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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이소문
강하율은 진희영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정다인이라고 불리는 여자는 이미 그곳의 안주인이 된 듯했다.

진희영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강하율 씨,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강하율은 정다인의 이름을 듣지 못한 척하며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제 물건 좀 가지고 가려고요.”

진희영은 문을 가로막은 채 안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안 오셔서요.”

그러니 외부인인 강하율은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었다.

조금 전 정다인이라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줄 때와는 상반되는 대우였다.

재벌가의 가사도우미들은 눈치가 굉장히 빠른 편이었기에 진희영은 강하율과 정다인 중 누구에게 붙어야 할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강하율은 문을 가로막고 있는 진희영의 팔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제 물건을 챙겨가는 게 정다인 씨에게도 좋을 텐데요.”

진희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팔을 내린 뒤 잡동사니들을 모아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층으로 올라가지는 마세요. 도련님이 저한테 저기에 다 두라고 하셨거든요.”

강하율은 걷다가 멈춰 선 뒤 시선을 들어 계단 위쪽을 바라보았다. 구석 쪽에 배윤제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저 여자가 정다인인가 보지? 꽤 예쁘네.’

강하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려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물건들은 박스 안에 아무렇게나 담겨 있었다.

강하율은 배윤제와 4년간 연애하면서 단 한 번도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지만 그곳을 자기 집처럼 여기며 돈과 힘과 정성을 들여 예쁘게 꾸몄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모두 헛짓거리였다.

이곳에는 그녀를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강하율이 물건을 챙겨서 떠나려는데 진희영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기 도련님이 줬던 선물들도 있는데 안 챙겨가시나요? 도련님께서 다 가져가도 된다고 하셨는데...”

“필요 없어요. 알아서 처리하세요.”

모두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강하율은 예전에 그것들을 소중히 여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강하율은 말을 마친 뒤 떠났고 진희영은 이내 배윤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련님, 강하율 씨께서 본인 물건들을 챙기러 오셨어요.”

“다 챙겨갔죠? 강하율이 그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어요. 아마 그것들을 핑계로 나를 찾아올 생각이었겠죠.”

배윤제는 비아냥대면서 피식 웃었다.

진희영이 난감한 듯 말했다.

“도련님, 다 챙겨간 건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선물로 줬던 것들은 제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셨어요...”

한 빌딩의 로비에 서 있던 배윤제는 순간 웃음을 그쳤다.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친 뒤 전화를 끊었다.

“강하율, 이제는 밀당도 할 줄 아네?”

이런 방식을 쓰면 그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고 해도 그는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부드러운 손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윤제 씨, 혹시 하율 씨예요? 하율 씨가 윤제 씨를 귀찮게 한 거예요? 저랑 같은 여자인데 하율 씨는 왜 그렇게 뻔뻔한 걸까요?”

여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스럽게 말했다.

배윤제는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긴 뒤 주물럭대며 말했다.

“하율이는 너랑 비교가 안 되지. 일단 올라가자. 다들 왔대.”

“그러면 저는 일단 화장실에 갈 테니 먼저 올라가요.”

여자는 미소 띤 얼굴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배윤제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는 순간 눈빛이 음산해졌다.

“강하율이랬지.”

...

강하율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새 휴대폰을 장만했다.

카톡에 로그인하자 추천 친구가 하나 떴고 프로필 사진을 클릭하자 여러 장의 사진이 보였다.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심해서 고른 듯한 사진들이었다.

한때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반하고, 다른 여자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끝내는 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에르메스 트리 하나만 해도 지난 4년간 강하율이 받은 선물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강하율은 문득 별장에 버리고 온 배윤제의 선물들을 떠올렸다.

당시 배윤제는 선물을 주면서 마음이 가장 중요한 법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 강하율은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겨우 추슬렀던 마음에 또 한 번 파문이 일었다.

강하율은 문득 배윤제가 바람을 피울 때 자신은 뭘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아.”

당시 강하율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서 자신을 무시하던 배윤제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강하율은 자조하듯 피식 웃으며 그때의 자신을 동정했다.

카톡에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왔다.

[그 사람이 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했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맞이한 사람들 중 이별의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왜 굳이 그렇게 성가신 방법으로 헤어지기를 선택한 걸까?

결국 강하율은 고민 끝에 여자가 보낸 메시지에 하트를 눌렀다.

여자가 또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해일 펍으로 와요.]

...

해일 펍.

아리 타워 스카이 가든에 위치한 해일 펍은 재벌가 자제들이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강하율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유리로 된 난간에 몸을 기대고 술을 마시고 있는 배윤제를 보았다.

밤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늘 그랬듯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강하율이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제야,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일부러 교통사고까지 냈잖아. 너는 미리 준비할 수 있으니까 괜찮았겠지만 하율이는 아무것도 몰랐을 거 아니야? 하율이가 잘못됐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럴 리는 없어. 기껏해야 어디 좀 긁히고 말겠지. 그리고 자꾸 우리 사이를 공개하기를 바라는 눈치여서 짜증 났단 말이야.”

배윤제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하율이는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받아들인 거야?”

“흥.”

배윤제는 술잔을 흔들면서 코웃음을 쳤고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 의미를 이해했다.

“강하율이 배윤제한테 얼마나 푹 빠져있는지 몰라서 그래? 걔는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절대 안 떨어지는 애야.”

“아마 지금도 어떻게 해야 배윤제가 다시 자신을 사랑할지 고민하고 있을걸?”

“역시 윤제는 대단해. 여자의 마음을 완전히 틀어쥐었잖아.”

배윤제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단숨에 잔을 비우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율이는 착하고 사람을 잘 챙기지만 지금 걔 신분으로는 내 숨겨둔 연인 정도가 적당해. 내가 다인이랑 결혼하고 나서 하율이한테 기억을 되찾았다고 말한다고 해도 하율이는 감동할걸? 이건 다인이한테 비밀로 해줘. 다인이는 단순하고 잘 토라지는 성격이거든. 나도 겨우 달래 놨어.”

배윤제의 눈빛에서 마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듯한 오만함이 보였다.

배윤제의 친구들은 잔을 들면서 알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강하율의 눈빛에 잔물결이 생겼다가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사실 강하율은 오는 길에 이러한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집안이 망한 뒤 강하율은 신분이 추락해서 현재 배윤제와 같은 급이 아니었다.

강하율은 배윤제를 과소평가했다.

대단한 배씨 가문의 둘째 아들인 배윤제는 두 여자 중 한 명을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두 여자를 모두 원했다.

그리고 그 말을 그의 입으로 직접 내뱉는 모습을 보니 그를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을 수 있었다.

배윤제가 진짜로 기억을 잃었든, 가짜로 기억을 잃었든 강하율의 선택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윤제 씨.”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배윤제의 곁에 예쁜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가 바로 조금 전 배윤제가 말했던 단순하고 쉽게 토라지는, 별장 속 사진의 주인공 정다인이었다.

정다인을 본 배윤제의 친구들은 곧바로 유난을 떨었다.

“다인 씨, 우리 모두 다인 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 윤제가 다인 씨를 기쁘게 해주겠다고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어요.”

“서프라이즈요?”

정다인의 얼굴에 기대가 가득했다.

그녀는 배윤제의 안내에 따라 스카이 가든 한가운데에 섰고, 배윤제가 그녀를 바라볼 때 갑자기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배윤제는 고개를 숙여 정다인에게 입을 맞췄고 정다인은 조금 쑥스러워하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불꽃놀이 아래서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은 매우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키스가 끝난 뒤 배윤제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정다인을 바라보며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네가 내 여자 친구라는 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하겠어.”

정다인은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배윤제의 친구들은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를 쳤다.

“한 번 더.”

“한 번 더.”

예전에 그들은 강하율과 배윤제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실컷 농락당하다가 버림받은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강하율은 자조하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런데 강하율이 몸을 돌리는 순간 정다인이 그녀를 불렀다.

“강하율 씨.”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강하율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다인이 눈물을 흘렸다.

“강하율 씨,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거 알아요. 하지만 윤제 씨는 기억을 잃었고 의사 선생님도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윤제 씨를 몰아붙이지 말아 줘요. 네? 이건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윤제 씨를 사랑하게 돼서... 그래서...”

정다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잠깐 경멸 어린 눈빛을 해 보였다.

강하율이 진실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강하율은 그녀의 라이벌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말이다.

강하율은 이것이 정다인의 계략이었음을 뒤늦게 눈치채고 곧바로 휴대폰을 들면서 반박했다.

“정다인 씨가 나한테 이곳으로...”

탁.

새로 장만한 강하율의 휴대폰이 또 한 번 배윤제 때문에 망가졌다.

“강하율, 나를 미행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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