽에 기댄 채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으나 그녀는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강하율과 배윤제는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그러나 배윤제 가족들은 강하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 탓에 두 사람은 4년 동안 남몰래 연애를 해야 했다.

그러다 어젯밤 배윤제는 가족들 앞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밝히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본가로 향하는 길에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둘 다 다쳐서 정신을 잃었다.

강하율은 지난 4년 동안 둘이 연인 사이라는 걸 공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배윤제가 드디어 그 사실을 밝히는 것에 동의했는데, 그것이 실은 다른 여자와 싸워서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던 것이다.

배윤제는 이제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당시 배윤제가 운전에 집중하지 못하고 휴대폰만 자꾸 들여다본 이유가 있었다.

강하율이 조심하라고 했을 때 배윤제는 업무 때문에 그런 거라고 변명했으나 사실은 다른 여자가 그 사실을 알고 질투해서 문자를 보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하율은 의사의 발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방금 도착한 척하며 의사와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배윤제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누워있는 상태였다.

배윤제는 강하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의사와 함께 그녀의 앞에서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하다가 마지막에는 냉담하게 강하율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알겠으면 나가.”

그의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율은 그의 눈물 나는 노력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대단한 배씨 가문의 둘째 아들인 배윤제는 그녀와 헤어지고 싶어 연기까지 하면서 애를 썼다.

강하율은 몇 번이나 그의 거짓말을 까발리고 싶었지만 자꾸만 울분이 차올라서 아무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의 얼굴에는 씁쓸함만 남았다.

강하율은 본인의 처지가 너무도 처량했다.

4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강하율이 배윤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배윤제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도 전부 알고 있었다.

강하율은 그동안 배윤제와 연인이었임에도 그 사실을 밝히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마치 엄마처럼 옆에서 그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배윤제가 화를 낼 때면 그녀는 잠을 못 자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를 달랬다.

강하율의 세상은 온통 배윤제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배윤제는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녀에게 포기를 강요했다.

‘하, 정말 우습네.’

강하율은 마음이 무뎌졌고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강하율은 배윤제가 바라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사랑이라는 건 강요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고 또 강하율도 이런 관계에 지쳐버렸다.

강하율은 시선을 내려뜨린 채로 병실에서 나왔다.

배윤제는 강하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는 강하율이 이렇게 쉽게 이별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배윤제는 비서를 불러와서 명령했다.

“사람을 시켜 강하율을 지켜보도록 해. 지금은 아닌 척해도 갑자기 찾아와서 나한테 제발 기억을 되찾아보라고 애원할지도 모르니까. 병원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혹시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골치 아파질 거야.”

배윤제는 강하율이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상상한 것인지 그렇게 말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비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떴다.

...

강하율은 어떻게 병실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그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서서히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4년 동안 사귀었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결국 강하율은 피곤한 얼굴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가 마침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에 손이 닿았다.

액정이 깨져 있는 게 느껴지자 강하율은 흠칫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휴대폰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상태였기에 사고 후에도 휴대폰은 멀쩡했었다.

그런데 왜 액정이 깨진 것일까?

문득 뭔가를 떠올린 강하율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들었다.

휴대폰에는 뭔가 무거운 것에 짓눌린 것 같은 흔적이 남아있었고 액정은 산산이 조각났으며 휴대폰이 켜지지도 않았다.

휴대폰이 망가졌으니 휴대폰 속 그녀와 배윤제가 사귄 증거들 또한 전부 사라졌을 것이다.

누가 한 짓인지는 자명했다.

배윤제는 강하율이 성가시게 굴까 봐 상당히 걱정되었는지 치밀하게 그녀의 휴대폰까지 박살 냈다.

강하율은 헛웃음을 치면서 휴대폰 케이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휴대폰 케이스에는 그녀와 배윤제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었다.

배윤제와 연애했을 때 행복했던 건 사실이었고 배윤제가 그녀를 매정하게 내친 것도 사실이었다.

배윤제가 원치 않는 건 강하율도 원치 않았다.

탁.

강하율은 휴대폰을 쓰레기통 안에 처박은 뒤 간호사에게 부탁해 퇴원 절차를 밟았다.

떠나기 전, 한 간호사가 그녀를 불러 세운 뒤 병실 안 구석 자리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하율 씨, 여기 있는 짐들도 챙겨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강하율은 몸을 돌려 그것들을 힐끗 보았다. 그것들은 강하율이 배윤제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기 위해 준비한 선물들이었다.

배윤제는 버려도 선물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들을 사기 위해 돈도 꽤 많이 썼는데 가져가서 팔아버린다면 조금이라도 손해를 줄일 수 있었다.

강하율은 팔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챙겼고 팔 수 없는 간식 같은 것들은 간호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거 가져가서 맛보실래요?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인사를 건넨 뒤 강하율은 병원을 떠났다.

...

강하율이 떠난 뒤 배윤제는 잠을 잤다.

정신을 차린 그는 침대맡에 놓인 죽을 보고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면서 혀를 찼다.

배윤제는 끈질긴 강하율을 떨쳐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하율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그의 환심을 사려고 벌이는 짓들에 배윤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배윤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죽은...”

버리라는 말은 미처 하지 못했다.

“도련님, 깨셨어요? 죽 드시게요? 제가 숟가락 챙겨드릴게요. 빨리 드실 수 있게 제가 사람을 시켜 사 오라고 한 거예요.”

비서가 숟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배윤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시킨 거야?”

“네.”

비서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한마디 보탰다.

“의사 선생님이 말하길 강하율 씨는 병실로 돌아간 뒤 바로 퇴원하셨다고 해요. 기억을 잃은 도련님이 헤어지자고 한 걸 받아들인 것 같아요.”

배윤제는 무심한 얼굴로 죽을 먹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받아들였다고? 강하율은 그런 애가 아니야. 걔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애였으면 나도 굳이 이런 방식으로 헤어지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도 내가 사람을 시켜 걔 휴대폰을 망가뜨린 걸 알고 화가 났는데 나한테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못해서 이런 식으로 자기가 화났다는 걸 보여주는 거겠지.”

“그러면 계속 사람을 시켜 지켜볼까요?”

비서가 물었다.

“됐어. 잠시 뒤에 알아서 핑계를 대며 나를 찾아올 테니까. 가서 퇴원 절차 밟아 줘.”

“네.”

...

강하율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배윤제의 별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헤어졌으니 관계를 깔끔히 정리해야 했다.

강하율은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4년 동안 연애하면서 그녀는 배윤제의 별장에 수백 번은 드나들었고 그를 위해 밥도 수백 번 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배윤제는 강하율을 끌어안으며 말했었다.

“하율아, 우리 둘이 결혼하게 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될 거야.”

그러나 그녀와 결혼하겠다던 배윤제는 그녀에게 절대 별장의 키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 지문 인식 도어락으로 교체한 뒤 직원들조차 다 지문을 등록했는데 강하율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외부인과 다름없었다.

이때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가사도우미 진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다인 씨, 혹시 또 지문 인식이 안 되는 건가요...”

‘정다인 씨?’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357화

    그 후로 모든 사람이 정다인에게 매달린 덕분에 강하율은 오히려 편안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밥을 먹고 나서 자리를 뜨려는데, 조윤서가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같이 산책하러 가자고 했다.“하율아, 솔직히 말해서 다인이가 임신했다는데도 내 마음은 영 편치가 않구나. 난 여전히 네가 제일 좋은데 말이다. 하지만... 애가 무슨 죄가 있겠니.”“이모, 저랑 윤제 오빠 어차피 이루어질 운명이 아니에요. 하지만 전 앞으로도 이모를 엄마처럼 모시고 효도할 거예요.”강하율이 살갑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조윤서가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하율아, 네가 이렇게 곁에 있어 주니 참 좋네. 걱정 마. 내 마음속에선 다인이 걔는 너랑 비교도 안 되니까.”강하율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미소만 지었다.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는 정다인의 귀에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다.정다인은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율을 노려보았다.‘두고 봐!’잠시 후, 조윤서가 화장실에 간 사이 강하율은 정원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정다인이 나타났다.“정말 대단한 수단이네. 윤제 씨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이젠 사모님 옆에 붙어서 이간질이야? 안타깝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윤제 씨 짝은 나야. 넌... 평생 음지에나 머물 팔자고.”강하율은 반박하려다 멈칫했다. 정다인이 임산부라는 사실, 그것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점이 머릿속을 스쳤다.이런 여자와는 아예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강하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다인 씨 말이 다 맞으니까, 그 잘난 흥 깨지 않을게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곧이어 자리를 뜨려 했으나 정다인이 덥석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누구 맘대로? 내가 가라고 했어?”강하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아니나 다를까 정다인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누군가 밀치기라도 한 듯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당황한 강하율이 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녀보다 한발 빠른 사람이 있었다.바로 배윤제였다.정다인을 부축해 세운 그는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356화

    가정부가 한창 회포를 푸는 강하율과 조윤서 사이에 끼어들었다.“이모, 어서 갑시다.”강하율이 말했다.조윤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와 함께 1층으로 향했다.주방에서 마침 정다인과 명혜숙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조윤서가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강하율을 바라보았다.“하율아, 난 정말 네가 참 좋다. 꼭 우리 며느리로 삼고 싶었어. 나 몰래 윤제랑 만났었지? 둘 다 서로 마음 못 접은 거 내 눈엔 훤히 보여. 윤제도 지금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 난 진작부터 너를 친자식처럼 생각했어.”조윤서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며 강하율이 환하게 웃었다.“이모는 저한테 늘 가장 소중한 가족인걸요. 걱정 마세요, 윤제 오빠한테 서운해할 일은 없을 거예요.”그런 인간 말종에게 화를 내는 자체가 아까웠다.사실 마주치는 것조차 넌더리가 났지만 조윤서를 위해서라면 앞으로 사이좋은 척 연기라도 할 생각이었다.조윤서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주방으로 들어섰다.명혜숙은 강하율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얜 왜 부른 거니?”조윤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님, 하율이는 제가 오라고 했어요. 그래도 저희가 수년 동안 키운 아이인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요.”명혜숙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정다인이 일어나 강하율을 거들고 나섰다.“할머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도 강하율 씨랑 구면이고 하니까 그냥 친구가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온 셈 치죠, 뭐.”강하율이 멈칫했다.할머니? 게다가 우리 집이라니?오늘따라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닌 정다인이었다.생각 외로 명혜숙은 순순히 수긍하며 손을 내저었다.“내가 다인이 체면을 봐서 참으마. 다들 앉거라.”강하율은 남의 집에서 굳이 언쟁하고 싶지 않아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오늘 모인 이들은 대부분 배씨 가문 식구들이었고, 그중에는 강하율조차 처음 보는 얼굴이 여럿 섞여 있었다.나중에 정다인이 삼촌이니, 외삼촌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355화

    “난 하율 씨가 해낼 줄 알았어.”“다 총괄님께서 잘 이끌어 주신 덕분이에요.”강하율이 대답했다.“아니야, 순전히 하율 씨 실력이 출중해서 얻은 결과야. 앞으로도 잘해봐. 본인이 원하는 걸 손에 넣는 날이 분명 올 테니까.”평범한 축하 인사 같았지만 그녀의 귀에는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머릿속으로 문득 놈들이 필사적으로 찾고 있던 ‘물건’이 떠올랐다.양지원은 어머니 곁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했으니 부모님 사이의 일들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총괄님, 혹시... 예전에 저희 부모님이 유독 소중하게 여기셨던 물건 같은 건 없었나요?”“갑자기 왜?”양지원이 되물었다.“그게... 집을 정리하다 보니까 부모님 유품이 진짜 손에 꼽을 정도네요. 두 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요.”“예전에 살던 그 집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떠니? 지금은 비어 있는 데다 경매도 계속 유찰돼서 방치된 상태거든. 어쩌면 하율 씨가 놓친 옛 물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양지원의 조언에 강하율의 눈이 반짝였다.강씨 별장은 압류된 상태였지만 사람이 죽은 집이라는 소문 때문에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내고, 부자들은 재수 없다며 꺼리는 탓에 번번이 유찰되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강하율은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서둘러 문을 열러 나갔다.배윤호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야?”강하율은 양지원이 해준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배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내일 가보도록 하지.”시간을 확인해 보니 곧 본가로 가야 해서 지금 당장 움직이기엔 확실히 무리였다.“네, 일단 가요.”두 사람은 함께 배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도착하자마자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리고 있는 정다인과 마주쳤다.평소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즐겨 입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인지 넉넉한 핏의 캐주얼 차림이었다.정다인은 강하율을 보자마자 즉각 손을 들어 허리를 문질렀다.“아주버님, 하율 씨, 왔어요?”아주버님이라니? 이 여자,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354화

    강하율은 병상에서 깊게 잠든 아버지를 가슴 졸이며 바라보다가, 결국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머릿속으로는 방금 자신이 흘렸던 정보가 떠올랐다.‘아빠가 정신 멀쩡할 때 나한테 뭘 남겨줬다고 했거든요...’고작 한 마디에 아버지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이게 다 제 탓이에요.”“네 잘못 아니야. 이 정도로 삼엄한 곳에 금방 손을 뻗칠 줄 누가 알았겠어?”배윤호가 그녀를 다독였다.손을 뻗치다니?강하율은 즉각 무언가를 깨달았다.“그럴 리가 없는데... 아빠한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반인이거든요. 그나마 증오가 깊은 건 예전 아빠 비서 가족 정도라, 심지어 지금은 외국에 있단 말이에요. 설마... 그냥 미끼였던 건가요?”배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비서 한 명 따위가 어떻게 네 부모님이 평생 일군 공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겠어?”“그럼 사설탐정도 절 속인 거네요. 이 얘기, 그 사람한테만 했거든요.”누군가 어둠 속에서 계속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강하율은 소름이 끼쳤다.“그나마 아무도 안 다쳐서 다행이지. 이번 일로 놈들도 위협을 느꼈을 테니 한동안은 잠잠할 거야. 이제 아버님도 안전해.”강하율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강진철의 손을 꼭 맞잡았다.그러다 곁눈질로 베개 밑에 살짝 삐져나온 모서리를 발견했다.재빨리 꺼내 보니, 뜻밖에도 배윤호가 선물했던 만년필 케이스였다.하지만 상자를 열자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만년필은 어디 갔죠?”강하율은 고개를 숙여 주변을 훑었고, 침대 밑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조차 없었다.배윤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찾지 마. 아마 가져갔을 거야.”“왜죠?”강하율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네가 사설탐정한테 아버지가 남겨둔 게 있다고 했잖아. 놈들은 분명 그걸 노리고 온 거야. 다만 뭔가 오해했나 보군.”배윤호가 빈 상자를 내려놓았다.강하율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즉각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그러니까 우리 아빠 사건에 정말 숨겨진 내막이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353화

    정다인은 차분하게 조건을 제시했다.오늘 배윤제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한동안 정적 끝에 배윤제가 입을 열었다.“생각 좀 해볼게.”“사흘 드릴게요. 마침 할머니께서 식사하러 오라고 하셨으니, 그때 기쁜 소식을 발표하면 딱 좋을 것 같네요.”“알았어.”이내 말을 마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배윤제는 돌아서자마자 쓰레기통을 걷어찼다.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란 경비원이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장천우가 급히 다가가 상황을 설명한 뒤, 다시 배윤제의 곁으로 돌아왔다.“도련님, 일단 차로 돌아가시죠.”“정다인 뒷조사해봐, 최근에 누구 만났는지. 딱 삼 일 준다. 장천우, 네 주인이 누군지 똑바로 기억해.”배윤제가 장천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장천우는 재빨리 고개를 주억거렸다.“네, 알겠습니다.”“그나저나 신예진은 왜 정다인과 같이 있었던 거지?”배윤제가 물었다.“아까 통화하실 때 호텔 쪽에 따로 확인해 봤는데요. 오늘 정다인 씨가 호텔에 물건 찾으러 갔다가 신예진이랑 부딪혔나 봐요. 배가 아프다고 하니까 신예진이 병원에 데려다줬고, 임신 사실도 그때 밝혀진 모양이에요. 정작 신예진은 아직 모르는 눈치입니다.”배윤제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감히 날 협박해? 정다인, 네가 그럴 짬밥은 아닐 텐데.”...레스토랑.강하율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배윤호가 손을 닦으며 물었다.“무슨 생각해?”“윤호 오빠 말대로 사설탐정한테 가짜 정보를 흘리긴 했는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네요.”강하율은 거짓말한 게 들통났을까 봐 내심 불안했다.“뭐라고 했어?”배윤호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강하율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이번에 판을 좀 크게 키워보려고요. 아빠가 정신 멀쩡할 때 나한테 뭘 남겨줬다고 했거든요.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때 사건이랑 관련 있는 물건이라고.”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윤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강하율은 흠칫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352화

    강하율은 배윤제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배윤호가 뒤를 따르려던 순간, 배윤제가 팔을 들어 가로막았다.“형, 하율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야. 지금은 기억 잃고 다른 여자 만나서 화가 난 것뿐이라고.”자신만만한 배윤제의 태도에도 배윤호는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는 듯, 그의 휴대폰 화면을 차갑게 훑었다.“네 여자친구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그러다간... 또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그야말로 뼈 있는 한마디였다.배윤호는 말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문이 닫히자 강하율이 물었다.“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배윤호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강하율의 반응이 더욱 가관이었다.“이따가 어디 가서 밥 먹을까요?”그녀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지난번에 갔던 거기 어때?”“좋아요.”강하율이 미소를 살짝 지었다.한편, 배윤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또 왜?”“윤제 씨, 축하드려요. 이제 아빠 됐네요.”정다인이 웃으며 입을 뗐다.배윤제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한창 넋을 잃은 찰나, 휴대폰 너머로 신예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전 이만 호텔로 들어갈게요.”“응, 가봐. 좀 있으면 윤제 씨가 나 데리러 올 거야.”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정다인!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예진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배윤제가 경고했다.“예진이요? 윤제 씨는 여자한테 호감이 생기면 꼭 호칭부터 바꾸더라. 이를테면 ‘하율’에서 ‘강하율’이 되었다가 저도 다시 풀네임을 부르는 것처럼. 워낙 다정다감한 분이라 그렇다 쳐도... 뭐, 어쩌겠어요? 내 아이 아빠인걸.”“말도 안 돼! 우리 매번 조심했잖아.”“흥분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든 건 윤제 씨였어요. 나도 정신없어서 약 챙겨 먹는 걸 깜빡했나 보죠.”정다인이 웃음을 터뜨렸다.배윤제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언제나 제 기분이 최우선인 남자.배경을 떠나서 그와의 잠자리가 정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182화

    배윤호가 정다인의 부탁을 받아 기소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강하율은 잠시 멍해졌다.순간 자신이 우스워졌다.배윤제가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야 강하율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액자는 아무 데나 두지 마. 누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다 고쳐놨으니까 가져가.”액자가 손에 닿는 순간, 강하율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액자 따위 가지고 싶지 않았다.강하율은 차갑게 말했다.“대표님, 그 액자는 아무 데나 둔 게 아니에요. 애초에 쓰레기여서 버리려고 한 거예요.”배윤제는 표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206화

    정다인이든 조익현이든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은밀히 접촉했다는 건 분명 뒤에서 불순한 모의를 꾸미고 있다는 증거였다.한창 생각에 잠긴 와중에 강하율의 휴대폰이 진동했다.급히 확인해 보니 허지연의 부계정에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와 있었다.[길 가다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 딱 마주침! 무려 커피까지 한 잔 사주심.]사진 속 허지연은 평소 일할 때보다 훨씬 과감하고 화려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한쪽 귀퉁이에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살짝 노출되어 있었는데, 고급스러워 보이는 슈트와 꼿꼿한 체격이 예사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211화

    “참, 바텐더한테 들었는데 조익현이 따로 양주를 꽤 많이 들여왔대. 파티 한 번 하겠다고 이렇게까지 유난 떠는 건 처음 보네. 우리 호텔에 웬만한 술은 다 있잖아.”안혜슬이 의아한 듯 말을 이었다.강하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혜슬아, 지금 바로 펍에 전화해 봐. 객실팀에서 숙취 해소제를 준비해야 하니까 술 도수랑 종류를 확인해야 한다고 하고, 사진 좀 찍어서 보내달라고 해.”역시 그녀의 절친답게 안혜슬은 곧바로 의도를 눈치채고 대답했다.“알았어.”통화를 마친 강하율은 사무실로 돌아왔고, 일부러 침울한

  •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제210화

    배윤호는 강하율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슬쩍 쳐다보기만 했다.강하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시 한번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서야 요동치는 감정을 겨우 억눌렀다.곧이어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죄송해요. 제가 주제넘게 참견했네요.”배윤호가 되물었다.“네가 언제부터 기씨 가문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지?”강하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배윤제와 기씨 가문의 사이가 그토록 각별한데 배윤호가 어찌 내막을 모르겠는가.결국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